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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10월 유신 이후 민주화운동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일으켜 민중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의 민주화운동은 1987 6월 민주항쟁의 승리와 더불어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은 다수의 국민이 원하면 평화적, 합법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 우리의 민주주의는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 하지만 아직 성숙하지는 않았다.

 

민주적 제도가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에 맞는 생각을 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성숙한 민주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민주주의는 제도와 행태, 의식의 복합물이다.

물론 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1987년 가을 여야 정당들이 합의하고 국민이 승인한 제도의 틀 안에서 작동해왔다.

그 제도의 틀을 ‘1987년 체제라고 하자. 1987년 체제는 민주화 이전부터 존재했던 낡은 의식과 문화와 결합해 우리 민주주의의 성숙을 더디게 했다.

 

1987년 체제는 특정한 제도와 의식과 행태의 결합이다. 여기서 제도의 핵심은 대통령중심제와 5년 단임 규정, 결선투표가 없는 선거법,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다. 이 제도는 지역주의라는 낡은 의식, 동원정치라는 후진적 문화와 결합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한국적 특성을 만들어냈다.

 

 

 

-1 3김의 시대, 대통령 5년 단임규정, 국회의원 소선거구제-

 

1987년 체제는 현행 헌법과 선거제도를 만든 정치 지도자 ‘13의 동상이몽과 이해타산이 만든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 5년만 하고 나가는 데 합의했다. 대통령 단임 규정은 25년의 군사독재로 말미암은 정치적 인사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들은 그 취지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헌법 제 128 2항에 임기를 늘리거나 중임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을 할 경우 개정 조항은 현직 대통령에게 적용하지 않는다는 안전장치까지 넣어두었다.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모두 결선투표제는 도입하지 않고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채택한 것은 ‘13의 기득권을 지키고 정치적 사행심을 충족시키는 방안이었다.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하면 전국 평균 득표율이 높은 정당보다 특정 지역에서 몰표를 받는 정당이 유리하다. ‘13은 각자 대구, 경북, 부산, 경남, 호남, 충청지역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결선투표를 배제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면 1차 투표 순위가 어떻게 되든 양김 가운데 한 사람과 노태우 후보의 맞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노태우는 그것이 두려웠다. 김종필은 결선투표까지 갈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야권 단일 후보 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으며 표가 잘 나뉘기만 하면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6월 민주항쟁도 4.19 혁명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권력주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재야와 학생운동 세력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을 이루기 위해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조직하는 데는 유능했지만 그 승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 능력은 없었다.

거리시위에 참여해 민주주의 정치 혁명의 본대를 형성했던 시민들은 ‘13이 합의한 1987년 체제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알지 못했다. 결국 6월 민주항쟁의 후위였던 야당의 두 지도자가 사실상 모든 것을 결정할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1987년에 개정한 현행 헌법에 큰 문제가 있는 아니다.

권력구조 관련 조항을 제외하고 보면, 현행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분명하게 보장한 민주적 헌법이다.

 

 

 

-새로 개정된 헌법에 투영된 6월 민주항쟁의 성과-

 

우리 헌법은 국민의 저항권을 인정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명시했다. 10조부터 37조까지 신체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노동3권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비롯한 시민의 기본권을 명확하게 보장했다.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국회와 사법부의 권한을 대폭 확대해 권력의 분산과 상호견제를 강화했다.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부활시키고 법관의 독립성을 높였으며 헌법재판소를 설치했다.

 

최저임금제를 명시하고 성장, 안정, 적정한 소득분배, 독과점 폐해방지, 경제민주화를 위해 국가가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었다. 시각에 따라 비판할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헌법은 민주주의 선진국의 헌법에 견주어 크게 손색이 없는 훌륭한 헌법이 되었다. 나는 이것이 바로 헌법에 투영된 6월 민주항쟁의 성과라고 본다 .

 

 

 

-‘양김 분열, 노태우 당선-

 

1987 10 27일의 헌법 개정 국민투표에 78%의 유권자가 투표했고 93%가 찬성했다. 12 16, 1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무려 17년 만에 대통령을 자기 손으로 뽑게 된 국민들은 기쁨에 들떴다. 하지만 내게 이 선거는 끔찍한 악몽이었다.

나는 양김이 후보 단일화를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후보 선출방식을 둘러싼 줄다리기 끝에 김대중 씨가 추종자들을 통일민주당에서 탈당시켜 평화민주당을 창당했지만 어떻게든 대선에는 한 사람만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대중 총재가 좀 더 훌륭한 사람인 만큼 최악의 경우에는 그가 양보를 할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다. 후보 단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야인사와 대학생들이 양당 당사를 점거해 농성을 하면서까지 단일화를 요구했지만 양김은 끝내 거부했다. 평민당에서는 이른바 ‘4자 필승론을 퍼뜨렸다. 객관적으로 보면 로또 당첨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두 지도자는 각자 출마해 끝까지 선거를 치렀다. 야당이 분열되었고 재야가 분열되었으며 국민도 결국 분열되었다.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유효표의 36.6%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는 28%,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27.1%를 획득했다.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의 득표율은 8.1% 였다. 유신체제와 제5공화국을 같은 세력의 정권으로 보면, 55.1%의 유권자가 정권교체를 지지했는데도 전두환 정권이 연장된 것이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민주화를 이루어놓고서는 결국 12.12 군사반란과 광주학살, 5공화국 강권통치와 권력형 부정부패의 제 2인자를 대통령으로 뽑았으니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김대중의 후회, 이인제의 의도치 않은 선한 역할-

 

김대중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때 후보 단일화를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김영삼은 노태우, 김종필과 손잡고 민주자유당을 만들어 보수정권의 대통령이 되었다.

김대중은 4수 끝에 겨우 대통령이 되었고 유신본당김종필과 권력을 분점한 탓에 소신대로 국정을 운영하지 못했다. 후보 경선에서 패배하고서도 독자 출마를 해서 무려 500만 표를 분산시켜준 이인제 후보가 아니었다면 김대중 후보는 이회창 후보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인제 씨는 선한 의도가 있어야만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삶의 역설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경선탈락-탈당-신당창당-독자출마로 이어진 그의 반칙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것 덕분에 진보정권 10년을 경험할 수 있었기에 나는 텔레비전에서 그를 볼 때마다 감사의 마음을 되새기곤 한다.

 

 

 

 

1987년 대통령 선거는 결코 공정하고 깨끗한 선거가 아니었다. 선거를 약 보름 앞두고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이 터졌다. 정부는 범인 김현희를 선거일 직전에 김포공항으로 데리고 들어와 모든 신문과 방송의 뉴스를 도배함으로써 거센 북풍을 일으켰다. 정부여당은 공무원과 통반장을 동원해 유권자에게 돈을 뿌렸다. 공무원들이 시청, 군청 지하 강당에서 밤새 현금을 봉투에 담는 작업을 했다. 노태우 후보의 여의도 유세 때 마포대교는 인파로 가득 찼다.

차량 통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포대교를 도보로 건너 여의도에 가서 조직책에게 돈 봉투를 받은 다음 다시 걸어서 마포로 나왔다. 전두환 대통령이 재벌에게 천문학적 규모의 정치자금을 걷어 노태우 후보를 지원했다. 야당 후보들도 각자 구할 수 있는 만큼 돈을 구해서 썼다.

그러나 어쨌든 노태우 정부는 국민의 선택으로 수립되었다. 노 태우 대통령은 양김의 분열이, 그리고 북풍에 휘둘리고 부패선거를 용인한 우리 국민들의 의식과 행태가 만든 대통령이었다.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1988 4 26일 제 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집권당인 민정당은 125석을 얻었다. 그러나 광주, 전남,전북은 단 한 석도 없었다. 평민당은 70석을 얻어 제 1야당이 되었지만 수도권과 광주, 전남, 전북에서만 당선자를 냈다. 통일민주당은 주로 수도권과 부산, 경남에서 59석을 얻었다. 공화당은 35석을 얻었는데 대부분 충청지역 의석이었고, 영남,호남에서는 한 석도 없었다. 여야 4당 득표 기반은 1987 12월 대통령 선거 때와 거의 비슷하게 나타났다. 1980년대 내내 민주 대 독재로 양분되어 있던 민심이 대구, 경북, 부산, 경남, 광주, 전남, 전북, 대전, 충남, 충북 등의 지역으로 갈라진 것이다.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 : 민주자유당(이후 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의 등장-

 

그런데 1990년 초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 여당을 만들었다. 그러자 지역구도는 호남 대 비호남으로 단순화되었으며 25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민주자유당을 신한국당으로 바꾸었다. 이회창 총재가 신한국당을 한나라당으로 바꾸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을 새누리당으로 바꾸었다. 김종필 총재는 김영삼 대통령과 헤어져 자민련을 만들었으며 잠시 동안 김대중 대통령과 손잡고 국민의 정부 권력을 공유했다. 새누리당은 1987년 이후 한국 정치를 이끌어 온 보수정당을 모두 통합한 정당이다.

 

 

 

 

 

-진보 당의 변천사-

 

평민당은 재야세력을 흡수하고 3당 합당을 거부한 통일민주당 잔류세력과 통합하면서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었다. 열린 우리당이 창당된 2004년 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했다가 총선에서 참패를 당했다. 하지만 결국 열린우리당과 다시 합쳤고, 2014년에는 안철수 박사의 조직과 통합해 새정치 민주연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정당은 박정희 시대 신민당의 전통을 물려받은 진보적 자유주의 정당이다.

 

 

 

-재야 인사들의 국회 입성-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민주화운동의 전위였던 재야와 학생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농민운동, 각계각층 지식인운동에 변화를 요구했다. 그들은 정치, 민중운동, 시민운동으로 갈라져 점차 1987년 체제에 통합되었다. 정치 진입의 주요 통로는 김대중당이었다.

김대중 후보가 3위로 낙선해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던 1987 12, 100여 명의 재야인사들이 평민당에 입당해 다음 해 총선에서 대거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김대중 총재는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까지 여러 차례 이런 방식으로 재야 인사와 학생운동 출신 신인을 영입했다.

이해찬, 임채정, 한명숙, 장영달, 박영숙, 심재권, 우원식, 김민석, 신계륜, 임종석, 송영길, 우상호, 이인영, 호인회 등이 모두 이런 경로로 정치에 진입했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김영삼당도 그런 역할을 했다.

노무현, 김광일 등이 1998년 통일민주당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정치군인 집단인 하나회를 숙청하고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도입해 인기가 치솟았던 1994년에 민자당을 신한국당으로 개편하면서 민중당 출신 이재오, 김문수와 학생운동 출신 심재철, 손학규 등을 영입했다.

1997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는 김대중 총재의 정계복귀에 반발해 야권통합추진위원회에서 갈라져 나온 이부영, 김부겸, 제정구 등을 받아들였다. 2000년 제 16대 총선 때는 김영춘, 원희룡, 고진화 등 소위 386 세대 학생운동 리더 일부가 이회창 총재의 한나라당에 들어갔다.

 

 

 

- 3당의 등장-

 

노동자, 농민을 기반으로 한 진보정당은 아직도 현실정치에 안착하지 못했으며 다른 제3당 실험도 성공하지 못했다.

1988년 한겨레 민주당, 1992년 정주영 회장이 만든 국민당과 이기택 씨의 꼬마민주당’, 2008년 등장했던 문국현 대표의 창조한국당, 2010년 지방선거에 나선 국민참여당 등 새누리당과 민주당 양당체제를 균열시키려 한 모든 시도는 다 실패로 끝났다. 결선투표 없는 국회의원 소선거구제와 지역구도라는 진입장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안철수 의원의 제3당 시도 역시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막을 내렸다. 결국 우리 정치는 여전히 1987년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014 6.4 지방선거를 보수-자유주의 양당체제의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었다.

 

…………………..

 

또 한 갈래는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도시빈민운동 등 소위 기층운동또는 민중운동에 투신했다. 그들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여러 대기업 노동조합과 금속노조를 비롯한 산별연맹, 전교조와 언론노조 등의 공공부문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그 토대 위에서 민주노총을 세웠으며 전국 농민회총연합 탄생을 도왔다. 전국 각지의 다양한 빈민운동단체와 영세상인단체가 탄생하는 과정에도 기여했다. 그들은 각계각층의 대중이 생활에서 느끼는 요구를 기반으로 스스로를 조직하고 정치적으로 각성해야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것을 토대로 진보정당을 만들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민중후보 백기완선거운동을 시작으로 정치적 결집을 시도한 그들은 민중당 실험을 거쳐 민주노총과 전농을 조직적 기반으로 한 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

 

민주노동당은 2004 17대 총선에서 열 명의 당선자와 13%의 정당득표율을 기록해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내부의 노선투쟁과 조직운영의 비민주성 문제로 분열과 이합집산을 거듭한 끝에 정의당, 통합진보당, 노동당 등 여러 군소정당으로 갈라져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시민운동의 발전-

 

세 번째 갈래는 시민운동이었다. 첨여연대,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소비자 생활협동조합,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예술인총연합, 인도주의실천의사회, 건강실천약사회, 참교육학부모회, 인권운동사랑방, 정신대문제협의회, 여성민우회, 민주언론시민연합, 어린이보육공동체, 빈곤층자활운동단체, 마을공부방 등 민주화 이후 그 종류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자생적 시민운동단체가 탄생했다.

1988년 시민들이 주주가 되어 [한겨레] 신문을 창간한 것도 일종의 시민운동이었다. 시민운동의 첫 세대 주역들은 거의 대부분 민주화운동의 용광로에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이 흐름을 체현한 대표적 인물로는 박원순 서울시장과 환경운동연합 최열 의장을 거명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시대의 민주화 운동-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시대의 민주화운동은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저항운동에서 헌법정신을 실현하는 시민참여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시민참여운동은 종종 격렬한 반정부투쟁을 동반했다. 민주주의 제도는 다시 세웠지만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짓밟는 국가권력의 공안통치 행태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1989 3문익환 목사의 북한 방문이었다. 그는 통일논의의 물꼬를 트기 위해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평양에 가서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북한의 수뇌부 인사들을 만났다. 노태우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 공안통치로 기울기 시작했다.

 

 

 

-임수경의 북한 방문 사건, 전대협->한총련-

 

4.19 혁명 직후 대학생들이 남북학생회담을 추진했던 것처럼, 6월 민주항쟁 이후 대학생들도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NL 계열이 주도권을 쥔 학생운동은 반미자주화투쟁의 일환으로 통일운동을 폈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외국어대학교 학생 임수경의 북한 방문사건이었다.

그는 일본과 서베를린, 동베를린을 거쳐 1989 6 30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한국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임수경을 평양 시민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살벌한 공안정국이 조성되었다. 전대협은 1993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으로 재편되었고 정부는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노태우 정권의 탄압과 유서대필사건-

 

1990 1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전격적인 3당 합당으로 국회는 개헌의석을 확보한 민자당의 독무대로 변했다. 정부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는데 이것은 반정부세력에 대한 정치적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국회를 완전히 장악한 노태우 정부는 힘으로 대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을 제압하려 했다. 그런 상황에서 1991 4월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시위 도중 경찰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가는 시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두 달 동안 전국에서 2,361회나 반정부집회가 열렸고 열세 건의 분신과 의문사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안기부와 검찰이 분신한 청년활동가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해 주고 자살을 교사했다는 혐의를 조작해 아무 죄도 없는 강기훈 씨를 구속한 유서대필사건을 만들어 냈다.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죽음의 굿판을 거두라면서 재야와 학생운동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해 파문을 일으킨 것도 이때였다.

 

 

 

-민통련->전민련->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6월 민주항쟁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중심으로 결속해 있던 재야 진보세력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공동대표 이부영, 이창복)을 거쳐 1991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으로 확대 재편되었다. 노동자, 농민, 대학생 등 각계각층의 운동단체 14개와 13개 지역운동단체가 결합한 전국연합은 1997년에 사실상 해소되었다.

 

 

 

2008년의 공식 해산 이후에는 한국진보연대로 전환되었다. 경기동부, 울산, 인천 등 NL 계열 지역운동단체들은 전국연합이 사실상 해소된 1997년 이후 조직적으로 민주노동당에 결합해 당권을 장악했다. 경기동부연합과 울산연합은 현재 통합진보당으로 결속해 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정권-

 

누가 하는 어떤 것이든, 민주주의와 관련한 헌법의 규정을 실현하려는 활동은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대통령에 대해서든, 정치에 대해서든, 통일문제에 대해서든, 혁명에 대해서든, 그 무엇에 대해서든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헌법이 우리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정부가, 또는 압도적 다수의 국민이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위한 것이 아니다. 대다수 국민이 터무니없다고 판단하는 견해까지도 제한 없이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

비록 진리가 아닌 견해라 할지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그것을 제약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헌법의 정신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다. 노태우 정부는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에 대한 대학생과 시민들의 의사표현을 탄압했다.

 

 

 

-김영삼 정부와 민주화 운동-

 

김영삼 정부는 노동법을 날치기했다. 1996 12 26일 새벽, 신한국당 소속 의원 154명이 야당에 회의 개최 사실도 통보하지 않은 채 버스를 대절해 국회 본회의장에 몰래 들어가 파견근무제, 정리해고제, 파트타임근로제와 변형시간근로제 등 노동자의 지위에 엄청난 악영향을 주는 조항이 담긴 노동관계법을 의결했다.

민주노총이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를 요구하는 총파업을 시작했다. 공안당국이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체포조를 투입하는 등 초강경 대응에 나섰지만 하루 최대 35만 명 넘게 참여하는 등 파업은 더욱 확산되었다. 천주교 사제들의 시국미사를 시작으로 대학교수와 지식인, 각계각층 단체의 노동법 재개정 요구 서명발표가 줄을 이었다.

농민들은 쌀과 음식을 싣고 와 농성 노동자를 격려했으며 대학생과 시민들의 격려 방문과 파업을 지지하는 신문광고가 줄을 이었다. 해외교민들도 정부를 규탄하고 파업을 지지하는 집회를 벌였다. 내가 있던 독일 마인츠대학교 한국 유학생들도 돈을 모아 [한겨레]에 총파업 지지 생활광고를 냈다.

 

 

 

-노동운동의 중요성과 김영삼의 사과-

 

한 달 가까이 이어진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 투쟁 분위기는 마치 6월 민주항쟁 전야 같았다. 개정 노동법의 내용도 문제가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정부가 국회법의 의결 절차를 지키지 않았고 헌법이 보장한 노동 3권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임금과 근로조건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는 법률 개정을 막기 위해 노동자들은 파업을 할 권리가 있다.

파업을 하면 생산이 중단되고 기업이 타격을 받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업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지 않도록 성의를 다해 교섭해야 한다. 만약 국민경제에 악영향을 주고 기업 경영에 손실을 입힌다는 것을 이유로 파업행위를 처벌한다면 노동조합 그 자체가 의미가 없으며 노동3권을 보장한 헌법 조항은 효력을 잃게 된다.

노동자가 아닌 종교인, 지식인, 농민, 대학생, 시민들이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를 요구하는 총파업을 지지하고 연대한 것은 헌법정신과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이 날치기 행위에 대해 사과했고 국회는 임시국회를 열어 노동법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김대중 정권과 민주화 운동-

 

1997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룸으로써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성숙해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공안통치를 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야당과 언론의 입을 막거나 시민들의 기본권 행사를 제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정부와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부당하게 억압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견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김대중 대통령이 정리해고제를 도입하는 등 노동법을 개정함으로써 노동자의 지위를 현저히 약화시켰다. 1996년 정부여당이 날치기 처리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내용이었다. 정부는 정리해고제 반대 파업을 경찰력으로 해산하고 주동자를 구속했지만 대규모 파업이나 시민사회의 연대투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구제금융을 제공한 IMF 가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리해고제 도입을 강요했다. 둘째, 김대중 대통령은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노동계와 합의하려고 노력했으며 고용을 유지하는 기업을 지원하는 등 정리해고의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국민들이 벼랑 끝에 몰려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심정에 공감하면서도 정부를 심하게 비난하지는 않은 것이다.

 

 

 

-노무현 정권과 민주화 운동-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권력의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평검사들과 치열한 공개토론을 함으로써 대통령이 검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 국정원장의 독대보고를 받지 않았다.

자신의 대선자금 가운데 일부가 불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국민에게 사과했다. 한국-칠레 자유무역협정(FTA) 폐기를 주장하며 서울 도심에서 시위를 하던 농민이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사고가 났을 때도 공개적으로 사죄하고 경찰청장을 경질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손잡고 대통령 탄핵을 추진했을 때 열린우리당 의원들에게 육탄으로 저지하지 말라고 권했다. 국회에 탄핵권이 있고, 탄핵을 의결해도 헌법재판소 결정이 남아 있는 만큼 헌법 절차에 따라 다투는 것이 옳다고 했다. 이라크 파병 등 중요한 문제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통령과 다른 견해를 밝혀도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도 민주주의 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3년에 일어난 부안사태였다. 산업자원부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사용 후 핵연료가 포함된 저장 시설인지 아니면 중저준위 방사선폐기물만 저장하는 시설인지 정보를 정확하게 제공하지 않았다.

게다가 부안 군수는 부안 군민과 인접 시, 군 주민들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고 유치 신청을 했다.

대통령은 그런 사실을 제대로 보고받지 못한 채 정책 결정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정부가 국민을 속이고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환경운동단체가 중심이 된 부안 핵폐기물 저장시설 반대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졌고 시위대와 경찰의 심각한 충돌을 야기했다.

 

결국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재공모 절차를 거쳐 주민투표 찬성률이 가장 높았던 경주시에 방폐장을 설치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칠례 FTA 와 한- FTA 체결, 이라크 파병, 용산 미군기지 평택 이전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사태가 일어났다. 그러나 정부는 정부대로 절차를 지키려고 노력했고 범국본은 범국본대로 헌법상의 기본권을 충분히 행사하면서 의사표시를 했다. 민주주의 국가 어디에서나 흔히 일어나는 정상적인 과정이었던 것이다.

 

2004년 봄의 탄핵규탄 촛불집회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시민들이 현직 대통령의 편이 되어 자발적으로 전국적, 동시다발적, 연속적 집회시위를 벌인 적은 그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탄핵규탄 촛불집회의 투쟁대상은 야당이었다.

임기가 넉 달 밖에 남지 않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뽑은 임기 5년 대통령의 직무를 겨우 1년 만에 정지시킨 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분개했다.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얻고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를 기각함으로써 대통령 탄핵은 야당이 국회의 헌법적 권한을 오남용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 촛불시위는 국회가 국민의 주권을 부당하게 침해한 데 대한 항의였으므로 헌법을 지키는 민주화운동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과 민주화 운동-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 미국산 쇠고기로 인한 광우병 발병 확률은 매우 낮았다. 문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을 완화하는 결정을 내린 과정이었다. 아무 예고도 하지 않고 최소한의 공론화 과정도 없이, 국민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대통령과 정부가 그런 결정을 한 것이다.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가 다른 일도 모두 그런 식으로 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여중생들이 광화문 인근에서 작은 촛불집회를 시작했을 때 그것이 국민운동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촛불집회는 재야, 학생운동, 시민단체, 야당 등 전통적인 민주화운동 세력과 전혀 상관없이 젊은 어머니들과 직장인들에게 번져나가 거대한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집회시위로 확산되었다.

물대포와 최루액을 동원한 경찰의 진압과 명박산성이라고 불린 경찰차벽에도 굴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거짓 사과 말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지만, 촛불집회는 자발적으로 행동하면서 수평적으로 연대할 줄 아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예고했다.

 

 

 

-박근혜 정권과 민주화 운동-

 

2013년 시민들은 다시 촛불을 들었다. 이번에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 국정원과 기무사,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이 불법 개입한 것을 규탄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국미사를 열었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가기관을 정치적으로 사유화해서 같은 당의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국민을 상대로 온라인 심리전을 벌인 조직범죄였다.

지금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민참여의 시대다. 2008년 이후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지만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런대로 작동하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가 헌법을 무시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행태를 보이지만 권력의 제한과 분산, 상호견제를 통해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 역시

국가운영의 많은 분야에서 민주화의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정책과 행태를 보이는데, 그 기반은 불합리

한 제도나 경찰과 군대의 폭력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거대 보수언론

재벌, 공안세력이 반복 주입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시민들의 의식이 그 기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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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노태우와 종교

 

J: 그는 최초의 불교 대통령이었어. 생긴 것도 부처를 닮았다는 평이 많았어. 노태우 대통령의 과거 종교 행적은 알려진 게 별로 없긴 해.

 

딱히 자신의 종교를 드러내려 하진 않았으나 출근할 때마다 차 안에서 금강경 독송 테이프를 듣고 다녔고 스님들에게 천수심경을 누가 더 잘 외우는지 겨루어보자고 말하기도 했었지.

 

그의 어머니도 독실한 불교 신자였고…..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노태우는 퇴임 이후 개신교로 개종했다고 해. 2010년에 하용조 목사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다나….. 전두환이 퇴임 이후 천주교에서 불교로 개종한 것처럼 노태우도 불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셈이야.

 

 

 

A: 그거 참 흥미롭다.

 

J: 1987년도는 최초로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은 해였는데 6월 민주 항쟁 때 주도적 역할을 했던 종교계는 1987년 대선에서는 개입이 훨씬 심해져. 6월 민주 항쟁을 이끈 종교계의 자부심이 너무 과했던 탓일까?

 

당시 유력 대선 후보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었고 각기 불교,개신교,천주교 성향이 있다 보니 당시 대선은 거의 종교 파벌 대선이나 다름 없었지.

 

당시 먼저 가장 열심을 낸 건 불교였어. 지난 정권들에서 받았던 서러움이 폭발했는지 노태우라는 불교 신자를 어떻게든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골적인 노태우 지지 기원 법회를 열고, 불교계의 지지를 호소했어.

 

 

 

 

 

A: 노태우도 그런 반응이 싫지 많은 않았겠네?

 

J: 그랬겠지. ‘나라 안정과 불교 중흥을 위한 기원 대법회 11 27일에 열렸는데 당시 노태우는 직접 참석해서 불교 방속국 설립을 공약하며 참석자들로부터 박수를 많이 받아.

 

 

 

A: 우리는 개신교 쪽을 좀 더 집중적으로 살펴 보기로 했으니, 그 쪽은 어땠어?

 

J: 개신교는 민주당 후보로 나온 김영삼 장로를 적극 지지했어. 수천명의 목회자들이 김영삼 지지대열에 동참했었지. 김영삼 역시 유세를 다닐 때마다 해당 지역 목사, 장로가 주최하는 기도회에 참여하는 등 개신교 표를 얻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어.

 

 

 

 

 

A: 천주교 쪽은 역시 김대중을 밀었겠지?

 

J: 그랬지. 민주화 운동 세력도 중심이 되었어. 김대중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천주교 지지층 확보에 나섰고 말이야.

 

 

 

1987년도 대선은 그야말로 종교적 공방이었어. 노태우는 불교방송국 건립공약, 김영삼은 통일교 정치자금 수수설’, ‘불교 탄압설’, 김대중은 천주교인의 불당 참배 문제등이 늘 이슈로 따라 다녔지.

 

 

 

A: 결국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

 

J: 당시 노태우는 성난 불심을 달래줘야 할 입장이었는데 7년 전 벌어졌던 10.27법난 사건 때문에 불교계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거든.

 

그래서 노태우는 전통사찰보존법을 제정해서 전통사찰로 지정된 곳만 정부가 관할하고 나머지 사찰은 정부 규제에서 벗어나게 해 줬어. 이로 인해 사찰의 자율권은 확대되고, 사찰의 수리와 보수도 정부가 책임져 주는 특혜를 누리게 되었지.

 

 

 

그리고 노태우 정권에서 개신교의 이념적 근간이 크게 흔들리는데 그걸 처음 촉발시킨 건 전두환 집권 시절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었지만 노태우 정권에 들어서 평화통일운동과 반미 운동 등으로 구체화 되기 시작해.

 

 

 

A: 평화통일 운동은 아무래도 야당 출신인 김대중 정권 때부터나 생긴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닌 건가?

 

J: 흔히들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관계의 틀을 바꿨다고 알고 있지만 최초로 그 틀을 바꾼 건 노태우 대통령이라고 보는 게 더 공정한 평가일 거야.

 

노태우 대통령은 1988 7.7 선언을 통해 남북 동포의 상호 교류, 해외동포의 남북 자유왕래, 이산가족 생사 확인, 남북교역 문호 개방을 제안했지. 그는 남북한의 체제 경쟁이 대한민국의 완승으로 끝났음을 확신하고 북한을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잘 관리해야 할 위험정도로 보았고, ‘미군의 전술핵무기는 북한을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북한을 자극하는 무기로 판단했어. 노태우는 남북관계의 기조를 이념적, 군사적 대결에서 평화공존과 교류협력으로 전환하여 한반도의 국지적 냉전체제를 해체하려고 한 것이지.

 

 

 

A: 많은 극우 개신교 단체들은 김대중이 종북 스파이가 되어 북한과 대화하고, 북한과 친구가 되려고 했다고 맹비난을 하면서 보수 당을 지지하던데, 속내를 알고 보니 꼭 그렇지 만도 않은 거네?

 

 

 

J: 그렇지. 역사는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아무튼 노태우 정권 때 평화통일 운동, 반미운동도 본격화 될 만한 정치 토대는 충분했던 거야. KNCC 를 중심으로 한 진보 성향의 개신교 세력이 한층 단단해 지면서 본격적으로 개신교 내에 진보-보수 흐름이 뚜렷해지기 시작해.

 

 

A: KNCC 는 민간 차원에서 처음으로 평화 통일 운동에 앞장섰었지?

 

J: . 1985년에 한국 교회 평화통일 선언을 발표하고 1988년에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88통일선언)을 발표하기도 했고…. 88 통일 선언은 통일의 원칙을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민중 참여, 인도주의 원칙 이라는 5개의 원칙으로 정리해. 또한 군비 축소, 상호 불가침 선언, 한반도 비핵화지대 구축, 외국 군대의 점진적 철수 등이 포함되어 있었지.

 

이 내용은 기존의 한국 교회가 취해 왔던 반공의 입장을 비판하고,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한 셈이였어.

 

극우 개신교 세력들도 이런 흐름을 두고만 보지 않았어. 자신들의 반공’, ‘친미사상을 계속 설파하며 한국 개신교의 진보, 보수라는 두 흐름을 만들어 냈지.

 

 

 

A: 그렇다면 노태우 정권이 친화적이여서 종교계가 평화 통일 운동을 할 수 있게 된거야? 아니면 종교계가 이런 진보 흐름을 만들어 줘서 노태우 정권이 더 힘을 받았다고 해석해야 하나?

 

J: 아무래도 KNCC‘88통일선언은 노태우 정부의 ‘7.7 선언’(1988), ‘한국민족공동체통일방안’(1989), ‘남북기본합의서’(1992) 의 정신적 근간이 되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겠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남북기본합의서는 KNCC 88통일선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고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 주석과 면담하면서 발표한 자주평화통일 9개 원칙은 김대중 정부의 ‘6.15 남북공동선언의 토대가 되었지.

 

 

 

A: 보수 단체들은 이 시기 즈음에 한기총을 만들고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면서 KNCC 등의 진보 개신교 세력을 막으려 했었어?

 

J: 일단 1989 1월 한경직 목사는 한국 교회 원로(강원룡, 조향록, 지원상)들을 불러 놓고, 그 해12월에 한기총을 창립해. 한기총은 36개 교단과 6개 기관이 회원으로 참여했었지. 한기총 설립을 주도한 세력은 오직 반공에 앞장서 온 북한 출신 목사가 많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해.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많은 북한 출신 목회자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마법-요술봉같은 만능 신학을 우리 개신교 내에 던져줌 셈이야.

 

 

 

A: 한기총을 설립할 때도 정권의 도움을 받았으려나?

 

J: 극우 개신교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늘 정권에 결탁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기총의 설립도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었지. 노태우 정부가 반정부적인 개신교 진보 세력 KNCC에 맞서 극우 개신교 단체를 키우려고 했다는 주장이 있었어.

 

평화 통일 정책에 있어서는 서로 주고 받은 Spirit 이 있을지 모르지만 진보 기독교 단체는 노태우 정권 퇴진운동을 결의하며 노 정권이 국민이 요구하는 광주사태 해결, 5공 비리 청산, 민주화 실천 등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

 

 이런 분위기가 있다 보니 노태우가 슬쩍 한기총을 키워 준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생겼던 거지.

 

 

 

이미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진보 종교는 찍혀 있었고, 전두환 정권은 보수 교회 세력을 뒤에서 지지해 주는 활동을 해 왔었거든. 이런 분위기가 노태우 정권 때도 알게 모르게 한기총의 설립에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자연스레 추론해 볼 수 있지.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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