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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10월 유신 이후 민주화운동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일으켜 민중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의 민주화운동은 1987 6월 민주항쟁의 승리와 더불어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은 다수의 국민이 원하면 평화적, 합법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 우리의 민주주의는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 하지만 아직 성숙하지는 않았다.

 

민주적 제도가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에 맞는 생각을 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성숙한 민주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민주주의는 제도와 행태, 의식의 복합물이다.

물론 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1987년 가을 여야 정당들이 합의하고 국민이 승인한 제도의 틀 안에서 작동해왔다.

그 제도의 틀을 ‘1987년 체제라고 하자. 1987년 체제는 민주화 이전부터 존재했던 낡은 의식과 문화와 결합해 우리 민주주의의 성숙을 더디게 했다.

 

1987년 체제는 특정한 제도와 의식과 행태의 결합이다. 여기서 제도의 핵심은 대통령중심제와 5년 단임 규정, 결선투표가 없는 선거법,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다. 이 제도는 지역주의라는 낡은 의식, 동원정치라는 후진적 문화와 결합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한국적 특성을 만들어냈다.

 

 

 

-1 3김의 시대, 대통령 5년 단임규정, 국회의원 소선거구제-

 

1987년 체제는 현행 헌법과 선거제도를 만든 정치 지도자 ‘13의 동상이몽과 이해타산이 만든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 5년만 하고 나가는 데 합의했다. 대통령 단임 규정은 25년의 군사독재로 말미암은 정치적 인사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들은 그 취지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헌법 제 128 2항에 임기를 늘리거나 중임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을 할 경우 개정 조항은 현직 대통령에게 적용하지 않는다는 안전장치까지 넣어두었다.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모두 결선투표제는 도입하지 않고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채택한 것은 ‘13의 기득권을 지키고 정치적 사행심을 충족시키는 방안이었다.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하면 전국 평균 득표율이 높은 정당보다 특정 지역에서 몰표를 받는 정당이 유리하다. ‘13은 각자 대구, 경북, 부산, 경남, 호남, 충청지역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결선투표를 배제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면 1차 투표 순위가 어떻게 되든 양김 가운데 한 사람과 노태우 후보의 맞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노태우는 그것이 두려웠다. 김종필은 결선투표까지 갈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야권 단일 후보 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으며 표가 잘 나뉘기만 하면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6월 민주항쟁도 4.19 혁명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권력주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재야와 학생운동 세력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을 이루기 위해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조직하는 데는 유능했지만 그 승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 능력은 없었다.

거리시위에 참여해 민주주의 정치 혁명의 본대를 형성했던 시민들은 ‘13이 합의한 1987년 체제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알지 못했다. 결국 6월 민주항쟁의 후위였던 야당의 두 지도자가 사실상 모든 것을 결정할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1987년에 개정한 현행 헌법에 큰 문제가 있는 아니다.

권력구조 관련 조항을 제외하고 보면, 현행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분명하게 보장한 민주적 헌법이다.

 

 

 

-새로 개정된 헌법에 투영된 6월 민주항쟁의 성과-

 

우리 헌법은 국민의 저항권을 인정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명시했다. 10조부터 37조까지 신체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노동3권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비롯한 시민의 기본권을 명확하게 보장했다.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국회와 사법부의 권한을 대폭 확대해 권력의 분산과 상호견제를 강화했다.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부활시키고 법관의 독립성을 높였으며 헌법재판소를 설치했다.

 

최저임금제를 명시하고 성장, 안정, 적정한 소득분배, 독과점 폐해방지, 경제민주화를 위해 국가가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었다. 시각에 따라 비판할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헌법은 민주주의 선진국의 헌법에 견주어 크게 손색이 없는 훌륭한 헌법이 되었다. 나는 이것이 바로 헌법에 투영된 6월 민주항쟁의 성과라고 본다 .

 

 

 

-‘양김 분열, 노태우 당선-

 

1987 10 27일의 헌법 개정 국민투표에 78%의 유권자가 투표했고 93%가 찬성했다. 12 16, 1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무려 17년 만에 대통령을 자기 손으로 뽑게 된 국민들은 기쁨에 들떴다. 하지만 내게 이 선거는 끔찍한 악몽이었다.

나는 양김이 후보 단일화를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후보 선출방식을 둘러싼 줄다리기 끝에 김대중 씨가 추종자들을 통일민주당에서 탈당시켜 평화민주당을 창당했지만 어떻게든 대선에는 한 사람만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대중 총재가 좀 더 훌륭한 사람인 만큼 최악의 경우에는 그가 양보를 할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다. 후보 단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야인사와 대학생들이 양당 당사를 점거해 농성을 하면서까지 단일화를 요구했지만 양김은 끝내 거부했다. 평민당에서는 이른바 ‘4자 필승론을 퍼뜨렸다. 객관적으로 보면 로또 당첨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두 지도자는 각자 출마해 끝까지 선거를 치렀다. 야당이 분열되었고 재야가 분열되었으며 국민도 결국 분열되었다.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유효표의 36.6%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는 28%,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27.1%를 획득했다.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의 득표율은 8.1% 였다. 유신체제와 제5공화국을 같은 세력의 정권으로 보면, 55.1%의 유권자가 정권교체를 지지했는데도 전두환 정권이 연장된 것이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민주화를 이루어놓고서는 결국 12.12 군사반란과 광주학살, 5공화국 강권통치와 권력형 부정부패의 제 2인자를 대통령으로 뽑았으니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김대중의 후회, 이인제의 의도치 않은 선한 역할-

 

김대중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때 후보 단일화를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김영삼은 노태우, 김종필과 손잡고 민주자유당을 만들어 보수정권의 대통령이 되었다.

김대중은 4수 끝에 겨우 대통령이 되었고 유신본당김종필과 권력을 분점한 탓에 소신대로 국정을 운영하지 못했다. 후보 경선에서 패배하고서도 독자 출마를 해서 무려 500만 표를 분산시켜준 이인제 후보가 아니었다면 김대중 후보는 이회창 후보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인제 씨는 선한 의도가 있어야만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삶의 역설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경선탈락-탈당-신당창당-독자출마로 이어진 그의 반칙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것 덕분에 진보정권 10년을 경험할 수 있었기에 나는 텔레비전에서 그를 볼 때마다 감사의 마음을 되새기곤 한다.

 

 

 

 

1987년 대통령 선거는 결코 공정하고 깨끗한 선거가 아니었다. 선거를 약 보름 앞두고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이 터졌다. 정부는 범인 김현희를 선거일 직전에 김포공항으로 데리고 들어와 모든 신문과 방송의 뉴스를 도배함으로써 거센 북풍을 일으켰다. 정부여당은 공무원과 통반장을 동원해 유권자에게 돈을 뿌렸다. 공무원들이 시청, 군청 지하 강당에서 밤새 현금을 봉투에 담는 작업을 했다. 노태우 후보의 여의도 유세 때 마포대교는 인파로 가득 찼다.

차량 통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포대교를 도보로 건너 여의도에 가서 조직책에게 돈 봉투를 받은 다음 다시 걸어서 마포로 나왔다. 전두환 대통령이 재벌에게 천문학적 규모의 정치자금을 걷어 노태우 후보를 지원했다. 야당 후보들도 각자 구할 수 있는 만큼 돈을 구해서 썼다.

그러나 어쨌든 노태우 정부는 국민의 선택으로 수립되었다. 노 태우 대통령은 양김의 분열이, 그리고 북풍에 휘둘리고 부패선거를 용인한 우리 국민들의 의식과 행태가 만든 대통령이었다.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1988 4 26일 제 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집권당인 민정당은 125석을 얻었다. 그러나 광주, 전남,전북은 단 한 석도 없었다. 평민당은 70석을 얻어 제 1야당이 되었지만 수도권과 광주, 전남, 전북에서만 당선자를 냈다. 통일민주당은 주로 수도권과 부산, 경남에서 59석을 얻었다. 공화당은 35석을 얻었는데 대부분 충청지역 의석이었고, 영남,호남에서는 한 석도 없었다. 여야 4당 득표 기반은 1987 12월 대통령 선거 때와 거의 비슷하게 나타났다. 1980년대 내내 민주 대 독재로 양분되어 있던 민심이 대구, 경북, 부산, 경남, 광주, 전남, 전북, 대전, 충남, 충북 등의 지역으로 갈라진 것이다.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 : 민주자유당(이후 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의 등장-

 

그런데 1990년 초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 여당을 만들었다. 그러자 지역구도는 호남 대 비호남으로 단순화되었으며 25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민주자유당을 신한국당으로 바꾸었다. 이회창 총재가 신한국당을 한나라당으로 바꾸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을 새누리당으로 바꾸었다. 김종필 총재는 김영삼 대통령과 헤어져 자민련을 만들었으며 잠시 동안 김대중 대통령과 손잡고 국민의 정부 권력을 공유했다. 새누리당은 1987년 이후 한국 정치를 이끌어 온 보수정당을 모두 통합한 정당이다.

 

 

 

 

 

-진보 당의 변천사-

 

평민당은 재야세력을 흡수하고 3당 합당을 거부한 통일민주당 잔류세력과 통합하면서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었다. 열린 우리당이 창당된 2004년 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했다가 총선에서 참패를 당했다. 하지만 결국 열린우리당과 다시 합쳤고, 2014년에는 안철수 박사의 조직과 통합해 새정치 민주연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정당은 박정희 시대 신민당의 전통을 물려받은 진보적 자유주의 정당이다.

 

 

 

-재야 인사들의 국회 입성-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민주화운동의 전위였던 재야와 학생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농민운동, 각계각층 지식인운동에 변화를 요구했다. 그들은 정치, 민중운동, 시민운동으로 갈라져 점차 1987년 체제에 통합되었다. 정치 진입의 주요 통로는 김대중당이었다.

김대중 후보가 3위로 낙선해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던 1987 12, 100여 명의 재야인사들이 평민당에 입당해 다음 해 총선에서 대거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김대중 총재는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까지 여러 차례 이런 방식으로 재야 인사와 학생운동 출신 신인을 영입했다.

이해찬, 임채정, 한명숙, 장영달, 박영숙, 심재권, 우원식, 김민석, 신계륜, 임종석, 송영길, 우상호, 이인영, 호인회 등이 모두 이런 경로로 정치에 진입했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김영삼당도 그런 역할을 했다.

노무현, 김광일 등이 1998년 통일민주당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정치군인 집단인 하나회를 숙청하고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도입해 인기가 치솟았던 1994년에 민자당을 신한국당으로 개편하면서 민중당 출신 이재오, 김문수와 학생운동 출신 심재철, 손학규 등을 영입했다.

1997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는 김대중 총재의 정계복귀에 반발해 야권통합추진위원회에서 갈라져 나온 이부영, 김부겸, 제정구 등을 받아들였다. 2000년 제 16대 총선 때는 김영춘, 원희룡, 고진화 등 소위 386 세대 학생운동 리더 일부가 이회창 총재의 한나라당에 들어갔다.

 

 

 

- 3당의 등장-

 

노동자, 농민을 기반으로 한 진보정당은 아직도 현실정치에 안착하지 못했으며 다른 제3당 실험도 성공하지 못했다.

1988년 한겨레 민주당, 1992년 정주영 회장이 만든 국민당과 이기택 씨의 꼬마민주당’, 2008년 등장했던 문국현 대표의 창조한국당, 2010년 지방선거에 나선 국민참여당 등 새누리당과 민주당 양당체제를 균열시키려 한 모든 시도는 다 실패로 끝났다. 결선투표 없는 국회의원 소선거구제와 지역구도라는 진입장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안철수 의원의 제3당 시도 역시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막을 내렸다. 결국 우리 정치는 여전히 1987년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014 6.4 지방선거를 보수-자유주의 양당체제의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었다.

 

…………………..

 

또 한 갈래는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도시빈민운동 등 소위 기층운동또는 민중운동에 투신했다. 그들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여러 대기업 노동조합과 금속노조를 비롯한 산별연맹, 전교조와 언론노조 등의 공공부문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그 토대 위에서 민주노총을 세웠으며 전국 농민회총연합 탄생을 도왔다. 전국 각지의 다양한 빈민운동단체와 영세상인단체가 탄생하는 과정에도 기여했다. 그들은 각계각층의 대중이 생활에서 느끼는 요구를 기반으로 스스로를 조직하고 정치적으로 각성해야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것을 토대로 진보정당을 만들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민중후보 백기완선거운동을 시작으로 정치적 결집을 시도한 그들은 민중당 실험을 거쳐 민주노총과 전농을 조직적 기반으로 한 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

 

민주노동당은 2004 17대 총선에서 열 명의 당선자와 13%의 정당득표율을 기록해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내부의 노선투쟁과 조직운영의 비민주성 문제로 분열과 이합집산을 거듭한 끝에 정의당, 통합진보당, 노동당 등 여러 군소정당으로 갈라져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시민운동의 발전-

 

세 번째 갈래는 시민운동이었다. 첨여연대,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소비자 생활협동조합,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예술인총연합, 인도주의실천의사회, 건강실천약사회, 참교육학부모회, 인권운동사랑방, 정신대문제협의회, 여성민우회, 민주언론시민연합, 어린이보육공동체, 빈곤층자활운동단체, 마을공부방 등 민주화 이후 그 종류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자생적 시민운동단체가 탄생했다.

1988년 시민들이 주주가 되어 [한겨레] 신문을 창간한 것도 일종의 시민운동이었다. 시민운동의 첫 세대 주역들은 거의 대부분 민주화운동의 용광로에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이 흐름을 체현한 대표적 인물로는 박원순 서울시장과 환경운동연합 최열 의장을 거명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시대의 민주화 운동-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시대의 민주화운동은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저항운동에서 헌법정신을 실현하는 시민참여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시민참여운동은 종종 격렬한 반정부투쟁을 동반했다. 민주주의 제도는 다시 세웠지만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짓밟는 국가권력의 공안통치 행태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1989 3문익환 목사의 북한 방문이었다. 그는 통일논의의 물꼬를 트기 위해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평양에 가서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북한의 수뇌부 인사들을 만났다. 노태우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 공안통치로 기울기 시작했다.

 

 

 

-임수경의 북한 방문 사건, 전대협->한총련-

 

4.19 혁명 직후 대학생들이 남북학생회담을 추진했던 것처럼, 6월 민주항쟁 이후 대학생들도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NL 계열이 주도권을 쥔 학생운동은 반미자주화투쟁의 일환으로 통일운동을 폈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외국어대학교 학생 임수경의 북한 방문사건이었다.

그는 일본과 서베를린, 동베를린을 거쳐 1989 6 30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한국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임수경을 평양 시민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살벌한 공안정국이 조성되었다. 전대협은 1993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으로 재편되었고 정부는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노태우 정권의 탄압과 유서대필사건-

 

1990 1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전격적인 3당 합당으로 국회는 개헌의석을 확보한 민자당의 독무대로 변했다. 정부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는데 이것은 반정부세력에 대한 정치적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국회를 완전히 장악한 노태우 정부는 힘으로 대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을 제압하려 했다. 그런 상황에서 1991 4월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시위 도중 경찰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가는 시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두 달 동안 전국에서 2,361회나 반정부집회가 열렸고 열세 건의 분신과 의문사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안기부와 검찰이 분신한 청년활동가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해 주고 자살을 교사했다는 혐의를 조작해 아무 죄도 없는 강기훈 씨를 구속한 유서대필사건을 만들어 냈다.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죽음의 굿판을 거두라면서 재야와 학생운동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해 파문을 일으킨 것도 이때였다.

 

 

 

-민통련->전민련->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6월 민주항쟁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중심으로 결속해 있던 재야 진보세력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공동대표 이부영, 이창복)을 거쳐 1991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으로 확대 재편되었다. 노동자, 농민, 대학생 등 각계각층의 운동단체 14개와 13개 지역운동단체가 결합한 전국연합은 1997년에 사실상 해소되었다.

 

 

 

2008년의 공식 해산 이후에는 한국진보연대로 전환되었다. 경기동부, 울산, 인천 등 NL 계열 지역운동단체들은 전국연합이 사실상 해소된 1997년 이후 조직적으로 민주노동당에 결합해 당권을 장악했다. 경기동부연합과 울산연합은 현재 통합진보당으로 결속해 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정권-

 

누가 하는 어떤 것이든, 민주주의와 관련한 헌법의 규정을 실현하려는 활동은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대통령에 대해서든, 정치에 대해서든, 통일문제에 대해서든, 혁명에 대해서든, 그 무엇에 대해서든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헌법이 우리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정부가, 또는 압도적 다수의 국민이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위한 것이 아니다. 대다수 국민이 터무니없다고 판단하는 견해까지도 제한 없이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

비록 진리가 아닌 견해라 할지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그것을 제약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헌법의 정신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다. 노태우 정부는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에 대한 대학생과 시민들의 의사표현을 탄압했다.

 

 

 

-김영삼 정부와 민주화 운동-

 

김영삼 정부는 노동법을 날치기했다. 1996 12 26일 새벽, 신한국당 소속 의원 154명이 야당에 회의 개최 사실도 통보하지 않은 채 버스를 대절해 국회 본회의장에 몰래 들어가 파견근무제, 정리해고제, 파트타임근로제와 변형시간근로제 등 노동자의 지위에 엄청난 악영향을 주는 조항이 담긴 노동관계법을 의결했다.

민주노총이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를 요구하는 총파업을 시작했다. 공안당국이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체포조를 투입하는 등 초강경 대응에 나섰지만 하루 최대 35만 명 넘게 참여하는 등 파업은 더욱 확산되었다. 천주교 사제들의 시국미사를 시작으로 대학교수와 지식인, 각계각층 단체의 노동법 재개정 요구 서명발표가 줄을 이었다.

농민들은 쌀과 음식을 싣고 와 농성 노동자를 격려했으며 대학생과 시민들의 격려 방문과 파업을 지지하는 신문광고가 줄을 이었다. 해외교민들도 정부를 규탄하고 파업을 지지하는 집회를 벌였다. 내가 있던 독일 마인츠대학교 한국 유학생들도 돈을 모아 [한겨레]에 총파업 지지 생활광고를 냈다.

 

 

 

-노동운동의 중요성과 김영삼의 사과-

 

한 달 가까이 이어진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 투쟁 분위기는 마치 6월 민주항쟁 전야 같았다. 개정 노동법의 내용도 문제가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정부가 국회법의 의결 절차를 지키지 않았고 헌법이 보장한 노동 3권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임금과 근로조건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는 법률 개정을 막기 위해 노동자들은 파업을 할 권리가 있다.

파업을 하면 생산이 중단되고 기업이 타격을 받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업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지 않도록 성의를 다해 교섭해야 한다. 만약 국민경제에 악영향을 주고 기업 경영에 손실을 입힌다는 것을 이유로 파업행위를 처벌한다면 노동조합 그 자체가 의미가 없으며 노동3권을 보장한 헌법 조항은 효력을 잃게 된다.

노동자가 아닌 종교인, 지식인, 농민, 대학생, 시민들이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를 요구하는 총파업을 지지하고 연대한 것은 헌법정신과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이 날치기 행위에 대해 사과했고 국회는 임시국회를 열어 노동법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김대중 정권과 민주화 운동-

 

1997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룸으로써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성숙해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공안통치를 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야당과 언론의 입을 막거나 시민들의 기본권 행사를 제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정부와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부당하게 억압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견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김대중 대통령이 정리해고제를 도입하는 등 노동법을 개정함으로써 노동자의 지위를 현저히 약화시켰다. 1996년 정부여당이 날치기 처리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내용이었다. 정부는 정리해고제 반대 파업을 경찰력으로 해산하고 주동자를 구속했지만 대규모 파업이나 시민사회의 연대투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구제금융을 제공한 IMF 가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리해고제 도입을 강요했다. 둘째, 김대중 대통령은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노동계와 합의하려고 노력했으며 고용을 유지하는 기업을 지원하는 등 정리해고의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국민들이 벼랑 끝에 몰려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심정에 공감하면서도 정부를 심하게 비난하지는 않은 것이다.

 

 

 

-노무현 정권과 민주화 운동-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권력의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평검사들과 치열한 공개토론을 함으로써 대통령이 검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 국정원장의 독대보고를 받지 않았다.

자신의 대선자금 가운데 일부가 불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국민에게 사과했다. 한국-칠레 자유무역협정(FTA) 폐기를 주장하며 서울 도심에서 시위를 하던 농민이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사고가 났을 때도 공개적으로 사죄하고 경찰청장을 경질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손잡고 대통령 탄핵을 추진했을 때 열린우리당 의원들에게 육탄으로 저지하지 말라고 권했다. 국회에 탄핵권이 있고, 탄핵을 의결해도 헌법재판소 결정이 남아 있는 만큼 헌법 절차에 따라 다투는 것이 옳다고 했다. 이라크 파병 등 중요한 문제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통령과 다른 견해를 밝혀도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도 민주주의 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3년에 일어난 부안사태였다. 산업자원부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사용 후 핵연료가 포함된 저장 시설인지 아니면 중저준위 방사선폐기물만 저장하는 시설인지 정보를 정확하게 제공하지 않았다.

게다가 부안 군수는 부안 군민과 인접 시, 군 주민들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고 유치 신청을 했다.

대통령은 그런 사실을 제대로 보고받지 못한 채 정책 결정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정부가 국민을 속이고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환경운동단체가 중심이 된 부안 핵폐기물 저장시설 반대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졌고 시위대와 경찰의 심각한 충돌을 야기했다.

 

결국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재공모 절차를 거쳐 주민투표 찬성률이 가장 높았던 경주시에 방폐장을 설치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칠례 FTA 와 한- FTA 체결, 이라크 파병, 용산 미군기지 평택 이전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사태가 일어났다. 그러나 정부는 정부대로 절차를 지키려고 노력했고 범국본은 범국본대로 헌법상의 기본권을 충분히 행사하면서 의사표시를 했다. 민주주의 국가 어디에서나 흔히 일어나는 정상적인 과정이었던 것이다.

 

2004년 봄의 탄핵규탄 촛불집회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시민들이 현직 대통령의 편이 되어 자발적으로 전국적, 동시다발적, 연속적 집회시위를 벌인 적은 그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탄핵규탄 촛불집회의 투쟁대상은 야당이었다.

임기가 넉 달 밖에 남지 않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뽑은 임기 5년 대통령의 직무를 겨우 1년 만에 정지시킨 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분개했다.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얻고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를 기각함으로써 대통령 탄핵은 야당이 국회의 헌법적 권한을 오남용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 촛불시위는 국회가 국민의 주권을 부당하게 침해한 데 대한 항의였으므로 헌법을 지키는 민주화운동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과 민주화 운동-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 미국산 쇠고기로 인한 광우병 발병 확률은 매우 낮았다. 문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을 완화하는 결정을 내린 과정이었다. 아무 예고도 하지 않고 최소한의 공론화 과정도 없이, 국민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대통령과 정부가 그런 결정을 한 것이다.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가 다른 일도 모두 그런 식으로 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여중생들이 광화문 인근에서 작은 촛불집회를 시작했을 때 그것이 국민운동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촛불집회는 재야, 학생운동, 시민단체, 야당 등 전통적인 민주화운동 세력과 전혀 상관없이 젊은 어머니들과 직장인들에게 번져나가 거대한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집회시위로 확산되었다.

물대포와 최루액을 동원한 경찰의 진압과 명박산성이라고 불린 경찰차벽에도 굴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거짓 사과 말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지만, 촛불집회는 자발적으로 행동하면서 수평적으로 연대할 줄 아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예고했다.

 

 

 

-박근혜 정권과 민주화 운동-

 

2013년 시민들은 다시 촛불을 들었다. 이번에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 국정원과 기무사,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이 불법 개입한 것을 규탄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국미사를 열었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가기관을 정치적으로 사유화해서 같은 당의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국민을 상대로 온라인 심리전을 벌인 조직범죄였다.

지금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민참여의 시대다. 2008년 이후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지만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런대로 작동하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가 헌법을 무시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행태를 보이지만 권력의 제한과 분산, 상호견제를 통해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 역시

국가운영의 많은 분야에서 민주화의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정책과 행태를 보이는데, 그 기반은 불합리

한 제도나 경찰과 군대의 폭력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거대 보수언론

재벌, 공안세력이 반복 주입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시민들의 의식이 그 기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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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IMF 가 남긴 후유증 양극화- : 현 정권까지의 흐름]

 

경제위기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경제력 집중을 더 심화시켰다. 거시경제의 혼란과 불확실성은 약자를 몰락시키며 약자가 사라져 생긴 시장의 공백은 더 강한 자가 차지한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IMF 경제위기는 몇 가지 중대한 결과를 남겼다.

더욱 심화된 경제력 집중, 정리해고제 도입과 비정규직 확대, 그리고 이른바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의 현저한 약화였다. 그 결과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몰락하고 노동자의 지위는 약화되었으며 소득격차가 확대되었다.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양극화다.

양극화는 다소 과장된 표현일 수 있다. 더 온건하게는 격차의 확대라고 한다.

 

IMF 경제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벌그룹이 여럿 해체되었다. 그러나 삼성, LG, SK, 현대차, 롯데, 한화, 한진, 동양, 대림, 효성, 코오롱, 두산, 대상, 한솔, 금호, 동부, CJ 그룹 등은 더 거대한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정리해고제 도입으로 대량실업의 공포가 노동시장을 뒤덮자 노동조합은 더욱 약해졌고 실질임금은 하락했다. ‘공장 일을 내 일처럼 근로자를 가족처럼이라는 산업화시대의 구호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으며 평생고용이나 평생직장이라는 개념도 사라졌다.

기업이 정리해고를 사실상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고, 파견과 사내하청 등 간접고용이 널리 퍼진 결과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이 되었고 임금노동자 내부의 임금격차는 크게 확대되었다.

 

김대중 정부가 경제위기의 불길을 잡고 IMF 자금을 전액 상환한 데 이어 노무현 정부는 한국 경제를 다시 안정적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 10년의 진보정권 기간에 한국 사회는 양극화의 깊은 골짜기에 빠져들었다.

IMF 경제위기에서 탈출하고 새로운 발전전략을 찾기 위해 정부는 두 갈래로 노력했다. 첫째는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대세를 형성한 세계 경제환경을 받아들이면서 기회균등과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경제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해 복지정책 또는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민주정부 10년 동안 둘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진보정권은 국민경제를 대체로 잘 관리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각각 5년간 평균 4퍼센트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1인당 국민 소득(GNI) 1998 7335달러였던 것이 2007년에는 22000달러에 다가섰다.

물가상승률도 3% 수준에서 안정되었다. 지속적인 경상수지 흑자를 낸 덕분에 2007년 말에는 2500억 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가 쌓였다. 실업률은 3% 대로 내렸고 달러 환율은 900원 수준으로 외환위기 이전과 비슷해졌다.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의 한국 경제 신인도 역시 외환위기 이전인 A등급을 회복했다. 종합주가지수는 노무현 정부 때 처음으로 2000을 찍었다.

 

 

 

그러나 국민의 실제적 경제생활은 거시경제지표만큼 개선되지 않았다.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경제적 지위는 오히려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은 몇 가지 간단한 통계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소득불평등 또는 소득불균등을 측정하는 지표로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지니계수와 소득 5분위 배율이다. 지니계수는 모든 국민이 완전하게 균등한 소득을 얻으면 0이 되며 한 사람이 모든 소득을 독점하면 1이 된다.

 

지니계수가 0.3 미만이면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0.4를 넘어가면 사회적 불안이 야기될 가능성이 높다. 소득 5분위 배율은 최고 소득계층 20%의 평균소득을 최저 소득계층 20%의 평균소득으로 나눈 값이다. 소득격차가 커질수록 소득 5분위 배율은 높아진다.

 

우리의 소득분배 통계는 부족한 점이 많다. 정부가 소득분배 관련 데이터를 제대로 작성하지 않아 조사기관과 조사방법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예컨대 지니계수는 여러 종류가 있다. 전국 모든 가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있고 2인 이상 도시근로자 가구만을 대상으로 한 것도 있다. 시장소득 지니계수가 있는가 하면 납부한 세금을 제외하고 국가보조금을 더해 산출한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도 있다.

기업이 당기순이익 중 주주에게 배당하지 않고 쌓아두는 사내유보를 소득에 넣기도 하고 빼기도 한다. 이런 사정 때문에 언론인들은 종종 서로 다른 종류의 지니계수를 뒤섞어 사용한다.

 

통계청이 전국 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 소득분배지표를 발표한 것은 2006년이 처음이었다. 2006년도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전국가구 0.330, 2인 이상 비농가 0.312, 2인 이상 도시가구 0.305였다.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는 각각 0.306, 0.291, 0.285였다. 가처분소득 지니계수와 시장소득 지니계수의 격차가 0.02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은 조세와 복지제도를 통한 국가의 재분배 기능이 매우 약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2006년 시장소득 5분위 배율은 전국가구 6.65, 2인 이상 비농가 5.74, 2인 이상 도시가구 5.39였다. 가처분 소득 5분위 배율은 각각 5.38, 4.83, 4.62였다. 시장소득 5분위 배율과 가처분소득 5분위 배율의 격차 역시 그리 크지 않았다. 전국가구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2008년과 2009 0.314로 최고점을 찍었고 2012년에는 0.307로 조금 하락했다.

전국가구 시장소득 5분위 배율은 계속 상승해 2011 7.86으로 최고점을 찍었고 2012년에는 7.51로 조금 하락했다. 전국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모든 소득분배지표가 2006년 이후 지속적 악화 추세를 보인 것이다. 조사방법이 달라지면 지니계수도 달라진다.

통계청과 금융감독원, 한국은행이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산출한 2012년 전국가구 지니계수는 0.357로 예전 방법으로 조사한 0.307보다 훨씬 높았다.

 

양극화의 추세를 보려면 같은 대상을 같은 방법으로 조사한 시계열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래야 외환위기 이전과 이후 소득분배의 상태를 비교할 수 있다. 아쉽게도 그런 분배지표는 전국가구가 아니라 2인 이상 도시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분배지표밖에 없다.

 

……..

 

1990년에서 1996년까지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 …… 그러다가 1997년 이후 현저하게 악화되었으며 그 경향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시장소득 분배지표와 가처분소득 분배지표의 격차는 지니계수가 0.01에서 0.025 내외로, 소득 5분위 배율은 0.2에서 1.0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미약하긴 하지만 진보정권의 복지지출 확대는 가처분소득의 불평등한 분배를 완화하는 효과를 냈다.

 

2010년 이후 분배지표가 악화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연구가 필요하다. 시장소득 분배지표 악화가 멈춘 것은 비정규직 관련 법률의 유예기간이 끝나면서 부분적으로 비정규직이 정규직이나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되는 등 노동시장 양극화 추세가 완화된 것이 원인일 수 있다.

가처분소득의 분배지표 악화가 멈춘 것은 기초노령연금, 노인장기요양보험, 학교무상급식, 보육비 지원 등 새로운 복지제도를 도입하거나 기존 사업을 확대한 것 때문일 수 있다.

만약 이런 추측이 옳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현재까지 시장소득 분배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어왔다. 정부가 조세와 복지지출을 통해 가처분소득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시장소득 분배의 급격한 악화를 상쇄하기에는 부족했다.”

 

………..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국회와 대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2003년 한나라당이 주도해 국회에서 의결한 법인세율 인하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국민기초 생활보장제도와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기초노령연금 등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지만 확대되는 시장소득의 격차 확대를 막기에는 부족했다. 진보정권 10년 동안 임금근로자 가운데 비정규직의 비중이 급속히 증가했다. 집계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비정규직 비중은 2007년에 40퍼센트 넘는 수준까지 증가했다.

명예퇴직이나 정리해고로 직장을 그만둔 사람들이 자영업자로 변신했다. 전체 취업자 가운데 자영업자 비율이 급증해 35%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재벌 대기업들이 소비재산업과 유통업에 진출함으로써 골목상권은 붕괴 상황에 빠졌고 영세자영업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진보정권 10년 동안 연평균 4%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는데도 소득분배가 악화되고 중하위 소득계층의 경제생활이 어려워진 데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더욱 심화된 경제력 집중, 정리해고제 도입, 비정규직 확대, 낙수효과의 약화 등 여러 원인이 있다.

재벌 대기업들은 단가를 일방적으로 깎는 방식으로 협력업체를 약탈했다. 내부거래를 통해 계열사를 부당하게 지원함으로써 그 계열사와 경쟁 관계에 있는 기업의 경영을 악화시켰다.

중소 협력업체의 지불능력 악화는 노동자들의 임금과 근로조건 악화와 고용축소로 연결되었다. 게다가 대기업들은 소비재산업과 유통업까지 진출해 영세소기업과 영세상인들의 몰락을 부추겼다.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비정규직 관련 법률들은 기대와 달리 비정규직의 확산과 비정규직 제도의 악용을 막지 못했다.

중소기업 뿐만 아니라 재벌 대기업들까지 비정규직 제도를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데 악용했다.

사내하청, 파견 등의 명목으로 자기네 회사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에 대한 직접고용을 거부했으며 계약해지 방식으로 비정규직의 노조설립을 막았다.

 

낙수효과 약화도 무시할 수 없다. 예전에는 대기업이 돈을 벌면 전후방 연관효과 때문에 원료나 중간재, 부품을 공급하는 관련 산업과 협력업체도 함께 호황을 맞았다.

그러나 수출대기업들이 가격이 더 저렴한 외국업체의 중간재와 부품을 직접 조달해 쓰는 글로벌 소싱’(global sourcing)을 본격화 하자 낙수효과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국민들은 2007 12월 대선에서 기업인 출신 이명박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써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시켰다. 많은 국민이 7% 경제성장으로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와 세계 7위 경제 대국을 만들겠다는 소위 ‘747공약에 기대를 보냈다. 유권자들은 2012년에도 보수정권 연장을 선택했다.

여론조사 회사들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소득 수준이 낮은 유권자일수록 보수정당 후보를 더 높은 비율로 지지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서민의 경제생활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보수정권이 진보정권보다 경제성장을 더 잘 이루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경제성장률이 높아진다고 해서 저소득층의 소득이 향상되는 것도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1]부자감세다. 이명박 대통령은 법인세와 소득세율을 인하함으로써 재임중 누적효과가 100조원에 육박하는 감세를 했고 혜택은 대부분 대기업 주식 소유자와 고소득층의 몫이었다.

자영업자와 임금근로자 절반이 소득세 면세점보다 낮은 소득을 얻기 때문에 직접세 감세는 중간소득 이하 계층의 국민들에게는 단 한 푼의 혜택도 주지 않는다.

 

대기업의 투자와 부유층의 소비를 유도한다는 목적을 내세웠지만 감세의 투자촉진 효과는 별로 없었다.

둘째는 [2]부동산 거래 규제완화로 단기적 경기부양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동산 가격은 오히려 하락했다. 부동산 투기 시대의 거품이 덜 걷힌 상황에서는 규제완화로 부동산 경기를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셋째는 [3] 4대강 사업이다. 초대형 토목공사를 벌려 경기를 부양하려 했지만 환경을 파괴하고 국가의 돈을 건설회사 금고로 이전시켰을 뿐 고용증대와 경기진작 효과는 거의 없었다.

넷째는 [4] 수출을 증진하기 위해 환율을 인위적으로 올린 정책이다. 이 정책은 미국의 리먼 브러더스 파산 사태와 맞물려 환율 폭등을 일으킴으로써 달러로 표시한 1인당 국민 소득의 대폭 하락을 불렀다. 양극화의 원인이었던 경제력 집중과 오남용,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확산, 낙수효과 감소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는 부자감세 정책을 철회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가 처음 편성한 2014년도 정부 예산안에는 기초노령연금 수급액을 두 배로 올리는 것 이외에 복지지출을 크게 확대하는 정책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철도 민영화 정지작업이라는 비난을 무릎쓰고 수서발 KTX 자회사를 설립했고 비영리 의료법인이 영리 자회사를 세울 수 있게 하는 의료법 개정을 추진했다. 공공부문의 사유화 또는 시장화 정책을 강행한 것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입법과 정책은 전무했고 재벌 경제력 집중의 폐해를 시정하는 경제 민주화 공약도 완전히 실종되었다.

2014년 들어서는 규제를 암 덩어리’, ‘쳐부숴야 할 원수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규제철폐 작업을 시작했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2007년 이명박 후보와의 후보경선 때 내세웠던 줄푸세공약, 다시 말해서 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품고 법질서를 세우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서 4대강 사업 하나를 빼면 곧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이 된다. 소득분배의 개선과 양극화 해소에 관한 한 특별한 기대를 할 수 있는 근거는 찾을 수가 없다.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과의 관계]

 

어느 쪽이 먼저일까? 민주주의를 이루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번영한 것일까, 아니면 경제가 발전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어느 것도 먼저가 아니다.

이 둘은 선순환(Positive feed-back) 관계에 있다. 어느 특정한 시점에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는 어디에서나 함께 진전되었다. 무엇이 이런 선순환 관계를 만드는 것일까?

원하는 삶을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욕망이다. 그렇게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유가 있어야 한다. 자유를 누리려면 물질의 결핍이 주는 억압을 극복해야 하고, 부당한 제도와 낡은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개인의 자기중심적 선택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제를 철폐해야 효과적으로 경제적 번영을 이룰 수 있다고 한 애덤 스미스의 견해가 특수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만 타당하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이미 입증되었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스미스가 틀리지 않았다. 개인의 자유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사회는 경제적 번영을 길게 유지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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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의 부패는 이미 수 많은 대중들에게 익숙해 지고 있다. 

이번 PD 수첩은 검찰의 부패를 다루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법무부 부 차관에 임명되기도 했었던 김학의​, 그리고 OO 건설 회장인 윤중천.... 검찰의 가장 부끄럽고, 더러운 [별장 성접대 사건]이 공개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자신들이 임명한 김학의를 감싸기 바빴고, 검찰 측은 정권의 눈치를 보면서, 말도 안되는 근거로 김학의, 윤중천의 죄값을 무효화 시켜 버렸다.

 

 

그들에게 피해 당한 여성들의 생생한 증언과 동영상까지 확보가 되었으나, 얼굴 확인이 어렵다고 둘러대기 바쁘고 정밀 검사를 제대로 해보지도 않았다. 마치 장자연 사건이 허망하게 묻혀 버린 것처럼, 이 사건은 검찰이 자신들의 신뢰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재조명해야 할 사건이 되었다.

경찰 측에서 수개월에 걸쳐 엄정한 조사를 마쳐서 이를 검찰에 넘겼는데, 검찰 측에서 몇 개월간 수사 하더니 무혐의로 종결을 시켜 버렸다.

강원도 원주에 호화로운 별장을 여러 채 지어 놓고, 수 많은 여성들에게 약을 먹이고 성폭행을 하고, 이를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협박을 하면서 온갖 변태적인 행위와 성폭행을 반복했다는 의혹이 있는 그들이다.

가해자들은 버젓이 은퇴하고, 좋은 로펌 회사에서 떳떳하게 살고 있거나, 돈 잘 벌고 살고 있다니, 천인공노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서울 중앙지검의 수사 라인을 보면 부장 윤재필-3차장 박정식-지검장

조영곤.

뒤이어 재수사를 했을 때 수사 라인을 보면 부장 강해운-3차장 유상범-지검장 김수남...

이들의 이력은 정말 화려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BBK, 다스 관련 수사를 하고 다스의 소유자는 이명박이 아니라는 (지금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결과 발표를 한 자도 있고, 정윤회 문건이 근거가 없다는 황당한 주장을 발표한 자도 이 속에 들어 있으며, 국정원의 대선 관련 댓글 개입 관련 수사를 잘 해 오던 윤석렬 특별수사팀장에게 외압을 가하고, 수사를 방해했던 조영곤도 숨어 있다.

또한 김학의, 윤중천 관련 사건 발표를 보도하기 직전에 열심히 연예인 마약 관련 수사를 발표하고 관련된 뉴스 기사 수백건이 나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자도 이 속에 포함되어 있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3권 분립을 시켜 놓고, 검찰이라는 존재들은 나름의 역할을 잘 해 줘야 나라가 잘 돌아간다.

청와대가 되었든, 국회가 되었든, 법조계가 되었든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고, 반인륜적인 일들을 저지른다면 그들을 견제하고, 감시하고, 처벌해야 할 검찰이 정권의 하수인이 되고, 거짓에 동조하며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해 왔으니, 이런 사단이 난 것이다.

검찰은 과거사를 청산 하기 위해 자신들만의 팀을 꾸렸다고 한다.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작업이겠으나, 윤중천이 김학의를 포함하여 의사,미술가,대학 교수, 기업인 등 다양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함께 난잡한 성파티를 벌이고, 수 많은 여성들을 강간했다는 점을 무혐의 처리로 끝내 버린다면 이는 검찰의 역사 내내 씻을 수 없는 흑역사로 남을 것이다.

1부 내용도 이렇게 처참하니, 2부도 안 볼 수가 없다.

부끄러운 이 나라의 모습을 처절하게 반성해 보면서, 죄를 지은 자는 그에 합당한 벌을 받고, 피해자들이 다시 삶을 회복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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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박근혜와 종교

 

J: 박근혜는 공식적으로는 무교야. 2012년 대선 기간 중에 종교가 없음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고 말이야. 하지만, 요즘 터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최태민 등과의 관련성을 보면 일종의 무속 신앙 내지 영세교 비슷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어. 이 부분은 이따가 좀 더 자세히 나눠 보자.

 

 

 

 

A: 박근혜의 삶 속에는 여러 가지 종교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던데..

 

J: 맞아. 먼저 청소년기에는 천주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서울성심여자중, 서울성심여자고등학교를 나왔고 대학교도 천주교 재단인 서강대를 졸업했어. 그래서 율리아나라는 세례명도 받았어.

 

불교와의 인연은 어머니인 육영수와 외할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보면 될거야. 그래서 박근혜는 힘든 시기에 불교를 많이 의지했다고 해.

200년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에게서 대자행이라는 법명도 받고, 2006년 대구 동화사에서는 신라의 선덕여왕과 같은 선덕화라는 법명도 받았어.

 

그래서 천영식의 증언에 따르면 박근혜의 삶의 방식과 사고는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택을 방문하면 금강경 등 여러 권의 불교 서적을 볼 수 있었다고 해.

 

개신교와의 인연은 육영수 어머니를 잃고 방황하던 시절 만난 최태민 과의 만남을 통해 이어졌는데 이 때 다른 개신교 목사들과 함께 구국십자군 활동 등을 통해 관계를 형성해.

 

1977 5 29 AFKN 과의 인터뷰에서 박근혜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있어 신앙은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나의 노력으로 아버지의 외로운 마음을 어느 정도 위로해 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우리 가정에 화목한 분위기를 이룩해 가면서 동생들의 허전한 마음을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말하기도 했지.

 

 

 

박근혜는 박정희가 죽고 청와대를 나온지 2년 뒤인 1981년 개신교신학교인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 대학원을 한 학기 다녔다고 해.

 

A: 박근혜의 종교는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네. 무교라고 하는데 가장 다양한 종교를 의지하는 것 같은데?

 

                              -최태민과 박근혜 대통령-

 

 

J: 그러게. 박근혜는 두 부모가 모두 총에 맞아

암살 당하는 등 정신적 트라우마도 상당했을 것이기에 살기 위해 종교에 의지했을 가능성이 커.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주는 의지할 만한 종교를 찾아 돌아다녔다고나 할까.

 

가장 종교적인 무교 대통령’... 박근혜

 

 

 

2012년 제 18대 대선 때는 불교계가 열심히 박근혜 지지 선언을 했어. 그 전에 이명박 정부 때 너무 시달려서 3040 정각회, 태고종 보국회, 전국신도회, 대한불교종단진흥회,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회 등이 공개적으로 박근혜를 지지하기 시작했지.

 

반면에 개신교는 조용했어. 대신 한기총은 박근혜에게 대선 기간 중 큰 도움을 주는데 신천지 관련설’, ‘1억짜리 굿 사건을 잠재워 주는 데 한기총의 도움이 컸어. 대선 기간에는 집단적으로 행동하진 않았지만 박근혜 선거 캠프 쪽에 많은 개신교 인이 포진되어 있긴 했지.

 

더군다나 박근혜 정부 역시 이명박 정부처럼 개신교인을 중용하기 시작하는데 박근헤 정보에서는 사랑의 교회 인맥이 상당수를 차지했어. 이명박 때는 소망교회 인맥이 컸었던 것과 다른 점이지.

 

 

 

대표적인 사랑의 교회 인맥은 박근혜 캠프에서 선거를 총괄한 김성주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이혜훈 부위원장 등이 있어. 허태열 비서실장, 주철기 외교안보수석도 사랑의 교회 출신이었지. 또 장관 급인 금융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된 신제윤도 2004년부터 사랑의 교회에 출석했고

 

 

 

 

 

A: 대형교회 파워가 정말 엄청나긴 하나보다.

 

J: 그러게. 교회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커지면서, 2000년전 예수가 실현하고자 했던 참된 공동체의 모습과의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야.

 

 

 

박근혜는 무교였음에도 청와대 수석비서관 12명 중에 개신교인이 8명에 달했고 불교, 천주교는 1명도 없었어. 초대 내각 인선도 18명 중 종교가 있는 9명 중에서 개신교인은 4명이었어.

 

특히 황교안 법무부 장관(지금은 총리)은 실제 개신교 전도사라고 해. 사법 연수원 시절 야간 신학대학을 나와 서울 목동 성일 침례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했었지. 그는 검찰의 개신교 신자 모임인 검찰 신우회를 주도하는 등 굉장히 개신교 편향된 사람이었어.

 

 

 

A: 요즘 황교안 총리가 자주 언론에 공개되는데, 신앙을 가진 사람인 줄은 모르겠는데

 

J: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어

 

 

 

아무튼 박근혜 정부는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이야기는 이쯤에서 하기로 하자.

 

 

 

지금까지 논의를 종합해 보면 국가권력과의 관계에서 종교는 결코 주변부가 아니라는 점이야. 특히 개신교가 지닌 종교적 위력은 어마어마해. 10만 명에 육박하는 목사들, 그리고 수백만 명의 신도들이 적어도 매주 한 차례 일정한 장소에 모여 설교와 교제를 갖는 조직이 한국에 또 어디 있을까?. 군대 그 이상으로 막강한 세력이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 거기다가 천주교, 불교까지 더해지면 종교 파워는 정말 엄청날 거야.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종교를 배제시켜선 안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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