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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신뢰를 잃고,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고 있는 상태다. 다시 회생할 수 있는 길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1. 율법주의 신앙관 2. 아르뱅주의 3. 정치와의 잘못된 결탁으로 한국 교회의 문제를 진단했었는데, '3번' 항목과 '경제'와 관련된 부분을 접목시켜서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정의의 문제'를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 교회가 한국 정치와 맞물리면서 유독 반공주의를 좋아하고, 보수적인 정치관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는 건 많이들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에스더 기도 운동 본부처럼 국정원 등 뒷 세력의 선동이 섞여 있는 경우도 있으며 한국 근현대사/교회사 공부를 하다 보면 그들이 왜 서로를 형제처럼 아끼는지 이유를 알 수 있다. 다른 지면을 통해서 더 자세히 나누도록 하겠다.) 

교회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 사이에서 그리고 목회자들의 설교를 통해서 늘 자주 언급되는 이슈들은 동성애 이슈, 무슬림 이슈, 종교 혼합주의, 인본주의 등에 대한 부분이다. 물론 기독교가 지닌 배타성을 감안했을 때, 옳고/그름이라는 기준이 존재하며 이에 대해 성격적인 대답을 하는 것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는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영역들에서 경각심을 가지는 건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더욱 많이 강조되어 있는 '가난한 자의 구제', '압제받는 자들의 자유함', '억울한 자들의 한을 해소해 주는 일', '부당한 착취'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정말 신경을 안 쓴다. 한 두번의 교회 구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정도, 한 두 번의 후원에 참여하는 정도로 자신의 몫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직접적으로 물어 보면, 자신들은 그런 문제에 정말 관심이 많고 늘 기도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 하지만 실상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가난', '압제', '억울함' '부당한 대우' 등에 대해 상대적으로 둔감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인정하는 순간이 성경이 말하는 '정의와 함께 가는 참된 사랑'의 개념을 비로소 제대로 보기 시작한 때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일단 이 문제에 있어서 필자는 누구보다도 그들의 입장을 잘 이해한다. 나 스스로가 그런 입장의 선두주자였기 때문에 그렇다.

 

 

또는 무슨 일에든 깊게 개입하지 않고(*특히 정치적인 사안에서는) '중립'을 유지하자는 입장이 강하다 보면 관련 이슈에 개입을 안 하려 하거나 아니면 위에서 언급한 stance를 유지할 확률이 크다.

​(하지만 "중립성이라는 편견" 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험한다면 '중립'의 허상을 깨닫게 된다.)

 

 


대부분 이 stance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정치에 무관심하고, 가난, 압제, 억울함, 부당한 대우, 차별 등 소위 '정의의 문제'에 있어서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그러려면 통계적으로 극심한 가난에 처한 경험은 없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아니면, 경제 수준은 낮으나 교육 수준이 현저히 낮아서 길을 잘 못 보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피부로 그런 문제가 와닿지 않는 상황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위선]이라는 책에 나와있는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스라엘'이 '비교적 경제적으로/사회적으로 여유로우면서 정의를 망가한 일부 그리스도인'(매스컴에 보도되는 저명한 정치인,전직 대통령, 일부 목사님들 등 포함)과 매칭이 되었다.

이런 논의를 할 때 중요한 건 '재물이 많은 것' = '나쁘다' 라는 공식을 적용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라는 것이다. 

비록 일반 대중들에겐 보수니, 진보니, 자유주의니, 복지국가니 말들이 많지만 최소 그리스도인에게는 명확한 기준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바와 현재 기독교인들의 방향

성을 빗대어 살펴보는 게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면서 그들의 삶과 예배 속에 드러나는 위선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권영경 교수님의 [위선]이라는 책을 보면서, 인용할 만한 내용들이 많아서 함께 나눠 본다.

 

 

"당시 여로보암 2세 치하의 북왕국 이스라엘은 강대국의 약세를 틈타 솔로몬 시대에 버금가는 정치적,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3:15, 5:11, 6:13, 왕상:22:39). 아모스는 당시 하나님의 선민을 자처하던 이스라엘 상류층("백성들 중의 머리", 6:1)의 호화롭고 여유로운 삶을 적나라한 희화적 언어로 풍자한다.


그들은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양 떼에서 고른 어린 양을 잡아먹고 우리에서 가려낸 송아지를 잡아먹는다. 수금 소리에 따라 되잖은 노래를 불러 대고 다윗이나 된 듯이 악기들을 만들어 낸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고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6:4~6a, 가톨릭 성경)

사회 상류층을 향한 이런 비난은 물질적 풍요나 삶을 즐기는 태도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다. 예언자들이 날카로운 사회비평가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경제적 번영 자체를 악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이스라엘 지도층을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 이유는 그들이 누리던 번영과 안락이 하나님이 복으로 내리신 진정한 샬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풍요에 젖은 사람들에게서 확인하곤 하는 무서울 정도의 무감각 혹은 냉혹함은 아모스 당시 이스라엘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회경제적 풍요와 권력은 가진 자에게 자신감을 준다. 이 자신감은 그렇지 못한 이들을 쉽게 차별하는 오만으로 이어진다. (6:1). 여기서 '나보다 못한' 계층의 힘겨움에 대한 무관심과 무감각이 생긴다. 아모스의 표현을 따르면 이들 상류층 사람들은 더없이 호화로운 삶을 즐기면서도 정작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않았다."(6:6b)

 그렇다. 자신의 삶이 안락하고 편했다면 단돈 1000원이 없어서 괴로운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도 별로 큰 부자가 아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돈 없음'의 기준 자체가 다른 경우들이 있다. 돈이 없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이 없다 하지만 1주일에 한번씩 외식 할 정도의 여유가 있는 이들도 많다. 빈부 격차의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당연시 누리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누군가는 분명 누리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그리스도인은 항변할 것이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착취해서 부자가 된 것도 아니잖아요? 왜 우리를 나쁜 사람 취급하나요?"


하지만 세상 살이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정당하게 번 돈은 당연히 그 사람의 몫이겠지만, 최소 그리스도인 아니던가. 지금 가난한 사람들이 다 게으르고 공부 안 하고 일 안해서 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많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간의 욕망을 단순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손해가 되는 요구사항이 제시될 때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내리고 남을 돕기 힘든 존재들이다. 인간의 실존적 한계와 대립하면서 상대를 바라봐야 하기에 세상 살이가 어려운 것이다.  


아모스 선지자 시대의 이스라엘인들은 가난한 계층을 소외시킴으로써 자신들의 풍요를 획득했다. 또한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부와 권력을 축적했었다. 한국의 대형교회, 전 대통령들 중에도 교회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경제적 부를 잔뜩 지닌 이들이 있다. 그들 중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이들을 겨냥한 말씀들이 있다.

('부정한 방법의 축적'이 중요한 포인트다. 또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의 풍요가 우리의 노력과 열심 만으로 이뤄진 게 아님을 인정한다면 타인의 곤궁함을 쉽게 좌시하기는 어려워야 마땅하다. 그리스도의 참된 은혜로 자신이 과분한 것을 누리고 있음을 인정하는 자는 '정의'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정의(히브리어: 미쉬파트)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히브리어:체다카)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5:7)


정의(미쉬파트)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체다카)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며 (6:12) 

책의 내용을 다시 인용해 본다.

그들의 풍요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사회경제적 부정의 열매였다. 예언자는 정의와 공의를 팽개치는 악행의 실태를 생생한 언어로 고발한다.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세 가지, 네 가지 잘못 때문에 내가 끝까지 그 죄를 묻겠다. 그들은 은을 받고 의인을 팔고, 신 한 켤레에 가난한 자를 판다. 힘없는 사람의 머리를 땅의 흙 속에 짓밟고 억눌린 사람을 억울하게 만든다 .(2:6~7a)

너희가 힘없는 자를 짓밟고 그에게 밀의 세금을 부과하였다.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한다 .(5:11~!2)

쪼들리는 자를 짓밟고 땅의 가난한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는구나. "언제 초하루가 지나 곡식을 내다 팔지? 언제 안식일이 끝나 밀을 내놓지? 용량은 줄이고, 가격은 올리고, 거짓 저울로 속이자.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고,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고, 질이 나쁜 밀도 내다 팔자." (8:4~6)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특별히 선택해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정의로워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했으나, 그들의 행실과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거리가 멀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자부했을 것이다. 매일 예배도 잘 드리고, 헌금도 잘 내고 종교 의식에도 열심을 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들이 경건할 줄 착각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정의가 회복되는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셨다. 그들이 '삶'으로 그 길을 걸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참된 선택받은 민족임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대신, 정의를 물처럼 공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5:24) 


결국 한국 교회의 현 사태는 '정의를 잃어 버린 모습' 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 이면에는 옛적 이스라엘 민족이 그랬던 것처럼 '선민의식', 즉 '영적 교만'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은연 중에 자신들이 믿지 않는 자보다 더 '나은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 있지 않는 이상, 이토록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동성애, 무슬림 등 공포를 조장하고, 누군가를 배제하는 영적 지침에는 과도하게 혈안이 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칭 보수 정권'을 지지하고, 북한에 대한 과도한 공포심을 조장하며 자신들은 '선민', 상대방은 '악마'로 이분화 시켜서 신앙을 지키려 한다. 그들이 지속적으로 강단에서, 카카오톡으로, 모임 자리에서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는 그들과 다르다. 나는 구별된 그리스도인이다." 라는 인식이 무의식 중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러한 자신들의 주장을 보증해 준다고 자부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기도모임에도 잘 참석하고 하루에 몇 시간씩 중보기도도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설교 시간에 졸지도 않기 때문이다.

내 경험상으로도 내가 경건한 예배, 참된 성경의 가르침에 푹 빠져 있을 때 '나의 영성 상태'는 아주 좋은 수준이며, 그렇기 때문에 불경건한 자들을 걸러내는 작업에 혈안이 되었던 것 같다.

(만약 그 영역의 비중이 크지 않다면, 막연하게 주변의 이야기에 현혹되고 지적으로 무지한 상태에 안주해 있는 경우가 나머지를 차지한다.어느 쪽이 되었든 결코 좋은 상태는 아니다.)

하지만 다양한 '종교적 장치'들은 우리의 삶이 죄악의 길을 걸을 때 이를 가리는 역효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예배와, 믿음의 고백 등은 그 자체로는 값지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제사' 가 아니라 '순종'이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는 회생 불가능한 늪으로 빠져 들어가나 [위선]이라는 책이 이야기하는 '신앙과 욕망 사이에서 고투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참으로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사랑과 정의]를 함께 보면서,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시 재정립하고 있다.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을 회개하며 다시 한번 성경이 이야기하는 기독교가 회복되길 바란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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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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