'사랑하기 #위해 #읽는다 #김기현'에 해당하는 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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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고 하면, 대체로 책을 상상한다.

 

허나, 우리는 책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읽는다. 

 

모든 이해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오래전 광고 카피를 슬쩍 바꾸어 말한다면, "책은 독자 하기 나름"이다. 

 

책도 사람과 같은지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달리 읽힌다. 책도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얼굴을 내민다. 그 얼굴은 바로 내 얼굴이다.

 

텍스트라는 타인, 타인이라는 텍스트를 읽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읽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타인을, 세상을 읽는다. 하지만 읽는 이의 시선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그러니 대상에 관한 말은 곧 자신에 관한 말로 치환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은폐한 채 말해 온 일체의 것이 어쩌면 기실 자신을 탈은폐한 것이었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나만 몰랐을 뿐.

 

오랜만에 제자를 만난 스승은 빈 들에서 빌립이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던진 그 물음을 묻는다.

 

"무엇을 읽었느냐?" 제자는 자랑스레 말한다. "스승님, 그동안 토라를 무려 세 번이나 읽었습니다."

 

나라면 학업에 용맹 정진한 제자를 기특하게 바라보며 칭찬을 듬뿍 안겨 주었으련만, 스승은 지그시 눈을 감고 나지막하게 또 묻는다. 

 

"토라는 너를 읽었느냐?"

 

진정한 읽기란 내 눈앞에 놓인 텍스트 속의 활자를 보거나, 행간을 추척하거나, 저자의 뜻을 발견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책은 책 너머를 가리킨다. 책은 '창'이 되어서 책이 없었다면, 책이 열어 주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을 것을 보게 하고, 읽어 내게 하는 안목을 틔워 준다.

 

동시에 책은 '거울'이다. 책은 거울과 같아서 무언가를 반사하면서도 동시에 바라보는 자를 되비치는 법.

 

스승이 보기에 제자는 책을 통해 타인을 읽었을 뿐, 읽는 자신은 읽지 않았다. 읽었던 토라로 '사랑'하기보다 읽은 횟수를 '자랑'하기에 급급하다. '토라'마저 자기 과시 수단으로 삼는 자라면, 쉽게 타인을 하대하려 들지 않겠는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없는 독서이고, 나를 잃은 읽기다.

 

읽기 속에 비친 내 얼굴을 보는 방법이 있다. 책 여백에 끄적이는 메모다. 훗날, 하릴없이 이 책 저 책 뒤적일라치면, 어김없이 옛 메모와 만난다.

 

이전의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들여다볼라치면, 그때에는 내가 꽤나 멋지다고 쓴 말이 얼마나 후져 보이는지.

 

지금의 나, 그때의 나보다 성장했기에 옛 메모를 보며 발전한 나를 본다. 반대로 지금의 내가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통찰을 갈겨 놓은 것도 보인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꽤 괜찮은 생각을 했구나.

 

얼굴이 화끈거린 적도 없지 않다. 한번은 교회 청년이 내 책을 빌려 갔다.

 

그 다음 주일에 와서는 말하기를, "목사님, 책에다 욕을 쓰셨더라고요." 한다.

 

해서, 이제는 그리 심하게 쓰지 않는다. 정반대의 말도 쓴다. '할렐루야', '아멘'이라는 빨간 글자도 왕왕 보인다.

 

내 머리를 후려갈긴 문장, 내 가슴을 뛰게 한 문장이다. 

 

공자

 

여백의 메모는 책과 내가 만난 흔적이자, 책을 만났던 나의 역사다.

 

이런 방식의 독서법은 공자의 읽기론과 흡사하다. 아무리 많이 읽고 배워도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얻는 것도, 남는 것도 없다.

 

반면, 독자적인 사고를 구축하더라도 읽고 배우지 않으면 독단에 빠지기 십상이니 이는 위태롭다.([논어]의 <위정편>)

 

읽기는 생각을 낳고, 생각은 읽은 것을 다르게 읽게 한다. 이러한 읽기와 생각의 되먹임이 선순환할 때, 우리는 자란다. 우리 주님이 되물으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 10:26) 어떻게 읽었는지 메모하라!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김기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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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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