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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그리고 민주화의 역사 그리고 현재]

 

산업화를 이룬 동력이 물질의 결핍이 주는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었다면, 민주주의를 세운 힘은 부당한 외적 강제와 제도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와 존엄을 찾으려는 욕망이었다. 민주주의의 요체는 무엇인가.

 

첫째, 주권재민이다. 권력의 정당성 또는 정통성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다수 국민의 동의를 받지 않고 성립된 권력은 인정할 수 없다.

 

둘째, 국가권력의 제한과 분산, 상호견제다.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의 오남용을 막기 위해 입법권과 사법권, 행정권을 분리하고 선출 공직자의 임기를 제한하며 권력기관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게 한다.

 

셋째는 법치주의다. 시민의 자유와 권리는 오로지 법률로만 제한할 수 있으며, 정부는 헌법이 부여한 권한의 범위 내에서 법률에 따라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 피치자뿐만 아니라 통치자까지, 법률은 만인을 똑같이 구속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국가권력과 피 흘리며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

 

 

 

민주화는 전제정치 또는 독재체제를 민주주의 체계로 바꾸는 것이다.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개별적, 집단적 노력과 행동이 민주화 운동이다.

민주화의 역사를 살피려면 먼저 민주주의와 독재를 나누는 기준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앞에서 산업화의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마르크스와 로스토의 경제이론을 활용했다. 민주화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는 20세기의 대표적 자유주의 철학자 칼 포퍼(Karl R. Popper)(1902~1994)의 정치이론을 활용할 수 있다.

포퍼는 어떤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인지 전제정치 체제인지 가리는 기준을 하나로 정리했다. 다수 국민이 마음을 먹었을 때 정권을 평화적으로 교체할 수 있으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다. 그게 불가능한 나라는 독재국가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하는 법률과 제도가 아예 없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 제도가 있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면 그 역시 민주주의가 아니다.

 

1959년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제도는 있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기 나름의 견해를 자유롭게 형성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하지도 않았다.

정부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비롯해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한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짓밟았다.

갖가지 방법으로 부정투표를 저질렀으며, 그것도 모자라 개표 결과까지 조작했다. 다수 국민이 원해도 평화적, 합법적으로 정치권력을 교체할 수 없었다. 이승만 시대의 모든 선거가 그랬다.

 

 

민주주의는 단순한 제도의 총합이 아니다. 제도와 행태와 의식의 복합물이다. 합리적인 제도가 있어도 형태가 비뚤어지면 그 제도는 힘을 잃는다.

권력집단과 유권자의 행태는 욕망과 감정, 의식과 관습을 비롯한 여러 요소에 좌우된다. 좋은 헌법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집권세력 또는 통치자가 헌법과 민주주의 기본원리를 존중해야 하며 시민들이 자기의 권리를 제대로 알고 행사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통치자가 헌법과 법률 위에 군림하고, 시민들이 그것을 별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거나 굴종하면 헌법은 한낱 종이에 쓴 글씨에 지나지 않는다.

 

칼 포퍼는 특정한 계획이나 목표에 입각해 사회 전체를 개조하는 사회혁명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인간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현실조차 있는 그대로 인식할 능력이 없으며, 미래를 옳게 설계할 능력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정한 목표 또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 전체를 재조직하려는 혁명가들의 동기는 고상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청사진이 옳고 훌륭하다는 증거는 없다. 그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다음 그 청사진에 따라 재조직한 사회가 혁명 이전의 사회보다 확실히 훌륭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정의, 평등, 인간해방 등 혁명가들이 내거는 목표가 무엇이든, 어떤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기 위해 폭력으로 사회를 재조직하는 혁명은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로 귀결된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불행하게도 20세기 세계사는 포퍼가 옳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포퍼는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려고 혁명을 하기보다는 현실의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한 사회적 개혁과 개량에 집중하자고 호소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든 종류의 혁명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정치혁명만은 열렬히 옹호했다.

민주주의는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해 최대의 선을 실현하도록 하는 제도가 아니다.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악을 마음껏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민주주의는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악을 최소화함으로써 사회를 지속적으로 개량해나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민중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정당한 행위가 된다. , 민중의 저항권 행사는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세우는 데서 멈추어야 한다.

이것이 포퍼의 주장이다.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유일한 방법은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스스로 조직하고 궐기해 경찰과 군대, 사법기관과 정보기관을 동원한 권력집단의 폭력을 힘으로 제압해야 정치혁명을 할 수 있다.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그 나라의 환경과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 대한민국은 국토가 좁고 인구가 도시에 밀집해 있다. 역사적, 문화적, 인종적 균질성이 매우 높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고 겨울이 너무 추워서 난방시설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정글도 넓은 산악지역도 없다.

북쪽은 철책으로 단절되었고 나머지는 바다로 가로막힌 사실상의 섬나라다. 중국과 베트남, 중남미와 달리 특정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항전을 벌일 수 없다. 중동 국가들처럼 인접국가에 무장투쟁 기지를 만들 수도 없다.

게다가 국가는 엄청난 규모의 상비군과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적합한 저항권 행사 방식이었다.

 

 

 

민주화 운동가들이나 1980년대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테러를 투쟁방법으로 쓰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활동가들은 자금을 마련하고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 집을 털려 했을 뿐 사람을 해치려고 하지는 않았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나 동의대학교 사태에서 무고한 시민과 경찰관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일부러 사람을 죽이려고 일으킨 사건은 아니었다. 독일과 일본 적군파가 벌인 시설파괴, 요인 암살, 항공기 납치와 같은 일은 우리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국적, 동시다발적, 연속적 도시봉기를 일으키려면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 테러는 이에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였다.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대의를 알리고 대중의 관심과 각성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테러와 암살이 아니라 분신과 투신을 선택한 투쟁방식은 세계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렇게 목숨을 버린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전태일 이후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대부분 분신과 투신이었고, 그들이 원한 것은 민주화,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미국의 독재정권 지원 중단, 노동조합활동의 자유보장,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 같은 것이었다.

직업은 주로 대학생과 노동자였다.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1970), 서울대 학생 김상진(1975)과 김태훈(1981), 운수노동자 박종만(1984), 경원대 학생 송광영(1985), 구로공단 신흥 정밀 노동자 박영진, 서울대 학생 이재호, 김세진, 이동수, 박혜정(이상 1986), 서울교대 학생 박선영, 하남 신흥정밀 노동자 표정두(이상 1987), 성남 고려피혁 노동자 최윤범, 운수노동자 이문철(이상 1988), ㈜ 통일 노동자 이영일, 노동운동가 최동(이상 1990), 전남대 학생 박승희, 안동대 학생 김영균, 경원대 학생 천세용,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성남피혁 노동자 윤용하, 광주시민 이정순과 차태권, 보성고학생 김철수, 인천 운수노동자 석광수(이상 1991) 등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다. 분신과 투신은 1986년과 1991년이 가장 많았다. 1986년은 전두환 정권의 인권탄압이 절정을 이룬 가운데 민주화운동이 폭발적으로 확산된 시기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전두환과 미국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가 크게 고조된 시기이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 중반기였던 1991년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크게 허물어진 시기였다. 특히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시위 도중 경찰에 타살당한 사건으로 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이 격화되면서 분신정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청년이 죽음으로 정부를 규탄했다.

 

 

 

연속적,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한 최초의 사례는 3.1운동이다. 3.1 운동의 목적은 민주화가 아니라  민족해방이었지만 그 방식은 민주화운동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두 번째 사례는 4.19 혁명이다. 4.19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한국적 전형이었다. 우리 국민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독재자를 축출하고 정권을 교체하는 최초의 역사적 위업을 이루었다.

 

세 번째 사례는 1987 6월 민주항쟁이다. 승리한 6월 민주항쟁과 비극으로 끝난 광주민주항쟁의 차이는 딱 하나였다.

광주민중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 만약 그때 서울, 부산, 대구, 울산, 대전 등 다른 대도시 주민들이 용기를 내서 함께 궐기했다면 신군부가 광주 한 곳에 그토록 많은 병력을 집중 투입해 시민들을 살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를 상세하게 알고 싶은 독자에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가 엮은 [한국민주화운동사]를 권한다. 본문만 합쳐서 2300쪽이나 되는 세 권짜리 책이다. 정부 수립 이후 노태우 정부까지, 넓은 의미에서 민주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건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두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마치 같은 사건들이 무한 반복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이 수십 년 동안 같은 패턴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 패턴을 최대한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알고리즘이 된다.

 

 

 

-민주화 운동의 반복되는 패턴-

 

집권세력 또는 정부가 독재, 인권탄압,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야당과 재야 인사들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다. 여기서 재야인사란 정치인이 아닌 지식인, 종교인, 문화인 등 영향력 있는 시민사회 리더를 가리킨다. 대중이 크게 호응하지 않으면 집권세력은 신경 쓰지 않고 같은 행태를 반복한다.

그러면 야당과 재야의 투쟁대열에 청년학생들이 가세한다. 교내에서 규탄선언문을 발표하고 항의집회를 하다가 거리시위를 벌인다.

시민들이 여기에 합세하지 않으면 정부는 적당히 진상을 은폐하고 몇몇 책임자를 처벌하는 시늉을 한다. 주동자를 구속하고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한다. 그렇게 해서 투쟁이 끝나고 나면 집권세력은 또다시 독재와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같은 패턴의 투쟁이 또 벌어진다.

이것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호응을 불러일으킬 조짐이 보이면 공안당국이 나선다. 소요사태의 배후에 불순세력과 북한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간첩단 사건, 용공이적단체나 반국가단체 조직사건을 발표한다. 비판적인 언론보도를 통제하고 친정부 언론을 동원해 엄청난 국가적 위기가 온 것처럼 시민들을 세뇌한다. 왠만하면 이런 정도로 상황이 끝난다.

그래도 끝나지 않으면 최루탄과 몽둥이로 무장한 경찰력을 투입해 시위자를 마구 잡이로 연행하고 구속한다. 지치고 겁이 난 시민들은 분노를 삭이며 일상으로 돌아간다. 집권세력은 다시 독재와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가끔은 아주 많은 국민이 의분을 느낀 나머지 야당과 재야, 학생들의 투쟁에 호응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때 민주화 운동의 전국조직이 탄생한다. 야당과 재야, 학생단체, 노동단체와 농민단체 등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모인 전국조직에는 국민협의회국민운동본부라는 이름이 붙는다.

줄이면 국본이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름이다. 국본은 투쟁목표를 제시하고 구호를 정하며 지방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시위 장소와 시간, 행동강령을 선포한다. 이 모든 행동의 전술적 목표는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일으키는 것이며 전략적 목표는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것이다.

그런 사태가 실제 일어날지 모른다는 전망이 나오면 집권세력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남김 없이 동원한다.

국민운동본부의 주요 인사를 체포하고 활동가들을 예비 검속한다. 경찰 병력을 투입해 시위 예정 장소를 봉쇄하고 물샐 틈 없는 검문검색을 벌인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담화를 발표해 소요사태 주동자를 엄벌하겠다고 겁을 준다.

공안기관과 친정부 언론을 동원해 배후에 불순용공세력과 북한이 있다고 비난한다. 이렇게 해서 간신히 진압에 성공하면 집권세력도 잠시 조심한다. 민심을 수습한다며 내각을 개편하고 유화책을 발표한다.

 

그런데도 투쟁열기가 가라앉지 않으면 사태가 정말 심각해진다. 여러 도시에서 동시에 대규모 거리시위가 벌어질 경우 정부는 속수무책이 된다. 예컨대 전국 10대 도시에서 100만 명 정도의 시민들이 동시에 시위를 벌일 경우 전국 경찰을 다 투입해도 제압하지 못한다.

시위대는 큰 길을 점거하고 구호를 외치다가 불리하면 뒷골목을 통해 다른 장소로 이동해 다시 도로를 점거한다. 진압 경찰은 방패와 곤봉, 방독면을 비롯한 보호장비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서 기동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MGM 사의 만화 <톰과 제리>를 연상시키는 싸움이다.

시위대 규모가 커지면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진압 경찰이 거꾸로 포위되어 장비를 빼앗기고 얻어맞는 상황이 생긴다. 결국 경찰은 주요 시설 근처에 병력을 모아 진을 치고 장기전에 들어간다.

서울 같으면 청와대와 세종로 정부청사로 가는 대로와 골목에 병력을 집중배치하고 시위대와 대치하는 것이다. 도심을 장악한 시위대는 여유 있게 정부를 규탄하는 거리집회를 연다. 그러면 점점 더 많은 시민이 모여든다.

 

이럴 경우 정부가 쓸 수 있는 무기는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된다. 계엄령을 선포해 군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위험하다. 시위 진압 능력에 관한 한 군이 경찰보다 나을 게 없다.

유일한 차이는 총을 쏠 수 있다는 것이다. 1964 6.3 사태나 1979년 부마민중항쟁 때 정부는 군 병력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되면 위기를 넘길 수 있다. 하지만 4.19 혁명 때처럼 계엄군 수뇌부가 진압을 거부할 수도 있다. 군이 발포를 하고서도 투쟁을 진압하지 못하면 그것도 큰일이다.

4.19 혁명 때는 경찰관들에게 발포를 지시한 인물 몇몇이 사형을 당했다. 진압에 일시 성공하는 경우에도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 광주민중항쟁 때 특전사 병력에게 발포 명령을 내린 자들은 그 책임을 피하려고 모든 증거를 인멸하고 끝끝내 사실을 부정해야만 했다.

 

1987 6월 전국 수십 개 도시에서 100만 명 이상이 동시에 거리시위를 벌였을 때 전두환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지 못했다. 그 대신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를 앞세워 6.29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약속했다. 군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너무나 위험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는 다양한 불법행위를 수반한다. 도로점거, 투석, 화염병 투척, 야간시위 등 시위대의 모든 행위가 실정법 위반이다. 그러나 다수 국민이 그것을 최고의 법인 헌법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불가피한 행동으로 받아들일 경우, 그 모든 것은 불법이지만 정당한 행위가 된다.

주권재민이라는 민주주의 대원칙을 실현하는 민중의 저항권 행사이기 때문이다. 한국형 민주화의 경로는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민주주의 정치혁명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세 단계를 거쳤다. 4.19에서 10월 유신까지는 민주주의 맹아기라고 할 수 있다. 4.19 혁명은 곧바로 5.16 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이라는 북풍한설을 만났지만 죽지 않고 조금씩 생명력을 키웠다.

10월 유신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 유신체제 9년과 제 5공화국 7년은 성장기였다.

그 한가운데 광주민중항쟁이 있었다. 이 시기 국민들은 민주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열망과 능력을 축적했다. 시민의 힘으로 국가폭력을 이겨내지 않고는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성장기의 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을 지향할 수 밖에 없었다.

6월 민주항쟁 이후 현재까지는 민주주의 성숙기다. 우리는 두 차례 평화적 정권교체를 경험했다. 헌법 정신에 맞게 국가를 운영하도록 권력집단의 행태를 개선했다.

 

……………..

 

그런데 최근 우리의 민주주의가 과연 성숙해가고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고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개탄도 나온다. 그러나 2014년의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민주주의가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인 때도 있었다. 검열과 통제가 사라져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만개했고 대통령과 정부가 권력 행사를 절제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어제 내린 눈처럼 새롭지도 귀하지도 않은 것처럼 여겼다. 하지만 2008년 이후 이것은 착시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대통령과 정부, 집권세력이 헌법을 존중하려고 노력할 때만 제대로 작동한다.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

 

헌법을 무시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정부는 범죄조직과 비슷한 행동을 한다. 예컨대 국가정보원과 국군 기무사령부, 국가보훈처 등 여러 국가기관이 온라인 여론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2012년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것 자체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대통령과 집권당의 대응방식이었다. 대통령과 정부는 헌법정신을 파괴하고 법률을 위반한 국가기관들의 조직적 불법행위를 관련자들의 개인적 일탈로 규정했다.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은 원세훈 국정원장 등 대선 불법개입 주모자들에게 선거법 위반혐의를 적용한 검찰총장(채동욱)을 내쫓으려고 혼외아들로 지목한 어린이의 개인 정보를 불법적으로 수집해 언론에 유포했다. 2014년에는 서울시 공무원이었던 탈북자 유우성 씨를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중국 정보의 공문서를 위조해 법원에 제출한 사실이 드러났다. (영화 [자백] 참고) 국정원장과 검찰총장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고 몇몇 실무자들의 사표제출과 구속으로 끝내려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범죄조직의 행태를 보인 것이다.

 

모든 권력은 집중과 확대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진보든 보수든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감시와 견제가 느슨해지면 누구나 권력을 오남용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이럴 때 시민들이 참여하고 비판하고 저항하지 않으면 민주주의 제도는 껍데기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오늘날 다수의 국민이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 집권탕의 행태를 용인한다. 대통령이 국정수행을 잘한다고 생각하며 상당 기간 동안 제법 큰 격차로 야당이 아닌 집권당을 지지했다. 민주주의 성숙도는 주권자인 시민의 의식과 행태가 좌우한다. 집권세력의 반민주적 행태는 대통령과 여당 정치인들의 교만과 성숙하지 않은 시민의식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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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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