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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김대중과 종교

 

J:김대중은 1956년 민주당에 입당하고 나서 장면의 권유로 천주교인이 되.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였어.

 

A: 토머스 모어??.. 세례명이 멋진 걸?

 

 

 

J: 그러게. 그는 독실한 천주교인이었어. 40년 동안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투옥과 납치(박정희가 지시한) 속에서도 천주교는 든든한 버팀목이었지.

 

김대중이 박정희 정권 때 납치 당할 당시에 대한 간증을 2007 CBS TV 개국 5주년 특별 대담에 출현해서 나눠준 적이 있어. 한번 들어볼까?

 

 

 

“1973년 납치되었을 때 물에 던져지기 직전이었다. 당시 하나님을 생각하진 않았다. 곧 죽는구나라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에게 살려주십시오. 나는 우리 국민을 위해서 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 라고 기도를 했다. 그 때 기도도 정치적으로 했다. (웃음). 그 순간 펑 소리와 함께 나를 묶었던 정보부 요원들이 비행기다!” 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순간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그의 종교적 신념은 옥중서신에 잘 담겨 있다.

 

 

 

나는 나의 감정이 어떠하든, 외부적 환경이 얼마나 가혹하든, 내일의 운명이 어떻게 되든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며 나를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소망으로 일관할 결심이다.”

 

 

 

이 기회를 나의 영적 심화와 지식 향상의 기회로 삼으며 건강의 유지에 힘써서, 앞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도구로 쓰이는 데 좀더 쓸모 있는 능력을 갖추고자 마음먹고 있다.”

 

 

 

참고로 김대중의 아내인 이희오 여사는 개신교 신자였고 서울 신촌에 있는 창천 감리교회에서 오랜 기간 장로로 시무했었지.

 

 

 

A: 최초의 민주화 세력의 대통령 집권이었으니 극우 개신교 단체들이 경계를 잔뜩 했겠는걸?

 

J: 맞아. 극우 개신교는 김대중 집권 기간에 처음으로 정부와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때까지는 극우(또는 보수) 개신교는 늘 권력과 협력 관계를 유지했었는데 말이야.

 

극우 개신교 집단은 김대중 정부를 좌파 정권으로 규정하고 권력과의 투쟁을 시작해. 이러한 갈등이 절정을 이룬 건 역시 노무현 정부 때였어.

 

 

 

A: 그 당시 TV를 틀다 보면 공중파 방송에서 목사들의 비리가 보도되기 시작했던 것 같아.

 

J: 맞아. 김대중 정부 들어오면서 표현의 자유, 문화적 발전이 한층 강화되면서 그 동안 금기시 되어 오던 목사들의 비리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해.

 

고여서 썩어가고 있던 물을 드디어 들춰내기 시작한 것이지.

 

예를 들어 김대중 취임 초기인 1998 4 MBC [시사 매거진 2580] 은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의 공금 횡령과 불륜 의혹 사건을 직접 보도해.

 

 

 

A: 김홍도 목사는 대표적인 극우 기독교 목사였지?

 

J: 맞아. 그 이외에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JMS 라는 이단을 취재하고, MBC [PD 수첩]에서는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목사 사건이 보도되지.

[PD 수첩]은 이런 분위기를 이어 나가기 위해 2000년 한국 대형 교회를 방송하며 광림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 등 대형고회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파헤쳐.

 

이런 모습이 극우 개신교 내부에선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야. 그러면서 그들은 김대중 정권이 정치 보복을 하며 개입하고 있다고 주장했지.

 

 

 

A: 자신들의 도덕적인 부패에 대해서는 한치의 반성도 없나 봐?

 

J: 그러게. 너무 잘못 거꾸로 가다 보니, 도덕적 감수성을 잃어 버린 것일수도 있고, 아니면 죄책감이 너무 심해져서 죄책감이 수치심을 유발했고 그 수치심을 교묘하게 가리기 위해 연기를 하는 걸수도 있고

 

 

 

A: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개신교가 변화해 온 양상, 그리고 그 개신교가 정치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고 있으니, 김대중 정부가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 같기도 해. 개신교와 정치 권력의 협력 관계가 깨진 이유에 대해 좀 더 정리를 해 보면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J: 일단은 대형 교회 목사들의 비리를 공중파 방송으로 보도했던 점, 두 번째는 KNCC 계열의 진보 성향 인사들이 김대중 정부 입각에 도움을 줬고 극우(보수) 개신교가 이 때 소외감을 느낀점도 중요한 포인트야.

당시 김대중 정부에 입각한 대표적 진보 인사는 한국기독교 장로회 소속 김성재 목사와 김상근 목사, 성공회의 이재정 신부를 꼽을 수 있어. 최초로 극우 개신교가 정치 권력의 변두리로 가게 된 거지. 마지막으로는 김대중의 햇볕정책이 극우 기독교의 반공 이데올로기에 불을 지폈던 점을 들 수 있어.

 

 

 

A: 나도 극우 친구들과 이야기 해보면 늘 김대중은 중복 스파이고, 대표적인 예가 햇볕 정책이라고 말하더라고..

 

J: 그렇지. 극우 개신교의 이념적 근간인 반공을 흔들어 버린 평화적인 햇볕정책은 그들에겐 엄청난 위기였고, 극우 개신교는 좌파 진보주의 기독교에 대한 본격적인 반격을 노무현 정부 때 시작하게 되.

김대중 정권 때는 보수 언론사들이 사상 초유의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게 되는데 이로 인해 사주가 구속되기도 했어. 이러다 보니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소위 조중동은 극우 개신교와 연대를 모색하며 반정부 세력을 결집시켜 나가지.

 

 

 

A: 보수 개신교+보수 언론의 만남이 일으킨 시너지 효과는 굉장했어. 많은 정치를 모르는 개신교도들은 이러한 컴비네이션에 휘둘리기가 쉬웠지.

 

 

 

J: 극우 개신교들은 김대중 퇴임 한달 전에 반정부 집회를 시작해서 노무현 정부 임기 말까지 무려 18차례나 대규모 반정부 집회를 열어.

 

여기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월간조선]의 조갑제야. 이 사람은 대표적인 극우 언론인이지. 그는 자신의 조갑제닷컴에서 보수세력의 단결을 촉구해.

 

 

 

그래도 한국에는 잘 조직된 거대한 반공 보루가 있습니다. 전 인구의 약 30% 나 되는 개신교 세력과 약 70만 명을 헤아리는 군대가 그것입니다.”

 

 

 

즉 보수 언론+보수 개신교+군대 를 반공 집단으로 잘 묶어 두는 발언이었어.

 

그러면서 [조선일보]는 김대중 정부 들어 홍보 컨셉을 할 말을 하는 신문으로 바꾸고 강도 높은 정부 비판을 시작해.

 

 

 

A: 군부 독재 시절에는 늘 정권 찬양하기 바쁘던 그 조선일보가?.... 일제 치하에는 일본을 찬양하고, 6.25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는 북한을 찬양하는 기사를 올리며 기회주의적 습성을 보여주던 그 언론이?(북한을 찬양하는 신문 기사에 대해서는 조선일보 측에서는 부인을 하고 있는 상태임)

 

J: 결국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은 김대중의 좌파 정권을 타도하고 싶었던 거지 뭐.

 

김홍도 목사도 거리로 나와 김대중 정부가 싫다기 보다는 이 나라가 공산화되면 우리가 예수를 못 믿고 다 죽게 되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합니다라고 외쳤지.

 

이전까지는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민주화운동을 눈감아 오던 극우(보수) 개신교들은 정치와 종교를 철저히 합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이중성을 보여.

 

 

 

1970~1980년대에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을 이끌어온 KNCC는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그 부족한 부분을 대형교회의 지원으로 채우게 되. 그러다 보 KNCC의 진보성은 축소되기 시작해.

 

KNCC가 시들해지자 극우 개신교 연합단체인 한기총의 위상은 급부상하게 되. 그들은 한국의 보수 세력을 리드하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각인시켜가.

 

 

 

 

A: 한국 교회의 주류 입장이 극우화된 느낌을 받는 이유도 한기총과 대형교회가 목소리를 높여서일까?

 

J: 그런 면도 커. 좀 황당한 부분은 한기총은 과거 KNCC가 힘겹게 쌓아둔 민주화 투쟁의 역사마저 한국 교회가 민주정부 탄생에 기여했다는 식으로 마치 자신들이 그 힘겨운 싸움을 해온 것처럼 포장하는 레토릭을 구사하기 시작하지. 그들은 단순히 진보적인 정치에만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들의 보수 윤리관을 적극 피력하기 시작해.

 

 

 

A: 산업화 이후 시기 때 한국 교회는 1. 민중교회 운동, 2. 교회 성장 운동 이 주를 이뤘던 것 같다. 전자는 진보적 성향의 운동이고, 후자는 보수 개신교가 주축이 되었지 아마??

 

J: 맞아. 민중교회 운동은 산업화 시기에 소외된 사람들의 대변자 역할을 하며 현실참여에 비중을 두는 교회 운동인 반면, 교회 성장 운동은 개인의 영성 문제를 중심에 두고 사회적 약자들의 마음을 만져 주는 위로자 역할을 자처했지. 이 두 가지 운동 모두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다렀다는 점에서 의의가 커. , 민중교회운동은 많은 시민사회단체의 산파 역할을 하며 시민운동을 이끌어 온 반면 교회성장 운동은 메가쳐치를 양산하고, 신학적으로는 교회 성장학’, ‘목회상담학등 교회를 양적으로 키울 수 있는 전략을 개발하는 방향에 힘을 실어주게 되지. 교회성장 운동이 과도해 지면서 한국 개신교회는 세속화’, ‘정치화의 속도도 빨라진 면이 있어.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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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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