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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부탁해] 에서 발췌

 

-국정원의 댓글 조작 사건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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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늦은 오후 서울 명동에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다. 거리 양편의 노점들은 하나둘 불을 밝히고 하루를 시작한다. 성당 들머리엔 '명동성당 종합계획 1단계 신축공사' 표지판이 붙어 있다.

귀에 익은 노랫가락이 어디선가 들려온다. <잘할걸>. 버스커 버스커다.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찾아오면은 난 다시 그대 생각에..."

성당으로 향하는 철제 계단을 따라 성당의 연대기가 공사 가림막에 펼쳐져 있다. 1984 요한 바오르 2세 방문. 1987 인권,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 글귀 밑 미사 사진 속에 청년 박종철의 영정이 있다. 그렇다. 87년 6월이 있었다. 함성과 구호와 최루탄의 시간. 지금 우리는 그해 6월이 놓은 길 위에 서 있다.

 

 

"그때는 우리가 완벽했을지라도 지금은 닿을 수 없어..."

며칠 전 여론조사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2012년 하반기, 정말 이상했어. 야권 후보들을 비난하는 트윗들이 주말에 사라졌다가 월요일부터 급증하곤 했거든. 트위터 순위 사이트를 봐도.... 국정원 수사를 보니 왜 그랬는지 알겠더군.

컴퓨터 앞에 종일 앉아 있다 퇴근하는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들도 보통 샐러리맨들처럼 '불금'(불타는 금요일)과 주말이 기다려졌을 것이다. 그들은 댓글 올리고 리트윗(재전송)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문제는 그렇게 '평범한' 일상에 있었다.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도대체 우리가 왜 이렇게..."

1987년 6월 한국 사회는 대통령 직선제만 하면 민주주의가 이뤄질 거라 믿었다. 일상까지 민주주이 원칙에 따라 재편되지 않는 한 민주 정치는 요원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정보기관 직원, 군 사이버사령부 요원의 업무 내용이 상식적이지 않다면 정상적인 사회라 부를 수 없다는 사실도 예감하지 못했다.

그 책임이 정치인들에게만 있을까. 준비된 대통령은 준비된 시민이 있을 때만 유효하다. 안타깝게도 우린 준비되지 않았고 깨어 있지 않았다. 우리가 깨어 있었다면 우리의 친척이나 대학 동창인 그들이 선거 개입으로 의심받을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이었다면 과연 거부할 수 있었을까. 고통스럽지만 인정해야 하는 사실도 있다.

"조금만 더 잘할걸, 조금만 더 참을걸..."

그 해 6월 우린 서둘러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자기 자리로의 복귀를 조금 미루고 한국 사회, 한국 정치의 미래를 놓고 토론을 벌였어야 했다. 민주주의를 어떻게 발전시킬지 묻고 답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상식과 일상을 만들어가야 했다.

권력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 어떤 이유로도 국가기관이 시민들의 여론에 검은 손을 뻗으려 해선 안 된다는 것을 서로의 가슴에 새겨 넣어야 했다.

 

입으론 노동자, 농민을 말하면서도 다들 자기 앞의 생에 초조해 했다. 구호 소리만 높았을 뿐 생각을 나누지 않았다. 어쩌면 그 철저하지 못함에 보복당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상처가 덧나고 고름이 터진 뒤에야 '철저 수사'를 다짐하는 총리 담화문에서, 국정원 방어에 급급한 여당 의원들의 모습에서, '구국의 결단'과 '아버지 대통령 각하'를 거론하는 발언록에서 상식의 퇴행을 확인하고 있다.

"조금만 더 잘할걸, 조금만 더..."

현실은 홍상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통속적이고 비루하다. 그래도 개선하려는 의지까지 접지는 말아야 한다. 젊은 공무원들이 허접한 글들을 리트윗하면서 안보 업무라고 믿는 현실만큼 소름 끼치는 일은 없다.

이제 의식의 일대 변화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때 대학생이었던 40대, 넥타이 부대였던 50대, 60대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매번 비슷한 곳을 맴도는 회로에서 벗어날 순 없는 걸까. 착잡한 마음으로 외국인 관광객들이 점령한 거리로 들어갔다. 세상은 상점과 노점의 불들로 환했지만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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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2013년 9월 서울고법이 전 국정원 차장과 심리전단장에 대한 재정신청을 받아들였다. 이어 검찰 수사에서 국정원 댓글과 관련된 트위터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의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국정원 직원들이 댓글 활동을 공무원의 정상적 업무로 여기는 현실이라니.... 착잡함을 달래려고 명동성당 언덕에 올랐다가 87년 6월을 기억해냈다. 성당 앞 빌딩 숲 위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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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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