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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10월 유신에서 10.26까지]

 

-고려대 침투 간첩단 사건, 검은 10월단 사건, 전남대 함성지 사건, 남산 부활절연합에배 사건-

 

 

 

유신 이후 1979 10월의 부마항쟁까지 7년동안, 대중적인 반정부투쟁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야당, 재야인사, 지식인, 대학생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지키려고 저항했다가 구속되고 박해받은 사건들이 있었을 뿐이다. 유신정권의 철권통치는 너무나 강력했다.

 

중앙정보부는 예방적 목적에 입각한 조직사건을 연달아 터뜨렸다. 국민 대중의 불만이 팽배해도 뇌관을 제거하면 화약고가 폭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973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김낙중을 중심으로 한 고려대 침투 간첩단 사건’, 내란음모 혐의를 씌운 고려대 검은 10월단 사건’, 시인 김남주와 역사학자 박석무를 엮어 넣은 전남대 함성지 사건’, 박형규, 권호경, 김동완 등 기독교 목회자들을 구속한 남산 부활절연합예배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들이 한 일은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만들거나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치적 의사표시를 한 것 뿐이었다. 구속영장도 없이 수십 일씩 불법 구금한 가운데 고문을 해서 받아낸 진술서 말고는 북한과 연계되거나 내란을 모의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김대중 납치사건,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

 

1973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대중 씨를 도쿄 호텔에서 납치해 현해탄에 수장하려 한 것이다. 이 사건을 실행한 주일 외교관은 나중에 두둑한 현금을 들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던 그의 아들 성김(Sung Kim) 35년이 지난 2008년 주한 미국대사가 되어 서울에 돌아왔다.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을 죽이지 못하고 자택 근처에 내려주었다. 대학가에서 다시 유신철폐투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0 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시작된 교내시위가 경북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으로 번져 나갔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는 10 25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가 사망했다. 중앙정보부는 그가 총책 이재원에게 포섭되어 북한에 갔고, 공작금을 받고 정보를 제공하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자백하고 조사를 받던 중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2006 2월 법원은 국가의 배상판결을 내림으로써 중앙정보부의 고문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를 사실상 인정했다.

11월 들어 대학생들의 동맹휴학과 교내시위가 전국 대학으로 번졌으며 경기고, 대광고, 광주일고 등 고등학교까지 확산되었다.

 

 

 

-박정희의 긴급조치 1, 2, 4호 발동 그리고 민청학련 사건-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 결의대회를 열었고 재야인사들의 시국선언도 줄을 이었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시작하자 신민당이 합류했고 문인들도 집단으로 가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마침내 유신헌법이 부여한 비상대권을 휘둘렀다. 1974 1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한 것이다. 정부는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개헌을 청원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개헌청원 서명운동 주동자들을 대거 구속해 군법회의에 넘겼다.

대학생들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유신반대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전국적인 연대를 모색했다. 1974 3월 개학과 동시에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민청학련(민주청년학생연맹)이라는 이름을 기재한 유인물이 뿌려졌다. 4 3일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민청학련이라는 반국가단체를 뿌리 뽑기 위한 긴급조치 4를 발동했다.

민청학련에 가입하거나 연락, 선전, 수업거부, 집회, 농성, 관련 사실에 대한 보도를 모두 처벌대상으로 삼았다.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해 비상군법회의에 회부하며 형량을 최소 징역 5년에서 사형까지로 정했다.

비상군법회의는 이철, 유인태, 김병곤, 나병식, 김지하, 이현배, 여정남에게 사형을, 유근일 등 일곱 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사형을 구형받은 후 최후진술에서 영광입니다라고 말했던 그들은 1년도 지나기 전에 모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대통령도 그들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

 

- 2차 인혁당 사건와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그런데 1974 5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가 10년 전 지하로 잠복한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반국가단체를 재건하려 했다고 발표한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 또는 2차 인혁당 사건은 달랐다. 정부는 그들이 재일조총련 간첩과 함께 민청학련을 배우 조종했다고 주장했다. 군법회의는 민청학련 관련자까지 포함해 무려 열네 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의 실상을 알린 것은 김지하 시인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75 2월 석방된 그는 [동아일보]에 연재한 옥중수기 [고행1974]에서 하재완과 이수병 등 인혁당 사건 구속자들에게 들은 중앙정보부의 잔혹한 고문과 허위조작 실상을 폭로했다. 이 수기는 김지하 시인의 재구속,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 기자 대량해고 사태로 이어졌다.

정부의 압력을 받은 기업들이 광고를 취소해 [동아일보] 광고 지면이 백지로 나왔다. 그러자 시민들이 돈을 보내 [동아일보]를 격려하는 광고를 실었다. 내 기억에 최후까지 남은 기업광고는 안국약품의 감기약 투수코친이었다. “동아일보 만세, 투수코친도 만세!” 라고 쓴 독자 광고도 기억난다.

 

민청학련 사건은 반정부투쟁을 뿌리 뽑으려고 한 정부의 의도와 달리 민주화운동을 대중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1974 12 25일 민주화세력은 민주회복국민회의를 창립했다. 윤보선, 백낙준, 유진오, 김재준, 김수환, 정일형, 강신명, 김대중, 윤형중, 함석헌, 이병린, 천관우, 이희승, 이태영, 김영삼, 홍성우, 함세웅, 한승헌 등 저명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이 중심이었다. 김영삼 씨를 총재로 선출한 신민당은 적극적인 개헌 투쟁에 나섰다. 박정희 대통령이 곧바로 역공을 취했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의 신임을 묻기 위해 국민투표를 하겠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그는 국민투표에 자신이 있었다. 언론자유와 토론을 모두 봉쇄한 가운데 행정조직을 동원해 찬반 국민투표를 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야당이 거부의사를 밝혔지만 1975 2 12일 국민투표를 밀어붙였다. 투표율 79.8% 에 찬성률 73.1% 가 나왔다. 1972년 유신헌법 제정 당시의 투표율 91.9 % 에 찬성률 91.5% 와 비교하면 둘 다 현저히 낮았다.

 

1975 4 8일 대법원(재판장 민복기)은 서도원,김용원,이수병, 우홍선, 송산진,여정남,하재완,도예종 등 대학생이 아닌 인혁당 관련 피고인 여덟 명의 항소를 기각해 사형을 확정했고 다음 날 새벽 정부는 그들을 지체 없이 사형시켜버렸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국제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함세웅 신부 등 가톨릭 사제들이 장레미사를 지내려고 하자 경찰은 크레인을 동원해 영구차를 탈취해서 화장해버렸다.

문정현 신부는 시신을 지키려고 경찰에 맞섰다가 차에 깔렸다. 그가 다리를 저는 것은 그때 입은 부상 때문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최근 발매된 [악마기자 정의사제] 책을 보시면 잘 나와 있습니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관련자들은 민주화 이후 열린 재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재심 판결을 하면서 사법부의 잘못을 사과했고 국가가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박정희의 긴급조치 9호 발동-

 

1975년 봄 베트남에 사회주의 통일정부가 들어섰다. 5 13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해 유언비어 날조 유포, 헌법에 대한 부정, 반대, 왜곡, 비방, 헌번ㅂ개정 청원 선전, 선동, 긴급조치에 대한 비방을 모두 처벌대상으로 규정했다. 학생의 집회, 시위, 정치 관여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학생과 학교와 단체에 대해서는 주무장관이 제적, 해임, 해산, 폐쇄 조처를 취할 수 있게 했다. 게다가 이런 조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허가 없이 보도하는 것도 긴급조치 위반이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살지 않으면 누구든 범죄자가 될 수 있었다. 1979 10월까지 4년 반 동안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은 1400여 명이었고 그 중 1000여 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민주화 이후 헌법재판소는 1호부터 9호까지 모든 긴급조치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정부는 대학생들을 대거 제적하고 감옥과 병영으로 보냈으며 대학교수와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했다. 한신대의 안병무, 문동환, 연세대의 서남동, 이계준, 양인응, 김규삼, 고려대의 이문영, 김용준, 김윤환, 이세기 교수를 해직했다.

교수재임용 심사제도를 도입해 이화여대 김윤숙, 덕성여대 염무옹, 한양대 리영희, 연세대 성내운, 송리성 등 400명이 넘는 교수들을 탈락시켰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사주들은 언론자유수호투쟁을 벌인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함으로써 정부에 굴복했다.

 

검찰은 1976 3.1절 명동성당 기념미사에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이우정, 문동환, 윤반웅, 이문영, 안병무, 서남동, 은명기, 문익환, 이태영, 함세웅, 김승훈 신부, 김대중과 이희호, 정일형 의원을 연행했고 정부전복 선동혐의를 씌워 20명을 구속했다.

일제에 징병되었다 탈출한 후 6000리 길을 걸어 임시정부를 찾아갔던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 1975 8 17이리 경기도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2013년 묘소 이장 때 모습을 드러낸 그의 두개골에는 망치 크기의 동그란 구멍이 있었다. 실족사가 아니라 타살이었던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 이후 대학가에서는 작은 규모의 교내시위만 벌어졌다. 대학 교정에 사복형사뿐만 아니라 전투경찰이 상주했고, 시위 주동자는 선언문 첫 문장을 다 읽기도 전에 체포되었다.

1975 4 11, 서울농대의 시국성토대회에서 김상진 씨가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고 반독재민주화투쟁의 단호한 결의를 보이기 위해 칼로 복부를 찔렀다. 5 22일 관악캠퍼스에서 김상진 추도식을 한 학생들이 긴급조치 9호 선포 후 첫 시위를 벌였다 

80명이 체포되었고 29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이처럼 살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1976년 가을 축제 행사 끝에 시위를 벌인 서울대를 시작으로 1977년에는 한신대, 서울대, 감신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고려대, 연세대, 전북대, 국민대 등에서 반정부 교내시위가 일어났다.

1979년까지 이 대학들과 더불어 계명대, 영남대, 강원대, 경희대, 부산대, 동아대, 전남대, 한국외대, 마산대, 경남대 학생들이 교내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시위 소식은 신문과 방송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관련 학생들이 재판에서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1단짜리 단신보도가 나오면 국민들은 그제야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과 함평 고구마 사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등장)

 

중앙정보부는 1979 3월 노동자와 농민, 여성들을 대상으로 시민교육을 하던 크리스챤아카데미 간사 한명숙, 이우재, 황한식, 장상환, 김세균, 신인령 등과 대학교수 정창렬, 김병태, 유병묵, 아카데미 원장 강원룡 목사 그리고 거기서 교육을 받은 농민단체와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대거 구속한 뒤 그들이 사회주의 건설을 획책했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이다.

 

정부가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을 단속하느라 분주했던 1970년대 후반, 다른 곳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었다.

1976년 가을 전라남도에서는 고구마 농사가 풍년이었다. 그런데 농협이 약속과 달리 생고구마를 전량 수매하지 않아 농가의 고구마가 썩어나갔다. 가톨릭농민회가 고구마 주산지였던 함평군에서 고구마 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피해보상요구투쟁을 시작했다.

함평군 고구마 농가 피해 전액이 1억 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농협이 보상을 거부하면서 싸움이 전라남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1977 4월 농민들은 광주에서 거리행진을 벌인 데 이어 서울과 전국 대도시를 돌면서 불합리한 농정의 실상을 폭로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아마 한국전쟁 이후 첫 대규모 농민투쟁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가톨릭농민회를 비롯한 농민단체들이 역량을 키워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을 결성했다. 오늘날 우리가 전농이라고 부르는 단체다.

 

 

<함평 고구마 사건>

 

-YH 무역 사건-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운동이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1979 8월 경찰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YH 무역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 시켰다. 훗날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된 최순영 씨가 지부장이었던 YH 무역 노동조합원들은 돈을 외국으로 빼돌리고 노조를 탄압하기 위해 위장폐업을 한 악덕사업주를 처벌하고 회사를 살려달라는 요구를 들고 신민당에 들어왔고 신민당 지도부는 그들을 보호했다. 그런데 경찰은 제1 야당 당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노동자들을 체포했으며 신민당 당직자와 국회의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얼굴이 떡이 된 박권흠 신민당 대변인 사진이 기억이 생생하다. 이때 YH 무역 노동자 김경숙 씨가 4층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꾸라로 비난받던 이철승 의원을 누르고 신민당 총재가 된 김영상 의원은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고 강력한 반정부 투쟁을 선포했다.

 

 

 

 

-남민전 사건-

 

(김남주 시인 그리고 파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

 

정부는 치밀한 정치공작을 벌여 법원으로 하여금 신민당 총재단 직무정지 가처분 판결을 내리게 했다. 김영삼 총재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유신정권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것을 빌미 삼아 본회의장 주변에 무술경위를 배치한 가운데 공화당과 유정희 의원들끼리 모여 김영삼 의원을 국회에서 제명해 버렸다. 이것이 1979 10 4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시국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경찰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수사진행 상황을 전격 발표했다. 무려 77명을 구속한 대형 조직사건을 터뜨린 것이다.

 

공안당국은 동아건설 회장 최원석 자택의 강도사건을 수사하다가 이것이 단순한 강도사건이 아니라는 심증을 굳히고 저인망식 수사를 펼쳐 남민전 사건을 만들어 냈다. 이재문, 신향식 등이 유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지하조직을 만들고 청년학생위원회를 조직하려 한 것을 북한공산집단의 대남전략에 따라 국가변란을 기도한 사건으로 규정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적용한 것이다.

이재문 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고 신향식 씨는 사형당했다. 다른 관련자들은 최장 10년 징역을 살았다. 일부 인사가 북한과 연계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민주화투쟁 조직인 줄 알고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후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이 사건과 관련해 김남주 시인이 구속되었고, 무역회사 주재원으로 프랑스에 가 있었던 홍세화 씨는 망명허가를 받아 파리의 택시운전사가 되었다.

 

 

 

-부림사건- (영화 <변호인> 관련 단체 등장)

 

1979 10 16, 부산대 학생들이 교내시위를 벌인 다음 삼삼 오오 무리를 지어 거리로 나왔다. 종종 있었던 학생시위였는데 상황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퇴근길 직장인과 시민들이 대거 합세하면서 부산 시내가 거대한 시위장으로 변해 버렸다.

김영삼 총재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 민심이 끓어 오른 것이다. 공안당국은 부산대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의 핵심 고리가 6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양서협동조합이라고 판단했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만들어낸 소위 부림사건은 바로 이 양서협동조합 관계자들을 반국가단체로 엮은 사건이었다.

영화 <변호인>에서 세금전문 변호사 노무현이 인권변호사로 변신한 계기가 되었던 부동연 사건이 바로 이것이다.

 

시위가 낮 밤 없이 계속되자 정부는 10 18일 새벽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해 공수특전단 병력을 투입했다. 부산 시위는 수그러들었지만 경남대 학생들이 시작한 시위에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확산된 마산지역 시위는 더 크게 불붙었다.

창원의 보병 39사단을 투입했지만 10 19일 밤에도 시위가 계속되었다. 5공수여단이 마산에 들어갔다. 군과 경찰은 부산과 마산 일대에서 무려 1600여 명을 체포했다.

 

 

 

-부마항쟁-

 

부마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 우리에게는 아직 연속적, 동시 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할 역량이 없었다. 그런데 부마항쟁의 충격은 집권세력의 내분을 부추겨 유신체제를 무너뜨렸다.

1979 10 26일 밤, 서울 궁정동 안전가옥 만찬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쏜 것이다. 김재규 부장의 군법회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지만 내가 발포 명령을 하는데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에서 200만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냐고 맞장구쳤다.

김재규는 각하자유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10.26은 민주혁명이며 5.16이 정당하다면 10.26도 정당하다고 주장했던 그는 1980 5 24일 교수대에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생물학적 생명을 빼앗은 것은 총탄이었지만 정치적 생명을 앗아간 것은 그 자신이 이룬 성공이었다.

그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대중의 욕망을 무제한 분출시키고 그 탁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산업화의 성공으로 절대빈곤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대중은 다른 욕망에 끌리기 시작했다. 자유, 정의, 민주주의, 인간적 존엄성을 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욕망을 존중하지 않자 많은 국민이 마음으로 그를 버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 그와 같은 민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10.26 사건을 그렇게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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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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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에서 10월 유신까지]

 

-박정희 시대의 민주주의 투쟁-

 

모든 국민이 군인 박정희의 쿠데타와 대통령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 5.16 3선 개헌, 10월 유신을 환영하고 지지한 국민도 많았다. 그때는 일반 가정에 전화가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5.16에 대한 국민의 판단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여론조사 자료가 없다.

하지만 일반 시민은 물론이요, 대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도 군사정부에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5.16이 일어났을 때 4.19 주역들은 민주당 장면 정부를 지키려고 궐기하지 않았다. 박정희 장군이 여러 차례 공언한 민정이양과 병영복귀 약속을 파기했지만 국민들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무려 일곱 명의 후보가 출마한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강력한 반공주의와 더불어 경제적 자주와 자립을 강조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내걸었다. 그런데 유력한 경쟁자였던 윤보선 후보는 그의 남로당 전력을 폭로하고 민족적 민주주의를 공산주의 또는 결과적으로 공산주의를 편드는 중립주의로 몰아가는 색깔론을 펼쳤다.

박정희 대통령을 추앙하는 산업화 세력이 종북주의이념공세를 벌이고, 민주화세력이 그에 대해 치를 떠는 오늘의 현실과 비교하면 황당해 보이겠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겨우 10년이 지난 시점에 빨갱이 마녀사냥의 위력이 어떠했을지 상상해보라.

막판에 허정과 송요찬 등 야권 후보들이 사퇴해 윤보선 후보가 사실상 야권 단일 후보가 되었다. 민주화 세력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는 민주화 이후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승만 정부 때부터 2012년 대선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정치적 현안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반공, 반북, 경제성장을 내세우는 정치세력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는 현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박정희 후보는 470만 표를 얻어 455만 표를 얻은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간신히 누르고 당선되었다. 하지만 떳떳하게 이긴 것은 아니었다. 군사정부는 호남을 중심으로 흉년이 든 농촌에 원조 밀가루를 대량 살포했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정치를 가동하고 공무원 조직을 선거에 동원했고 군 부재자투표에서 광범위한 부정을 저질렀다. 하지만 박정희 후보가 오로지 부정선거만으로 당선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호남에서 압승했고 1956년 제 3대 대통령 선거 때 진보당 조봉암 후보 표가 많이 나왔던 선거구에서도 이겼다.

도시에서 전반적으로 지기는 했지만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소시민계층과 진보적 청년층의 지지를 적지 않게 받았다. 만약 내가 그 때 젊은 유권자였다면 누구를 찍었을까? 쿠데타 주모자를 뽑기도 싫었겠지만 윤보선 후보도 지지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경제적 자주, 자립이라는 공약을 미국원조를 거부하는 반미주의로, 민족적 민주주의를 가리켜 공산주의를 편드는 중립주의라고 비난하는 어리석음을 어찌 편들 수 있었겠는가.

 

박정희 후보는 미국 원조자금이 52% 를 차지한 6000억 환 규모의 1961년도 추가경정예산을 경제적 대미예속이라고 비판했다. 1959년 시설부문 미국 원조 2 800만 달러 가운데 공업화를 위한 시설의 비중이 22%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들어 미국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심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 원조 총액의 30%를 차지한 미국 잉여농산물 도입으로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농가경제가 몰락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막대한 기업부채 규모와 연간 5000만 달러에 이른 무역적자를 거론하면서 민족경제를 살려내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모두 타당한 현실인식이었다.

 

 

 

-김종필과 김종필-오히라 메모 사건-

 

박정희의 참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다니다 육사로 진학해 군인이 된 후 준장으로 예편한 김종필이었다. 그는 5.16 이후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초대 부장을 지냈고 1963년에는 공화당 당의장이 되었으며 2004년까지 아홉 번이나 국회의원을 했다.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던 전두환 정권 시기를 제외하고, 박정희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까지 무려 40여 년 동안 정권의 2인자역할을 했다. 술도 잘하고 골프도 잘 치며 독서도 많이 한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가운데 하나다. 대선이 끝난 직후였던 1963 11월 초, 그는 고려대학교에서 강연을 한 데 이어 서울대 문리대에 가서 학생들과 토론회를 했다.

 

후일 6.3 사태를 주도한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회(민비연) 소속 학생들이 참석한 이 토론회에서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이 젊은 정치인은 외국자본의 지배를 벗어나 경제적 자립을 이룩한 수구사상, 사대주의, 급진적 서구사상과 자유방임적 퇴폐를 탈피하며 정서적으로는 양키즘을 배격하는 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의 핵심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공화당과 박정희를 민족적 민주주의에 따른 조국 근대화의 추진 주체라고 추켜세웠다.

공화당은 곧이어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에서 의원 정수의 60%가 넘는 110석을 차지했다. 군사쿠데타의 주역이며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사람이 반정부투쟁을 하는 학생 대표들과 공개토론을 한 것을 보면, 그는 낭만적이고 수준 있는 정치인이었던 것 같다. 요즘 보수정당에는 그런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다 .

 

박정희 정부는 한일국교 정상화를 문제로 첫 번째 위기를 맞았다. 한일국교 정상화 협상은 1951년에 시작되었다. 우리 정부는 한일합병조약을 포함해 1910년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이 체결한 모든 조약을 무효로 하고 일제강점기 수탈과 착취에 대한 배상과 징용 조선인의 미지급 임금 등 대일청구권을 행사하려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한반도 주변 해역 50~60해리에 평화선을 선포하고 이를 침범한 일본 어선을 나포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의 요구를 어느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한제국과 맺은 조약은 합법적이로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강점기 수탈에 대한 배상을 할 의사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일본인이 한국에 두고 떠난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주장했고, 한국 정부가 선포한 평화선을 철폐하라고 요구했다 .협상은 아무런 진전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1960년 들어 미국이 새로운 안보조약을 체결해 일본을 동아시아 군사동맹의 중심에 세우고 거기에 한국을 묶으려 했다. 장면 정부는 일본 정부와 청구권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그 성과를 토대로 1961년 말부터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 일본 외상과 협상한 끝에 1962년 가을 무상 3억 달러, 정부차관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을 일본이 제공하는 것으로 청구권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김종필-오히라 메모라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 돈이 청구권 자금이라고 했지만 일본 정부는 경제협력자금 및 독립 축하금이라고 했다. 야당과 재야인사들은 이 합의를 굴욕외교로 규정하고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만들어 전국을 돌면서 집회를 열었다. 1964 3월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이 5.16 이후 처음으로 거리시위를 벌였다. 집회시위는 전국 대학교와 고등학교로 확산되었다. 반정부투쟁이라기 보다는 당당한 대일외교를 요구하는 집단적 의사표현이었다.

 

1964 3 30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의 대학생 대표들을 면담했고 다음 날 전국 대학생 대표들에게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비공식적으로 보여주었다. 정부를 비판하면서 거리시위를 벌이는 대학생 대표들을 대통령이 직접 만나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것은 민주화 이후에도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에는 인내심이 부족했다. 마침 일본 기업들이 공화당에 수천만 달러의 창당자금을 제공한 의혹이 불거졌다.

정권 실세들이 국유지를 부정 불하해 거액을 챙긴 사건도 터졌다. 여기에다 중앙정보부가 대학생들을 감시하고 사찰한 사실이 드러났다. 대학생들에게는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이 부패한 친일세력으로 보였다. 5 20일 서울대 학교 문리대 학생들이 민족적 민주주의 장레식이라는 규탄집회를 열어 박정희 정부의 조국 근대화이념을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공격했다.

 

 

 

-6.3 항쟁, 인혁당 사건-

 

그러자 정부는 대화를 포기하고 힘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거리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고 무장군인들이 법원에 난입해 시위 주동자를 구속하라고 판사를 협박하는 사태도 벌어졌으며 중앙정보부가 시위 주동자들을 불법 연행해 고문했다. 6 3일 박정희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전국적 거리시위가 일어났다. 이것이 6.3 사태또는 6.3 항쟁이라고 하는 대중투쟁이다.

수만 명의 시위대가 중앙청이 있던 서울 세종로 일대 거리를 점거한 가운데 곳곳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졌다. 4.19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정부는 서울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주입했으며 대학에는 휴교령을 내렸다.

 

정부는 야당과 혁신계 인사들을 투쟁의 배후로 지목하고 이념공세를 시작했다. 1964 8 14일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도예종, 이재문, 박현채, 김중태, 김정강, 현승일, 김정남, 김도현 등 기자, 교사, 대학생들이 인민혁명당이라는 지하당을 만들어 국가 변란을획책했고 북한의 지령을 받아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벌였다며 47명을 구속했다.

     <인혁당 사건>

 

그런데 서울지검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 장원찬 등 수사검사들이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며 기소장 서명을 거부했다. 결국 도예종 씨가 반공법 위반으로 최고 징역 3년을 받는 등 일부 유죄선고가 나기는 했지만 북한과 연계된 증거가 드러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1차 인혁당 사건이다.

 

1965 2월 한일 양국 정부 회담 실무자들이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했고 양국 외무부장관은 1965 6 22 [한일기본조약]과 네 건의 협정문에 정식 서명했다.

[한일기본조약]은 한일 강제병합조약을 포함해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체결한 모든 조약과 협정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일본이 대한민국 정부를 유엔결의 제 195호에 따른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바탕 위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했다. 일부 약탈 문화재 반환을 합의한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연안 기점 12해리 수역의 배타적 관할권을 인정한 [어업협정]. 해방 이전 일본 거주 대한민국 국민과 가족의 영주허가를 규정한 [재일교포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무상 3억 달러와 장기 저리 차관 2억 달러로 약국 국민 간의 청구권 문제를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확인한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이었다.

바로 이 협정을 근거로 오늘날까지 일본 정부는 징용, 징병, 정신대,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별적 청구권이 모두 소멸되었다고 주장해 왔다.

 

한일협정 조인과 국회의 비준 절차가 진행된 여름까지 여진이 계속되었다. 2학기가 시작되자 정부는 대학교를 미리 폐쇄하고 학생운동 리더들을 잡아들이는 한편 비판적 언론인을 테러, 납치, 폭행하면서 언론보도를 강력하게 검열하고 통제했다. 서울에 위수령을 내려 다시 군 병력을 투입했다. 9 25일 중앙정보부는 반공법 위반, 내란음모죄, 내란선동죄를 적용해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 학생들을 무더기로 구속했다.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결국 그렇게 끝이 났다. 무려 1000여 명이 넘게 체포되고 350여 명이 내란죄와 소요죄로 구속당하면서 박정희 정부와 2년 넘게 투쟁을 벌였던 청년들은 6.3 세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당시 학생운동 리더로 명성이 높았거나 정계, 학계, 언론계에서 활약을 펼친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중태, 손학규, 이재오, 김덕룡, 현승일, 이명박, 정대철, 이부영, 서청원, 박관용, 하순봉, 김경재 등이 있다. 그런데 그때 거리시위에 참여했던 20대 청년들이 지금은 70대 고령층이 되어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 당을 철옹성처럼 지키고 있다.

 

6.3투쟁은 1.49 혁명의 정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박정희 정부는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정보정치와 언론통제, 대학과 재야인사에 대한 감시체계를 대폭 강화했지만 학생운동과 야당, 재야 또한 투쟁 역량을 비축했다. 정부는 1964년 의료지원단과 공병단 파견을 시작해, 1965년 수송단과 공병으로 구성된 비둘기부대와 해병 청룡부대를 거쳐 1966년 백마부대와 맹호부대에 이르기까지 연인원 30만 명 이상을 베트남 전쟁에 보냈다.

주둔 병력이 최대 5만 명이나 되었다. 그 대가로 미국은 한국군의 현대화를 지원하고 한미 경제협력을 대폭 확대했다. 노무현 정부가 3000명의 병력을 비전투 임무를 주어 이라크에 파병한 2004년에는 전국적인 대규모 반대시위가 벌어졌지만 베트남 파병은 야당이 반대하지 않았으며 국민의 반대여론도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40년 동안 세상이 달라졌고, 세계 평화와 한미관계에 대한 국민의 생각도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권력형 부정부패 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그때가 지금보다 더 예민했던 것 같다. 1966 9 [경향신문]이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특종 보도했다. 사건의 핵심은 일본 미쓰이물산이 울산 한국 비료 공장건설사업과 관련해 100만 달러의 리베이트를 제공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측근들과 삼성 관계자들은 현금 대신 대량의 사카린 원료를 건설자재로 위장해 들여온 다음 이것을 처분해 정치자금과 공장 건설비, 한국비료 운영비로 쓰려고 모의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먹어본 적이 없겠지만 우리 세대는 설탕이 아니라 사카린으로 단맛을 낸 과자와 아이스케키를 먹으며 자랐다. 정경유착과 밀수 범죄의 진상이 드러나자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기로 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차남 이창희 씨가 총대를 메고 대신 구속되었다.

야당은 밀수 재벌 처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두한 의원이 밀수 재벌을 비호하는 국무위원들에게 똥물을 끼얹는 사건도 일어났다. 효창운동장에서 야당이 연 규탄대회에는 수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을 밀수 왕초라고 비난한 장준하 선생을 국가원수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했다. 대학가는 정부와 재벌의 유착과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집회로 끓어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윤보선 후보와 리턴매치를 벌인 1967 5월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 4년 전보다 훨씬 큰 116만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했다. 정부와 공화당은 6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에 필요한 의석을 확보하려고 했다. 대통령과 장관들이 전국을 돌면서 개발공약을 쏟아냈으며 일선 공무원을 선거운동에 동원했다. 중앙정보부와 검찰은 온갖 빌미를 잡아 야당 후보를 구속하고 선거운동원을 구금했다. 공화당 조직은 막걸리, 고무신, , 밀가루, 현금을 집집마다 돌렸다. 공개투표를 하다 발각된 사례도 있었고 미리 기표한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투표함에 집어 넣은 사례도 숱하게 드러났다. 도처에서 야당 참관인을 폭행해 내쫓았고 개표과정에서는 야당 후보 표를 무더기 무효표로 만들었다. 그 결과 공화당은 의원 정수의 74% 130석을 차지했다.

 

 

 

-동백림 사건-

 

부정선거 무효화를 요구하는 규탄집회와 거리시위가 전국의 대학으로 퍼져나갔다. 대학별로 휴업과 조기방학 조처를 내렸지만 시위는 고등학교로 확산되었다. 그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초대형 사건을 터뜨렸다.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한 북괴 대남적화공작단사건, 세칭 동백림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유학하면서 북한대사관과 접촉해 북한을 오갔던 임석진 박사가 조선일보 독일특파원 이기양 기자 실종사건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자신의 행위를 고백한 데서 시작되었다. 중앙정보부는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를 비롯한 관련자 30여 명을 한국으로 유인하거나 대사관에 모은 후 강제 압송했다.

<동백림사건>

1967 78일 수사 결과를 발표한 중앙정보부는 임석진, 정하용, 황성모, 최창진 등 대학교수와 정규명 등 유럽 유학생, 장덕상 중앙일보 파리특파원을 비롯해 무려 66명을 검찰에 송치하고 23명에게 간첩죄 또는 간첩미수죄를 씌웠다. 신민당 6.8 총선무효화투쟁위원회의 장준화 의원과 부완혁 집행위원도 엮어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최종심에서 간첩죄를 선고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정규명, 정하룡, 조영수 등이 사형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모두 1970년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진실이 밝혀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 반면 간첩단 사건의 정치적 위력은 즉각적이었다. 여름방학에 들어가면서 대학가의 6.8 부정선거 규탄투쟁이 식어버렸고 선거무효를 주장하면서 장외투쟁을 벌이던 신민당은 원내로 복귀했다.

 

 

 

1960년대 후반 유럽과 미국은 베트남전 반대와 사회문화 개혁 요구가 뒤범벅된 청년세대의 68혁명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반공주의라는 이념의 벽에 갇혀 있었다. 1968 1.21 사태와 북한의 미국 푸에블로 호 납치사건, 울진, 삼척 무장공비사건이 일어나자 반공, 반북 정서가 하늘을 찔렀고 전국에서 관제 규탄대회가 벌어졌다. 7 20일 중앙정보부는 통일혁명당 사건을 발표하고 158명을 체포해 96명을 기소했다.

이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병영국가북한에 맞서기 위해 대한민국 역시 병영국가로 개조하기로 결심한 듯 보인다. 병영의 기본은 인원점검이다. 정부는 국민 전체를 조직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주민등록제도를 도입했다. 향토예비군을 만들어 군복무를 마친 남자 250만 명을 정기적으로 병영에 소환했고 대학 입시에 반공도덕을 포함시켰다. 초중고 학생과 교사에게 반공교육을 실시했으며 전국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군사교육을 받도록 했다.

 

 

 

-박정희의 3선 개헌 작업 그리고 촛불집회의 시초-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초부터 3선 개헌 작업에 착수했다. 기술적으로는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고 규정한 헌법조항의 12로 고치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먼저 내부의 개헌반대론자들을 회유, 고립시켜 공화당 의원들이 만장일치로 3선 개헌안을 채택하게 했다.

신민당과 재야인사들이 반대투쟁에 나섰고 사태는 한일협정 반대투쟁이나 6.8 부정선거 규탄투쟁과 마찬가지로 대학생 교내집회, 거리시위, 중고등학생 가세, 휴교령 발동으로 이어졌다. 신민당과 재야는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만들어 전국적 반대집회를 열었다.

 

중앙정보부는 집요한 공작을 벌여 일부 야당의원들의 3선 개헌 지지성명을 이끌어냈고 여름방학이 끝났지만 대학 문을 열지 않았다. 일부 대학생들이 전기와 수돗물 공급이 끊긴 학교 도서관을 점거해 장기농성을 벌였다. 학생들은 시 낭송, 노래 부르기, 마당극과 연극 공연을 하면서 농성대오를 유지했는데, 이 새로운 투쟁방식이 세월을 거치면서 시민문화행사와 촛불문화제로 발전했다. 공화당은 1969 9 14일 새벽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이 아닌 별관에서 개헌안과 국민투표법을 날치기 의결했다.

대학이 다시 시위 열풍에 휩싸였고 정부는 휴교령을 내렸다. 10 17일 개헌 국민투표에는 77.1 퍼센트의 유권자가 참여했고 65.1 퍼센트가 찬성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 태세를 완비한 것이다.

 

 

 

 

 

-제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그리고 김대중의 등장-

 

1971 4 27일 제 7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기간 내내 대학가는 교련철폐투쟁으로 끓어올랐고 휴강, 교내집회, 거리시위가 이어졌다. 투표일을 코앞에 둔 4 20, 김재규 국군보안사령관이 서울대와 고려대에 다니던 재일동포 학생들을 포함해 50여 명이 연루된 재일교포 유학생간첩단 사건을 터뜨렸다.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려고 암약하던 유학생 간첩들에게 북한이 교련반대투쟁을 벌이도록 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은 곧바로 교련철폐투쟁을 전격 중단하는 작전상 후퇴를 했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정치 신인이나 다름없었던 김대중 후보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끈질기게 싸운 끝에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정치 지도자 김대중은 바로 이 선거에서 탄생했다.

 

김영삼, 이철승과 3파전을 벌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역전승을 거둔 40대 기수김대중 후보는 미, , , 4대국의 한반도 평화보장론, 3단계 통일론,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대중경제론으로 의제를 선점했으며 향토예비군과 학생 군사교육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책선거를 보여주었다. 4 18 100만 명의 청주우이 모인 서울 장춘단공원 유세에서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도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박정희 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오는 것이라고 예언했다.

재야인사들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해 전국적인 투개표 참관과 부시운동을 조직했고 교련철폐투쟁을 중단한 대학생들이 투개표 참관운동을 시작했다. 정부가 이를 금지하자 수천 명이 신민당 참관인으로 등록해 전국 산간벽지의 투표소로 흩어졌다.

 

이것은 대학생들이 정당과 조직적으로 연대한 최초의 사례였다.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특정 정당과 손잡지 말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깨뜨린 것이다. 김대중 후보는 득표율 8%, 90만 표 차이로 졌다.

공무원을 동원한 관권선거와 금품 살포, 군 부재자 부정투표, 야당 참관인 매수와 부정 투개표 등 만만치 않은 부정선거를 한 사실을 고려하면 사실상 김대중 후보가 이긴 선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곧이어 치른 국회의원 총선에서 공화당은 득표율 4.4% 차이로 신민당을 눌렀다.

하지만 의석의 3분의 2를 확보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합법적으로 개헌을 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10월 유신이라는 현직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는 바로 이 총선에서 배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을 하면 선거제도를 없애 총통이 될 것이라고 한 김대중 후보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박정희 정부는 거칠 것 없는 독재의 길을 갔다. 무엇보다도 언론에 대한 검열과 언론인에 대한 탄압을 대폭 강화했다.

1970년대 초 민주화운동의 톱스타는 단연 김지하 시인이었다. 정부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도적으로 묘사한 담시 [오적]을 발표한 그를 구속했다.

잠시 풀려나 있으면서 다음 작품 [비어]를 발표하자 곧바로 반공법을 걸어 다시 구속했고 잡지 [사상계] [o의 소리]를 등록 취소했으며 잡지 [다리]의 필자와 편집자들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선언을 했지만 언론사 경영진과 편집간부를 협박, 회유해 보도록 통제했다.

정부는 사법부도 장악했다. 검찰이 공안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린 현직 판사들에 대해 수뢰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판사들의 집단사표 제출과 법관 독립선언이 이어졌다. 하지만 판사들은 결국 중앙정보부 통제 아래 들어갔고 헌법의 3권 분립 조항은 효력을 잃었다.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사건-

 

1971년 하반기가 되자 권력형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교련폐지를 요구하는 학생시위가 다시 불붙었다. 정부는 위수령을 발동하고 서울 주요 대학에 군을 투입해 무려 2000여 명의 대학생을 체포했다.

시위 주동자를 제적하고 서클을 해체했으며 교내 간행물을 폐간하고 제적 학생과 교련 수업을 거부한 학생들을 강제 징집했다. 중앙정보부는 사법연수원생 조영래와 서울대생 심재권, 이신범, 장기표, 김근태 등이 정부기관 습격과 혁명위원회 구성 등 9단계의 국가전복 음모를 꾸몄다는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사건을 발표했다.

그래도 민심이 가라앉지 않자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 책동 강화를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안보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서 날치기 처리해 대통령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노동 3권 등 헌법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게 했다. 1972년 유신쿠데타 예행연습을 한 것이다.

 

 

<서울대생 내란예비 음모사건>

 

 

-박정희의 7.4 남북 공동성명-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두 번의 극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첫 번째는 7 4일 남북한 당국이 동시에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이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관계자가 비밀리에 남북을 오가면서 협상한 끝에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명을 받아 대리서명한 공동성명이었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입각해 통일을 추진하기로 한 이 성명이 나오자 국민들은 20년에 걸친 군사적, 이념적 대결이 끝나고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에 들떴다. 두 번째 사건은 그로부터 석 달 후에 일어났다. 10 17일 밤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남북대화와 통일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려면 냉전시대에 만든 헌법을 고쳐 새로운 정치체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화문에 탱크를 세우고 정부기관과 언론사 등 민간 주요 시설에 군을 투입했다.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으며 헌법 효력을 정지시키고 비상국무회의가 국회 기능을 대신하게 했다.

 

 

 

-10월 유신 체제 등장 (그리고 김기춘)-

 

그는 모든 것을 잘 준비해두고 있었다. 계엄령 선포 열흘째였던 10 26일 비상국무회의가 개헌안을 심의하게 한 다음 27일 곧바로 개헌안을 공고했다. 정부는 11 21일 계엄령하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토론이나 찬반운동은 완전하게 봉쇄한 가운데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1.9%가 투표했고 91.5 %가 찬성했다.

 

3선 개헌도 전적으로 찬성하지 않았던 국민들이 종신집권을 열어주는 헌법개정안에 이렇게 압도적인 찬성률을 보인 것은 계엄령의 공포 분위기에 완전히 굴복했기 때문이다. 절반의 반혁명이었던 5.16과 달리 10월 유신은 평화적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완벽하게 차단한 완성형 반혁명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반쪽 민주주의 국가에서 완전한 독재국가로 전락했다.

 

유신헌법의 핵심은 몇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국민은 통일 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뽑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대통령을 뽑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 성향 인사의 출마를 막고 지지자들만 대의원이 되게 함으로써 영구집권의 꿈을 이루었다.

 

둘째,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하고 국회의원을 한 선거구에서 둘씩 뽑도록 선거법을 고쳤다.

여당의원과 대통령이 임명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합치면 의원 정수의 3분의 2가 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국정감사권마저 폐지함으로써 국회를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법률을 통과시키는 통법부로 전락하게 했다.

 

셋째,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과 헌법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부여했다. 대통령이 무제한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10월 유신은 현직 대통령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 없었다. 국회의원 3분의 2의 찬성을 받지 않으면 헌법개정안을 확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폭력으로 국회를 해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신헌법 초안을 만든 인물은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파견 근무를 했던 김기춘 검사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그는 공무원과 공공기관장들을 모아놓고 화끈한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한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켰다. 다시 20여 년이 지난 2013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어 국정운영을 전횡함으로써 기춘 대원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계엄령을 해제한 직후인 12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했다. , , 동에서 하나씩 모두 2359명을 뽑았는데 대의원은 정당에 가입할 수 없었으며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견해를 밝혀서도 안 되었다.

 

12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선거 유세도 공약 발표도 하지 않고 혼자 출마해 100% 찬성으로 당선되었다.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이 된 것이다. 1978년에는 똑 같은 방식으로 제9대 대통령이 되었다. 유신체제는 선거제도 그 자체를 없애버린 완벽한 독재였다.

따라서 그날 이후 민주화운동은 국민이 주권재민의 원리에 입각한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게 되었다. 민주화운동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일으켜 힘으로 정권을 타도하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운동이 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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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5.16 쿠데타]

 

1961 5 16일 새벽, 2군사령부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이 3500여 명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와 정부청사와 언론기관 등 주요 시설을 점령했다. 대통령과 정부, 국회 등 모든 국가기관의 헌법적 권한과 기능을 폭력으로 정지시키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반공, 한미동맹, 사회적 부패와 정치적 구악일소 등을 열거한 혁명공약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국가 자립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여 기아선상에 방황하는 민생고를 해결함으로써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4), 혁명의 과업을 이루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6)는 것이다.

 

민생고 해결을 내세운 것은 아마도 박정희 소장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병영복귀약속은 의도적인 거짓말이었다.

 

장면 정부는 남로당 경력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박정희 소장을 중용하지 않았으며, 군 내부에는 군부의 정치개입에 반대하는 장성도 많았다. 미국행정부와 주한미군사령부도 마찬가지였다.

혁명에 성공하려면 적을 최소화하고 대중의 신뢰를 얻을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래서 마치 순수한 애국심에서 거사한 것처럼 보이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장군을 군사혁명의원회 의장으로 내세웠지만 쿠데타의 리더는 박정희 소장이었다. 미국 대사관과 미8군은 쿠데타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있었으며,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는 여러 차례 정보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미군이 있으니 쿠데타를 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았으며, 쿠데타가 일어난 후에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장면 총리는 내각과 함께 사퇴해 버렸고 윤보선 대통령은 병력을 동원해 쿠데타군을 진압하자는 맥그루더 미8군사령관의 강력한 제안을 거절했다. 남북분단과 이념적, 군사적 대결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군이 유혈내전을 벌이는 사태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는 군사혁명위원회가 하야를 만류하자 아무 실권도 없는 대통령직에 그대로 머물면서 쿠데타를 사실상 묵인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과 사회단체를 모두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일절 금지했다.

 

박정희 소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꾼 다음 장도영 장군을 밀어내고 스스로 의장이 되었으며 군부의 반대파를 차례차례 제거했다.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정보공작정치를 할 테세를 갖추고 국회에서 자신을 보위할 민주공화당을 창당한 다음 헌법을 바꾸어 의원내각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중심제를 도입했다. 그런 다음 병영으로 복귀한다는 혁명공약 제 6조를 폐기하고 1963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제5대 대통령이 되었다. 득표율 격차는 1.5 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1967년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보선을 꺾고 재선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걸어갔던 독재와 장기집권 경로를 그대로 따라 걸었다. 헌법의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하고 1971년 금권, 관권을 동원한 부정선거로 제7대 대통령이 되었다.

1972 10월에는 또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시대 왕보다 더 강한 권력을 수중에 넣은 다음 대통령 긴급조치를 아홉 번이나 발동해 야당과 비판세력을 목 졸랐으며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납치해 죽이려 했다. 자신의 추종자들만 체육관에 모아놓고 혼자 출마해 100% 찬성으로 제8대와 제9대 대통령이 되었다.

 

5.16은 단순히 제 2공화국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4.19가 만든 모든 것을 파괴해 버렸다. 그러나 4.19 혁명 그 자체까지 죽여 없애지는 못했다. 적어도 말로는 4.19 혁명을 인정했다. 1962 12 26일 공포한 제 3공화국 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 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에 있어서….”. 4.19의거이고 5.16은 그보다 더 의미가 깊은 혁명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4.19는 민중이 궐기해 권력을 교체한 민주주의 정치혁명이지만 새로운 권력 주체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자유가 주어진 것 말고는 바뀐 게 별로 없었다. 그와 달리 5.16의 주체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0만에서 60만으로 대폭 늘어난 군대를 힘의 원천으로 삼고 있었다.

가난한 농업국가 대한민국에는 기술적 효율성과 합법적 폭력을 보유한 군대조직의 압도적인 힘에 맞설 만한 사회집단이 없었다. 박정희 장군은 이 조직의 힘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국가 운영에 필요한 정치세력을 규합했다. 그는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대중이 당장 체감할 수 있는 가시적 변화를 만들기 위해 구악일소를 내세운 혁명공약가운데 가장 쉬운 것부터 실행했다.

 

 

자유당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활개 쳤던 정치깡패 이정재, 인기배우들을 괴롭혔던 영화계 건달 임화수, 전설적 조폭 두목 신정식, 정치깡패를 동원해 부정선거를 저질렀던 내무부장관 최인규, 발포 명령을 내린 대통령 경호실장 곽영주 등의 재판이 5.16 쿠데타로 중단되어 있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그들을 혁명재판에 회부해 사형을 확정한 다음 거리로 끌어내 조리돌림을 했다. 사형수들은 나는 깡패입니다.’ 따위의 우스꽝스러운 플래카드를 들고 덕수궁에서 출발해 서울 시내 중심가를 행진해야 했다.

이것은 북한 인민재판이나 중국 문화대혁명 때 벌어진 것과 비슷한 야만행위였지만, 헌법과 법률의 절차를 제대로 지키느라 재판 절차를 지지부진하게 끌어가던 장면 정부와 비교하면 당시 국민의 눈높이에서는 한결 속 시원한 응징이었다.

 

그런데 혁명인지 쿠데타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쿠데타는 혁명과 달리 민중의 동의와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다.

군대를 동원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군사쿠데타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학술적 개념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5.16을 굳이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경제발전을 이루었으니 결과적으로’ 5.16은 잘된 일이었고, 잘된 일에는 군사정변이나 쿠데타보다 혁명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운영을 잘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5.16이 군사쿠데타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족중흥을 이룩한 위대한 지도자또는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인권을 유린한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하나의 역사인물이 이처럼 극단적인 호오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는 복잡하고 상충되는 특성을 가진 사람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면서 커다란 선과 지독한 악을 행했다. 어떤 면을 중시하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정희 생애-

 

박정희는 동학 접주로 활동한 적이 있는 빈농 박성빈의 2 5남중 막내로 1917 11월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나이 마흔다섯에 태어난 탓에 소년 박정희는 살가운 보살핌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중도 진보 성향 언론인으로서 독립운동을 했던 둘째 형 박상희는 1946년 대구에서 터진 10.1 사건 와중에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소년 박정희는 공부를 잘하고 통솔력이 있었다. 책을 많이 읽었고 이순신과 나폴레옹 같은 군인을 숭배했다. 구미공립보통학교를 나와 대구사범학교에 들어갔는데, 성적이 우수하지는 않았지만 군사과목과 체육을 잘했다. 어른들의 강권에 떠밀려 김호남과 결혼했지만 가정을 제대로 꾸리지는 않았다.

1937년부터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 그는 충성혈서를 동봉한 지원서를 제출해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입학허가를 받았으며, 1940년 제 2기생으로 입교해 1942년 수석으로 졸업한 후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했다. 그때 박정희 생도는 다카키 마사오였던 이름을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꾸었다.

당시 평범한 조선 사람에게 창씨개명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지만, 두 번이나 창씨개명을 하는 일은 흔하지 않았을 것이다. 3등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장교가 된 그는 1944년 만주와 소련 국경지역의 관동군 635부대에 배속되었다가 곧바로 화북 열하성 만주군 보병 제8단으로 전속되어 중국공산당 팔로군과 싸웠다. 만주국은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해 만든 괴뢰국가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패전했고 만주군이 해산되었다.

 

소속이 없어진 박정희는 광복군을 찾아가 제3지대 제 1대대 제2중대장이 되었으며 1946 5월 미군 수송선을 타고 귀국했다.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단기과정을 마친 그는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런데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194811, 박정희 소령은 여수순천반란사건(여순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숙군작업에 걸려들었다. 둘째 형 박상희의 친구이며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였던 이재복의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그는 알고 있는 모든 남로당 인맥을 털어놓고 수사에 협조한 끝에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피고인 중 유일하게 풀려났다.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과 미군 고문관 하우스만이 은인이었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면죄 승인을 받아 그를 구해주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백선엽 장군을 극진하게 예우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예편을 당해 앞날이 막막했던 박정희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했으며 전쟁이 한창이던 1950 12월 대구에서 김호남과 이혼하고 육영수와 결혼했다. 만약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는 쿠데타를 할 수도 대통령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1957년 소장으로 진급해 제7사단장, 육군 제6관구사령관,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재직했다. 장면 정부는 친일 전력이 아니라 좌익 전력때문에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박정희 소장은 제 2군 사령부 부사령관으로 근무하면서 5.16 이전에도 세 차례나 쿠데타를 하려 했다. 첫 번째는 1960 3.15 선거를 전후한 시기였다. 그 다음은 1961 4 19일이었다. 4.19혁명 1주년을 맞아 민주당 정부에 불만을 가진 학생들이 반정부 데모를 벌여 혼란이 벌어지면 그것을 빌미 삼아 쿠데타를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날은 별다른 시위가 벌어지지 않자 두 차례 거사일을 조정한 끝에 5 16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5.16과 관련해 두 사람을 미리 거론할 필요가 있겠다. 먼저 정치 신인 김대중이다. 1924년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난 청년 사업가 김대중은 정치 입문 8년 동안 세 번이나 낙선한 끝에 강원도 인제군 민의원 보궐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가까스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불과 이 틀 후 5.16이 터져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국회의원 선서조차 하지 못하고 의원직을 잃었다. 중앙 정치무대에서는 아직 무명이었던 이 불운한 30대 정치 신인이 불과 10년 후 강력한 야당 대통령 후보가 되어 독재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또 한 사람은 청년 장교 전두환이다. 1931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그는 아홉 살 때 가족과 함께 만주로 갔다가 1년 후 돌아와 대구에 정착했으며 6년제 대구 공업중학교를 졸업한 후 1952년 진해로 와 있던 육군사관학교에 11기생으로 입교했다. 5.16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군단 교관이었던 전두환 대위는 5 17일 육군본부로 무작정 박정희 소장을 찾아가 독대했다. 그런 다음 쿠데타군 실세인 양 육사교장을 압박하고 생도들을 선동해 쿠데타 지지시위를 벌이게 했다. 5 18일 오전 육사생도와 소속 장교, 졸업생 1000여 명은 동대문과 남대문을 거쳐 서울시청 광장으로 행진했다.

전두환 대위가 박정희 소장을 독대하고 육사생도의 시가행진을 사주한 것이 사실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그를 비서관으로 발탁한 것을 보 면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이 때 인연을 맺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하나회라는 육사 출신 장교 사조직을 만들어 대한민국 국군 수뇌부를 장악하고 군사반란과 대학살을 통해 권좌에 오를 것이라고 상상한 사람 역시 없었다.

 

[김대중과 전두환]

 

  

박정희 대통령은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했지만 폭력으로만 통치하지는 않았다. 자발적으로 추종하거나 지지한 국민도 많았다. 18년의 집권기간에 박정희 정부는 농업 중심의 전통사회를 중화학공업을 보유한 산업사회로 만들었다. 고속도로와 항만, 비행장을 비롯한 사회 간접자본을 건설했고 헐벗은 민둥산을 숲으로 바꾸었다. 전국에 상하수도와 전기를 보급했고 기생충과 전염병을 퇴치했다. 나는 이런 것이 커다란 선이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결코 고결한 인간은 아니었으나 독재자로서는 크게 성공한 것이다.

[박정희가 남긴 좋은 것들]

 

 

 

4.19 5.16 둘 모두 일정한 성공을 이루었다. 4.19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50년이라는 긴 세월을 걸쳐 점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10년으로 끝나버린 진보세력의 집권과 심각하게 흔들리는 오늘의 민주주의는 4.19의 승리가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5.16도 성공했다. 박정희 장군은 18년 동안이나 권력을 누렸으며 그 후예인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이 12년 더 집권했다. 서거 33년이 지난 시점에 딸이 국민의 선택을 받아 대통령이 되었으며, 이유가 무엇이든 그는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세계사에서 이만큼 성공한 군사쿠데타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좋아하는 시민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사실 그의 인격과 행위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시민들 자신이 쏟았던 열정과 이루었던 성취, 자기 자신의 인생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박정희 집권 시절, 절대빈곤, 고도성장, 양극화]

 

박정희 정부는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토대를 구축했다.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지배한 것은 기회균등과 공정경쟁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었다. 이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반드시 그렇게 되었어야만 할 이유는 없다. 다른 방식으로 발전을 이루어 지금과는 크게 다른 사회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두 길을 가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박정희 정부이래 개발독재와 재벌 중심의 자본축적, 수출주도형 산업화의 길을 걸었다.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낡은 경제구조를 혁신하지 못했으며, IMF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과거와는 양상이 다른 정글법칙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10년의 진보정부는 역사적 경로의존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사실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에는 연습이나 실험이 없으며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는 바꿀 수 없다. 5.16이 없었다면? 2공화국이 상당기간 지속되었다면? 박정희 장군이 병영으로 복귀했다면? 3선 개헌을 하지 않았다면? 10월 유신을 하지 않고 1975년에 퇴임했다면? 그랬다면 대한민국 경제가 어떤 길을 걸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와 있을까?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다.

기껏해야 일종의 사고실험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사고실험의 결론이 타당한지 여부는 검증할 방법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객관적 사실을 근거로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과 현주소를 점검하고, 그 연장선에서 앞으로 이루어야 할 변화의 길을 탐색하는 것이다.

 

 

한국 경제는 1970년대에 이륙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저 사실일 뿐이다. 그 사실을 곧바로 특정한 가치판단과 규범적 평가로 바꿀 수는 없다. “산업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독재를 해야 했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동시에 이룰 수 없다.” , “독재를 해서 경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민주화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함께 추진해볼 기회를 자기 손으로 봉쇄했다. 물론 그런 기회가 있었어도 실패했을 수 있다. 그러나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근거 역시 어디에도 없다.

독재적인 방법으로 산업화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다양하게 해석하고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각자 나름의 철학과 인생관을 지니고 산다. 똑같은 경험을 해도 철학이 다르면 해석이 달라지며, 경험까지 다르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

 

다른 건 몰라도 경제성장 만큼은 독재, 권위주의, 보수정권이 민주, 자유주의, 진보정권보다 더 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고정관념이다. 한국 경제는 박정희 정권 때 이륙했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1인당 국민소득의 상승폭은 민주화 이후 10여 년 동안이 그 이전보다 더 컸다. 1979~1980년의 불황과 1997년의 외환위기, 2008~2009년의 금융위기는 모두 보수정권이 일으켰다. 김대중 정부가 IMF 경제위기를 수습한 이후부터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까지 진보정권 10년 동안 노태우 정부나 김영삼 정부 시절과 비슷한 상승세를 기록했다.

미국발 국제금융위기가 수습된 후인 2010~2013년의 상승세는 진보정권 때보다 나을 게 없다. 결국 경제성장에 관한 한 보수와 진보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잘했다고 판단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박정희의 경제관 그리고 경제정책-

 

박정희 대통령은 시장과 자유경쟁이 이륙의 선행조건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지 않았기에 민주적 정부라면 결코 선택할 수 없었을 방식으로 이 과제에 도전했다. 그는 성공한 사례를 알고 있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통해 모든 권력을 중앙정부에 집중했고, 그 힘으로 유럽을 따라잡는 산업화에 성공했다. 히틀러는 나치당 독재를 확고히 한 가운데 국가계획에 따라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중화학공업과 군수산업을 집중 육성하는 전시 계획경제를 실행함으로써 대량실업과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을 해소했다.

결말은 침략전쟁 패배로 인한 체제붕괴였지만, 단기적으로는 두 나라 모두 두드러진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승만 박사와 달리 전 남로당원박정희는 자유주의 이념에 갇히지 않았다. 국가가 주도하는 중앙통제식 계획경제가 러시아공산당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볼셰비키 혁명의 지도자 레닌이 사회주의자로서는 처음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했을 때 봉착한 첫 과제는 인민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고 중화학 공업을 신속하게 육성해 자본주의 강대국들에 포위당한 소련의 일국사회주의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참고할 수 있는 전례가 없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는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

레닌은 공산주의자들이 혐오해 마지않던 사적 소유를 일부 허용하는 가운데 국가전략산업을 정부가 계획하고 조직하고 통제하는 절충형의 신경제계획(NEP)을 실시했다. 그가 죽은 후 권력을 이어받은 스탈린은 생산수단과 토지를 완전히 국유화하고 생산과정을 집단화하는 등 전면적인 중앙통제식 계획경제체제를 구축했다.

 

소련은 1941 6월 유럽 동부전선에서 볼셰비키 혁명 이후 24년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유럽 전선에서 연합군과 제휴해 독일과 싸웠고, 태평양 전선에서는 막바지에 미국과 손잡고 일본을 협공했다. 차르체제의 러시아군과 달리 소련군은 중화기로 무장한 현대적 강군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했다.

소련공산당의 중앙통제식 계획경제가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매우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박정희 시대 한국 경제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자본주의 선진국과 제국주의 일본,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을 절반씩 닮은 체제였다.  다시 말해서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기본질서에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결합한 혼합형 경제체제였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경제체제도 그와 비슷하다. 중국공산당의 경제관료들이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을 면밀히 연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개발독재는 똑 같은 개발독재다. 중국 정부의 최고위인사들이 박근헤 대통령에게 보인 인간적 호감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게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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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정책과 산업정책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19세기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애국지사였던 프리드리히 리스(Friedrich List) (1789~1846)의 충실한 제자였다고 할 수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풍미했던 19세기 중반, 리스트는 자신이 독일인이기 때문에 자유무역론을 거부한다고 말했다.

그는 산업기반이 약한 독일이 자유무역을 하면 경제적으로 영국의 패권 아래 편입되어 별 볼일 없는 산업을 가진 2등 국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래서 먼저 높은 무역장벽을 치고 자국의 산업을 육성한 다음, 충분한 실력을 갖추었을 때 국내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스트는 독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 공산품에 높은 관세를 매겨야 한다고 제안했으며, 그런 목적으로 부과하는 관세에 보육관세라는 멋진 이름을 붙였다. 대한민국의 무역정책은 뒤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나라에는 보호무역주의자 리스트의 전략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박정희의 경제정책-

 

박정희 대통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도모했다. 일제의 착취와 수탈과 학살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3억 달러라는 헐값에 넘겨주었다. 베트남전쟁에 청년들을 보내 무려 5000여명을 희생시켰다. 독일에는 광부와 간호사들을 보냈다.

1963년부터 8000여명이 파견된 광부의 학력은 고졸이 50%, 전문대 이상 대학 학력자가 24%였다. 간호사 파견은 1966년 독일 마인츠 대학병원 이수길 박사가 독일병원협회와 한국해외개발공사를 중재한 데서 시작되었다. 1969년 두 기관이 협약을 한 후 11000여 명의 간호사가 독일로 갔다.

 

1970년대에는 중동지역이 외화 획득의 중요한 현장이었다. 1973년 삼환기업의 사우디아라비아 도로 건설공사로 시작한 중동 건설 붐은 남광토건, 신한기공, 대림산업의 요르단, 아랍에미레이트연합, 쿠웨이트 건설수주를 거쳐 1976년 현대건설의 사우디 항만공사로 폭발적 양상을 보였다. 1979년 중동지역에 파견된 한국 노동자 수는 10만 명에 육박했다.

 

박정희 정부는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소위 기생관광을 공공연하게 허용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로 일본인 관광객이 급증했다.

1973년 외국인 관광객 68만 명 중 80%가 일본인이었는데, 그 대부분이 기생관광을 즐기러 온 일본의 하위 소득계층 남자들이었다. ‘외화벌이를 한다면 안 될 일이 없었다. 종로 10곳을 비롯해 서울에만 14, 부산에 7, 경주에 4, 제주도에 2곳의 관광요정이 있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삼청각과 대원각에는 관광기생수가 800명이나 되었다.

여행사와 관광요정, 호텔이 삼각동맹을 맺은 이 국제적 성매매사업은 1973년 한 해에만 2억 달러의 관광수입을 안겨준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중화학공업 투자를 위해 직접 대규모 차관을 도입했고 철도, 도로, 통신, 철강, 석유화학, 금속 등 국가기간산업을 직접 또는 공기업을 세워 운영했다. …..그리고 정부가 한국은행에서 사실상 무제한으로 돈을 빌려 유통시키는 방식으로 물가인상을 유발함으로써 현금과 예금을 보유한 국민을 착취하고 부채가 많은 금융기관과 기업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박정희 정부는 [공산당선언]에서 현대 국가는 부르주아지의 일상사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한 마르크스의 견해가 최소한 진실의 일면을 포착한 것임을 증명해 보였다.

1972년의 8.3 긴급조치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것은 실패한 화폐개혁보다 더 노골적인 사유재산 침해 행위였다. 과도한 사채 규모와 높은 금리 때문에 부도 위험에 빠진 기업이 늘어나자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사채를 동결하고 금융기관 대출로 전환하는 방안을 정부에 건의했다. 박정의 대통령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선포했다.

 

이 명령의 핵심은 기업과 사채권자의 채권채무관계를 즉각 무효화하고, 채무자가 사채를 신고하면 3년 거치, 5년 분할로 시중 사채이자의 3분의 1 수준인 월 1.35 % 의 이자율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사채권자가 원할 경우 사채를 출자로 전환해주고 2000억원의 특별자금을 조성해 기업의 단기성 대출금을 장기저리 대출금으로 바꾸어주도록 했다.

정상적인 자본주의 사회라면 상상할 수 없는 조처였다. …. 채권자의 사유재산을 빼앗고 거기에 국민의 세금을 얹어 기업에 제공한 8.3 긴급조치가 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효과를 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재벌의 등장, 전경련의 탄생-

 

한국 경제는 시장경제체제가 아니었다. 시장의 원리에 따르면 자본은 저절로 수익성 높은 투자 프로젝트를 가진 산업과 기업으로 흘러간다. 그런데 산업화 이전의 대한민국에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시장과 금융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외국이나 한국은행에서 돈을 빌려 만든 투자재원을 정부가 기업에 직접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정부의 실체는 박정희 대통령과 측근 참모들이었다. 아무리 수익성 있는 투자 프로젝트를 가진 사람이라도 정부에 줄을 대지 못하면 자금을 받을 수 없었다. 특혜가 있는 곳에 정경유착과 부패가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재벌체제가 탄생했다.

 

대통령과 참모들의 신임을 받은 기업인들은 물가인상률보다 훨씬 낮은 이자를 내는 정책자금을 받았다. 각종 특혜와 행정 편의를 제공받으면서 국내시장의 독과점 공급자가 되어 소비자인 국민을 착취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여러 산업 분야에 진출해 거대한 기업집단을 형성했다. 삼성그룹 이병철, 현대그룹 정주영, 선경그룹 최종현 등 거대 기업집단을 만든 재벌 창업자들은 그런 일에 빼어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이었다.

정부는 재벌 대기업이 수출을 해서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도록 자금과 세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재벌 총수들은 대통령과 권력실세들에게 통치자금명목의 뇌물을 넉넉하게 바쳤다.

 

5.16 직후 군사혁명정부는 재개 서열 10위권 기업인들을 모두 구속했다. 일본에 출장을 간 덕에 체포를 면한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정축재처리위원장에게 편지를 보내 5.16을 지지하며 부정축재자 처벌 방침에 이의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 시기에 만든 불합리한 세법 아래에서 고용을 창출하고 세금을 납부해 국가운영을 뒷받침한 기업인과 백해무익한 악덕 기업인을 구별해야 하며, 경제인을 처벌해 기업활동을 위축시키면 빈곤을 추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군사정부의 종용을 받고 귀국한 이병철 회장은 1961 6 27일 박정희 소장을 만났다. 그는 법대로 세금을 냈다면 살아남은 기업이 없었을 것이며, 그런 환경에서도 큰 기업을 일군 기업인을 처벌한다면 세수가 줄어 국가운영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구속되어 있던 기업인들은 조국근대화사업에 협력하기로 맹세하고 모두 풀려났으며 각자 일정액의 추징금을 납부했다. 이병철 회장은 박정희 의장을 다시 만났을 때 기업인들에게 벌금을 물리기보다는 공장을 지어 정부에 헌납하게 하는 방안을 건의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이 제안을 수용해 정부가 기업에 투자명령을 내릴 수 있는 법률을 만들고 국가기간산업 시설을 세우기 시작했다.

 

박정희 의장과 이병철 회장의 만남은 국가와 재벌의 발전을 위한 동맹이 계기가 되었다. 5.16 직후 체포되었다 풀려난 기업인들이 만든 단체가 바로 전국경제사범연합회라는 비아냥을 듣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이다. 그 후 재벌 총수들은 대부분 한번 이상 불법 비자금 조성, 회사자금 횡령, 불법 정치자금과 뇌물 제공, 분식회계, 탈세 등의 범죄를 저질러 재판에 회부되었다.

아예 기소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지만 범죄 혐의가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난 경우에도 기껏해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그나마 조금 지나면 대통령이 국민경제 활성화와 기업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그들을 사면해 주었다. “기업의 탈세와 불법은 불합리한 제도 때문이며 기업인을 처벌하면 경제가 위축되어 경제가 침체한다라는 이병철 회장의 견해는 대통령과 판검사, 언론이 모두 추종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삼성그룹의 역사-

 

삼성그룹의 역사는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 전체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이병철 회장은 일제강점기에 정미업과 운수업을 했다. 이승만 정부 때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했으며 한국전쟁으로 대구에 피난해 있으면서 제조업 진출을 준비했다. 가장 먼저 제일제당을, 그 다음에 제일모직을 세웠다.

그는 소비재 독과점 공급자의 지위를 활용해 벌어들인 돈으로 국내은행 주식의 절반을 취득해 금융업 기반을 만들었다. 5.16 이후에는 일본 자본을 끌어와 울산에 한국비료를 세웠으며 동양방송, 용인자연농원 등 미디어와 레저산업에 도전했다. 1970년대에는 전자산업, 조선업, 플랜트사업, 석유화학, 방위산업에 손을 뻗었고 생명보험, 백화점, 호텔사업에도 진출했다.

반도체와 컴퓨터산업은 1983년에 착수했다. 미국과 일본 기업에서 기술을 도입해 초대규모집적회로(VLSI) 64KD 램과 16KS 램 생산을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웨이퍼를 수입해 회로를 입히고 절단해 중간재를 만드는 단순 공정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전후방 연관기술을 개발해 반도체 결정을 키우는 데서부터 완제품을 만드는 데까지 모든 공정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삼성전자는 미국과 일본 기업을 능가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집적기술을 확보했다.

 

요약해서 말하면 제당과 모직 등 수입대체 소비재산업에서 출발한 삼성그룹은 전자, 석유화학, 조선, 기계 등 중화학공업, 정밀기계를 축으로 한 방위산업, 반도체, 컴퓨터, 산업용 전자기기, 유전자공학 등 최첨단 수출산업 분야로 주력업종을 빠르게 교체했다.

이건희 회장 체제로 넘어온 뒤 자동차산업에 진출했다가 실패한 것을 제외하면, 삼성그룹은 하드웨어산업 뿐만 아니라 정보처리 등 소프트웨어, 이동통신기기, 문화콘텐츠, 의료서비스와 의료기기, 연료전지 등 신재생에너지산업 등으로 계속해서 주력업종을 교체하는 데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좋은 나라는 국민이 골고루 잘사는 나라다. 여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경제성장과 소득분배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소득분배에 신경을 쓰다보면 경제성장을 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하려면 소득분배가 되도록 균등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현실을 보면 둘 다 잘하는 나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도 있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은 쪽에 속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국의 소득격차가 다른 나라보다 심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과거보다 격차가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국가 주도 경제개발계획의 실마리를 처음 제공한 것은 UN 이었다. UN은 식민지배와 분단을 거쳐 전쟁의 참화에 빠진 불행한 신생국의 자활을 돕기 위해 한국재건단’(UNKRA)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한국재건단은 1953년 봄 한국 경제의 재건을 도모하기 위한 경제개발계획 보고서를 냈다.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이것을 참고해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계획경제는 공산당이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 탓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은 한동안 허공을 떠돌다가 4.19 혁명 나흘 전에야 겨우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이념적 편견에 사로잡혀 경제발전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을 내팽개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저지른 여러 잘못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중의 절실한 물질적 욕망을 외면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장면 정부는 1961 2경제개발 7개년계획을 수정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요강을 발표했다. 정부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서둘러 작성했지만 집권 민주당과 내각에서 사회주의가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이승만 대통령만 계획경제를 싫어한 건 아니었던 것이다.

장면 총리는 공공재와 국가기간시설을 비롯해 꼭 필요한 만큼만 하겠다면서 계획을 밀고 나간 끝에 최초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군사정부의 손에 넘어갔다.

 

한국 경제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가치가 있는 사건은 두 가지다. 경제성장과 관련해서는 제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이고 소득분배와 관련해서는 IMF 경제위기다. 우리나라는 다양한 소비재 경공업 뿐만 아니라 철강, 자동차, 금속, 석유화학, 조선 등 전통적 중화학공업과 세계 최고 수준의 컴퓨터, 반도체, 이동통신기기 등 첨단산업을 보유하고 있다. 수출입을 합친 금액이 국내총생산과 맞먹을 정도로 무역의존도가 높다. 주요 산업을 거의 모두 소수의 재벌이 장악하고 있다. 이러한 재벌 대기업과 수출 중심 경제구조의 원형이 바로 제 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에 탄생했다.

 

우리나라는 비정규직이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나 된다.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60퍼센트에 불과하며 고용안정성과 근로환경도 현저히 나쁘다. 기업은 사실상 마음대로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으며 노동조합 조직률은 10퍼센트 아래로 내려갔다. 중산층이 줄어들고 빈부격차는 확대되었다. 외국자본이 특별한 규제를 받지 않고 국내시장에 들어오거나 나갈 수 있으며 대기업들은 생산시설 일부를 외국으로 옮겼고 부품과 중간재를 외국에서 조달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기업과 내수기업의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러한 양극화 현상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크게 심화되었다.

 

국민경제가 이룩하려면 활주로와 연료가 있어야 한다. 전통적 경제이론에 따르면 생산의 필수 요소는 자본과 노동력이다. 대한민국에 노동력은 많았지만 자본은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산업화를 하려면 공장건물, 기계, 원료와 중간재 같은 실물자본을 축적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가동하는데 필요한 최초의 자본을 형성하는 것을 자본의원시적 축적이라고 했다.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 과제를 해결했다. 첫째는 봉건적 특권을 자본화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귀족들은 중세 이래 농민들이 가지고 있던 경작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함으로써 토지에 대한 봉건적 특권을 자본주의적 소유권으로 전환했다. 양모 값이 오르자 농민들을 영지에서 추방해버리고 농지를 초지로 바꾸어 농업자본가에게 임대한 소위 인클로저 운동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로 이주해 노동자가 되었다.

 

둘째는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수탈이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등 모든 산업국이 군사력으로 다른 전통사회를 정복해 부와 노동력과 자원을 약탈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했다. 소련과 중국은 다른 방식으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이루었다. 그들은 봉건적 특권을 사유재산이 아닌 국가자본으로 전환했다. 소비재산업에 앞서 사회간접자본과 중화학공업을 먼저 육성했다. 시장 경쟁이라는 사회적 강제나 물질적 부를 향한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혁명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해 국가자본을 쌓았다. 냉전시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이념적, 정치적, 군사적인 면에서 극단적으로 대립했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통하는 점이 있었다.

현실의 사회주의 국가는 생산수단의 소유권과 생산물의 처분에 관한 권한을 자본가가 아니라 공산당 관료들이 행사한 일종의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정책의 초점은 단기간에 대량의 국가자본을 축적하는 데 놓여 있었다.

 

대한민국은 서유럽 국가와 달랐으며 사회주의 국가도 아니었다. 자본화할 수 있는 중세적 특권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다른 나라를 수탈할 능력도 없었으며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생산시설이 조금 있었지만 그나마 한국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어버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실정에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했으며 자본을 해외에서 차입하고 기업으로 하여금 폭리를 취하게 함으로써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이룬 것이다. 최초 해외자본 차입의 주체는 정부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업의 해외 차입을 조금씩 열어주었다.

정부는 독점기업들이 시장지배력을 이용해 폭리를 얻도록 했으며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소비자와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 기업들은 짧은 기간에 막대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진행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특별히 비인간적이고 잔혹했던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어느 곳에서나 자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며 태어났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자본의 원시적 축적또는 이륙을 위한 선행조건 충족을 위한 것이었다. 1 5개년 계획(1962~1966)의 핵심은 전력과 석탄 등 에너지원 확보, 국가기간산업 확충, 철도,도로,항만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 확대, 농업생산력 제고, 수출 증대, 기술 진흥이었다.

공공재 공급과 국가기간산업 육성에 초점을 맞추었던 장면 정부의 계획과 다를바 없었다. 이것은 비행기를 띄울 활주로를 닦는 작업에 해당했다.

 

2 5개년계획(1967~1971) 목표는 식량 자급, 삼림녹화, 화학, 철강, 기계공업 건설, 7억 달로 수출, 고용 확대, 국민소득 증대, 과학기술 진흥, 기술수준과 생산성의 향상 등이었는데 핵심은 화학, 철강, 기계 등 중화학공업 육성이었다. 1 5개년계획의 목표를 달성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중화학공업을 육성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가장 큰 난관은 계획을 실행하는데 필요한 자본이 없다는 것이었다.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려면 다른 어떤 산업보다 막대한 설비투자를 해야 한다. 투자에서 이윤 획득까지 걸리는 시간이 매우 길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축적된 자본이 없었으므로 밖에서 들려오는 것 말고는 단기적 해결책이 없었다. 정부는 한일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전쟁 파병 등을 계기로 일본과 미국 자본을 들여와 중화학공업 건설 작업에 시동을 걸었고 제3 5개년 계획 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얻었다.

 

산업화세력의 주요 인사들은 산업화의 성공과 관련한 이야기를 많이 남겼다. 국민들에게는 김종필, 이후락, 차지철, 김형욱, 김재규, 김성곤 등 음습한 정보공작 정치의 책임자들이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이름을 기억해둘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박정희 시대의 고위 경제관료들이다. 경제개발계획 입안과 집행을 총괄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은 장기영(1964~1967), 박충훈(1967~1969), 김학렬(1969~1972), 태완선(1972~1974), 남덕우(1974~1978), 신현확(1978~1979)이었다. 산업정책과 수출정책을 담당한 상공부장관은 박충훈(1964~1967), 김정렴(1967~1969), 이낙선(1969~1973), 장예준(1973~1977), 최각규(1977~1979)였다. 이 사람들은 대체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국내 명문대학과 외국에서 공부했고 공직을 마친 다음에도 안락한 노후를 보냈다. 비밀결사를 만들고 거리시위를 조직해 독재정권과 싸운 민주화세력의 주요 인사들이 수배, 도피, 체포, 고문, 투옥으로 이어진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숱한 무용담과 인생 드라마를 남긴 것과 달리 그들의 인생에는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인간적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별로 없다.

하지만 그들이 산업화 초기의 국가정책 결정과정에 대해 남긴 기록에는 지적 흥미를 자극하는 이야기가 적지 않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중화학 공업화를 선언했다. 1980년대 초까지 수출 100억 달러와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달성하고, 수출상품 중에서 중화학제품이 절반을 넘기게 하겠다고 장담했다.

수출제일주의, 10년이 넘는 대규모 장기계획, 산업기계, 조선과 운송기계, 철강, 화학, 전자 등 5대 산업의 집중 발전 등이 선언의 핵심 내용이었다.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직접 위원장을 맡았으며 100억 달러 투자재원 조달계획에 따라 첫 3년 동안 31억 달러의 투자자금을 동원했다. 오원철 경제수석, 김정렴 상공부장관, 박정희 대통령이 그 주역이었다.

중화학공업은 방위산업을 증강하고 국군을 현대화하는 데도 필요한 정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 사업은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참모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중화학공업화를 위해 나라 안팎에서 100억 달러를 동원해야 한다는 보고를 받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쟁을 일으키자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일으켰는데도 국민들은 기꺼이 따라주었다. 태평양전쟁 때 패전을 해서 국민들에게 막중한 피해를 주긴 했지만. 이 정도의 사업에 협조를 안 해주어서야 되나.”

 

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에 한국 경제는 이륙을 위한 선행조건을 충족했다. 국제 경제환경이 좋지는 않았다.

베트남전쟁을 치르느라 너무 많이 돈을 찍어낸 탓에 달러 가치가 폭락하자 미국 정부는 1971년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는 금태환 제도를 전격 중단해버렸다. 금본위제와 고정환율제를 축으로 한 전후 국제 금융질서가 무너져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졌다. 게다가 이스라엘과 아랍연합군이 전쟁을 벌인 1973년 가을, 중동 산유국들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나라에 대한 원유 공급을 거부하는 원유 무기화전략을 썼다. 1배럴에 2달러 수준이던 국제 원유가격이 단숨에 다섯 배 이상 뛰어올랐고 국내물가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부는 계속해서 대규모 정부차관을 들여와 기업에 배분했다. 해외 국가채무 규모가 급증하자 나라 안팎에서 외채망국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원유가격 폭등으로 천문학적 규모의 오일달러를 거머쥔 중동 국가의 건설 붐을 적극 활용한 덕분에 한국 경제는 연평균 10퍼센트에 육박하는 성장률을 기록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면서 속도를 냈고 바퀴가 지면 위로 떠올랐다.

 

4 5개년계획(1977~1981) 한복판에 10.26 사건이 터졌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이 계획은 그대로 살아남았다. 4 5개년 계획 목표에 자력성장 구조 확립, 기술혁신과 능률향상 등과 더불어 사회개발을 통한 형평 증진을 포함시킨 것을 보면 박정희 정부의 경제관료들은 한국 경제가 이미 이륙에 성공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륙을 할 때는 추진력과 가속도가 중요하지만 이륙한 후 순조롭게 비행을 하려면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래서 경제정책과 관련해 처음으로 형평이라는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4 5개년 계획 첫해인 1977년에 우리 경제는 100억 달러 수출과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조기에 달성했지만 민들의 삶은 여전히 고달팠다. 부동산 투기 광풍으로 주택가격이 폭등했고 생필품 공급은 여전히 부족했다. 1978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과 사우디아라비아 내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일련의 사건으로 제 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 다시 한번 물가가 폭등했다. 하필이면 그런 시기에 정부가 국가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세율 10% 의 부가가치세를 새로 도입하는 바람에 소비자물가는 더 높게 치솟았다. 민심이 사나워질 수 밖에 없었다.

 

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목표에 형평을 포함시킨 것은 시의적절했지만 정부는 경제적 불평등과 물가 폭등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해소하지 못했다. 10.26 사태와 5.18에 이어 1980년 여름 이상저온 현상이 한반도를 덮쳐 농업마저 대흉작을 기록하자 한국 경제는 경제개발계획 시행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것은 산업화 이후 첫 번째로 맞은 심각한 경제위기였다.

 

경제개발계획은 그 후에도 세 차례 더 수립되었지만 그 의미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1982년에 시작한 제5 5개년 계획의 목표에서 성장이 빠졌다.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의 제6, 7차 계획에는 자율, 경쟁, 개방, 국제화, 기업경쟁력 강화 같은 새로운 목표가 등장했다. 그런 목표들은 국가주도형 자본주의적 계획경제의 점진적 해체를 의미했다. 게다가 1980년대 말 지구촌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식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대세를 형성했다. 국내 대기업과 재벌들이 이미 거대한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정부가 투자재원을 조달해 기업에 할당할 필요도 없어졌다. 결국 1997년의 외환위기와 함께 국가주도형 경제개발계획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 경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세계사에서 보기 힘든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성장 속도에서 한국을 추월한 나라는 중국 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것을 이루기 위해 18년 동안 철권통치를 했다. 위협과 폭력이 항구적이고 효율적인 통치방법이 아니라는 것, 국민들이 국가의 목표를 자신의 개인적 목표로 여기고 자발적으로 협력하면 정부가 폭력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래서 그는 교육과 언론을 통제하고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국민을 세뇌하려고 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는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를 불러들인다.

 

 

 

-산업화의 성공 그리고 그로 인해 초래된 재벌과 정부의 관계 변화-

 

산업화의 성공은 정부와 재벌의 관계를 바꾸어놓았다. 처음에는 정부가 이고 재벌이 이었다. 정부의 사업허가와 자금을 배정받아야 사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업인들은 불법 비자금을 만들어 대통령과 권력실세들에게 바쳤다. 대통령 눈 밖에 나면 어떤 기업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런데 1980년대 3저 호황과 고도성장기를 거쳐 재벌이 막대한 자본을 축적하고 정치적으로도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정부가 권력으로 기업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재벌이 돈으로 정치권력을 관리하게 되었다. 재벌은 대통령과 집권세력뿐만 아니라 야당 정치인에게도 정치자금선거자금을 제공했다. 집권세력에게는 많이, 야당에게는 보험차원에서 적게 주었다. ‘삼성 X파일사건에서 보듯 삼성그룹 같은 재벌은 대통령과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경제부처의 고위공무원과 검사를 포함해 국가권력 행사와 관련한 의사결정권을 가진 사람들 전체를 돈으로 관리하기에 이르렀다. 자본 권력이 국가권력과 정치권력을 포획한 것이다.

 

……….

 

1995 12월 김영삼 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군사반란과 내란목적 살인혐의 등으로 구속하는 계기가 되었던 천문학적 규모의 소위 통치자금은 대부분 재벌 총수들이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 바친 뇌물이었다. 윗물이 혼탁하면 아랫물로 흐리기 마련이어서, 우리 사회 전체가 부패문화에 젖어들었다.

정치권과 정부만 그런 것이 아니다. 기업, 언론, 대학, 문화, 예술계까지도 사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공적 권력을 휘두르는 완장 문화에 감염되어 있었다. 이 모두가 재벌 탓은 아니겠지만 부패문화의 진원지가 재벌과 정치권력의 유착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에게 재벌은 애증의 대상이다. 재벌이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 어렵다. 국민들은 재벌기업이 지은 아파트에 살면서 재벌기업이 만든 텔레비전, 냉장고, 에어컨을 쓰고 재벌기업이 만든 승용차를 탄다. 재벌기업이 만든 옷을 입고 재벌기업이 생산한 스마트폰을 쓰며 재벌기업이 운영하는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경기를 본다. 재벌기업이 만든 화장품을 바르고 재벌 계열의 백화점과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 하며 재벌기업이 공급하는 생명보험에 가입한다.

청년들은 지불능력이 탄탄하고 근로조건이 좋은 재벌기업에 취직하기를 원한다. 자식이 재벌회사에 취직하면 부모는 고시합격이라도 한 것처럼 기뻐한다. 재벌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으며, 어쩌면 우리의 미래마저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 재벌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헌법 위에 군림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국가권력을 통한 정치적, 민주적 개입과 통제 뿐이다. 나는 이것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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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박근혜와 종교

 

J: 박근혜는 공식적으로는 무교야. 2012년 대선 기간 중에 종교가 없음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고 말이야. 하지만, 요즘 터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최태민 등과의 관련성을 보면 일종의 무속 신앙 내지 영세교 비슷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어. 이 부분은 이따가 좀 더 자세히 나눠 보자.

 

 

 

 

A: 박근혜의 삶 속에는 여러 가지 종교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던데..

 

J: 맞아. 먼저 청소년기에는 천주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서울성심여자중, 서울성심여자고등학교를 나왔고 대학교도 천주교 재단인 서강대를 졸업했어. 그래서 율리아나라는 세례명도 받았어.

 

불교와의 인연은 어머니인 육영수와 외할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보면 될거야. 그래서 박근혜는 힘든 시기에 불교를 많이 의지했다고 해.

200년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에게서 대자행이라는 법명도 받고, 2006년 대구 동화사에서는 신라의 선덕여왕과 같은 선덕화라는 법명도 받았어.

 

그래서 천영식의 증언에 따르면 박근혜의 삶의 방식과 사고는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택을 방문하면 금강경 등 여러 권의 불교 서적을 볼 수 있었다고 해.

 

개신교와의 인연은 육영수 어머니를 잃고 방황하던 시절 만난 최태민 과의 만남을 통해 이어졌는데 이 때 다른 개신교 목사들과 함께 구국십자군 활동 등을 통해 관계를 형성해.

 

1977 5 29 AFKN 과의 인터뷰에서 박근혜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있어 신앙은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나의 노력으로 아버지의 외로운 마음을 어느 정도 위로해 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우리 가정에 화목한 분위기를 이룩해 가면서 동생들의 허전한 마음을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말하기도 했지.

 

 

 

박근혜는 박정희가 죽고 청와대를 나온지 2년 뒤인 1981년 개신교신학교인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 대학원을 한 학기 다녔다고 해.

 

A: 박근혜의 종교는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네. 무교라고 하는데 가장 다양한 종교를 의지하는 것 같은데?

 

                              -최태민과 박근혜 대통령-

 

 

J: 그러게. 박근혜는 두 부모가 모두 총에 맞아

암살 당하는 등 정신적 트라우마도 상당했을 것이기에 살기 위해 종교에 의지했을 가능성이 커.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주는 의지할 만한 종교를 찾아 돌아다녔다고나 할까.

 

가장 종교적인 무교 대통령’... 박근혜

 

 

 

2012년 제 18대 대선 때는 불교계가 열심히 박근혜 지지 선언을 했어. 그 전에 이명박 정부 때 너무 시달려서 3040 정각회, 태고종 보국회, 전국신도회, 대한불교종단진흥회,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회 등이 공개적으로 박근혜를 지지하기 시작했지.

 

반면에 개신교는 조용했어. 대신 한기총은 박근혜에게 대선 기간 중 큰 도움을 주는데 신천지 관련설’, ‘1억짜리 굿 사건을 잠재워 주는 데 한기총의 도움이 컸어. 대선 기간에는 집단적으로 행동하진 않았지만 박근혜 선거 캠프 쪽에 많은 개신교 인이 포진되어 있긴 했지.

 

더군다나 박근혜 정부 역시 이명박 정부처럼 개신교인을 중용하기 시작하는데 박근헤 정보에서는 사랑의 교회 인맥이 상당수를 차지했어. 이명박 때는 소망교회 인맥이 컸었던 것과 다른 점이지.

 

 

 

대표적인 사랑의 교회 인맥은 박근혜 캠프에서 선거를 총괄한 김성주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이혜훈 부위원장 등이 있어. 허태열 비서실장, 주철기 외교안보수석도 사랑의 교회 출신이었지. 또 장관 급인 금융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된 신제윤도 2004년부터 사랑의 교회에 출석했고

 

 

 

 

 

A: 대형교회 파워가 정말 엄청나긴 하나보다.

 

J: 그러게. 교회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커지면서, 2000년전 예수가 실현하고자 했던 참된 공동체의 모습과의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야.

 

 

 

박근혜는 무교였음에도 청와대 수석비서관 12명 중에 개신교인이 8명에 달했고 불교, 천주교는 1명도 없었어. 초대 내각 인선도 18명 중 종교가 있는 9명 중에서 개신교인은 4명이었어.

 

특히 황교안 법무부 장관(지금은 총리)은 실제 개신교 전도사라고 해. 사법 연수원 시절 야간 신학대학을 나와 서울 목동 성일 침례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했었지. 그는 검찰의 개신교 신자 모임인 검찰 신우회를 주도하는 등 굉장히 개신교 편향된 사람이었어.

 

 

 

A: 요즘 황교안 총리가 자주 언론에 공개되는데, 신앙을 가진 사람인 줄은 모르겠는데

 

J: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어

 

 

 

아무튼 박근혜 정부는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이야기는 이쯤에서 하기로 하자.

 

 

 

지금까지 논의를 종합해 보면 국가권력과의 관계에서 종교는 결코 주변부가 아니라는 점이야. 특히 개신교가 지닌 종교적 위력은 어마어마해. 10만 명에 육박하는 목사들, 그리고 수백만 명의 신도들이 적어도 매주 한 차례 일정한 장소에 모여 설교와 교제를 갖는 조직이 한국에 또 어디 있을까?. 군대 그 이상으로 막강한 세력이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 거기다가 천주교, 불교까지 더해지면 종교 파워는 정말 엄청날 거야.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종교를 배제시켜선 안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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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박정희와 종교

 

J: 박정희는 독실한 불교 신자인 부인 육영수의 영향을 받아 친불교 정책도 있었어. 그런 그도 15~16세까지는 집에서 500m 떨어진 상모교회를 다녔고 주일학교 선생으로도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어. 1967년에는 6.25 전쟁 때 파괴된 상모교회의 건축을 위해 비용 380만원 중 100만원을 헌금했고, 육군 공병대 트럭을 보내 1개월 간 교회건축을 돕기도 해. 대체로 무교로 살아온 그이지만 1970년 후반 박정희는 여러 지인들로부터 전도를 받고 개신교 교회 출석을 고려할 만큼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었어.

 

 

 

A: 박정희를 전도하려던 사람이 있었어?

 

J: 대표적으로는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대표였던 김준곤 목사를 들 수 있지. 김준곤 목사의 반공 사상’, 그리고 박정희 정부로부터 특혜를 입어 얻게 된 ’…. 이 부분은 따로 설명이 필요할 만큼 할 말이 많으니 일단 생략할께..

 

 

 

박정희의 집권 초기에는 개신교에 대한 규제 강화’, ‘형평성 차원에서 불교 지원을 종교 정책의 기본 틀로 삼았어. 왜나하면 이승만 집권 당시 개신교에 편향된 정책이 많다 보니, 이를 폐지하고자 했어. 결국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분명 다시 군대로 복귀하기로 국민들과 약속했음에도 그 약속을 어겼던 터라 박정희는 초조했을 거야. 국민들 눈치도 봐야 하고….

 

더군다나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 이승만의 하야로 이어진 정국이다 보니 개신교에 대한 국민들의 강한 적대감을 의식한 것으로 보여.

 

 

 

A: 예를 들어 어떤 부분에서 개신교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거지?

 

J: 일단 중등교육 평준화 조치를 시행해서 학생 선발권을 없애 버려서 미션 스쿨의 개신교적 영향력이 약해지게 만든 점이야. 또한 주일 국가 행사도 이승만 집권 때는 없었다면 이를 다시 부활시켜서, 의사, 간호사 국가고시나 새마을운동 관련 행사, 예비군 소집도 일요일에 많이 했어. 그리고 주목례로 바뀌었던 국기에 대한 경례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국기에 대한 맹세문이라는 것도 추가되어 버렸어.

 

 

 

A: 그러면 다른 종교에 대해선 어땠어?

 

J: 일단 불교는 여러 혜택을 입었어. 군종제도, 형목제도를 개신교가 독점하고 있다가 불교도 참여가 가능하게 되었고, 석가탄신일도 1975년도에 국가공휴일도 지정되었어. 또한 불교재산과리법도 재정해 주고, 새마을 운동 일환으로 전국의 사찰에 도로와 전기를 공급해 주기도 했으며 세계 불교지도자 대회도 지원해 줬어.

 

 

 

 

박정희는 이승만처럼 미국 유학파도 아닌, 토종 대통령이다 보니 민족 주체정 확립을 위한 측면에서 불교에 관심을 가졌던 부분이 많았어.

 

 

 

A: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고 민좁 문화 보존의 필요성의 측면에서 불교를 지원했다면, 불교 이외의 종교들은?

 

J: 그 부분이 지적을 꽤 받았었어. 새마을운동 일환으로 진행된 미신타파 운동의 영향으로 전통 종교들은 푸대접을 받았지. 나중에 무속신앙은 전두환 정권에 들어오면서 전통문화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지만….. 아이러니 한 건 자신의 딸이 참으로 요상한 짬뽕 종교인 영세교 교주 최태민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는 점이지

 

 

 

J: 5.16 쿠데타 세력 속에는 불교 신자가 다수 있었어. 대표적으로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두 차례나 조계종 전국신도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불교계 핵심 인물 중 하나였어. 불교 신자는 장면 정부 시절 7%에 불과했는데 박정희 집권기에는 19.1%로 대폭 높아져.

 

 

 

당시 쿠데타에 참여한 군 지도부들 가운데 불교 신자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던 게 영향을 미쳤을 거야. 박정희 집권 당시 국회의원 중 개신교 비율은 10% 이하로 떨어지는데 이승만 집권 당시 20% 넘겼던 걸 보면 대통령의 종교가 사회지도층의 종교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어.

 

 

 

A: 박정희가 개신교를 별로 안 좋아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왜 어느 순간 개신교는 군부 독재 정권과 결탁하게 된 거지?

 

 

 

J: 박정희는 워낙 체제가 불안정한 상태이다 보니, 개신교를 이용하고 싶어 했어. 정권 기반이 취약한 그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지해서 명맥을 유지했고 미국 등 국제 사회의 지지도 얻고 싶었던 거지.

 

 

 

그러다 보니 박정희의 혁명 공약 6개항 가운데 1~2순위가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는다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였어.

 

 

 

자신의 체제 유지를 위해 반공’, ‘친미가 절실했는데 이 두 가지를 가장 잘할 만한 거대 집단은 역시 개신교였어.

 

 

 

6.25 전쟁 이후로 뿌리 까지 반공주의가 체화되어 있고, 미국 선교사와의 교류를 통해 개신교의 미국 인맥은 상당했거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반고 이데올로기는 소위 레드 콤플렉스’, ‘만능 요술봉 이데올로기등 다양하게 불릴 수 있는데,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선 아무리 뭘 잘못해도 간첩 조작 사건 일으키고, 빨갱이만 만들어 주면 다 용서되는 시대였어. 요즘도 이 부분은 해결되지 않은 분단 국가의 난제로 남아 있지.

 

 

 

박정희의 독재정권을 반대하는 세력들도 너희 공산당이지??’ 이런 위압을 주면 그 파괴력은 어마어마했어.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의 전신)의 간첩 조작 사건은 현대 사회에도 보수가 집권할 때마다 발생하고 있지. 세월호와 관련해서도 국정원 개입이 드러나고 있고, 워낙 뿌리 깊은 난제들 속에 암암리에 활약하는 국가 조직 단체이다 보니, 극우 정권들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는 따로 지면을 할애해서 나눌 이야기가 많아.

 

 

 

 

 

A: 개신교도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했다는 역사적 정황을 이젠 알겠어. 그럼 그들은 박정희의 5.16 쿠데타를 변호한 건가?

 

J: 개중에는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정의평화를 위해 싸운 목회자들도 분명 계셨을 거야. 그러나, 오늘은 소위 기독교 주류 세력들의 정권 타협의 측면만을 나눠 볼께.

 

 

 

J: 개신교는 5.16 쿠데타 직후 환영 성명을 발표하는데, 지지의 근거는 결국 반공이었어. 더군다나 개신교는 박정희의 10월 유신(1972)과 긴급조치 발령 (1974,1975) 등으로 민주주의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이뤄지자 구국기도회를 열어 사회 분위기를 반공 쪽으로 몰고 갔어.

 

 

 

A: 구국 기도회…. 지난번 11월 촛불 집회 때도 서울역 앞에 촛불 시위 반대 집회가 열렸는데 그 때 차에도 구국 기도회 비슷한 말이 써 있던데….

 

 

       -5.16 쿠데타 당시 모습-

 

 

J: 그렇지. 극우 기도회의 역사는 참으로 길고도 깊구나.

 

1975 7월에 열린 세계기독교반공대회에선 CCC 대표 김준곤 목사가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갈림길에서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유신 체제를 찬양하는 등 반공을 체제 유지에 적극 활용해.

 

 

 

그런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기독교가 진리의 핵심 전제로 받아들이다 보니, 베트남 파병 때도 파병군을 공산주의와 싸우는 자유의 십자군으로 묘사하며 파병 찬성, 대대적 환송 예배를 드리게 되지.

 

 

 

박정희 정권에겐 개신교 만큼 든든한 후원자도 없었을 거야.

 

베트남 파병 지지’,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대한 지지’ , ‘주한미군 철수 반대 시위등 개신교는 정말 열심히 그 정권이 유지되는 걸 도왔어.

 

 

 

 

 

 

 

A: 그 당시의 흉흉했던 시대 상황도 이런 불행한 사태에 일조를 했겠다..

 

J: 물론이야.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박명수는 이렇게 말했어.

 

 

 

“1960년대 국제 정세는 강력한 냉전체제 가운데 있었다. 중국에서는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있었고, 인도차이나반도는 공산화의 위협 가운데 있었다. 여기에 김일성은 간첩을 남파하여 남한 사회를 교란시키고 있었다. 이런 공산주의 위협에서 나라를 지키는 것은 정부의 군사적인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정신무장이 필요했고 또한 종교적인 힘이 필요했다. 대한민국 종교 가운데 반공 이념에 가장 투철한 종교는 기독교와 천주교였다…. 특히 기독교는 철저한 반공의 보루였다. 4.19 이후 한국 사회를 불안하게 보던 기독교는 박정희의 반공 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J: 박정희의 군부 독재 정권과 개신교의 유착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1. 임마누엘 중대와 2. 구국십자군 창설 일거야.

 

 

 

베트남 파병 시기에 백마부대 내에 개신교인들로만 구성된 임마누엘 중대’ , ‘다윗 중대’, ‘요호수아 중대등이 만들어졌던 사건

 

그리고 파병 이후에 구국십자군이 창설되어 목사들이 직접 총,검술 등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는데 이 부분은 몇 주 전 [그것이 알고 싶다] 를 봤으면 잘 알고 있을 거야.’

 

 

 

A: ? 구국십자군이라면…… 박근혜의 정신적 지주인 최태민!!!!

 

J: 그렇지. 구국십자군은 최태민이 총재로 있던 대한구국선교단의 산하 단체야. 최태민 같은 사이비 교주도 반공이라는 키워드로 군부 독재 정권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니,. 어느 덧 권력의 심장부까지 들어올 수 있었지.

 

 

 

반공 이데올로기가 악용되고, 개신교가 정권에 타협하기 시작하면서 사이비 종교, 국가 권력에 침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 버린 게 아닌가 싶어. ‘반공 이데올로기만능 요술봉 이데올로기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논리 무시, 확률 무시하고 0.000001% 라도 정권에 반하는 말과 행동과 분위기를 풍기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북한을 다녀오고, 북한에 헌신한 빨갱이가 되어 버린다는 점이지. 더군다나 이 만능요술봉 이데올로기사이비 종교’, ‘기만’, ‘부패’ , ‘부정을 다 암묵적으로 허용해 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 같아.

 

 

 

분단 국가이고, 북한이 실제로 간첩을 보낸 경우도 있기 때문에 경계하고 조심은 해야 하겠지만 그 과정 속에서 무고한 사람들의 인생을 짓밟는 건 부당하지.

 

6.25가 안겨준 트라우마가 워낙 커서, 그 낌새가 조금만 보여도 극도의 공포와 증오가 생기는 소위 레드 콤플렉스라는 정신병리 현상으로도 이런 이데올로기를 연구할 필요는 있을 거야.

 

 

 

A: 개신교에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았다는 점이 충격이야. 최근에 불거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등도 개신교의 역사를 배제하고선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것 같은데?

 

J: 그렇지. 사람들은 어떻게 한 나라의 대통령이 무당에게 휘둘리냐며, 분노하는 선에서 이야기를 종결하고 다른 문제들도 관심을 옮기지만 그 기저에는 더 근원적인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고 그 배후에는 개신교의 책임과 잘못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봐.

 

 

 

박정희는 또한 개신교를 미국과의 소통의 창구로서 활용했는데 실제로 한경직 목사, 김활란 등 한국 교회의 거물들이 5.16 쿠데타 직후에 미국을 방문해서 열심히 박정희 군사정권을 옹호해.

 

 

 

김장환 목사는 뉴욕 CBS 텔레비전 존 챈슬러(John Chancellor) 프로그램에 출현해 한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순수한 복음 전파를 하는 일은 전혀 탄압받지 않는다. 종교인 가운데 구속된 사람들은 정치적인 활동 때문에 구속된 것이다라고 말하며, 민주화 세력에 있던 목회자들을 정치세력으로 만들어 버려.

 

 

 

A: 박정희 정권 때 정권 자체의 본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가만 놔두지 않았었잖아. 그게 어떻게 종교의 자유며 순수한 복음 전파를 탄압하지 않은 게 되는 거지?

 

 

 

J: 그러게. 논리적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일들이 많았었지.

 

그 목사들에겐 반공을 지키고 친미를 지키는 게 복음의 핵심 과제 중 하나가 아니였을까 싶어. 이 중에 한 축이라도 흔들리려 하면 대대적으로 집단 행동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걸 보면다음 세대인 우리들은 그들의 트라우마를 공감해 주고, 그들의 문제 의식을 경청하며 반영하되 그들이 놓쳐 버렸던 수 많은 영역들에 대한 반성과 각성과 변화 또한 필요할 거야.

 

 

 

A: 극우화된 개신교는 박정희에게 열심히 러브콜을 보냈으니, 이런 저런 혜택도 받았으려나?

 

J: 물론이야. 이미 일제 강점기 때부터 권력에 붙어서 이득을 취해 본 경험이 있다 보니 그들은 그 재미를 박정희 독재 시대 때도 누렸어. 일단 당시 군대 내 신앙을 가진 신자가 늘어날수록 사고가 줄어든다는 조사가 나왔고 이를 토대로 전군 신자화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걸 활성화 시킨 사람이 박정희야. 초기에는 친불교 정책을 펴더니, 개신교가 반공 이데올로기를 잘 외쳐 주고, 자신의 체제 유지에 유용하다는 걸 알고 나서는 개신교에 아낌 없는 사랑을 부어주지. 물론, 자기 말을 잘 듣는 개신교도에게만

 

 

 

또한 이 시기에 개신교는 대형 전도 집회를 여는데 1973 5월에 빌리 그레이엄 전도 집회는 대단했어. 5 16일 대전을 시작으로 19일간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진행된 이 집회에는 연인원 320만 명이 참석했고, 신앙을 가질 것을 결심한 사람만 36000명이 나와 한국 사회를 놀라게 했지. 그 다음으로 한국 대학생선교회(CCC)엑스플로 1974 기독교 세계 복음화 대회가 있었는데 연인원 650만명이 참석했어. 이 분위기는 전두환 집권 초반까지 이어여 1980년에 열린 ‘1980 세계 복음화 대성회는 연인원 1600만명이라는 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집회 기록을 자랑해.

 

 

 

그런데 이러한 대형 집회는 군사 정권의 협조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했어. 당시에는 10월 유신과 긴급조치 발효로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엄격하게 제한되던 시기였거든. [금서] 목록도 어찌나 많았는지, ‘헉명이라는 단어만 들어가도 다 금서였어. 유시민 씨도 이 일화를 자신의 저서에서 웃프게(웃기고 슬프게) 풀어 놨지.

 

 

 

국가 행사 외에는 빌려 주지 않는 여의도 광장을 장소 이용료 없이 개신교에 제공해 주고, 부흥회 준비를 위해 군 공병대를 투입시켜 주고, 육군 군악대도 동원해서 찬송가를 연주해 주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집회 기간에는 통행금지도 해제시켜 줬으니 박정희 정권의 개신교에 대한 지원은 엄청났어.

 

 

    -1974년도 국가 조찬기도회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결국 박정희 정권은 개신교를 통해 반공’, ‘친미체제를 강화해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고, 개신교는 군부 독재 정권에 협력해 교세를 확장해 나가는 놀라운 공생 관계가 연출된 것이지.

 

개인적으로는 이런 한국 교회사의 영향으로 메가처치 현상도 대두된 게 아닐까 싶어.

 

 

 

A: 박정희가 했던 여러가지 일들 중에 새마을 운동도 유명하지?

 

J: . 새마을 운동의 단초를 제공해 준 것도 개신교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였어.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를 위해 국민들이 동참하도록 해야 할텐데, 여전히 많은 이들이 수수방관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라고 조용기 목사에게 물었고 조용기 목사는 새마음운동을 벌이라고 조언했대.

 

새마을 지도자들이 개신교 농촌운동인 가나안농군학교에서 일정한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조용기 목사의 조언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짐작 가능해.

 

조용기 목사의 소위 ‘4차원 영성그 당시 표현으로는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메시지와 박정희 대통령의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는 점도 중요해. ‘번영을 향해 나아가는 한국인에게 희망을 준 메시지라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급속도의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이룬 면이 있었고, 교회들도 번영 신학’, ‘성공 신학에 도취되기 시작한 게 아닌가 싶어.

 

 

 

A: 박정희의 공로 중 하나가 산업화를 성공한 거라고들 하잖아? 물론, 그 과정 속에서 많은 이들을 착취하고 부당하게 대우해서 그 공로마저도 논란이 많지만 말이야…. 이러한 산업화와 개신교도 관련이 있을까?

 

J: . 산업화의 최대 수혜자는 개신교였거든. 산업화가 되면서 급격히 도시로 유입된 이농민을 개신교는 부지런히 흡수하면서 개신교의 교세는 성장했고 도시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공동체 정신이 무너지고, 인간 소외 현상, 빈부 격차 심화 등의 사회 문제가 생기면서 그들을 위로하는 쉼터 역할을 교회가 자처하게 된 것이지. 또 교회에서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사귈 수 있었고….

 

 

 

이러한 산업화, 도시화로 인한 개신교의 급격한 교세 성장은 여의도 순복음 교회 같은 1세대 메가처치(엄청 큰 초대형 교회)를 탄생시켰어.

 

1970~1980년대에 다른 교회들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데 산업화가 진행된 1960년부터 1990년까지 30년간 개신교 신도는 62만명에서 자체 추산 1000만명에 육박해서 무려 16배로 성장했어. 교회 수도 5000개에서 35000개로 늘어나 7배나 증가했지.

 

 

 

A: 교회는 이런 부당한 역사 속에서 쭉 정권에 타협만 하고 온거야? 이건 너무 암울한데?

 

J: 결코 그렇진 않았어. 1970년대 들어 국가권력에 협조적이던 종교계에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기 시작했거든.

 

개신교는 1968년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를 다루기 위한 도시 산업선교회를 출범시키는 한편 박정희의 장기 집권을 반대하는 반독재민주화 운동을 시작해. 도시산업 선교회는 출범 이후 1970년 전태일의 분신에서부터 1979 YH 노동조합 사건에 이르기까지 1970년대의 굵직한 노동계 사건과 함께 하며 소외된 자들을 위한 인권 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어.

 

 

 

A: 박정희는 자신의 체제가 흔들리는 건 눈뜨고 못 봤을 텐데?

 

J: 그랬지. 그는 특정 불순 세력을 잡고자 도시산업 선교회를 공격했고 이 때 인명진 목사, 문동환 목사, 서경석 목사 등이 구속되.

 

 

 

개신교는 1969 7 3선 개헌반대 운동을 시작으로 1973 4월 남산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1973 12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 1976 3 3.1 민주 구국선언, 1979 11 YWCA 위장결혼 사건 등에 관여하며 1970년대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주도해 나가.

 

 

 

그러다가 1973 4 22일 유신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살포했다는 이유로 내란예비음모죄로 박형규 목사, 권호경 목사, 김동완 전도사 등이 실형을 선고 받기도 해.

 

 

 

A: 개신교 뿐만 아니라 천주교나 다른 종교계도 중심이 되어서 1973년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했었지? 아마 서명 10일만에 30만 명이 참여해서 군사정권이 긴장했다던데?

 

J: 그랬지. 분명 그들의 행위는 정의롭지 못했거든. 그러다 보니 1974 1월에 박정희는 긴급조치 1호 발동을 걸어. 1976 3 1일 명동성당 미사에서 긴급조치 철폐, 정권퇴진 을 요구하는 3.1 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되지 박정희는 종교 지도자 27명을 체포하는데 여기에 문익환 목사, 문동환 목사, 서남동 목사, 안병무 목사, 이해동 목사, 함세웅 신부, 문정현 신부 등이 포함되지.

 

 

 

A: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던 개신교가 갑자기 저항 운동을 벌이니 박정희는 골치가 아파겠네.

 

J: 물론 대형교회를 이룬 극우 기독교 목사들은 여전히 정권을 찬양하기 바빴어. 그 와중에 야인처럼 들판에서 정의를 부르짖는 목사들이 출현한 것이지.

 

박정희는 총 9차례 긴급 조치를 발동했는데 이 중 실질적인 조치는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논의나 반대를 금지한 긴급조치 1 (1974.1.8), 민청학력 등 반국가단체 구성을 금지한 긴급조치 4 (1974,4.3), 유신헌법 반대자들의 영장 없는 체포를 가능케 한 긴급조치 9 (1975.5.13) 등이었어.

 

(긴급조치 2호는 고등군법회의와 비상보통군법회의 설치를, 긴급조치 3호는 저소득층에 대한 세금 감면 등 민생 부분을, 긴급조치 5호와 긴급조치 6호는 긴급조치 1,2호의 해제를, 긴급조치 7호는 고려대학교 휴교령과 군대 투입을 규정하고 있다.)

 

 

 

긴급조치 1: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긴급조치 4: 민청학련 사건 -> 이 때 구속된 인사들은 대부분 기독교 관계자들이었어. 한 자료에 따르면 기독교 관계자들이 이 두 번의 긴급조치로 42명 구속되었는데 이 중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시인을 빼면 모두 개신교 관계자였다고 해.

 

 

 

민청학련 사건은 조사받은 사람만 총 1024명이고 이 중 203명이 구속되고 183명이 실형을 받은 최대 용공 조작 사건인데 이 때 많은 종교인이 구속되었어. 이 사건이 터지자 그 해 8월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교회 협의회(WCC) 중앙위원회는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한편 이를 위해 각 나라 교회들이 적절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촉구해.

 

 

 

A: ~ WCC라면 몇 년 전에 기독교계를 시끄럽게 했던 그 단체인 걸? 많은 기독교가 WCC를 아주 위험한 세력으로 규정하던데?

 

J: 그 당시 전단지 뿌리고, 카톡 뿌려대던 이들은 다 극우 기독교 세력이라고 보면 되. WCC의 기원이나 의의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부족한 거지. 그리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반공등에도 배치된다고 보니까….. 더군다나 극우 집단은 율법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서 동성애’ ,’낙태 같은 키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어. 그거 하나로 전체를 규정해 버리는 오류를 자주 범하지. WCC 단체가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거 같다면, 그 단체의 설립 의의를 다시 공부하고 바르고 건전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해야지, 무조건 악마 집단으로 매도하는 태도는 그들이 키워온 증오의 신학의 산물이 아닐까?

 

 

 

A: 신학적으로도 논의할 게 많이 나오네?.,.. 최근 몇 년간 기독교 계를 술렁이게 했던 모든 이슈들도 다 이런 역사적 맥락과 연결되는 구나?

 

J: 그렇지. 이슬람 포비아, 동성애를 경계하는 호모포비아 등의 사태와 법안 반대 서명운동 등 극우 단체들은 이런 쪽으로 열심을 많이 내. 신학적으로 건전한 길을 지향하고, 기독교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 건 매우 중요하지만 그걸 추진하는 세력들이 지닌 독특한 특성들은 그들의 운동에 동참하는 걸 꺼리게 만들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 당시 민청학련 사건은 로마 교황청에게 까지 소문이 전달되었고 교황청은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지학순 주교의 구속이 많은 나라에 경악을 일으켰으며”, “ 이 재판이 공정한 해결에 도달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히기도 했어.

 

 

 

박정희는 자신의 말을 안 듣는 개신교를 겨냥해서 1975년에는 KNCC 선교자금 유용 사건을 일으키기도 해. 박정희 정권이 갑자기 KNCC 사무실에 들어와서 재정업무 서류를 압수하고, 김관석 목사와 교회 직원들을 체포해. 세계 식량기구 독일 지부에서 준 8만 달러의 선교비를 착복했다는 이유였는데 세계식량기구는 KNCC 는 잘못이 없다고 말했음에도 김관석 목사와 박형규 목사 등 관련자들은 구속되었어.

 

 

 

그 당시 천주교도 1. 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 2.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 3. 함평 고구마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인 저항 운동에 참가하게 되. 그 전까지는 천주교도 개신교처럼 반공을 중심으로 한 군사정권에 협조적이었고…..

 

 

 

오늘은 개신교 중심으로 이야기를 살펴볼 테니, 이 부분은 생략할께.

 

 

 

즉 박정희 집권 후반기에는 정권에 협조적이던 종교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고 보면 되. 소위 진보 종교인의 탄생이지. 이들은 1970년대 인권운동과 반독재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며 강력한 체제 저항 세력이 되어갔어.

 

 

 

박정희 정권이 강화시킨 산업화가 기존 극우 기독교 세력의 덩치를 불리고, 교세를 확장시키는 데 기여한 반면 이로 인한 인간 소외 현상과 노동자, 농민의 인권 문제, 장기간의 군부 독재 정권 집권으로 인한 회의 등을 유발시킨 면도 있었어. 산업화의 양면성이지.

 

 

 

그러나 이런 국내적 현상 뿐만 아니라 1968년 스웨덴 웁살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4차 총회와 1962년부터 4년간 로마 바티칸에서 열린 제 2차 바티칸공의회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진보 기독교인이 많아진 측면이 있었어.

 

 

 

1960년대 당시에 베트남 전쟁, 3차 중동전쟁, 체코민주화운동, 반전운동, 흑인인권 운동 등이 대두되면서 종교계도 각성의 바람이 불었거든.

 

 

 

이러한 두 국제회의 이후 전 세계적으로 진보신학 운동이 일어나면서 남미의 해방신학,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 국내의 민중신학 등이 태동하게 되지.

 

 

 

참고로 개신교, 천주교와 달리 불교는 1980년대 들어서야 체제 저항적인 진보 종교인이 나타나. 1980년도에 전두환 세력에 의해 자행된 10.27 법난 사건을 계기로 불교도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되지.

 

 

 

A: 한국 근현대사, 그리고 세계사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위치가 상당히 중요한 것 같아.

 

J: . 이런 격변의 시기를 지나서 그 다음 전두환 대통령 시절로 가보자.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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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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