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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 사건에 대해서 가장 잘 쓰여진 책 중 한 권입니다. 김기현 목사님의 깊은 영성과 지식이 잘 녹아져 있는 대표 저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 딜레마

 

저자: 김기현 목사님

 

24~31page

 

 

 

가룟 유다는 누구인가?

 

 가룟 유다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먼저 그의 이름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과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다는 영예롭고 대중적인 이름이었습니다.

그 뜻은 찬양입니다. ( 29: 35). 칼 바르트에 의하면, 독일어로는 감사(thnks)라고 합니다. 히브리식 이름을 표기하면 Judah이고, 헬라식으로는 Judas입니다.

성서에서는 야곱의 넷째 아들에게서 유다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했습니다. 그 후 통일왕국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포로기 이후 귀환한 이들이 대개 유다 지파나 남왕국 출신이 많았기에, 유다는 자연스레 민족 공동체 전체를 일컫는 이름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성서에는 유다라는 이름이 많습니다.

신약 성서에만도 유다라는 이름이 여섯 번 등장합니다.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인 유다( 6:16, 1:13), 예수님의 형제이자 유다서의 저자인 유다( 13:55), 백성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킨 갈릴리 유다(5:37), 다메섹에서 눈을 보지 못하게 된 사울이 잠시 기거했던 집의 주인 유다( 9:11), 바사바라 하는 유다( 15:22), 그리고 가룟 유다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시리아로부터 잠시나마 조국을 독립시키고 마카비 왕조를 열었던 이의 이름도 유다였습니다.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e).

 

 

 

 

오늘날의 유대교(Judaism)라는 이름도 유다와 관련이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이들을 유대인이라 지칭한 이후로 유대인(Judean)은 그들의 공식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불행하게도 유다는 유대인의 전형으로 각인된 것입니다.

지금은 마치 유대인이 아닌 듯 여겨지는 또 한 사람의 유대인과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다가 유대인의 대표명사가 된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추론입니다. 다만, 그의 이름 때문인 듯 합니다. 둘의 이름과 발음이 너무 흡사합니다. 혼동하기가 쉽지요. 유다와 유대. 제 친구 김일승과 김일성처럼 말입니다.

 

두 번째로, 유다 이름 앞에 붙는 가룟은 논란이 참 많습니다.

가룟, 공동번역에서는 가리옷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권터 슈바르츠라는 학자에 의하면 아홉 가지 해석이 있다고 합니다. 이를 클라센은 네 가지로 분류했는데, 이 중에서 그런 대로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동네 이름입니다.

그의 고향이 아마 가룟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라는 이름은 가룟 지역 출신의 유다인 겁니다. 이 추론이 맞다면 가룟은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그리욧(15:25, Kerioth)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네게브 지역의 텔 퀴리옷(Tel Qirrioth)일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 유력한 해석은 그가 시카리(Sicari)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그가 시카리라고 명명한 열심당(Zealots)의 명단에 유다라는 이름이 많이 언급됩니다. 그의 책에는 유대(Jude)라는 사람이 19, 유다가 13명인데, 그들 대부분이 열심당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베드로가 아닌 시몬이 바로 이 열심당 일원입니다.( 6:15). 이들은 이교도인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참 왕인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원조는 마카비이고, 그들의 후손들은 마사다에서 로마와 저항하다 일천 여명이 자살하기도 했습니다.

 

만일 유다가 이 열심당원이라면, 그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처럼 이스라엘 나라의 구속, 곧 정치적 해방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로마의 식민지 시절인데다, 구약에서 예언한 바 다윗 왕조의 회복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종교적 열정이 결합된 것이 열심당이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가슴에 품은 젊은이라면 이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겠지요.

그래서 그 기대가 배반당하자 예수를 부인했다는 가설이 많은 이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 어디에도 그가 열심당과 연루되어 있다는 징후를 읽을 수 없는 마당에 그의 이름 하나만으로 그를 열심당원이라고 확언하기에는 증거가 미비하여서 여간 미심쩍은 것이 아닙니다.

 

오경준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성경에는 없다] (홍성사)에서, ‘이스카리옷시카리로 보기에는 원어적으로 어렵고, 시카리들은 광장에서 민족 반역자나 로마 군인들을 암살할 정도로 대담한 반면, 유다는 자살한 것이나 세리 마태를 제치고 돈을 관리하는 것으로 보아 성격이 소심하거나 꼼꼼하여 성격이나 기질상 사카리에 맞지 않을 것이라 언급합니다.

, 그가 제자단의 금고의 돈을 빼돌렸다는 요한의 기사를 토대로 보건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만큼 유다는 이상주의적이지 않고 도리어 현실주의자일 공산이 크다고 언급합니다.(각주)

 

성서에서 유다를 열심당원으로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에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하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그가 사카리인지를 확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가설로 새겨들을 필요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가 열심당이었다고 단정하고 그들이 추구했던 하나님 나라와 메시아 기대가 배신당하자 예수님을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성서의 기록에도 맞는 정확한 묘사는, 유다가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열두 사도. 요한복음을 제외한 세 복음서에는 열두 사도의 명단이 있습니다. ( 10:2~4 ; 3:16~19 ; 6:14~16). 유다에 관련된 특이 사항이 있다면, 각 명단에서 유다는 항상 맨 꼴지에 있다는 것, 그리고 유다는 예수를 판 자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다를 사도의 한 명으로 언급하면서도 그가 예수를 팔았다는 과거 전력을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그리고 또박또박 적어 둔 것이 참으로 희한해 보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도라는 말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으로 문자적으로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도가 되겠지만, 신약에서 사도라 불린 사람들은 열두 사도가 아닌 경우 직접적으로는 바울과 바나바( 14:14), 암시적으로는 주의 형제 야고보(1:9)였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특별한 소수의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의 관심은 유다를 사도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모든 신자를 일컫든 아니면 특별한 소수의 무리이든 이른바 누가 사도인가 하는 것보다는, 유다가 그 사도들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에 제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도를 뽑으셨다는 것 못지않게 특별히 유의해야 할 점은 12라는 숫자입니다. 12는 구약의 열두 지파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던 숫자는, 이제 교회가 영적 지위를 차지할 것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새 세상에서 인자가 자기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라온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19:28).

열두 사도는 새로운 하나님 백성 공동체인 교회로 하여금 구약의 이스라엘을 연속적인 측면에서 계승하게 할 뿐 아니라, 비연속적인 측면에서 진정으로 완성하도록 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 건설을 위해 사소들이 해야 할 일은 세 가지입니다.(3:14~15).

예수와 동행하는 것, 보냄을 받고 전도하는 것,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열두 명의 명단에 이름이 기재된 유다에게도 분명 이런 역할과 특권이 부여되었을 것입니다.

하여, 유다도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했을 겁니다. ( 10:8). 그리고 돌아와서 아마도 70명의 제자들처럼 기쁨과 놀라움에 겨워 말했을 것입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10:17).

그랬다면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10:18)라는 칭찬과 격려의 말씀도 들었을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신하고, 귀신마저도 항복할 만한 영적 권세를 지녔고, 실제로 그런 경험도 한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이런 유다의 배신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뭘까요? 이 사람 유다는 누구일까요? 열두 사도의 명부에 이름이 등재되어 있으면서도 예수를 판 자라는 불명예가 항상 따라다니는 이 사람, 유다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이 이방인 선교를 하는 것과 유대인이 구원받는 것의 상관 관계를 설명합니다.(9~11).

유다와 관련해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대목은 11장의 돌감람나무 이야기입니다.

원래 가지에 문제가 있어서 그 가지들을 꺾어 버리고 새로운 가지를 접붙였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가지인 우리 이방인에게 주는 교훈은, 원래 있던 가지고 아낌없이 잘라내신 분이 우리 또한 높은 마음을 품고 교만하면 그들과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우리 모습입니다.

열두 사도였던 그가 예수를 판 자가 되었습니다.

그토록 놀라운 특권과 능력의 소유자였던 유다가 배반자 유다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유다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유다와 베드로처럼 예수를 부인하고 배신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현재의 축복과 형통함에 우쭐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바로 서면 하나님의 너그러운 인자하심이,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습니다.

 

 

 

내가 율법의 삶을 사는지, 은혜의 삶을 사는지를 분별하는 좋은 잣대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 또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내가 한 것이 자꾸 생각나는지, 아니면 주님이 내게 해주신 것이 생각 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한 일이 생각나면 불평하게 되고, 주님이 하신 일이 생각나면 감사하게 됩니다.

과거의 영광스러운 성취와 지위가 영원불변할 것으로 착각하여 자긍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일수록 얼른 잊어버려야 유익합니다.

나 역시 유다처럼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할 수 있습니다. 오직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3:14, 공동번역)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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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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