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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서구처럼 수백 년에 걸쳐 진보와 보수가 형성된 게 아니라, ​해방 이후 지금까지 몇십 년 동안 갈등을 압축적으로 경험해왔다.

 

이건 순전히 주관적 해석이므로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서구에서 진보의 역사는 시민권을 향한 투쟁이라고 할 수 있고, 시민권의 내용도 세 차례에 걸쳐 변화를 겪어 왔다.

제 1세대 시민권은 참정권이었고, 제2세대 시민권은 경제적 권리(복지권)이었다. 유럽에서는 전후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복지국가가 정착되었지만, 미국에서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이 복지권을 헌법 개정 조항으로 포함시키려다 갑자기 서거해 아직 시민권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제3세대 시민권은 자치권이다.

소수민족이나 문화를 지키기 위한 시민권인데 이를 헌법에 규정한 나라는 소수에 불과하다. 나는 제 3세대 시민권을 프랑스 68혁명의 참여민주주의 정신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19세기와 20세기는 ​더 많은 보통사람이 참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싸움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귀족에서 유산 계급으로, 유산 계급에서 평민으로, 그리고 노동자와 여성과 젊은이들로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참정권이 허용되는 방향으로 인류의 역사는 진보해 왔다.

​우리는 일제에서 해방됨과 함께 투쟁 없이 미군정에 의해 참정권을 부여받았다. 그 후 우리의 민주주의는 몇 차례 굴절됐고, 급기야는 독재정권의 등장으로 그 참정권마저 빼앗기게 되었다.

 

참정권을 향한 투쟁이 4.19, 5.18 그리고 6.10으로 이어졌다.

 

투쟁을 통해 드디어 참정권을 획득한 건 1987년 대통령 직접선거를 내세운 개헌운동의 승리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제1세대 시민권을 향한 운동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위한 운동이기도 했다.

 

1987년의 6.10 항쟁은 화이트칼라가 가세함으로써 성공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민중운동이라기보다는 지식인, 대학생, 중산층 위주의 제1세대 시민권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그랬듯이 경제권을 향한 노동자 정당의 제2세대 운동이 일어나면 제1세대 운동에서 진보적이었던 유산계급은 보수화된다.

열린우리당은 탈지역주의 정치개혁을 소명으로 내걸고 창당했기에 영국의 자유당과 유사한 면이 있다. 하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영국의 자유당과 참여정부는 달랐다.

 

노무현은 2002년 대선에서 낡은 정치를 청산하고 새 정치를 하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되었다.

​탈지역정당인 열린우리당의 탄생과 과반수 의석 달성, 노무현 정부의 정치개혁으로 한국민의 정치만족도는 2002년 말 아시아 최하위(25%)에서 2004년 초 1등(75%) 이 되었다.

정치개혁을 1년 만에 거의 완성했기에 노무현 대통령은 양극화를 의제화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에서 제2세대 시민권운동에 본격적으로 불을 댕긴 장본인이 노무현이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1980년대 후반에도 노동자의 인권을 변호하기 위해 싸웠다.

그러나 정동영은 노무현이 의제화한 제2세대 시민권을 2007년 대선에서 의제화하지 못했다.

 

그는 탈지역주의 정당인 열린우리당을 깨고 이도 저도 아닌 대통합민주신당을 탄생시켰는데, 선거에서 대패했고 신당은 정당으로서의 역할도 하지 못했다.

 

 

2008년 총선에서 참패한 대통합민주신당은 2012년 총선에서 혁신과 통합이라는 재야 시민단체 세력과 통합하면서부터 노동 분야 전문가를 대폭 공천했으며, 대선 후보가 된 문재인은 복지, 재벌개혁 등 좌파적 경제 공약을 대거 내걸었다.

 

민주당이 경제적 진보정당의 색채를 띠면서 호남의 기득권 정치인과 전문가 출신의 중도 정치인(박영선, 김한길, 변재일 등)이 안철수와 한 편이 되고, 비교적 진보적인 친노/민평련이 연대하는 본격적인 이념 갈등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광옥, 한화갑, 김경재 같은 호남 정치인들은 새누리당으로 넘어갔다.

이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정권교체를 함으로써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됐다고 믿기에 보수화 행보를 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호남에서의 분열은 민주당이 제2세대 시민권인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자 세대 간 이념 갈등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유럽 역사에서 살펴봤듯이, 제1세대 시민권에서 진보적이었던 자유당이 제2세대 시민권 운동이 등장하면서 몰락하거나 보수당에 흡수되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역사적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당은 김대중 대통령 때까지만 해도 중도보수정당이었지만, 2012년 이후 세계화와 양극화의 흐름 속에서 경제적 민주화와 제2세대 시민권을 향한 시대적 과제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호남을 중심으로 했던 60대 이상 민주화 세력이 제2세대 운동이 일어나면서 보수화되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

​중도보수적인 안철수와 호남 정치인들이 국민의당으로 뛰쳐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도 단지 문재인이 싫어서라기보다는 이념 갈등이 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호남 출신이었기에 민주당에 몸담았던 것이지 민주당이 경제적 민주화를 지향하는 정당이라서 온 게 아니었다.

 

김수환 추기경, 김동길 교수 등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던 지식인들이 민주화 이후 보수적으로 변화한 이유 역시 단지 나이 때문만은 아니다.

유럽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민주화 이후의 필연적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와 독재의 균열이 사라지자 민주화운동을 했던 일부 유산 계급이 보수화된 것이다.

 

호남인들은 모두 진보여야 한다는 가정 자체가 잘못이라고 본다.

 

​호남인들 중에도 기득권 세력이 있다.

 

우리의 소선거구 선거제도는 지역주의 토호 세력에는 큰 행운이다.

 

호남의 의원들은 공천만 받으면 천년만년 당선될 수 있다. 호남에서 민주당 다선의원이 보수화되는 건 당연하고, 때마침 등장한 국민의당은 민주당에 비해 경제적 쟁점에서 더 보수적이다.

따라서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합쳐야 한다는 주장은 과거로 회귀하자는 주장이나 다름 없다.

 

이러한 이념적 분열을 거치면서 지역주의가 약화되는 것이므로, 호남의 분열은 사실 한국 정치 발전에 매우 긍정적인 신호로 볼 수 있다.

민주당과 국민의당의 분열을 안타까워하거나, 서로 간에 원망하고 미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선거 역사에서 진보/보수라는 이념이 투표권을 행사하는 데 중요한 기준으로 등장한 건 1997년 대선 이후 2000년 총선에서다.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호남의 한이 풀리면서 호남인들의 분열이 시작된 것이다.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는 수도권에서 호남 출신 유권자들이 이탈한 것이다. 고소득, 고학력, 성공한 호남 출신 수도권 유권자들이 이익 투표를 하면서 한나라당을 찍기 시작했다.

 

더는 민주당을 찍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지역주의의 약화는 2000년 총선 때 시동이 걸렸다.

서구에서는 20세기에 좌우 대립이 있었다.

영국에서 자유당이 보수당에 일부 흡수되면서 사라지고, 노동당이 좌파 정당으로 등장해 복지권이 확립되었다.

그래서 20세기에는 ​경제적 민주화를 추구하면 좌파, 경제적 자유(사유재산권)를 추구하면 우파가 되었다.

​경제 문제가 정당을 가르는 핵심 균열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68혁명이 일어났다. 68혁명은 경직되고 비인간화된 공산주의에 대한 염증을 표출했다.

20세기의 자본이냐 노동이냐 하던 경제적 균열은 둘 다 물질주의 뿐이다.

물질주의는 빈곤과 전쟁 등을 겪은 세대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68세대는 ​2차 대전 이후 평화와 풍요 속에서 자란 중산층의 자녀들이다. 이들은 전후 세대로서 배고픔과 전쟁의 위협을 모른다. 이들에겐 물질이 더는 중요하지 않기에 진보와 보수, 좌와 우가 기본적으로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좌우가 서로 싸우면서 똑같이 권위주의적이라는 점을 혐오했다.

​권위주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집단주의에 기초한다. 집단주의는 집단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데, 이것이 유럽의 신세대에게는 설득력이 없었다.

경제가 풍요로워 질수록 인간은 개인주의적으로 변한다. 마치 물리학에서 온도가 올라갈수록 분자의 운동이 활발해져 고체에서 액체, 액체에서 기체로 변하는 것과 같다. 68세대에게는 물질보다 자아실현과 정의 같은 가치관이 더 중요했다.

예컨대 인권과 일상 속에서의 민주주의, 환경, 생태, 여성 등의 가치를 높이 사고 이를 위해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들이 물질 이후의 가치를 추구한다고 해서 탈물질주의자라고 부른다. 유럽은 1968년 이후 30년간 혁명적 변화를 거치며 21세기에 도달했다.

.................

민노당이 원내에 진입하면서 경제 균열이 한국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자, 진보언론과 지식인은 영국처럼 자유주의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사라지면서 민노당이 제1 야당이 되리라 기대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와 열린 우리당에 가혹하게 굴었다. 불행히도 한국은 분단과 6.25를 겪은 나라다. 빨갱이, 좌파 기피증이 민노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가로막았다. 이것이 우리가 유럽과 달리 제2세대 시민권을 성취하기도 전에 건너뛰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김대중 대통령이 인터넷 인프라를 구축하면서 세계 최강의 IT 국가가 되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인터넷은 시민에게 정보를 주며 정보는 곧 권력이다. 제2세대 시민권을 확립하기도 전에 권력을 가진 시민들이 제3세대 시민권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게 노사모다.

시민의 자발적 참여민주주의를 실천한 노사모가 한국 탈물질주의 운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은 인터넷을 활용해 대통령이 되었는데, ​미국의 오바마는 2008년에야 이를 벤치마킹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우리가 미국보다 6년이나 빨랐던 것이다.

​우파는 노무현을 좌파라고 공격했고, 좌파는 노무현을 신자유주의자라고 공격했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노 대통령은 "그럼, 참여정부가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거냐"고 한탄했다.

 

그랬더니 좌우 언론은 노 대통령도 스스로 참여정부를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인정했다며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게 된 시민들은 양쪽의 공격이 다 부당하다고 느꼈다.

노무현은 분명히 공공성을 추구했으면서도 세계화와 시장경제의 장점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탈권위주의적인 그의 모습이 좌우 정치인 누구보다 진보적으로 보였다. 이 때문에 나는 노무현 왕따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론을 보수, 진보가 아니라 우파, 좌파로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보인 노무현과 좌파 언론이 갈등을 보이는 이유는 좌파 언론이 노무현만큼 진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좌파 언론이 20세기 경제적 평등이라는 구좌파 이념을 추구한다면, 노무현은 21세기의 진보라고 할 수 있는 탈물질주의 이념을 추구했다.

​탈물질주의의 요체는 탈권위주의적이며, 이들을 유럽에서는 신좌파라고 부른다.

​신좌파는 좌파의 아류가 아니라 우파(시장)와 좌파(국가)를 모두 배격하고 제3의 영역에서 합리적 개인의 연대를 통한 공동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제3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진보적 자유주의'라고도 부른다.

영국의 자유당이 아니라 신좌파였던 노무현은 우파 언론뿐만 아니라 구좌파 언론과도 이념 갈등을 겪었던 것이다. 나는 늦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에게 그의 정체성을 찾아 주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님, 당신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21세기 진보적 자유주의자였습니다."

-[왕따의 정치학]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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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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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이승만,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 정권을 옹호했던 역사가 잘 기록되어 있다. 기만과 권모술수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노련함이 잘 들어 있는 사설들이 많다. 또한 [조선일보]가 왜 '노무현'을 그토록 싫어했는지도 잘 알 수 있는 유시민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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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민주화 운동가를 싫어한다.-

[조선일보]는 노무현을 싫어한다. 미워한다. 혐오한다. 사설과 기사를 보면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수없이 많은 이유가 있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노무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민주화운동 전력을 가진 사람을 싫어한다.

 

[조선일보]는 박정희를 민족의 지도자로 숭배하며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필요악이 아닌 역사의 필연으로 규정한다.​ 전두환의 쿠데타와 양민학살까지도 대놓고 지지했다. [조선일보]의 시각으로 보면 노무현은 '입으로 민주화를 떠드는 시끄럽고 무책임한 선동가'에 속한다.

아무 근거없이 [조선일보]를 험담하는 게 아니다. 지난날의 [조선일보]가 한 독재 찬양 행적을 보면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럼 먼저 지난날 행적부터 잠깐 보자.

 

사례가 하도 많아서 대표적인 것만 본다. 더 많은 사례를 확인하고 싶은 분들은 강준만이 쓴 [권력변환-한국언론 117년사]를 보시기 바란다.

[조선일보]는 5.16 쿠데타와 유신독재를 지지했으며 아직도 박정희를 민족의 영도자라고 찬양한다.

 

박정희와 방일영이 술동무라 그랬을 수도 있고, 서로 생각이 같기 때문에 술동무가 되었을 수도 있다. 다음은 박정희 쿠데타 사흘 뒤인 1961년 5월 19일 [조선일보] 사설이다.

<혁명의 공약과 국내외의 기대>

군사혁명은 이런 불행한 여건 하에서 보다 나은 입장을 마련하기 위하여 감행된 것으로서 이것이 거군적인 단결과 함께 국내외적인 찬사와 지지를 받게 된 소이가 실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5.16 쿠데타에 이어 1969년 3선개헌을 지지했던 [조선일보]가 1972년 10월 17일의 유신 쿠데타를 지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민주적 기본질서를 완벽하게 파괴하고 종신집권 체제를 구축한 뒤 새로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에게 [조선일보]는 연일 화려한 꽃다발을 바쳤다. 다음은 1972년 12월 28일 [새 역사의 전개 - 제 8대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을 경하한다]는 제목의 사설이다. 1934년 일본 왕의 생일 축하 사설 [봉축천장절]을 떠오르게 하는 명문장이다.

지난 4반세기에 걸쳐 지속되어온 냉전 속에서의 동족상잔과 남북 결원의 민족사에 10.17 구국의 영단으로 종지부를 찍고 평화통일의 새 역사를 위하여 정초한 박정희 대통령을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 취임토록 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미덥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무엇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5,6,7, 대나 대통령을 역임한 그를 또다시 환영하는 것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그의 영도력 때문이다. 그의 높은 사명감과 뛰어난 능력과 역사의식의 정당성 때문이다. 더욱 전망적인 민족통일의 사명감과 구구중흥의 신념에 불타는 영도자를 가졌다.

 

중앙정보부가 종종 비판적 언론인들을 지하 취조실에 끌어다 매운맛을 보이는 한편, 기자들의 검열거부운동과 권력비판을 봉쇄하기 위해 광고주를 협박해서 광고를 싣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동아일보]의 숨통을 조였던 시대에 [조선일보]는 번영의 토대를 구축했다.

 

조선일보사는 1969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최초로 일본 이토추 상사의 민간차관 400만 달러를 연리 6%에 들여와 코리아나 호텔을 지었다. 은행금리도 연 25% 를 넘던 그 시절로서는 엄청난 특혜였다.

[조선일보]는 훗날 군사반란과 내란행위로 처벌받은 전두환 일파의 1979년 12.12 쿠데타를 지지했고, 군부의 언론자유 탄압을 옹호했으며, 1980년 광주학살을 왜곡 보도해 역사의 진실을 감추었다.

1979년 12월 20일 사설에서 "군의 이러한 입장과 결의가 새삼 천명되었다는 것은 전국민의 공감과 지지를 받아 마땅"하다고 군사 반란을 예찬했다.

[조선일보]는 또한 신군부의 언론통제와 여론조작을 노골적으로 옹호했다.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인 협력이었다.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선우휘는 1980년 1월 30일 일본 [산케이신문]과 회견했다. [산케이신문]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앞장선 극우파 신문으로 유명하다. 이 회견에서 선우휘는 당당하게 말했다.

언론규제는 없는 것이 낫다. 하지만 한국에서 언론의 제약이 가해져도 하는 수 없는 상황이 있다. 4.19에서 5.16까지의 1년은 어떠했는가. 언론의 자유와 책임이 전혀 양립되어 있지를 않았다. 하룻밤 새 모든 신문이 정부에 대해 비판적으로 나서게 되고 1년 내내 연일 조석간을 통틀어 정부를 두들겨팼다. (....) 그 사태를 한국의 언론이 심각하게 반성하지 않고 5.16에 의해 언론규제를 받게 되자 이번에는 언론의 자유를 붙잡고 '슬픈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너무도 감상적인 처사이다.

​[조선일보]는 광주민주화 운동을 '폭도'들의 '난동'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신군부가 광주를 피바다로 만든 직후인 1980년 5월 28일 사설에 다음과 같은 거짓말을 늘어 놓았다.

지금 오직 명백한 것은 광주 시민 여러분은 이제 아무런 위협도, 공포도 불안도 느끼지 않아도 될, 여러분의 생명과 재산을 포함한 모든 안전이 확고하게 보장되는 조건과 환경의 보호를 받게 됐꼬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 비상계엄군으로서의 군이 자제에 자제를 거듭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광주항쟁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은 군부의 힘을 바탕으로 정치 권력을 찬탈하려 했다. 1980년 8월 21일 전군지휘관회의가 충성서약을 하고 전두환이 최규하를 축출하고 유신헌법에 따라 선거인단을 집합시켜 권좌에 오르자 [조선일보]는 즉각 '영웅 만들기'에 나섰다. 8월 23일과 28일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은 사설을 내보냈다.

국민 일반은 크게 안도와 고무를 간직했을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 (...) '8.21 군 결의'는 이러한 국민의 기대와 신뢰를 한층 더 공고히 뒷받침하고 보장하는, 일찍이 없었던 국가 간성들의 담보의 표징이다. 건국 이래 모든 군이 한 지도자를 전군적 총의로 일사분란하게 지지하고 추대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그러한 점에서 '8.21군 결의'는 또한 역사적으로 깊은 함축을 간직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우선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을 온 국민과 더불어 축하하며 그 전도에 영광이 있기를 희원해 마지 않는다.

(...) 전 대통령의 취임으로 바야흐로 새시대 새역사는 개막되고 있으며 국민들은 전 대통령 정부에 새로운 소망과 기대를 걸고 (...)

 

전두환이 1987년 4월 13일 이른바 '호헌선언'을 통해 5공헌법에 따라 대통령 자리를 노태우​에게 물려주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을 때도, [조선일보]는 "현행 헌법에 따른 당초의 단임 공약조차 제대로 이행할 수 없는 시간적, 상황적 위기에 봉착할 우려가 짙게 깔려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며 맞장구를 쳤다.

[조선일보]는 '1등신문'이 아니었다. 1980년도 이 신문의 매출액은 161억 원이었다. [동아일보](265억원), [한국일보](217억원)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이 끝난 1988년에는 [조선일보]가 매출액 914억 원으로 [동아일보](885억원), [한국일보](713억원)을 앞질렀다.

 

조선일보사가 받은 특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월간조선]이다. 전두환은 언론통폐합 조처를 통해 제 마음대로 매체를 없애고 만들었다. 예컨대 1980년 [월간중앙]이 폐간된 시점에서 조선일보사는 [월간조선]을 창간했다.

이런 [조선일보]가 1981년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운동에 뛰어들었고 1987년 6월을 아스팔트 위에서 보낸 노무현을 반길 리 없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영도자로 찬양한 [조선일보]가 보기에 노무현은 '역사적 정통성'이 없는 인물이다.

-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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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밤의 대통령' 방일영

 

그런데 방일영이 '밤의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은 건 사실이다. 앞서 인용했던 한홍구의 글에 그 사연이 나와 있다.

 

그런 칭호를 내린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절대권력자 박정희였다. '밤의 대통령'이 의미하는 바도 전혀 다르다.

방일영은 박정희의 가까운 술동무였다. 군사반란으로 갑자기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요정에 가보면 방일영은 화술로나 주량으로나 늘 좌중을 휘어잡았다. 박정희가 보기에 자기에 대한 마담이나 기생들의 대접은 깍듯하기는 해도 거리감이 있었지만 방일영에 대해서는 대접이 극진하면서도 정감이 넘쳐났다.

 

                        -젊은 시절 방일영 -

 

긴 방일영은 술이 거나해지면 동석자들의 지갑까지 털어 기생들에게 듬뿍 돈을 쥐어주었다니 누군들 마다했을까? 나이는 박정희가 다섯 살 위였지만 술집 출입의 경력으로 보나 여자들 다루는 솜씨로 보나 방일영은 '촌놈' 박정희보다 한참 위였다. 박정희는 자신을 '대통령 형님'이라 부르는 방일영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팔자가 좋은 사람'이라며 부러워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낮에는 내가 대통령이지만 밤에는 임자가 대통령이구먼" 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좋게 이야기하면 당대의 풍류객이라는 것이고, 좀 진하게 이야기하면 최고의 '오입대장'이라는 것이다.

 

조선일보사가 펴낸 방일영의 전기에 "권번 출신 기생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사람이 바로 방일영"이란 이야기까지 버젓이 나오는 것을 보면 박정희가 방일영을 그렇게 부른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후 1987년 6월항쟁까지 40여 년 동안 우리 언론은 권력의 혹심한 탄압을 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광신적 반공주의와 군대의 폭력을 무기 삼아 언론자유를 목졸랐고, 전두환 정권은 날마다 보도지침을 내려보내 신문과 방송 편집자를 무위도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입을 가젓스나 생벙어리 행세를 하여야 하엿스며 할 말은 만헛스나 호소할 곳이 업섯"고 "죽으라면 말업시 죽는 시늉을 하지 안흐면 안 될 환경에 노혀 잇섯"던 시대라고 말하지 않는다.

[디지틀조선일보]에 올라와 있는 회사 소개를 보라.

 

1960년 이후는 [조선일보]의 본격적인 발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명 칼럼니스트들이 [조선일보]를 무대로 활약을 했으며, 이를 통해 [조선일보]는 오늘날의 명성에 토대를 쌓았습니다. 이후 사회의 문제점을 정확히 전달하고 비판하는 기사, 그리고 세계와 국내의 동향을 정확하게 파악한 각종 기획사업 및 행사로 성가를 높였습니다.

방응모가 [조선일보] 복간사에서 내비친 변명, 그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없는 이 회사 소개는 [조선일보]의 정치적, 사상적 정체성을 증명한다. 여기에는 1960년대 이후 [조선일보]는 탄압을 받은 흔적이 없다. "군사독재 정권에 결탁해서 알랑거리고, 특혜 받아 가지고 뒷돈 챙겨서 부자가 되었다"면, 민주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당연히 사죄를 해야 한다. 궁색한 변명이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모든 것을 당당하게 했고, 그래서 지금도 너무나 당당하다.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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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노무현 대통령이 2001년 6월 7일자 [미디어 오늘] 이영태 기자와 나눈 인터뷰에서 그의 '언론관', '조선일보관'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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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는 좋은 언론과 나쁜 언론이 있다.

정당을 나눌 때 보수와 진보로 구별한다.

그러나 이를 나누기 전에 정당은 정통성 합리성 신뢰성을 갖춰야 하며 이는 언론도 마찬가지다.​

언론이 기본적으로 합리적이고 정당한 방법으로 보도하는가,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가, 사실의 취사선택에 있어 합리적 균형을 유지하는가, 일관된 관점을 견지하는가 등이 중요하며 이 원칙을 지키면 좋은 언론, 합리적 언론이라 할 수 있다.

언론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고 공론화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형성하는 만큼 정확한 사실과 가치 있는 보도를 해야 한다.

정치인을 비판하기에 앞서 스스로 과거를 고백하고 사죄해 겸손하고 품위 있는 언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언론이 달라지면 정치도 달라지고 국민도 달라진다.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이론이 공론화 과정을 거쳐 사회적 통념이 됐을 때 법과 제도를 바꿀 수 있는데 공론화와 통념에 기여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며 언론을 통해 변화의 계기가 마련된다.

​도대체 언론이 비판하는 실업자 문제, 탈북자인권, 의약분업 등에 대한 대안이 뭐냐고 묻고 싶다.

언론개혁은 사주의 소유지분 제한, 편집권과 인사권 독립이 우선이며 언론간의 경쟁은 보도의 품질로 이뤄져야 한다.

언론사가 배송 시스템의 기득권이나 우위를 갖고 경쟁하는 것은 문제이며 공동배송제 등이 필요하다.

앞으로는 광고주로부터의 독립도 큰 문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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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월 유신 ~ 6월 항쟁 : 직접적 언론통제와 종속적 유착관계

 

독재권력이 국민의 주권을 박탈한 시대였기 때문에 언론이 사회적 권력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정치권력은 언론시장 신규 진입을 봉쇄하고 취재와 보도의 자유를 제한했으며, 언론인에 대한 협박과 테러를 자행하고 보도와 편집에 직접 개입했다.

협조적인 언론사에 대해서는 이윤 추구의 기회를 열어주되 권력의 나팔수가 되기를 거부하는 언론사에 대해서는 경제적 기반을 공격했다.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폐합, 보도지침은 이 시기의 권언관계를 증언하는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종속적 유착관계는 전두환 정권의 몰락이 분명하게 예고되었던 6월 항쟁 전야에 가서야 비로소 동요의 조짐을 보였다.

 

 

2) 6월 항쟁~2001년 1월:선택적 상리공생과 제한적 대립

6월항쟁의 승리와 더불어 선거를 통하지 않고는 정권을 창출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

독재시대의 종속적 권언유착은 종말을 고했다. 권언관계는 대등한 상리공생으로 발전한다. 양측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만큼 정치권력은 유력 언론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했다.

김영삼 정부가 언론사 세무조사를 유야무야 처리한 것은, 정치권력이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독자적인 사회적 권력으로 언론이 성장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언론사는 자기의 입맛에 맞는 정치권력이 탄생하도록 적극적으로 국민의 의사 형성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적 상리공생은 안정성이 약하다.

다수 국민의 여론이 정치권력에 비판적일 경우 언론은 이윤과 사회적 권력의 확대를 위해 정치권력과 제한적 대립각을 연출한다.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양김 혐오증 유발(87년)과 노골적인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92년)를 했던 유력 언론사들이 이들의 집권 후반기에 가한 대정부 공격은 대등한 상리공생이 얼마나 불안정한가를 보여준다.

김대중 정부가 2000년도에 정기 세무조사를 하지 않는 등 집권 초기 3년 동안 지난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했던 유력 언론사와의 대립을 회피한 것은 소수파 정권이라는 약점과 경제난 등 불리한 환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권세력으로서 선택적 상리 공생의 수혜자가 되려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3) 2001년 1월~현재: 선택적 상리공생의 일시적 붕괴

2001년 1월 김대중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 이후 상황은 1987년 이후 약 15년간 계속되어온 권력과 언론의 선택적 상리공생과 제한적 대립관계가 일시적으로 무너진 과도기다.

김대중 정부는 유력 신문사와의 상리공생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고, 합법적 수단인 세무조사를 통해 언론사의 물질적 토대와 사주들의 특권을 공격하고 신문고시를 부활시켜 신문시장의 불공정 경쟁행위를 규제하고 나섰다. 그러나 구속된 유력 신문사 사주들은 보석으로 풀려났다.

 

부활한 신문고시는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언론개혁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동력과 국민의 지지를 상실했다.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의 선택적 상리공생이 어떤 식으로 되살아날지 알 수 없다.​

 

-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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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10월 유신 이후 민주화운동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일으켜 민중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의 민주화운동은 1987 6월 민주항쟁의 승리와 더불어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은 다수의 국민이 원하면 평화적, 합법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 우리의 민주주의는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 하지만 아직 성숙하지는 않았다.

 

민주적 제도가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에 맞는 생각을 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성숙한 민주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민주주의는 제도와 행태, 의식의 복합물이다.

물론 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1987년 가을 여야 정당들이 합의하고 국민이 승인한 제도의 틀 안에서 작동해왔다.

그 제도의 틀을 ‘1987년 체제라고 하자. 1987년 체제는 민주화 이전부터 존재했던 낡은 의식과 문화와 결합해 우리 민주주의의 성숙을 더디게 했다.

 

1987년 체제는 특정한 제도와 의식과 행태의 결합이다. 여기서 제도의 핵심은 대통령중심제와 5년 단임 규정, 결선투표가 없는 선거법,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다. 이 제도는 지역주의라는 낡은 의식, 동원정치라는 후진적 문화와 결합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한국적 특성을 만들어냈다.

 

 

 

-1 3김의 시대, 대통령 5년 단임규정, 국회의원 소선거구제-

 

1987년 체제는 현행 헌법과 선거제도를 만든 정치 지도자 ‘13의 동상이몽과 이해타산이 만든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 5년만 하고 나가는 데 합의했다. 대통령 단임 규정은 25년의 군사독재로 말미암은 정치적 인사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들은 그 취지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헌법 제 128 2항에 임기를 늘리거나 중임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을 할 경우 개정 조항은 현직 대통령에게 적용하지 않는다는 안전장치까지 넣어두었다.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모두 결선투표제는 도입하지 않고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채택한 것은 ‘13의 기득권을 지키고 정치적 사행심을 충족시키는 방안이었다.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하면 전국 평균 득표율이 높은 정당보다 특정 지역에서 몰표를 받는 정당이 유리하다. ‘13은 각자 대구, 경북, 부산, 경남, 호남, 충청지역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결선투표를 배제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면 1차 투표 순위가 어떻게 되든 양김 가운데 한 사람과 노태우 후보의 맞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노태우는 그것이 두려웠다. 김종필은 결선투표까지 갈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야권 단일 후보 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으며 표가 잘 나뉘기만 하면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6월 민주항쟁도 4.19 혁명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권력주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재야와 학생운동 세력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을 이루기 위해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조직하는 데는 유능했지만 그 승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 능력은 없었다.

거리시위에 참여해 민주주의 정치 혁명의 본대를 형성했던 시민들은 ‘13이 합의한 1987년 체제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알지 못했다. 결국 6월 민주항쟁의 후위였던 야당의 두 지도자가 사실상 모든 것을 결정할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1987년에 개정한 현행 헌법에 큰 문제가 있는 아니다.

권력구조 관련 조항을 제외하고 보면, 현행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분명하게 보장한 민주적 헌법이다.

 

 

 

-새로 개정된 헌법에 투영된 6월 민주항쟁의 성과-

 

우리 헌법은 국민의 저항권을 인정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명시했다. 10조부터 37조까지 신체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노동3권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비롯한 시민의 기본권을 명확하게 보장했다.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국회와 사법부의 권한을 대폭 확대해 권력의 분산과 상호견제를 강화했다.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부활시키고 법관의 독립성을 높였으며 헌법재판소를 설치했다.

 

최저임금제를 명시하고 성장, 안정, 적정한 소득분배, 독과점 폐해방지, 경제민주화를 위해 국가가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었다. 시각에 따라 비판할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헌법은 민주주의 선진국의 헌법에 견주어 크게 손색이 없는 훌륭한 헌법이 되었다. 나는 이것이 바로 헌법에 투영된 6월 민주항쟁의 성과라고 본다 .

 

 

 

-‘양김 분열, 노태우 당선-

 

1987 10 27일의 헌법 개정 국민투표에 78%의 유권자가 투표했고 93%가 찬성했다. 12 16, 1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무려 17년 만에 대통령을 자기 손으로 뽑게 된 국민들은 기쁨에 들떴다. 하지만 내게 이 선거는 끔찍한 악몽이었다.

나는 양김이 후보 단일화를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후보 선출방식을 둘러싼 줄다리기 끝에 김대중 씨가 추종자들을 통일민주당에서 탈당시켜 평화민주당을 창당했지만 어떻게든 대선에는 한 사람만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대중 총재가 좀 더 훌륭한 사람인 만큼 최악의 경우에는 그가 양보를 할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다. 후보 단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야인사와 대학생들이 양당 당사를 점거해 농성을 하면서까지 단일화를 요구했지만 양김은 끝내 거부했다. 평민당에서는 이른바 ‘4자 필승론을 퍼뜨렸다. 객관적으로 보면 로또 당첨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두 지도자는 각자 출마해 끝까지 선거를 치렀다. 야당이 분열되었고 재야가 분열되었으며 국민도 결국 분열되었다.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유효표의 36.6%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는 28%,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27.1%를 획득했다.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의 득표율은 8.1% 였다. 유신체제와 제5공화국을 같은 세력의 정권으로 보면, 55.1%의 유권자가 정권교체를 지지했는데도 전두환 정권이 연장된 것이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민주화를 이루어놓고서는 결국 12.12 군사반란과 광주학살, 5공화국 강권통치와 권력형 부정부패의 제 2인자를 대통령으로 뽑았으니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김대중의 후회, 이인제의 의도치 않은 선한 역할-

 

김대중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때 후보 단일화를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김영삼은 노태우, 김종필과 손잡고 민주자유당을 만들어 보수정권의 대통령이 되었다.

김대중은 4수 끝에 겨우 대통령이 되었고 유신본당김종필과 권력을 분점한 탓에 소신대로 국정을 운영하지 못했다. 후보 경선에서 패배하고서도 독자 출마를 해서 무려 500만 표를 분산시켜준 이인제 후보가 아니었다면 김대중 후보는 이회창 후보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인제 씨는 선한 의도가 있어야만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삶의 역설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경선탈락-탈당-신당창당-독자출마로 이어진 그의 반칙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것 덕분에 진보정권 10년을 경험할 수 있었기에 나는 텔레비전에서 그를 볼 때마다 감사의 마음을 되새기곤 한다.

 

 

 

 

1987년 대통령 선거는 결코 공정하고 깨끗한 선거가 아니었다. 선거를 약 보름 앞두고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이 터졌다. 정부는 범인 김현희를 선거일 직전에 김포공항으로 데리고 들어와 모든 신문과 방송의 뉴스를 도배함으로써 거센 북풍을 일으켰다. 정부여당은 공무원과 통반장을 동원해 유권자에게 돈을 뿌렸다. 공무원들이 시청, 군청 지하 강당에서 밤새 현금을 봉투에 담는 작업을 했다. 노태우 후보의 여의도 유세 때 마포대교는 인파로 가득 찼다.

차량 통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포대교를 도보로 건너 여의도에 가서 조직책에게 돈 봉투를 받은 다음 다시 걸어서 마포로 나왔다. 전두환 대통령이 재벌에게 천문학적 규모의 정치자금을 걷어 노태우 후보를 지원했다. 야당 후보들도 각자 구할 수 있는 만큼 돈을 구해서 썼다.

그러나 어쨌든 노태우 정부는 국민의 선택으로 수립되었다. 노 태우 대통령은 양김의 분열이, 그리고 북풍에 휘둘리고 부패선거를 용인한 우리 국민들의 의식과 행태가 만든 대통령이었다.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1988 4 26일 제 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집권당인 민정당은 125석을 얻었다. 그러나 광주, 전남,전북은 단 한 석도 없었다. 평민당은 70석을 얻어 제 1야당이 되었지만 수도권과 광주, 전남, 전북에서만 당선자를 냈다. 통일민주당은 주로 수도권과 부산, 경남에서 59석을 얻었다. 공화당은 35석을 얻었는데 대부분 충청지역 의석이었고, 영남,호남에서는 한 석도 없었다. 여야 4당 득표 기반은 1987 12월 대통령 선거 때와 거의 비슷하게 나타났다. 1980년대 내내 민주 대 독재로 양분되어 있던 민심이 대구, 경북, 부산, 경남, 광주, 전남, 전북, 대전, 충남, 충북 등의 지역으로 갈라진 것이다.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 : 민주자유당(이후 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의 등장-

 

그런데 1990년 초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 여당을 만들었다. 그러자 지역구도는 호남 대 비호남으로 단순화되었으며 25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민주자유당을 신한국당으로 바꾸었다. 이회창 총재가 신한국당을 한나라당으로 바꾸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을 새누리당으로 바꾸었다. 김종필 총재는 김영삼 대통령과 헤어져 자민련을 만들었으며 잠시 동안 김대중 대통령과 손잡고 국민의 정부 권력을 공유했다. 새누리당은 1987년 이후 한국 정치를 이끌어 온 보수정당을 모두 통합한 정당이다.

 

 

 

 

 

-진보 당의 변천사-

 

평민당은 재야세력을 흡수하고 3당 합당을 거부한 통일민주당 잔류세력과 통합하면서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었다. 열린 우리당이 창당된 2004년 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했다가 총선에서 참패를 당했다. 하지만 결국 열린우리당과 다시 합쳤고, 2014년에는 안철수 박사의 조직과 통합해 새정치 민주연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정당은 박정희 시대 신민당의 전통을 물려받은 진보적 자유주의 정당이다.

 

 

 

-재야 인사들의 국회 입성-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민주화운동의 전위였던 재야와 학생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농민운동, 각계각층 지식인운동에 변화를 요구했다. 그들은 정치, 민중운동, 시민운동으로 갈라져 점차 1987년 체제에 통합되었다. 정치 진입의 주요 통로는 김대중당이었다.

김대중 후보가 3위로 낙선해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던 1987 12, 100여 명의 재야인사들이 평민당에 입당해 다음 해 총선에서 대거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김대중 총재는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까지 여러 차례 이런 방식으로 재야 인사와 학생운동 출신 신인을 영입했다.

이해찬, 임채정, 한명숙, 장영달, 박영숙, 심재권, 우원식, 김민석, 신계륜, 임종석, 송영길, 우상호, 이인영, 호인회 등이 모두 이런 경로로 정치에 진입했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김영삼당도 그런 역할을 했다.

노무현, 김광일 등이 1998년 통일민주당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정치군인 집단인 하나회를 숙청하고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도입해 인기가 치솟았던 1994년에 민자당을 신한국당으로 개편하면서 민중당 출신 이재오, 김문수와 학생운동 출신 심재철, 손학규 등을 영입했다.

1997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는 김대중 총재의 정계복귀에 반발해 야권통합추진위원회에서 갈라져 나온 이부영, 김부겸, 제정구 등을 받아들였다. 2000년 제 16대 총선 때는 김영춘, 원희룡, 고진화 등 소위 386 세대 학생운동 리더 일부가 이회창 총재의 한나라당에 들어갔다.

 

 

 

- 3당의 등장-

 

노동자, 농민을 기반으로 한 진보정당은 아직도 현실정치에 안착하지 못했으며 다른 제3당 실험도 성공하지 못했다.

1988년 한겨레 민주당, 1992년 정주영 회장이 만든 국민당과 이기택 씨의 꼬마민주당’, 2008년 등장했던 문국현 대표의 창조한국당, 2010년 지방선거에 나선 국민참여당 등 새누리당과 민주당 양당체제를 균열시키려 한 모든 시도는 다 실패로 끝났다. 결선투표 없는 국회의원 소선거구제와 지역구도라는 진입장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안철수 의원의 제3당 시도 역시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막을 내렸다. 결국 우리 정치는 여전히 1987년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014 6.4 지방선거를 보수-자유주의 양당체제의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었다.

 

…………………..

 

또 한 갈래는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도시빈민운동 등 소위 기층운동또는 민중운동에 투신했다. 그들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여러 대기업 노동조합과 금속노조를 비롯한 산별연맹, 전교조와 언론노조 등의 공공부문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그 토대 위에서 민주노총을 세웠으며 전국 농민회총연합 탄생을 도왔다. 전국 각지의 다양한 빈민운동단체와 영세상인단체가 탄생하는 과정에도 기여했다. 그들은 각계각층의 대중이 생활에서 느끼는 요구를 기반으로 스스로를 조직하고 정치적으로 각성해야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것을 토대로 진보정당을 만들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민중후보 백기완선거운동을 시작으로 정치적 결집을 시도한 그들은 민중당 실험을 거쳐 민주노총과 전농을 조직적 기반으로 한 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

 

민주노동당은 2004 17대 총선에서 열 명의 당선자와 13%의 정당득표율을 기록해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내부의 노선투쟁과 조직운영의 비민주성 문제로 분열과 이합집산을 거듭한 끝에 정의당, 통합진보당, 노동당 등 여러 군소정당으로 갈라져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시민운동의 발전-

 

세 번째 갈래는 시민운동이었다. 첨여연대,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소비자 생활협동조합,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예술인총연합, 인도주의실천의사회, 건강실천약사회, 참교육학부모회, 인권운동사랑방, 정신대문제협의회, 여성민우회, 민주언론시민연합, 어린이보육공동체, 빈곤층자활운동단체, 마을공부방 등 민주화 이후 그 종류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자생적 시민운동단체가 탄생했다.

1988년 시민들이 주주가 되어 [한겨레] 신문을 창간한 것도 일종의 시민운동이었다. 시민운동의 첫 세대 주역들은 거의 대부분 민주화운동의 용광로에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이 흐름을 체현한 대표적 인물로는 박원순 서울시장과 환경운동연합 최열 의장을 거명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시대의 민주화 운동-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시대의 민주화운동은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저항운동에서 헌법정신을 실현하는 시민참여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시민참여운동은 종종 격렬한 반정부투쟁을 동반했다. 민주주의 제도는 다시 세웠지만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짓밟는 국가권력의 공안통치 행태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1989 3문익환 목사의 북한 방문이었다. 그는 통일논의의 물꼬를 트기 위해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평양에 가서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북한의 수뇌부 인사들을 만났다. 노태우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 공안통치로 기울기 시작했다.

 

 

 

-임수경의 북한 방문 사건, 전대협->한총련-

 

4.19 혁명 직후 대학생들이 남북학생회담을 추진했던 것처럼, 6월 민주항쟁 이후 대학생들도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NL 계열이 주도권을 쥔 학생운동은 반미자주화투쟁의 일환으로 통일운동을 폈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외국어대학교 학생 임수경의 북한 방문사건이었다.

그는 일본과 서베를린, 동베를린을 거쳐 1989 6 30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한국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임수경을 평양 시민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살벌한 공안정국이 조성되었다. 전대협은 1993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으로 재편되었고 정부는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노태우 정권의 탄압과 유서대필사건-

 

1990 1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전격적인 3당 합당으로 국회는 개헌의석을 확보한 민자당의 독무대로 변했다. 정부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는데 이것은 반정부세력에 대한 정치적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국회를 완전히 장악한 노태우 정부는 힘으로 대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을 제압하려 했다. 그런 상황에서 1991 4월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시위 도중 경찰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가는 시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두 달 동안 전국에서 2,361회나 반정부집회가 열렸고 열세 건의 분신과 의문사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안기부와 검찰이 분신한 청년활동가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해 주고 자살을 교사했다는 혐의를 조작해 아무 죄도 없는 강기훈 씨를 구속한 유서대필사건을 만들어 냈다.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죽음의 굿판을 거두라면서 재야와 학생운동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해 파문을 일으킨 것도 이때였다.

 

 

 

-민통련->전민련->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6월 민주항쟁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중심으로 결속해 있던 재야 진보세력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공동대표 이부영, 이창복)을 거쳐 1991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으로 확대 재편되었다. 노동자, 농민, 대학생 등 각계각층의 운동단체 14개와 13개 지역운동단체가 결합한 전국연합은 1997년에 사실상 해소되었다.

 

 

 

2008년의 공식 해산 이후에는 한국진보연대로 전환되었다. 경기동부, 울산, 인천 등 NL 계열 지역운동단체들은 전국연합이 사실상 해소된 1997년 이후 조직적으로 민주노동당에 결합해 당권을 장악했다. 경기동부연합과 울산연합은 현재 통합진보당으로 결속해 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정권-

 

누가 하는 어떤 것이든, 민주주의와 관련한 헌법의 규정을 실현하려는 활동은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대통령에 대해서든, 정치에 대해서든, 통일문제에 대해서든, 혁명에 대해서든, 그 무엇에 대해서든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헌법이 우리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정부가, 또는 압도적 다수의 국민이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위한 것이 아니다. 대다수 국민이 터무니없다고 판단하는 견해까지도 제한 없이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

비록 진리가 아닌 견해라 할지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그것을 제약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헌법의 정신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다. 노태우 정부는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에 대한 대학생과 시민들의 의사표현을 탄압했다.

 

 

 

-김영삼 정부와 민주화 운동-

 

김영삼 정부는 노동법을 날치기했다. 1996 12 26일 새벽, 신한국당 소속 의원 154명이 야당에 회의 개최 사실도 통보하지 않은 채 버스를 대절해 국회 본회의장에 몰래 들어가 파견근무제, 정리해고제, 파트타임근로제와 변형시간근로제 등 노동자의 지위에 엄청난 악영향을 주는 조항이 담긴 노동관계법을 의결했다.

민주노총이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를 요구하는 총파업을 시작했다. 공안당국이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체포조를 투입하는 등 초강경 대응에 나섰지만 하루 최대 35만 명 넘게 참여하는 등 파업은 더욱 확산되었다. 천주교 사제들의 시국미사를 시작으로 대학교수와 지식인, 각계각층 단체의 노동법 재개정 요구 서명발표가 줄을 이었다.

농민들은 쌀과 음식을 싣고 와 농성 노동자를 격려했으며 대학생과 시민들의 격려 방문과 파업을 지지하는 신문광고가 줄을 이었다. 해외교민들도 정부를 규탄하고 파업을 지지하는 집회를 벌였다. 내가 있던 독일 마인츠대학교 한국 유학생들도 돈을 모아 [한겨레]에 총파업 지지 생활광고를 냈다.

 

 

 

-노동운동의 중요성과 김영삼의 사과-

 

한 달 가까이 이어진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 투쟁 분위기는 마치 6월 민주항쟁 전야 같았다. 개정 노동법의 내용도 문제가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정부가 국회법의 의결 절차를 지키지 않았고 헌법이 보장한 노동 3권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임금과 근로조건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는 법률 개정을 막기 위해 노동자들은 파업을 할 권리가 있다.

파업을 하면 생산이 중단되고 기업이 타격을 받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업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지 않도록 성의를 다해 교섭해야 한다. 만약 국민경제에 악영향을 주고 기업 경영에 손실을 입힌다는 것을 이유로 파업행위를 처벌한다면 노동조합 그 자체가 의미가 없으며 노동3권을 보장한 헌법 조항은 효력을 잃게 된다.

노동자가 아닌 종교인, 지식인, 농민, 대학생, 시민들이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를 요구하는 총파업을 지지하고 연대한 것은 헌법정신과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이 날치기 행위에 대해 사과했고 국회는 임시국회를 열어 노동법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김대중 정권과 민주화 운동-

 

1997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룸으로써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성숙해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공안통치를 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야당과 언론의 입을 막거나 시민들의 기본권 행사를 제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정부와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부당하게 억압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견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김대중 대통령이 정리해고제를 도입하는 등 노동법을 개정함으로써 노동자의 지위를 현저히 약화시켰다. 1996년 정부여당이 날치기 처리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내용이었다. 정부는 정리해고제 반대 파업을 경찰력으로 해산하고 주동자를 구속했지만 대규모 파업이나 시민사회의 연대투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구제금융을 제공한 IMF 가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리해고제 도입을 강요했다. 둘째, 김대중 대통령은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노동계와 합의하려고 노력했으며 고용을 유지하는 기업을 지원하는 등 정리해고의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국민들이 벼랑 끝에 몰려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심정에 공감하면서도 정부를 심하게 비난하지는 않은 것이다.

 

 

 

-노무현 정권과 민주화 운동-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권력의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평검사들과 치열한 공개토론을 함으로써 대통령이 검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 국정원장의 독대보고를 받지 않았다.

자신의 대선자금 가운데 일부가 불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국민에게 사과했다. 한국-칠레 자유무역협정(FTA) 폐기를 주장하며 서울 도심에서 시위를 하던 농민이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사고가 났을 때도 공개적으로 사죄하고 경찰청장을 경질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손잡고 대통령 탄핵을 추진했을 때 열린우리당 의원들에게 육탄으로 저지하지 말라고 권했다. 국회에 탄핵권이 있고, 탄핵을 의결해도 헌법재판소 결정이 남아 있는 만큼 헌법 절차에 따라 다투는 것이 옳다고 했다. 이라크 파병 등 중요한 문제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통령과 다른 견해를 밝혀도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도 민주주의 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3년에 일어난 부안사태였다. 산업자원부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사용 후 핵연료가 포함된 저장 시설인지 아니면 중저준위 방사선폐기물만 저장하는 시설인지 정보를 정확하게 제공하지 않았다.

게다가 부안 군수는 부안 군민과 인접 시, 군 주민들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고 유치 신청을 했다.

대통령은 그런 사실을 제대로 보고받지 못한 채 정책 결정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정부가 국민을 속이고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환경운동단체가 중심이 된 부안 핵폐기물 저장시설 반대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졌고 시위대와 경찰의 심각한 충돌을 야기했다.

 

결국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재공모 절차를 거쳐 주민투표 찬성률이 가장 높았던 경주시에 방폐장을 설치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칠례 FTA 와 한- FTA 체결, 이라크 파병, 용산 미군기지 평택 이전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사태가 일어났다. 그러나 정부는 정부대로 절차를 지키려고 노력했고 범국본은 범국본대로 헌법상의 기본권을 충분히 행사하면서 의사표시를 했다. 민주주의 국가 어디에서나 흔히 일어나는 정상적인 과정이었던 것이다.

 

2004년 봄의 탄핵규탄 촛불집회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시민들이 현직 대통령의 편이 되어 자발적으로 전국적, 동시다발적, 연속적 집회시위를 벌인 적은 그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탄핵규탄 촛불집회의 투쟁대상은 야당이었다.

임기가 넉 달 밖에 남지 않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뽑은 임기 5년 대통령의 직무를 겨우 1년 만에 정지시킨 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분개했다.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얻고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를 기각함으로써 대통령 탄핵은 야당이 국회의 헌법적 권한을 오남용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 촛불시위는 국회가 국민의 주권을 부당하게 침해한 데 대한 항의였으므로 헌법을 지키는 민주화운동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과 민주화 운동-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 미국산 쇠고기로 인한 광우병 발병 확률은 매우 낮았다. 문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을 완화하는 결정을 내린 과정이었다. 아무 예고도 하지 않고 최소한의 공론화 과정도 없이, 국민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대통령과 정부가 그런 결정을 한 것이다.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가 다른 일도 모두 그런 식으로 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여중생들이 광화문 인근에서 작은 촛불집회를 시작했을 때 그것이 국민운동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촛불집회는 재야, 학생운동, 시민단체, 야당 등 전통적인 민주화운동 세력과 전혀 상관없이 젊은 어머니들과 직장인들에게 번져나가 거대한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집회시위로 확산되었다.

물대포와 최루액을 동원한 경찰의 진압과 명박산성이라고 불린 경찰차벽에도 굴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거짓 사과 말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지만, 촛불집회는 자발적으로 행동하면서 수평적으로 연대할 줄 아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예고했다.

 

 

 

-박근혜 정권과 민주화 운동-

 

2013년 시민들은 다시 촛불을 들었다. 이번에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 국정원과 기무사,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이 불법 개입한 것을 규탄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국미사를 열었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가기관을 정치적으로 사유화해서 같은 당의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국민을 상대로 온라인 심리전을 벌인 조직범죄였다.

지금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민참여의 시대다. 2008년 이후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지만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런대로 작동하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가 헌법을 무시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행태를 보이지만 권력의 제한과 분산, 상호견제를 통해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 역시

국가운영의 많은 분야에서 민주화의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정책과 행태를 보이는데, 그 기반은 불합리

한 제도나 경찰과 군대의 폭력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거대 보수언론

재벌, 공안세력이 반복 주입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시민들의 의식이 그 기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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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노무현과 종교

 

J: 노무현은 세례까지 받은 천주교인이었는데 종교 활동에 열심이 있진 않았어. 김수환 추기경이 하느님을 믿느냐?” 고 물었고 노무현은 희미하게 믿는다고 답했고, “확실하게 믿느냐?” 고 재차 묻자 노무현은 잠시 고개를 떨구더니 앞으로 프로필 종교란에 방황이라고 쓰겠다고 대답했어.

 

최초의 반미 사건인 부산 미문화원 사건 때 만난 송기인 신부의 권유로 성당에 다니긴 했지만 성실하게 교리반에 참여하진 않았었다.

 

노무현은 왜 성당에 안 나오냐고 다그치는 신부에게 신부님이 성당에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착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어.

 

개신교인이 아닌데도 개신교가 가장 지향하는 많은 면모를 갖춘 대통령이 아니었나 싶어.

 

 

 

A: 그거 참 아이러니하다. 어쩌다가 이렇게 꼬여 버린 거지?

 

J: 그러게. 사람마다 해석하는 관점은 다르겠지만, 요즘 시국에는 노무현을 그리워 하는 사람이 많을 거야.

 

아무튼 노무현의 삶의 이력에는 천주교보다 불교가 더 많이 등장해.

 

청년 시절 고시공부를 위해 많은 시간을 절에 머물기도 했고, 불교 경전도 탐독했으며 권양숙 여사도 평소 불심이 깊었지. 또한 대통령 재임시절 해인사를 세 차례나 방문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했어.

 

 

 

A: 아마 극우(보수) 개신교는 노무현을 엄청 싫어했지?

 

J: 말도 못했지. 그들의 반정부 집회는 김대중 정권이 아닌 노무현 정권 때 본격화 되었어. 그래서 당시 노무현의 최대 정적은 개신교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지.

 

 

 

 

 

A: 왜 극우 개신교는 노무현을 싫어했지? 단순히 야당 소속이라서?

 

J: 일단 4대 개혁입법(국가 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진상규명법, 언론관계법)을 노무현 정부가 추진해서였어.

 

특히 극우 개신교는 1. 국가 보안법 폐지 2. 사립학교 법 개정에 강력하게 반발했어.

 

국가 보안법 폐지는 자신들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건드는 심각한 사안이었고, 사립학교법 개정은 개신교의 재산권을 위협하는 사안이었기 때문이지.

 

그들의 사고 속에는 국가보안법 폐지’ = ‘반공 전체의 포기라는 도식이 있었어. 즉 국가 보안법이 폐지되면 반공 이데올로기가 모두 소멸해 버려서 자신들의 주도권은 모두 사라질 것이라 여겼던 거지. 이걸 막기 위해 조갑제를 위시한 극우 언론들과 손을 잡고 한기총도 집회에 모습을 드러내.

 

 

 

한기총+조갑제의 놀라운 연합 전선이었지.

 

 

 

A: 국가보안법 폐지는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 만으로 쉽게 이해가 되는데 사립학교법 개정도 반 정부 시위에 중요 역할을 한 거야?

 

J: 오히려 사립학교법 개정은 극우 개신교들이 반 노무현 전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 노무현 정보는 사학의 투명성과 공공성을 높이기 위해 개방형 이사제 도입’, ‘이사장 친인척의 이사 비율 축소 30개 조항을 골자로 하는 개정안을 추진했어. 이를 지켜본 극우 개신교는 정부의 개정안이 사학의 설립 정신을 훼손해 결과적으로 재산권 행사를 어렵게 한다며 강하게 반발했지.

 

 

 

2005년 당시 개신교는 중학교 123, 고등학교 165개의 많은 사학을 운영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이 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일부 목사들은 삭발 투혼을 하기도 했고, 학교 폐쇄 등 강경 조치로 맞서기도 했어. 20016 12월에는 서울 영락교회에서 목사와 성도 3000명이 모여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해 .

 

이 때 극우 개신교는 구체적으로 국회의원들을 압박하기 시작하는데 2007년에 시행될 선거(대선과 총선) 때 그 복수를 하겠다며 사립학교법 재개정을(그 쪽에서 재개정을 요구했어) 반대한 의원들에 대한 낙선운동을 벌여 나가. 당시 한기총이 1차 낙선 대상자 5명의 명단을 발표했는데 이해찬, 장영달, 정세균, 유기홍, 최재성 의원이 여기에 속해 있었어.

 

 

 

A: 교회가 뭔가 이상한데?....

 

J: 본인들의 이익이 걸려 있다고 생각해서 목숨이라도 걸 기세였나봐.

 

 

               -분향소를 찾은 한기총 임원진-

 

 

그 이외에도 종교 단체 기부금 내역 공개, 종교인 과세 등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다 보니 극우 개신교들은 노무현 정부를 향해 엄청 이를 갈았어.

 

 

 

김지방의 [정치교회]를 보면 이런 말이 나와.

 

 

 

민주화 이후 한국 교회는 오히려 자신들이 지난날 누렸던 특혜가 점점 위협받고 줄어드는 것을 경험했다. 게다가 민주화운동으로 온갖 고초를 겪었던 개신교계 인사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같이 보였다. 그러니 정치권 동향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같은 정치인들이 교회의 힘을 인정하고 두려워해주길 은근히 기대한다. 이런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받고, 정권에 불만을 품게 된다. 대형 교회 목회자를 비롯한 개신교계 인사들이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반 기독교 정권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A: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개신교 소속이 아닌 대통령이 꼭 반기독교 정권일까?

 

J: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럴 것 같진 않아. 그가 보여준 삶의 모습과 가치관, 걸어온 길, 내뱉는 말들이 진리에 가까운지, ‘진리로부터 먼지가 더 중요한 바로미터가 아닐까?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토론을 해볼 필요가 있겠지? 중요한 것은 단지 개신교 소속이라고 해서 그 정권이 하나님의 편에 있다고 주장했던 게 그 동안 보여왔던 개신교의 민낯이라는 거지. 그게 옳았다면, 그 열매도 한번 주목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아.

 

 

 

당시 사립학교법 논란에는 강의석 사건도 있었어. 미션스쿨에 다니던 강의석 군은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서울특별시 교육청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고, 이에 대해 개신교계는 그 학교를 종교적 목적으로 세웠는데 고교 평준화 조치로 인해 학생 선발권이 없어지다 보니, 자신들이 원하는 학생 교육이 안되고 있다고 주장했어.

 

어찌 되었든 법원의 판결은 미션스쿨에서도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가뜩이나 사립학교법 문제로 날카로워진 개신교를 더욱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지.

 

 

 

A: 노무현 집권 당시 대규모 반정부 시위도 참 많았지?

 

J: . 무려 18차례나 있었어.

집권 초기에는 반공’, ‘친미를 중심 이슈로 잡았고, 중반에는 사립학교법 개정이 중심 이슈였어. 나중에 말기가 되니 모든 이슈를 다 섞어서 정권 퇴진 투쟁을 벌였지. 요즘 벌어지고 있는 촛불시위와는 근간 자체가 매우 다른 집회였지.

 

2002 6월 여중생인 심미선, 신효순이 미군 차량에 압사당한 후 반미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이런 분위기를 우려한 극우 개신교는 미국의 한국 포기는 다시 남한의 공산화로 이어질 수 있다며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어.

 

 

 

A: ‘반공 이데올로기가 어마 무시하게 파급력이 세구나.

 

J: 거의 게임에서 말하는 치트키 수준이었지. 그나마 시대가 발전해 가면서 새로운 의식을 지닌 시민들이 많아져서, 이젠 더욱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해진 편이야.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겠지만….

 

 

 

당시 극우 개신교가 벌였던 집회를 주도하던 목사들 중 한사랑 교회 김한식 목사는 설교를 통해

 

대한민국이 공산주의 마수에 적화되려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손길은 미국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라고 말했어.

 

김홍도 목사는

 

대한민국은 간첩 천국이며 더 이상 간첩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한국 교회가 친공, 친북, 좌경 세력을 척결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어.

 

 

 

그 다음 사립학교법 재개정문제를 놓고 시위할 때는 극우 개신교가 한나라당과 손을 잡고 노무현 정부를 압박했어. 한나라당 역시 보수 개신교가 자신들의 당을 지지해 주던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니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거지.

 

 

 

도올 김용옥은 이에 대해 종교권력이 역사를 이끄는 신정정치를 한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며 경고하기도 했었어.

 

 

 

A: ‘반공도 중요 키워드지만, ‘친미도 역시 중요한 극우 개신교의 입장이었나 봐.

 

J: 아무래도 선교사 파송 시절부터 미국으로부터 각종 혜택을 입어 온 게 개신교이다 보니…. 6.25 때는 물자도 대주고 얼마나 고마웠겠어?  더군다나 미국 유학파 신학도들의 비중은 64.5 퍼센트에 달했기 때문에 미국식 신학과 사상, 인맥이 계속 제자들에게 대물림 된 측면도 있었어.

 

최근에 세대 교체기를 맞이한 대형교회의 후임 목사들도 미국 유학파가 많지.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도 그렇고

 

 

 

노무현 정권 말기에는(2007) 정부가 마지막으로 손봐야 할 대상으로 1. 재벌, 2. 대형 교회 3. 강남 부자 가 거론되기도 했었다. 재벌은현대’, 대형교회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라는 이름까지 거론되어 조용기 목사와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이 만나 해명을 하는 해프닝도 있었어.

 

 

 

당시 김홍도 목사는

 

내가 반공운동을 하고 좌파정권을 자꾸 까기 때문에 들어간다는 것을 나도 알고 교인들도 아니까이건 좌파사상을 가진 정권이 교회를 파괴하려는 음모에서 비롯된 거예요. 전에는 없었어요. 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일어난 일이지.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가장 미워합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어.

 

 

 

A: 본인이 도덕적으로 법률적으로 잘못해서 구속 당했던 거 아닌가?

 

J: 그러게. 본인들이 자주 쓰는 전략이라 민주주의 세력들도 속이고, 조작하고 가두는 방법을 쓸 것이라 지레짐작 한 것 같은데, 씁쓸하지.

 

극우 개신교는 정권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개신교 독자 세력화를 시작하게 되는데 2004년 제 17대 총선부터 도입된 정당투표제가 있어서 기독교 정당의 창당이 가능케 되었어.

 

 

 

17대 총선에서는 14개의 정당(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자민련, 국민통합21, 가자희망 2080, 공화당, 구국총연합, 한국기독당, 노년권익보호당, 녹색사민당, 민주노동당, 민주화합당, 사회당)이 정당 등록을 마쳤어.

 

당시 첫 기독교 정당인 한국 기독당의 창당을 주도했던 사람은 최수환 장로, 박영률 목사인데 최수환 장로는 전두환의 5공화국 시절 민주한국당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이었어. 박영률 목사는 한기총 총무를 지냈고…..

 

창당대회에서 CCC 대표 김준곤 목사는 전국 개신교 인구가 25퍼센트이고, 투표율이 약 50퍼센트 정도가 될 것이므로 개신교인들이 90퍼센트 정도만 투표하면 전체 유효표 가운데 약 50%를 차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어.그러나 까놓고 보니 당선자는 1명도 나오지 않았다.

 

 

 

A: 사실 기독교의 정당 활동은 북한이 먼저 시작했었지? 아마?...

 

J: .. 북한은 원래 개신교의 주류가 있던 곳이었으니까그들이 대거 월남하면서 남한의 교세가 확 커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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