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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에서 6월 민주항쟁까지]

 

-전두환 시대의 민주주의 투쟁-

 

1979 10 27일 새벽이었다. 서클 공부방으로 쓰던 봉천동 꼭대기 달동네 자취방에서 대통령 유고계엄령 선포를 알리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박정희가 죽었다!!! 우리는 기쁨에 넘쳐 서로를 얼싸안았다.

처마 밑에 조기를 달던 집주인 아주머니가 싱글벙글하는 우리를 나무라셨다. “학생들 너무 좋아하진 마. 그래도 사람이 죽은 거잖아.” 그렇지 않아도 찜찜하던 참이었다. 독재자도 사람이 아닌가. 사람이 죽었다는 데 기뻐하는 것은 왠지 인간적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일그러진 시대였고 내 마음도 그렇게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11월 하순 휴교령이 풀린 후 학생회 부활을 준비하는 과대표 회의에 갔다. 3학년 대표가 궐석이어서 2학년 대표였던 내가 경제학과 대표로 간 것이다. 학교에 상주하던 경찰 병력이 보이지 않았다. 회의를 한 강의실에 학생처 직원도 사복형사도 나타나지 않았다.

늦은 밤 회의를 마치고 비탈길을 내려오면서 크게 소리 질렀다. “자유다! 만세!” 곧 좋은 세상이 올 것 같았다. 하지만 섣부른 기대였다. 어느 날 자취방에 모여 공부를 하기로 했던 서클 친구들이 자정이 다 되어서야 나타났다. 한강대교가 봉쇄되어 버스기사가 양화대교 쪽으로 돌았는데, 거기도 막혀 있어서 걸어왔다는 것이다.

 

 

 

-전두환의 12.12 쿠데타-

 

쿠데타가 난 거야! 그렇지 않으면 한강 다리가 막힐 리 없지!” 1979 12 12일 밤이었다.

며칠 후 우리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희도, 장세동 등 소위 신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고 군권을 장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1980 5 15일 오후, 나는 서울역 광장에 있었다. 몇만 명인지 모를 대학생들이 대오를 맞추고 앉아 있었다. 광장 가장자리와 인근 고가도로는 구경하는 시민들로 빼곡했다. 그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그저 구경만 했다.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경찰은 남대문 근처 도로를 차단했다.

 해가 기울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광장에서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대한민국을 상상했다. 마음이 아찔하게 설레었지만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이 혼돈에서 도대체 무엇이 나올까?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주검이 산더미를 이루는 끔찍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서웠다. 그 시각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때는 휴대전화도 카톡도 트위터도 없었다. 남대문 근처에서 누군가 버스를 몰아 경찰대오를 덮쳤다는 소식이 들렸다. 용산 효창운 동장과 강남 잠실운동장 인근에 중화기와 장갑차로 무장한 대규모 군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총학생회장들이 어디선가 대책회의를 한다고 했다. 마이크로버스 위에 서서 집회를 이끄는 학생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변변한 방송시설도 없었고 거리 시위의 목적을 알리는 유인물도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가 지닌 것은 전두환은 물러가라’, ‘계엄령을 해제하라따위의 구호를 손으로 휘갈겨 쓴 피켓과 플래카드, 맨주먹과 조그만 휴대용 확성기 뿐이었다.

 

이 광장에 무장한 군인들이 들어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난 아마 죽을거야. 스물한 번째 생일이 두 달 남았는데, 벌써 죽어야 하나? 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시위를 주동했으니 억울할 거야 없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하지 않는가. 그 피가 내 피일 수도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가 나와 같은 건 아니었다. 대학에 들어온 지 석 달이 채 되지 않은 저 신입생들은 어찌될까? 자신과 세상의 관계에 대해, 권력과 역사에 대해,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한 적 없이 선배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와 착한 아이처럼 줄지어 앉은 저 청년들의 죽음을 누가 책임져야 하나? 책임을 질 수나 있는 것일까?

이 광장이 시산혈해가 되면 민주주의 정치혁명이 이루어질까? 그렇게 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을 살리려면 일단 집회를 끝내고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비참한 패배를 당할 것 같았다.

 

그 때 지하 지도부선배들이 그 자리에서 철야농성을 하자는 연설을 하라고 했다. 1980년 말 이른바 무림사건으로 일망타진당한 서울대 학생운동 비밀조직의 지도선인 77학번 형들이었다. 학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공부모임의 가장 활동적인 인물들을 연결한 이 조직은 총학생회 부활을 준비했고 학생회칙을 만들었으며 주요 직책 후보를 내정했고 실제로 당선시켰다.

여러 학생조직 가운데 서울대 총학생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조직이었다. 심재철도 나도, 그 조직의 결정에 따라 총학생회장과 대의원회 의장이 되었다. 그들이 그 혼돈 속에서 어떻게 나를 찾아 냈는지 신기했다.

 

마이크로버스 지붕에 올라가 소형 확성기로 연설을 했다. 우리의 형이요 오빠이며 국민의 아들인 국인들은 우리에게 총을 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오며 박수로 반겨주면서 충심으로 호소합시다.

우리는 오늘 밤 이곳을 지켜야 합니다. 이 집회를 해산하면 신군부의 역습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학우 여러분, 역사의 대의와 나라의 미래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대충 그렇게 말했다. 이 연설 때문에 나는 강력한 투쟁을 주장한 매파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정직한 연설이 아니었다. 나는 두려움과 번민을 감추고 조직의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다.

 

 

 

-서울역 회군 사건-

 

(심상정의 등장)

 

그런데 장소를 옮겨가며 회의를 하던 총학생회장들이 집단해산과 대학별 교내농성을 결정했다. 더 준비하고 더 많은 시민들의 이해와 지지를 구함으로써 더 크고 성공적인 투쟁을 전개하자는 취지였다. 정부가 휴교령을 내리면 전국의 모든 대학생이 일제히 가두투쟁에 나서자는 결의를 덧붙였다. 곳곳에서 항의와 욕설이 터져 나왔지만 학생들은 대오를 지어 각자의 학교로 걸어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1980 5 15일의 서울역 회군이었다.

 

나는 어떻게 되든 이 싸움이 패배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역 광장을 지켜도 질 것이요, 학교로 돌아가도 질 것이다. 시민들이 저렇게 구경만 하고 있는데 무슨 수로 신군부의 폭력을 이길 것인가.

그러던 차에 철수 결정이 나오자 가슴 밑바닥에서 안도감이 차올랐다. 내일모레 죽는 한이 있어도 일단 오늘 죽는 것은 면했다. 저 신입생들이 죽지 않아도 된다. 걸어서 한강대교를 건너는데 대오 한가운데서 누군가 십 원짜리’, ‘백 원짤욕을 섞어가며 학생회 지도부를 성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녀는 단정해 보이는 여학생이었다. 이름을 물어보았다. 심상정. , 저 친구가 여러 학회의 여학생들을 모아 별도의 서클을 만든 다음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부에 들어가겠다고 해서 무림의 남자들을 열받게 만들었던 바로 그 심상정이구나.

 

예쁜 입술에서도 험한 소리가 나오네요!” 그렇게 웃으며 한마디를 건넸다. 그 뒤 6년 동안 그녀를 보지 못했다.

 

인류 역사는 숱한 반란, 봉기, 내전, 혁명,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사태의 원인과 계기, 전개과정과 결과는 저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같은 게 있었다.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을 덮친 것이 혼돈이었다는 사실이다.

무리를 지어 폭력으로 부딪치는 격동의 순간에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동기와 지향에 따라 제각기 활동한다. 모두에게 익숙한 일상의 소통방식이 무너진 상황에서는 냉철한 논리와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충동이 행동을 지배한다.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누구도 전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끝나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역사가들이 사태의 전모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해석한다.

그때에야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 대한민국현대사도 예외가 아니다. 제주 4.3 사건, 6.25 전쟁. 4.19 혁명, 5.16 쿠데타, 5.18 광주민중항쟁, 6.10 민주항쟁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이 본 것은 혼돈이었다.

 

…..

 

 

 

-대학교 학생들의 투쟁: 서울의 봄-

 

5.13 밤 연세대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생들이 각자 학교 근처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누가 어떤 의도로 그랬는지 나는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당시 대학가에는 유신체제를 연장하려 하던 신군부와 어떻게 투쟁해야 할 지를 두고 생각을 달리하는 두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1] 신군부와의 전면적 정치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 다양한 자생적 학생조직이었다. 다른 하나는[2] 정치정세와 국민여론, ‘3이 이끈 여당 정당들의 움직임과 보조를 맞추어 가면서 점진적으로 투쟁수준을 높여나가려 한 주류 학생운동조직이었다. 5 13일 밤 가두시위를 벌인 것은 아마도 전면투쟁론을 주장한 급진적 학생조직이었을 것이다.

 

 

 

그날 자정이 다 된 시간에 고려대학교 학생회관에 모인 서울의 총학생회 대 표들이 대규모 거리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군대를 갔다 온 복학생이었던 고려대 신계륜 총학생회장이 모임을 이끌었다. 나는 심재철 총학생회장을 대신해 이 회의에 갔다. 학생대표들은 정부가 휴교령을 내릴 명분을 얻었다고 판단했다. 학생들 사이에 전면 투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급격하게 세를 불리는 형국이라 거리시위를 더는 막을 수 없다고 보았다.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앉아서 선제공격을 당할 수는 없었다. 전국의 대학 총학생회에 결정사항을 알려주었다. 5 14일 아침 대학생들은 교문의 경찰 봉쇄망을 무너뜨린 후 걸어서 도심으로 진출했다. 혼돈은 그때 시작되었다. 서울의 경우 어느 대학 총학생회도 가두시위를 이끌지 못했다. 방송시설도 없었고 전투조직도 갖추지 못했다.

학과별 배오는 모두 흐트러졌다. 학생들은 사방에서 광화문을 향해 걸어갔지만 세종로 사거리와 남대문 일대에 구축한 경찰의 강력한 방어망을 뚫지 못했다. 휴교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신군부는 전국적 학생시위를 단숨에 제압하기 위해 군 병력을 이동 배치하는 중이었다.

 

5 17일 오후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이화여대 교정에 모여 향후 투쟁방침을 논의했다. 대규모 경찰병력이 회의장을 급습했다. 총학생회장 심재철의 체포 여부는 알 수 없었다.

학생처장 이수성 교수가 총학생회장실로 전화를 해서 오늘 밤은 편한 곳에서 자라고 했다. 계엄군이 들어오니까 도망치라는 뜻이었다. 그는 그 전화를 한 죄로 계엄사 합수부에 끌려가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

 

학생들이 고립된 캠퍼스에서 계엄군에게 짓밟히도록 둘 수는 없었다. 전국의 여러 대학 학생회에서 전화가 왔다. 상황을 설명한 다음 휴교령이 내리면 학교 근처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한 계획을 상기시켰다.

10시 반경 비상계엄을 제주도까지 확대한다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건장한 남자들이 쇠사슬로 묶어둔 학생회관 4층 복도 현관문을 뜯어내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공주사대 총학생회에서 온 전화였다. “여기도 계엄군이 진입했으니 빨리 피하세요!”

그렇게 외치고 돌아서는데 이단옆차기가 날아왔다. 허벅지를 밟혔다. 이마에 닿는 권총 총구가 서늘했다. 나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편입되어 있던 경찰청 특수수사대로 끌려갔다. 계엄군은 교정과 기숙사에 남아 있던 모든 사람을 소총과 몽둥이, 군홧발로 짓밟았다. 모든 대학 교정에서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고 서울의 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우리 국민은 아직 민주주의를 누리는 데 필요한 용기와 의지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유신독재를 끝내지 않았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죽였을 뿐이었다. 10.26에서 5.18까지, 그 다섯 달은 안개 속이었다. 짙은 안개 너머에 있는 것이 유신의 연장일지 새로운 민주주의일지 알 수 없었다. 권력의 심장을 잃어버린 집권 공화당은 영원한 2인자김종필을 새 총재로 선출했다. 그는 신민당 김영삼 총재를 만나 시국 수습책을 논의했다. 유신시대에는 재야인사로 일컬어졌떤 정치인 김대중 씨도 오랜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정치가 다시 살아날 징후를 보였다.

 

 

 

-최규하 대통령 선출-

 

정부는 1979 12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소집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던 최규하 국무총리를 제 10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죽었지만 유신체제는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최규하 대통령의 임무는 유신체제의 안락사일 것이라고 우리는 기대했다.

그가 헌법 개정과 선거 관리를 제대로 해서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면 유신체제는 조용히 무너질 것이라 믿었다. 최규하 정부는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고 양심수들을 일부 석방했다. 그런데 전두환과 노태우, 정호용 등 육사 11기 정치군인들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유신체제를 수호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12 12일 밤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수경사, 특전사, 보병 9사단 등 휘하 병력을 동원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등 온건파 국군 지휘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국민들은 계엄사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그 내막을 알 수 없었으며 전두환이 정권을 잡을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사북 사태-

 

봄이 와서 언 땅이 녹으면 모든 풀과 나무가 한꺼번에 움튼다. 유신체제라는 겨울공화국이 물러날 기미를 보이자 그 동안 억눌려 있었던 모든 욕망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1980년 신학기가 되자 전국의 대학생들이 학생회 부활을 준비했다. 대학은 계엄령 해제 요구, 병영 집체훈련 거부, 어용교수 퇴진, 재단 비리 척결 투쟁에 나섰다. 교수들은 교수협의회를 만들 준비를 갖추어 나갔으며 언론인들도 검열의 폐지와 언론자유를 요구하는 모임을 잇달아 결성했다 

노동조합 설립 붐이 일었고 곳곳에서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이 일어났다. 물질적 풍요, 자유, 인간적 존엄성을 향한 열망이 강력하게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사태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4 21사북사태가 터졌다. 강원도 정선군의 동원탄좌 광부들이 어용노조 지부장 사퇴와 임금인상을 요구하면서 시작한 파업이 회사 측과 경찰의 강경대응 때문에 폭동으로 비화한 것이다.

광부들이 사북읍 일대를 점거한 이 사건은 사흘 만에 노사합의로 막을 내렸지만, 언론은 공포의 탄광촌’, ‘무법천지 사북’, ‘곡괭이 도끼 무장 파괴 방화등 끔찍한 제목을 달아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국민의 불안심리를 자극했다. 구로공단과 울산, 부산, 인천 등 대규모 사업장이 밀집한 곳에서 잇달아 파업과 노사충돌이 빚어졌다.

 

 

 

정치 상황은 불길한 흐름을 보였다. 개헌안 공청회를 하는 등 국회가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신현확 국무총리는 정부가 주도해서 개헌을 하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직선제가 아닌 내각제 또는 이원집정부제 개헌론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4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전두환 보안 사령관 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이 중앙정보부장까지 겸직한 것을 대학생들은 정치군인들의 정권장악 의사표시로 간주했다.

대학가에서 전면투쟁론이 고개를 들었다. 5월 초부터 전국 주요대학 학생회는 신입생들의 병영집체훈련 거부투쟁을 접고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정치투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5 14일과 15일 전국에서 동시다발적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것은 사실상 대학생들만의 투쟁이었다.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 본대 없이 선봉대 혼자 싸운 것이다.

결국 5 17일 밤 신군부가 전국 주요 대학에 계엄군을 투입함으로써 학생시위는 막을 내렸다. 휴교령이 내릴 경우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시위를 벌이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약속을 지킨 곳이 광주였다. 그곳에서만 시민이 참여하는 도시봉기가 일어났다.

 

 

 

-광주 5.18 민중 항쟁-

 

광주민중항쟁의 시작은 1979 10월의 부마항쟁과 비슷했다. 김영삼 총재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부마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처럼 신군부가 김대중 씨를 체포한 것이 광주 시민의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5 18일 오전부터 전남대 앞에서 학생과 계엄군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계엄군이 학교 밖으로 나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것을 본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하면서 도시 전체가 궐기했다. 여기까지는 부마항쟁과 같았다. 그런데 광주 시민들은 부산, 마산 시민들보다 더 절박했고 더 용감했다. 공수부대는 시내 곳곳에서 대검을 장착한 소총과 충정봉이라는 박달나무 몽둥이로 마구잡이 폭력을 휘둘렀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자 시위는 더 확산되었다.

계엄사는 더 많은 특전사 병력을 광주로 보냈다.

 

비무장 시위가 무장투쟁으로 번진 것은 계엄군이 발포를 했기 때문이다. 5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정문 앞에 진 치고 있던 제 11공수여단 병력이 갑자기 흘러나온 애국가 연주에 맞추어 일제히 M16 소총과 M60 기관총을 공중으로 발포했다. 그래도 시위대가 흩어지지 않자 곧바로 사람을 향해 총을 쏘았.

전일빌딩, 상무관, 수협 전남지부 건물 옥상에서는 저격수들이 조준사격을 가했다. 그것은 명령에 따른 조직적, 계획적 발포였다. 5 19일과 20일에도 제 11공수여단과 제 3공수여단 병력이 권총과 M16 을 발포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그것은 산발적, 돌발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도청 앞 발포는 달랐다. 거리는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했다.

 

분개한 시민들은 광주 시내뿐만 아니라 나주, 화순, 장성, 영광, 담양 등 인근지역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카빈소총과 M1 소총을 확보했고 화순탄광의 다이너마이트를 반입했다. 시민들이 먼저 총을 쏘았기 때문에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다는 신군부의 주장은 거짓이었다.

군의 모든 기록 갸ㅏ운데 최초로 등장하는 무기탈취 사례는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상황일지]에 기록된 5 21일 오후 1 35분 전남화순파출소 무기 피탈사건이었다. 특전사가 전남도청 앞에서 발포를 할 때에는 시민들에게 총이 없었다. 시민들이 무장항쟁을 시작하자 경찰관들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광주를 빠져나갔고 특전사 병력은 외곽으로 이동해 광주의 교통과 통신을 차단했다.

그들은 인근 도시로 가는 국도에서 광주를 빠져나가는 민간차량을 저격하고 주둔지 인근의 민가에 총을 쏘았다.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해 많은 시민이 죽었다. 다른 도시에서는 대중투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군부는 모든 화력을 광주에 집중했다. 특전사 3개 여단 3500, 보병 20사단 5000,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소속 병력 1 2000명 등 무려 2만이 넘는 병력을 광주시 일원에 투입한 것이다.

 

도청을 점령한 시민군은 부대를 편성하고 치안질서를 유지했으며 시민들은 그들에게 음식과 물을 제공했다. 시민자치에 들어간 광주 시내는 평온했으며 범죄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병원에는 헌혈 신청자들이 줄을 섰고 도청 공무원들이 다시 출근했다. 지역사회 원로들이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광주 상무대에 있던 전남북 계엄분소를 방문했다. 그러나 계엄사는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광주항쟁에 대한 소식은 닷새째인 5 22일에 가서야 석간 [동아일보]가 처음으로 보도했다. 그 닷새 동안 광주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으며 국민들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신군부는 광주 시민을 폭도로 규정했고 계엄군은 광주시를 포위했다. 5 27일 새벽 계엄사는 6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해 광주를 탈환하는 상무충정작전을 전개했다. 도청을 중심으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한 시민군은 카빈총과 M1 소총을 든 157명 뿐이었다.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윤상원 씨를 비롯한 열세 명을 사살하고 100여 명을 체포했다.

 또 다른 거점이었던 광주공원과 전일빌딩도 손쉽게 점령했다. 그들은 도청 앞 상무관에 있던 광주 희생자들의 시신 129구를 덤프트럭에 싣고 가서 망월동 산비탈에 묻었다. 5.18 유족회의 집계에 따르면 항쟁 당시 사망자는 166, 행방불명 65명이었다. 부상 후 사망자는 400명이 넘는다.

군경 사망자는 27명이었는데 군인들끼리 벌인 오인전투 사망자가 많았다. 계엄사는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무려 2500명이 넘는 시민과 대학생을 체포해 600명 이상을 검찰에 송치했다. 정동년, 배용주, 박남서는 군법회의와 대법원 최종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홍남순, 정상용, 허규정, 윤석루 등 일곱 명은 무기징역, 김상윤, 김성용, 명노근, 전옥주, 윤강옥 등 열한 명은 징역 20년에서 10, 152명은 징역 10년에서 5년의 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모두 풀려났다.

 

광주민중항쟁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가능성과 당시 민주화운동의 현주소를 명료하게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전제정치를 타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라는 것, 그리고 아직 대한민국 국민은 그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참혹한 패배로 막을 내린 광주민중항쟁은 많은 국민의 가슴에 깊은 죄책감을 남겼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 시민들이 계엄군의 폭력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1987 6월 민주항쟁의 서막 그리고 전두환의 집권-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87 6,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어느 지역도 고립되지 않는 전국적 도시봉기를 정밀하게 기획하고 준비했다. 광주 시민들만 홀로 고립의 아픔을 겪게 만든 1980 5월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6월 민주항쟁은 사실상 광주민중항쟁의 전국적 확대판이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유신쿠데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저질렀던 독재를 능가하는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이해동, 조성우, 이신범, 이해찬, 설훈 등 재야와 학생운동 핵심 인사들에게 내란음모 혐의를 씌워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김대중 씨에게는 사형, 다른 사람들에게는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했다. 김영삼 씨를 비롯한 야당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했고 김종필, 이후락, 김진만 등 유신정권의 실세들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공직에서 몰아냈다.

정부 공무원과 공공기관 임직원 9000여 명을 숙청했다.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만들어 위원장이 되었다. 기자들을 대거 구속하고 해고했으며 신문, 방송을 통폐합하고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뿌리깊은 나무], [기자협회보] 등 정기간행물 172종을 폐간시켰다.

문화공보부가 보도지침이라는 것을 매일 내려보내 방송과 신문의 내용뿐만 아니라 편집까지 일일이 통제했다. 1986년에 가서야 김주언, 김태홍 등 용감한 기자들이 보도지침의 실상을 폭로했다.

 

신군부는 대학생과 교수들을 대량 제적, 해직했고 노동조합을 해산했으며 원풍모방, 반도상사, 콘트롤데이타, 청계피복 노동조합 간부들을 해고했다. 불량배 소탕이라는 명목으로 무려 4만여 명의 시민들을 불법 연행해 삼청교육대에 집어넣었다. 무자비한 고문, 학대로 300명 넘게 사망했고 3000명 가까운 사람이 영구장애를 입었다.

 

 

 

신군부가 한 조처 가운데 그나마 대중의 호감을 산 것은 과외 금지와 대입 본고사 폐지, 졸업정원제를 명분으로 한 대학 입학정원 대폭 확대, 야간 통금 해제 정도가 고작이었다.  

 

[몇 안 되는 전두환의 업적]

 

 

 

신군부는 1980 8월 최규하 대통령을 내쫓았다. 그는 유신헌법에 따라 합법적으로대통령이 되었지만 퇴진 요구를 받자 군소리 없이 물러났다. 전두환은 곧바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소집해 100% 찬성으로 제 11대 대통령이 되었다. 모든 신분, 방송이 그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특집보도와 특집기사를 내보냈다.

정부는 지체 없이 헌법개정안을 만들었다. 1980 9 29일 공고한 5공화국헌법안은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제로 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이름을 대통령 선거인단으로 바꾸었다.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하는 제도를 없애는 대신 비례대표를 의원 정수의 3분의 1로 하고 제1당에 비례의석 3분의 2를 배분하는 괴상한 제도를 도입했다. 10 22일 실시한 국민투표에 95.5%의 유권자가 투표했고 91.6% 가 찬성했다. 유신헌법 국민투표 때와 비슷한 결과였다. 국민들이 다시 한번 폭력의 공포에 굴복한 것이다.

 

…..

 

전두환 대통령은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것을 만들어 총선 때까지 국회 기능을 대신하게 했다. 국가보위입법회의는 156일 동안 존재하면서 215건의 안건을 가결했다.

 

야당 정치인 835명을 정치활동 금지 대상자로 정한 특별조치법, 집회와 시위를 사실상 금지한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이름을 국가 안전기획부로 바꾼 중앙정보부법, 반공법을 흡수 통합한 국가보안법 등을 모두 여기에서 만들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1 1월 하순 김대중 씨의 형량을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하고 계엄령을 해제했다. 미국 행정부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한 사대주의적 유화책이었다.

갓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은 워싱턴에 간 전두환 대통령을 극진히 환대했다.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을 바꾼 중앙정보부는 충성을 서약한 사람들을 모아 민주정의당(민정당)이라는 집권당을 창당했고, 민주주의를 한다는 시늉을 하기 위해 야당 민주한국당(민한당, 총재 유치송)과 한국국민당(국민당, 총재 김종철)도 만들었다. 이런 속사정을 아는 시민들은 민정당을 전두환 1중대, 관제야당인 민한당과 국민당을 2중대, 3중대라고 불렀다.

 2 25일 대통령 선거인단을 체육관에 불러 모은 전두환은 2중대, 3중대의 유치송과 김종철을 출마시켜 모양새를 갖추고 90% 라는 상대적으로 소박한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제 12대 대통령이 되었다. 한달 후 실시한 제 11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민정당은 득표율 36% 로 비례의석 61석을 포함해 전체 의석의 54.7% 151석을 차지했다. 당시 나는 강원도 화천 전방부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투표용지는 없고 선거공보만 든 봉투를 받았다. 투표용지는 대대본부 서무병이 모두 1번을 찍어 발송했다. 당시 군 부재자투표는 그런 식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민중항쟁의 전국적 확산을 두려워했다. 부마항쟁도 광주항쟁도 모두 학생운동이 뇌관이었다. 5공화국이라는 이름을 붙인 새로운 유신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학생운동을 뿌리 뽑고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을 고립시켜야 했다. 그런데 1980년 하반기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대학생들은 산발적 저항을 계속했다. 하반기에만 경희대, 연세대, 성균관대를 비롯한 전국 20여 개 대학에서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살포하거나 교내시위를 벌이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정부는 학생운동의 뿌리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무림사건->학림사건->부림사건-

 

안기부와 보안사, 경찰과 검찰은 1980 12월 남명수 등 서울대 학생들이 교내시위를 하면서 뿌린 [반파쇼학우투쟁선언] 을 추적하는 합동수사를 편 끝에 유신시대와 1980년 봄 서울대 학생운동을 주도한 주요 서클 활동가 조직을 일망타진했다. 다수의 졸업생을 포함해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를 범죄조직으로 만들려고 하니 안개처럼 모호한 점이 많아 무림사건이라는 낭만적 명칭을 부여했다. 정부는 김명인, 한홍구 등 수십 명의 학생들을 구속하거나 강제로 징집했다.

 

대학생과 노동자들을 전국적으로 결합해 강력한 반정부투쟁을 전개하려 한 조직도 적발했다.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을 만든 이태복과 흥사단아카데미를 기반으로 전국민주학생연맹을 결성한 이선근이 그 주역이었다. 그들은 여러 지역에 조직을 만들어 1981년 대학가 반정부 교내시위를 일으켰다.

공안당국은 1981 6월 두 사람과 관련자들을 체포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감금했다. 무시무시한 고문을 가한 끝에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한 반국가단체를 결성한 혐의를 만들어 무기징역형을 선고했다. 그들은 대학생이 중심이었던 이 사건에 학림사건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1979 10월 부마항쟁의 뇌관을 찾아 제거할 목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부산에서도 학생운동 활동가와 양서협동조합 회원들을 두달 넘게 불법 구금하고 고문해 반국가단체 사건을 만들었으며 부산의 무림사건이라고 해서 부림사건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1981년 한해 동안 전국 각지의 대학생들이 40회나 교내시위를 했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학생운동의 이념과 운동방식은 급진적 변화를 겪었다. 군복무를 하고 있던 나를 면회하러 온 친구들이 처음 듣는 행진곡풍의 운동가요를 불렀다.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일보전진 이보후퇴], 마오쩌둥의 [모순론], [실천론] 같은 논문을 읽는 게 기본이라고 했다.

 

…………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청년지식인들이 단순한 민주화가 아니라 사회혁명을 목표로 삼는 급진적 대중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반미주의와 사회주의가 빠르게 확산되어가던 1982 3,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이 터졌다. 문부식, 김은숙, 이미옥 등이 문화원에 불을 질렀고 유승렬과 박원식 등이 인근 건물에서 미제국주의 반대살인마 전두환 타도를 주장하는 유인물을 뿌렸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곳에서 공부하는 학생 한 사람이 죽었고 부상자가 여럿 생겼다. 배후 조종자로 지목된 김현장과 문부식은 사형, 김은숙과 이미옥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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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두 가지 노선 : 민중민주주의(PD) 노선, 민족해방(NL) 노선-

 

1980년대 혁명운동가들에게 전두환 대통령은 절대악의 화신이었다. 광주의 대학살과 난폭한 인권탄압을 겪은 만큼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전두환 정권은 청년지식인들의 영혼을 흔들어 놓았으며 그들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이념을 찾아 나섰다.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민중민주주의(PD) 노선을 받아들였다.

모델은 러시아 혁명이었다. 그들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믿으면서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러시아 혁명사, 레닌의 전략, 전술을 연구했다. 노동자계급을 조직하고 정치적으로 지도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규정했다. 그들은 민족주의를 낡은 부르주아 사상으로 북한을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전체주의 독재국가로 간주했다. 이런 성향을 가진 세력은 민주화 이후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진보정파가 되었다.

 

광주 학살의 배후에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점을 중시한 청년지식인들은 민족해방(NL) 노선으로 결집했다. 모든 사회악의 근원은 미제국주의다. 분단도 독재도 자본주의적 악덕도 모두 미제국주의 때문에 생긴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지배와 간섭을 중단시키지 않으면 민주화도 사회정의도 통일도 이룰 수 없다. 러시아 방식의 혁명은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다.

노동자 계급을 조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중산층과 소자산계급을 포함해 각계각층 모든 민중을 반미의 기치 아래 결속함으로써만 혁명을 이룰 수 있다. 그들은 그렇게 판단했다. 북한은 민족자주를 최고의 가치로 표방하고 있는 만큼 북한 정권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믿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단파 라디오로 북한 대남선전조직인 한국민족민주전선(민민전)이 송출한 구국의 소리방송을 녹취해 학습자료로 삼았다. 한국은 반식민지’, ‘반봉건사회라고 규정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혁명이 민족해방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사회 내부에서 생겨난 자생적 사회주의 혁명운동과 민족해방 혁명운동은 전두환 정권의 학살과 독재가 만들어낸 이념적 열병이었다. 적지 않은 국민들이 청년들의 반정부투쟁과 반미투쟁을 심정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주장이 다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독재정권과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경제적 풍요와 아울러 자유, 인권, 인간적 존엄을 원했다. 전두환 정권이 그런 욕망의 표현을 폭력으로 억눌렀기 때문에 반정부 투쟁을 지지한 것이다. 6월 민주항쟁 때 대중이 선택한 구호는 독재타도 민주쟁취’ , ‘호헌철폐 직선개헌이었다. 그 때 거리시위에서 청년들은 헌법제정민중회의미군철수 양키고홈을 외칠 수 없었다. 시민들이 호응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대놓고 면박을 주었기 때문이다. 독재정권이 대중의 욕망을 거스를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의 혁명전사들도 대중의 욕망을 무시하지 못했다.

 

 

 

-민주화 운동에 발동이 걸리기 시작-

 

1982년과 1983년 전국 대학에서 각각 60회가 넘는 교내시위와 작은 규모의 거리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기 정부를 상대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대학생 뿐이었다. 그러나 유신체제 때와 마찬가지로 시위 주동자는 교내에 상주하고 있던 사복형사와 경찰에게 5분을 버티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오래 버티기 위해 건물 옥상에 밧줄을 매고 공중에 매달린 상태로 선언문을 읽는가 하면 식칼이나 횃불로 무장을 하는 등 기묘한 버티기 전술을 선보였다.

그런 가운데 시간이 흐르면서 재야와 야당 인사들도 공포감을 떨치고 서서히 기지개를 켰다. 1983 5월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자택에 연금되어 지내던 김영삼 씨가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무려 23일에 걸친 단식투쟁을 했다. 정부의 보도지침 때문에 겨우 숨만 쉬면서 연명하던 신문사의 기자들이 검열을 피하기 위해 재야인사의 식사 문제라는 희한한 말을 만들어냈다. 1982 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미국으로 망명한 김대중 씨가 연대투쟁을 시작했다. 두 사람이 손을 잡자 재야와 야당 인사들도 기력을 회복했다.

 

1983 9월에는 학생운동 출신 청년들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 김근태)을 결성했다. 5.18 이후 처음으로 독재정권과 싸우는 단체를 공개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12월 말 갑자기 유화책을 발표했다. 조금 인심을 써도 권력 유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때문이었는지, 정부는 제적 대학생 1400여 명의 복학을 허용하고 청년학생을 포함한 정치범 172명을 석방했다. 해가 바뀌자 대학 교장에 상주했던 경찰 병력을 철수시켰고 야당 정치인들의 정치활동 규제를 일부 완화했다. 그런데 이 유화 조치는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기는커녕 반독재투쟁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철권통치가 느슨해지자 눌려 있던 대중의 욕망이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던 것이다.

 

대학가는 곧바로 학도호국단 철폐와 학생회 부활을 추진하는 투쟁에 들어갔다. 1984년에는 학원자율화와 사회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교내집회와 시위가 집계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다. 3년간 계속된 혹독한 공안통치 아래서 강력한 비밀조직을 구축한 학생운동의 이념적 성향이 그대로 표출되었다.

처음에는 PD 계열이 분위기를 이끌었다. 문용식, 안병룡, 윤성주 등 청년 활동가들이 [깃발]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고 여러 대학에 민주화추진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든 다음 그것을 모아 민주화투쟁학생연합을 결성했다. 그들은 9월 청계피복노동조합 합법성 쟁취대회에 결합해 동대문 일대에서 격렬한 거리시위를 벌였. 구로공단과 부평역 등 공단이 밀집한 지역에서 노동악법 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 11월에는 민정당 중앙당사를 점거했다가 264명이 체포되었다.

 

1985년에는 노동자들을 의식화하고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해 주민등록증을 위조하거나 경력을 속이고 공장에 취업했던 청년 활동가들이 처음으로 그 존재를 드러냈다.

수가 얼마였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적게 보는 사람은 5000, 많게 보는 사람은 2만 명이 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정부가 1970년대의 대표적인 노동조합들을 강제 해산시킨 억압적 상황에서도 1984년 한 해 동안 130개가 넘는 노동조합이 새로 조직된 것은 이들의 활동과 관계가 있었다.

1985 4월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노동자들이 어용노조와 회사 측에 맞서 열흘간 파업투쟁을 벌였다. 홍영표, 송경평 등 학생운동 출신 운동가들이 그 주역이었다. 김우중 회장은 직접 농성 노동자 대표와 협상해 문제를 해결했으며 그들이 징역을 살고 나오자 대우자동차 판매법인으로 복직시켜 유럽 각국으로 내보냈다. 재벌 총수들 중에 이렇게 한 사람은 김우중 회장 밖에 없었다.

 

6월에는 경찰이 성공적으로 파업투쟁을 한 구로공단 대우어패럴 노동조합의 김준용 위원장 등 간부들을 연행해간 데 항의하면서 인근 여러 회사 노동조합들이 연대파업을 한 구로동맹파업이 벌어졌다.

노동조합의 연대의식을 표출한 보기 드문 사건이었다. 공안당국은 심상정을 이 연대파업의 주모자로 지목했다. 대학생들이 노학연대의 깃발을 들고 대거 뛰어들었고, 민청련을 비롯한 민주인권단체들이 가세했다. 가리봉오거리 등 구로공단 일대에서 대규모 거리시위가 벌어졌다.

구로동맹파업을 일으킨 노동운동가들이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결성해 [노동자신문]을 발간했다. 재야세력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의장 문익환)으로 결집했다. 전두환 정권의 유화 조치가 열어준 정치적 공간을 야당과 재야,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세력이 신속하게 점령하면서 역량을 확대하고 조직을 구축한 것이다 .

 

 

 

1985년 전두환 정권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다. 2 12일에 치른 제1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국민들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거부 의사를 명확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1984 5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만들어 야당 부활 작업을 시작한 양김은 투표일을 겨우 25일 앞둔 시점에서 이민우 씨를 총재로 세워 신한민주당을 창당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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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민주당은 득표율 29%를 얻어 35% 를 받은 민정당을 턱밑까지 추격했다. 민청학련 사건 때 전국에 수배전단이 붙었던 돌아온 사형수 이철이 서울 성북구에서 당선되었다. 신한민주당은 관제야당 민한당과 국민당을 밀어내고 단숨에 제1야당이 되었다. 서울에서는 42.7%를 얻어 27%를 얻은 민정당을 압도했다. 당선자들이 대거 신한민주당으로 이적하자 전두환의 제 2중대 민한당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다.

 

 

 

-전국총학생총연합(전학련)와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 투쟁위원(삼민투) 의 등장-

 

민정당이 2.12 총선에서 사실상 패배하면서 전두환 정권은 정국 주도권을 상실했다. 신민당과 재야, 학생운동 세력은 더욱 거세게 정부를 공격했다. 학생운동의 주도권은 PD 계열에서 NL 계열로 넘어갔다. 학생운동은 학습 서클과 비밀결사 수준을 넘어섰고 자치조직인 총학생회 그 자체가 거리시위를 수행하는 전투조직으로 변화해 전국적 연대를 형성했다.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의장 김민석)이 탄생한 것이다. 전학련은 산하에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 투쟁위원회’(삼민투, 위원장 허인회)라는 전투조직을 설치했다. 광주민중항쟁 5주년을 맞아 전학련은 광주항쟁 진상규명과 학살원흉을 처단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전국적인 시위를 벌였다. 전국 80개 대학 5만 여명의 대학생이 시위에 참가했다.

 

5 23일 서울 5개 대학 ‘5월 투쟁특위소속 대학생 73명이 서울 미국문화원을 점거했다. 그들은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보유한 미국이 공수특전단과 보병 20사단의 광주 투입에 대해 사과하고 독재정권 지원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나흘간 미국문화원을 점거했던 대학생들은 내외신 기자회견을 한 다음 전원 연행되었다. 삼민투를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로 규정한 정부는 현장을 지휘했던 함운경, 고진화 등을 구속하고 전학련 의장 김민석, 삼민투 위원장 허인회를 수배했다. 그리고 [깃발]을 발간했던 민추위를 고리로 삼아 민청련을 학생운동의 배후로 몰았다. 이 사건으로 민청련 김근태 의장은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 등에게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남영동 1985>는 바로 그 사건을 재현한 것이다. 김근태 의장은 그 와중에도 고문한 사람의 얼굴과 이름, 방법, 시간을 상세하게 기억해두었다가 변호인과 가족에게 알렸다.

 

대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을 견디다 못한 정부는 학원안정법을 제정하려고 했다. 대학에 선도교육위원회를 만들고 학생운동 관련 학생단체를 대학당국이 해산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이었다.

장세동 안기부장과 허문도 허문도 청와대 정무수석이 주동자였다. 야당, 재야, 대학생 단체가 공동투쟁위원회를 만들어 강력하게 대응하자 정부는 결국 법 제정 작업을 중단했다. 1985 11월 재야 세력이 마지막 무기를 빼들었다. 재야 민주화운동의 본부 역할을 하던 민통련이 민주헌법쟁취 위원회를 구성한 것이다. 여기에 호응해 전학련 산하 군부독재타도 및 파쇼헌법철폐투쟁위원회’(위원장 김의겸) 소속 서울 14개 대학 학생 191명이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을 기습 점거했다.

 

 

 

-민주개헌 천만인 서명운동-

 

1986 2월부터 양김의 연대기구인 민주화추진협의회가 민주개헌 천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정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신민당사를 봉쇄했다. 전학련이 범국민개헌서명운동본부를 띄웠고 김수환 추기경,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성공회 정의실천사제단, 조계종 승려 152, 여성계 인사, 대학교수들의 개헌 요구 성명과 공동선언이 줄을 이었다. 마치 봇물이 터진 것 같은 형세였다.

 

그런데 시민들의 민주화투쟁에 대한 호응이 점차 높아가던 이 시기에 학생운동은 이념적인 면에서 정상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서울대 학생운동가 김영환이 쓴 [강철서신] 시리즈가 지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와 같은 자극적 제목을 단 팸플릿에서, 그는 김일성의 관점으로 박헌영을 비판하면서 주체사사으이 수령관품성론을 전파했다. 학생운동의 대세를 장악한 NL 계열의 조직에는 구국학생연맹, 애국학생회, 구국학생동맹과 같은 민족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 붙었다.

공개조직은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처럼 반미와 민주화를 결합한 이름을 짓는 게 유행이었다. 구국은 일제강점기 민족해방투쟁을 하던 사람들이 쓰던 말이지만 대한민국을 미제 식민지라고 보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매력이 있는 단어였다.

 

강철이라는 필명을 널리 떨쳤던 김영환은 반제청년동맹이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활동했다. 남파간첩과 접촉한 그는 1991년 강화도 해안에서 반잠수정을 타고 평양에 가서 김일성 주석을 만났으며 1992년 하영옥 등과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결성하고 지역조직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접촉했다.

 

그렇지만 실제로 본 북한의 실상이 생각했던 것과 달라 번민하다가 1997년 초 민혁당을 스스로 해산했다. 1998년 말 거제도 남쪽 해상에서 해군의 함포를 맞아 침몰한 북한 반잠수정에서 관련 단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민혁당은 그저 몇몇 청년지식인들이 벌인 이념의 소꿉놀이로 끝났을 것이다.

공안당국은 민혁당 조직원들을 구속하고 사건을 발표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반제민족혁명운동가김영환은 북한해방운동가로 전향했다. 그가 강철서신으로 운동권의 스타가 되었을 때, 학생운동 선배들은 그 유행에 휩쓸린 후배들을 간곡하게 말렸다. 북한이 무늬만 사회주의 국가일 뿐 실제로는 개인숭배와 독재가 일상화 된 전체주의 왕조국가라는 것은 굳이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주체사상을 전파하는 일에 몰두했던 사람들이 북한인권운동가로 전향해 그 때 북한과 어울리지 말라고 말렸던 사람들은 종북세력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인간의 부박함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준 것이다.

 

1986 3월부터 신민당이 개헌추진위원회 지방지부 결성대회와 현판식을 열었고 학생과 재야는 이 행사를 활용해 선전전을 펴고 거리시위를 벌였다.

 

…………..

 

그들은 제각기 다른 구호를 외치면서 경찰과 충돌했다. 시위대는 5만명이 넘었다. 정오부터 밤늦은 시각까지 인천 시내는 최루탄과 돌, 각목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전쟁터로 변했고 인천 민정당사가 불탔다. 정부는 5.3 인천 사태를 폭력봉기로 규정하고 민통련 문익환 의장과 장기표 정책실장을 포함한 간부 전원을 구속했다.

 

……..

 

정부는 5.3 사태와 관련해 모두 129명을 구속하고 60여 명을 수배했다. 함께 활동했던 시인 박노해는 백태웅 등과 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했다.

 

1986 10 24일 안기부는 마르크스레닌주의당 결성기도사건관련자 100여 명을 체포해 열세 명을 기소했다. 하지만 1986년 하반기에 학생운동을 지배한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니라 주체사상과 민족해방혁명론이었다. ….NL 계열은 자신들의 노선을 관철하기 위한 독자적 전국조직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을 결성했다. 경찰이 결성식 장소였던 건국대를 포위하고 최루탄을 쏘면서 진입하자 학생들은 건물 안으로 피신해 사흘을 버텼다. 경찰은 무장헬기와 소이탄, 취루액을 동원해 건물에 진입하여 무려 1525명을 체포하고 1288명을 구속함으로써 단일 사건 최다 구속 신기록을 세웠다. ‘건대사태로 알려진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과 학생운동이 7년 내내 벌였던 기나긴 싸움의 절정이었다.

 

 

 

-6월 민주 항쟁의 서막-

 

1987년이 되자 국민의 정치적 관심은 헌법 개정 여부에 집중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임기가 1년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헌법을 바꾸지 않으면 또 5000명의 선거인단이 차기 대통령을 뽑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정권교체도 민주화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민주화세력은 민주화를 위한 최소 요구이자 절대적 조건인 대통령직선제 회복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1 14, 어찌 보면 필연적이고 달리보면 우발적인 사건이 터졌고 이 운명적인 사건이 대한민국의 진로를 바꾸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씨가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 것이다. [중앙일보]가 대학생 사망 사실을 최초 보도했고 [동아일보]가 더 많은 사실을 취재해 더 크게 보도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수사관이 범죄사실을 추궁하면서 주먹으로 책상을 치자 박종철 군이 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 초기 [동아일보] 기자들의 활약은 역사적으로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 [동아일보]는 시신에 피 멍자국이 있었다는 부검 관련 소식에 이어 쇼크로 인한 심장마비가 아니라 물고문으로 인한 사망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의사의 검안소견서를 보도했다. 그때의 [동아일보]는 오늘의 [동아일보]와 전혀 다른 신문이었다. 비난여론이 끓어오르자 검찰이 경찰관 두 사람을 구속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유감을 표명하고 치안본부장과 내무부장관을 경질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 파문이 가라앉을 사건이 아니었다. 구속자 가족모임인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민가협)의 어머니들이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 드러누었다. 민정당이 국정조사권 발동을 거부하자 신민당 국회의원들도 농성을 시작했다. 김근태 민청련 의장 고문사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재야, 종교계, 여성계, 시민단체가 구성했던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가 활동을 본격화했다. 이것이 나중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로 발전해 6월 민주항쟁의 지도부가 되었다. 전국의 대학에서 고문살인 규탄집회가 열렸다. 2 7일 서울 명동성당을 비롯해 전국에서 열린 추도대회가 거리시위로 번졌을 때 5.18 이후 처음으로 일반 시민들이 반정부 시위에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종교단체 추도행사가 열린 3 3일에는 전국 46개 대학에서 집회가 열렸다.

 

 

 

-전두환의 4.13 호헌선언-

 

야당은 전투모드에 들어갔다. 신한민주당 이민우 총재는 바지사장이었고 김영삼, 김대중 양김이 당의 대주주였다. 그런데 고용사장이 대주주의 뜻과 달리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정부와 타협하려고 하자 법적으로 대항할 수단이 없는 대주주들이 투자금을 회수해 버렸다. 신민당 소속 의원 대부분이 전격 탈당해서 통일민주당을 창당한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신당의 창당발기인 대회가 열린 4 13일에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한 그는 개헌을 하지 않을 것이며 계속 개헌을 주장하면서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을 엄단하겠다고 말했다. 이른 바 ‘4.13 호헌선언이다. 뉴스를 보면서 우리는 휘파람을 불었다. “넌 이제 죽었어!”

 

호헌선언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뿌린 행위였다. 7년을 체육관 대통령의 독재 아래 산다는 것을 끔찍한 일로 여기는 국민이 많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날부터 국민적인 호헌철폐투쟁이 불붙었다. 야당과 대학생, 종교인, 대학교수 등 기존의 세력 범위를 넘어 여성단체, 화가, 문인, 연극인, 법조인, 의사, 교사, 약사, 한의사, 간호사, 영화인, 연예인들의 호헌반대성명 발표가 줄을 이었다. 마치 들불과 같았다.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한국경영자총협회, 이북5도 민중앙연합회, 실향민호국운동중앙협의회, 한국반공연맹, 대한노인회, 한국노총 등 소수의 단체들만이 호헌지지 성명을 냈다. 대부분의 신문이 호헌선언을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으로 지지했지만 국민여론은 그와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다시 5월이 오자 전국 62개 대학에서 광주항쟁 추모집회가 열렸고 명동성당에서는 광주민중항쟁 제7주기 미사가 열렸다. 그런데 이곳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핵폭탄 급 진실을 폭로했다. 이미 구속된 경찰관 두 사람 이외에도 박종철 씨를 죽인 범인이 더 있다는 것이었다. 김승훈 신부는 고문살인범 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사, 이정오 경장이 현직에 그대로 근무하고 있고 치안본부의 전석린 경무관과 유정방 경정이 사건을 조작했으며 강민창 치안 본부장이 사건은폐와 범인조작에 개입했다고 폭로했다.

사흘이 지난 후 검찰은 고문경관이 셋 더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동아일보]는 김성기 법무부장관과 서동권 검찰총장이 범인 축소, 은폐 사실을 석달 동안이나 알면서 감추었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임시국무회의를 열어 내각 총사퇴를 결정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대규모 개각을 단행했다. 검찰은 공안수사의 대부로 통하던 치안본부의 박처원 치안감을 구속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6월 민주항쟁 후에 구속되었다.

 

그러나 분노의 불길은 잦아들지 않았다. 마침내 정당, 재야, 학생, 각계각층의 단체 대표들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했다. 2,191명의 발기인은 지역대표 352, 종교계 683, 정치인 213, 각계각층 대표 943명이었다. 고문은 함석헌, 홍남순, 강석주, 문익환, 윤공희, 김지길, 김대중, 김영삼이었다. 상임공동대표 11명은 박형규, 김승훈, 지선, 계훈제, 이우정, 송건호, 박용길, 고은, 양순직, 김명윤, 한승헌이었다. 감옥에 있던 김근태 민청련 의장은 비상임 공동대표를 맡았다. 오충일 목사가 위원장을 맡은 상임집행위원회에는 이해찬, 임채정, 장영달, 이미경, 김부겸, 이재오, 박계동, 이규택 등 젊은 활동가들이 포진했다.

 대변인은 인명진 목사, 인권위원장은 이상수 변호사였다. 노무현 변호사는 부산 국본의 상임집행위원장이었다. 국본의 주요 인사들 가운데 세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 국무총리, 장관, 국회의원이 된 사람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김영삼, 이재오, 박계동, 안명진 등 후일 보수진영으로 간 사람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국가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본 집행부의 면면을 보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6월 민주항쟁의 결실임이 분명하다.

 

 

 

-연세대 이한열 씨 사건-

 

1987 6 10일 오전 민정당은 전당대회를 열어 노태우 씨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고 전두환 대통령은 그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국본은 그 행사를 겨냥해 같은 날 오후 6시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국민대회를 열었다. 그날 국민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연세대 학생 이한열 씨의 생사문제였다.

 

6 9일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6.10 국민대회 참가 결의대회를 마치고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중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 씨가 총류탄(SY-44)에 뒷머리를 직격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신문들은 이한열 씨가 뒷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다른 학생의 품에 안겨 있는 사진을 크게 보도했다.

 

 

 

6 10일 오후 여섯 시, 나는 유인물 몇백 장을 품에 감추고 서울 시청 광장에 서 있었다. 국본 지도부 인사들이 대회 개막을 선포하기로 한 성공회 본부를 경찰이 미리 봉쇄했지만, 미사에 참여할 피아노 반주자 등으로 위장해 성공회 교회에 잠입하는 데 성공한 몇몇 인사들이 여섯 시에 종탑으로 올라갔다. 종소리와 동시에 유인물 뭉치가 날아올랐고 구호가 터져 나왔다. 서울시청 일대 거리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시위대로 뒤덮였다. 최루탄이 터졌고 버스와 택시, 승용차들이 경적을 울렸다. 남산 아래 힐튼호텔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 축하연을 하던 민정당 국회의원들이 최루탄 가스에 쫓겨 흩어졌다. 거리 시위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전국 22개 도시에서 50만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고 4000여 명이 연행되었다. 서울에서는 경찰이 시위대에 밀려 청와대와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부근 전략거점으로 후퇴했다. 시위대 일부가 명동성당에 들어가 닷새 동안 농성하면서 투쟁 분위기를 이어갔다. 명동 일대는 아무나 와서 대자보를 붙이고 연설을 해도 되는 해방구로 변했다.

 

나는 노동자와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 청년지식인들이 뒤섞인 자생적 비밀결사에 속해 있었다. 한 시간 간격으로 세 곳의 중간 집결지를 정하고 나갔다. 모든 것이 오판이었다. 유인물은 금방 동났고, 조직원들은 모두 흩어져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큰 시위가 벌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1980 5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1987 6 10일 서울 도심에서 내가 본 것도 혼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다. 넥타이를 맨 젊은 직장인들과 더 나이 든 시민들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본이라는 지도부가 있었고 양김이 이끄는 야당도 있었다.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 봉기-

 

6 18최루탄 추방 국민대회에서 더 큰 민심의 파도가 밀어 닥쳤다.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참여한 이날 시위의 하이라이트는 서울이 아니라 30만 명이 시위를 벌인 부산이었다. 부산 시민들은 거리에서 교대로 잠을 자면서 밤샘시위를 벌였다.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경찰은 전국에서 1500여 명을 연행했지만 시위를 통제할 능력을 잃었다.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고 주한미군방송(AFKN)이 미군과 군속, 가족들의 외출자제령을 보도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긴급친서를 보냈고 국무부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가 서울에 왔다. 6 24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가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만나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회담을 마치고 나온 김영삼 총재는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선언했다. 그가 투박한 부산 사투리로 햅상은 갤랠되었다라고 선언하는 장면이 내가 본 정치인 김영삼의 모든 모습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국민평화대행진-

 

세 번째 파도는 6 26국민평화대행진이었다.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80만 명이 거리시위에 나왔다. 맨손으로 시위를 한 6.10 대회와 달리 시민들은 도처에서 투석전을 벌였으며 대학생들이 던지는 화염병에도 큰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사태 추이를 지켜보던 광주 시민들이 마침내 궐기했다. 그들은 이번만큼은 결코 고립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광주에서만 2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목포, 순천, 여수, 광양 등 전남 전역의 도시에서도 수 만명이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전국에서 3500여 명을 연행했지만 점점 수세에 몰렸다. 30개가 넘는 경찰서와 파출소가 화염병에 맞아 불이 났다. 민정당 지구당사와 공공기관 건물 여러 곳에 화염병이 날아들었다. 경찰차량 20여 대가 불타고 전복되었다. 전국 거의 모든 도시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를 10만여 명의 경찰력으로 진압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아무도 정부와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다음 국민대회에서 얼마나 더 큰 시위가 벌어질지 가늠할 수 없었다.

 

 

 

-6.29 선언-

 

6 29일 민정당 노태우대통령 후보가 8개 항으로 이루어진 시국수습 특별선언을 전격발표했다. 소위 ‘6.29 선언이다. 대통령직 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과 정치범 석방, 국민 기본권과 언론자유 보장, 지방자치제 실시와 교육자율화, 자유로운 정당활동 보장 등을 담은 이 선언으로 전국적 도시봉기는 막을 내렸다. 전두환 정권은 야권의 분열을 일으키면 선거를 통해서도 재집권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6.29 선언을 했으며 이 희망은 결국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12.12 군사 반란과 광주학살, 그리고 천문학적 부정부패를 저지른 죄를 완전히 면책 받은 것은 아니었다.

 

 

 

7 5일 이한열 씨가 끝내 숨을 거두었다. 7 9일 서울역 광장에서 100만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영결식이 열렸다. 이 행사는 6월 민주항쟁의 에필로그였다. 영결식이 끝나고 경찰이 해산을 종용하면서 페퍼포그와 최루탄을 쏘자 100만 시민은 조용히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헌법을 고치고 선거를 하면 정권을 바꾸고 민주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그들의 희망은 다섯 달 뒤에 물거품이 되었다.

 

 

 

-노동자들의 투쟁-

 

하지만 6월 민주항쟁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시민들의 정치투쟁이 소멸된 공간은 노동자들이 채웠다. 독재정권의 정치적 억압이 약화되자 곧바로 전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과 파업, 거리시위가 폭발했다.

노동자들은 재벌그룹 대공장에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7 5일 현대엔진을 시작으로 현대미포조선 등 대규모 사업장에서 노조설립 신고가 줄을 이었다. 마산, 창원, 울산 등 영남지역 중화학공업 대공장을 휩쓴 노동조합 결성과 임금, 근로조건 개선투쟁은 중장비를 동원한 거리시위로 이어졌다. 8 22일 거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씨가 거리시위 도중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검찰은 노동자들을 지원한 노무현 변호사와 이상수 변호사를 장례방해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투쟁은 수도권 중소기업으로 확산되었으며 1987년에만 1500개에 육박하는 노동조합이 새로 결성되었고 조합원 수는 23만 명이 늘었으며 7월에서 9월까지 3300건이 넘는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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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10월 유신에서 10.26까지]

 

-고려대 침투 간첩단 사건, 검은 10월단 사건, 전남대 함성지 사건, 남산 부활절연합에배 사건-

 

 

 

유신 이후 1979 10월의 부마항쟁까지 7년동안, 대중적인 반정부투쟁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야당, 재야인사, 지식인, 대학생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지키려고 저항했다가 구속되고 박해받은 사건들이 있었을 뿐이다. 유신정권의 철권통치는 너무나 강력했다.

 

중앙정보부는 예방적 목적에 입각한 조직사건을 연달아 터뜨렸다. 국민 대중의 불만이 팽배해도 뇌관을 제거하면 화약고가 폭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973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김낙중을 중심으로 한 고려대 침투 간첩단 사건’, 내란음모 혐의를 씌운 고려대 검은 10월단 사건’, 시인 김남주와 역사학자 박석무를 엮어 넣은 전남대 함성지 사건’, 박형규, 권호경, 김동완 등 기독교 목회자들을 구속한 남산 부활절연합예배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들이 한 일은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만들거나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치적 의사표시를 한 것 뿐이었다. 구속영장도 없이 수십 일씩 불법 구금한 가운데 고문을 해서 받아낸 진술서 말고는 북한과 연계되거나 내란을 모의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김대중 납치사건,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

 

1973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대중 씨를 도쿄 호텔에서 납치해 현해탄에 수장하려 한 것이다. 이 사건을 실행한 주일 외교관은 나중에 두둑한 현금을 들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던 그의 아들 성김(Sung Kim) 35년이 지난 2008년 주한 미국대사가 되어 서울에 돌아왔다.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을 죽이지 못하고 자택 근처에 내려주었다. 대학가에서 다시 유신철폐투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0 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시작된 교내시위가 경북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으로 번져 나갔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는 10 25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가 사망했다. 중앙정보부는 그가 총책 이재원에게 포섭되어 북한에 갔고, 공작금을 받고 정보를 제공하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자백하고 조사를 받던 중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2006 2월 법원은 국가의 배상판결을 내림으로써 중앙정보부의 고문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를 사실상 인정했다.

11월 들어 대학생들의 동맹휴학과 교내시위가 전국 대학으로 번졌으며 경기고, 대광고, 광주일고 등 고등학교까지 확산되었다.

 

 

 

-박정희의 긴급조치 1, 2, 4호 발동 그리고 민청학련 사건-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 결의대회를 열었고 재야인사들의 시국선언도 줄을 이었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시작하자 신민당이 합류했고 문인들도 집단으로 가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마침내 유신헌법이 부여한 비상대권을 휘둘렀다. 1974 1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한 것이다. 정부는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개헌을 청원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개헌청원 서명운동 주동자들을 대거 구속해 군법회의에 넘겼다.

대학생들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유신반대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전국적인 연대를 모색했다. 1974 3월 개학과 동시에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민청학련(민주청년학생연맹)이라는 이름을 기재한 유인물이 뿌려졌다. 4 3일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민청학련이라는 반국가단체를 뿌리 뽑기 위한 긴급조치 4를 발동했다.

민청학련에 가입하거나 연락, 선전, 수업거부, 집회, 농성, 관련 사실에 대한 보도를 모두 처벌대상으로 삼았다.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해 비상군법회의에 회부하며 형량을 최소 징역 5년에서 사형까지로 정했다.

비상군법회의는 이철, 유인태, 김병곤, 나병식, 김지하, 이현배, 여정남에게 사형을, 유근일 등 일곱 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사형을 구형받은 후 최후진술에서 영광입니다라고 말했던 그들은 1년도 지나기 전에 모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대통령도 그들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

 

- 2차 인혁당 사건와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그런데 1974 5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가 10년 전 지하로 잠복한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반국가단체를 재건하려 했다고 발표한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 또는 2차 인혁당 사건은 달랐다. 정부는 그들이 재일조총련 간첩과 함께 민청학련을 배우 조종했다고 주장했다. 군법회의는 민청학련 관련자까지 포함해 무려 열네 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의 실상을 알린 것은 김지하 시인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75 2월 석방된 그는 [동아일보]에 연재한 옥중수기 [고행1974]에서 하재완과 이수병 등 인혁당 사건 구속자들에게 들은 중앙정보부의 잔혹한 고문과 허위조작 실상을 폭로했다. 이 수기는 김지하 시인의 재구속,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 기자 대량해고 사태로 이어졌다.

정부의 압력을 받은 기업들이 광고를 취소해 [동아일보] 광고 지면이 백지로 나왔다. 그러자 시민들이 돈을 보내 [동아일보]를 격려하는 광고를 실었다. 내 기억에 최후까지 남은 기업광고는 안국약품의 감기약 투수코친이었다. “동아일보 만세, 투수코친도 만세!” 라고 쓴 독자 광고도 기억난다.

 

민청학련 사건은 반정부투쟁을 뿌리 뽑으려고 한 정부의 의도와 달리 민주화운동을 대중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1974 12 25일 민주화세력은 민주회복국민회의를 창립했다. 윤보선, 백낙준, 유진오, 김재준, 김수환, 정일형, 강신명, 김대중, 윤형중, 함석헌, 이병린, 천관우, 이희승, 이태영, 김영삼, 홍성우, 함세웅, 한승헌 등 저명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이 중심이었다. 김영삼 씨를 총재로 선출한 신민당은 적극적인 개헌 투쟁에 나섰다. 박정희 대통령이 곧바로 역공을 취했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의 신임을 묻기 위해 국민투표를 하겠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그는 국민투표에 자신이 있었다. 언론자유와 토론을 모두 봉쇄한 가운데 행정조직을 동원해 찬반 국민투표를 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야당이 거부의사를 밝혔지만 1975 2 12일 국민투표를 밀어붙였다. 투표율 79.8% 에 찬성률 73.1% 가 나왔다. 1972년 유신헌법 제정 당시의 투표율 91.9 % 에 찬성률 91.5% 와 비교하면 둘 다 현저히 낮았다.

 

1975 4 8일 대법원(재판장 민복기)은 서도원,김용원,이수병, 우홍선, 송산진,여정남,하재완,도예종 등 대학생이 아닌 인혁당 관련 피고인 여덟 명의 항소를 기각해 사형을 확정했고 다음 날 새벽 정부는 그들을 지체 없이 사형시켜버렸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국제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함세웅 신부 등 가톨릭 사제들이 장레미사를 지내려고 하자 경찰은 크레인을 동원해 영구차를 탈취해서 화장해버렸다.

문정현 신부는 시신을 지키려고 경찰에 맞섰다가 차에 깔렸다. 그가 다리를 저는 것은 그때 입은 부상 때문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최근 발매된 [악마기자 정의사제] 책을 보시면 잘 나와 있습니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관련자들은 민주화 이후 열린 재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재심 판결을 하면서 사법부의 잘못을 사과했고 국가가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박정희의 긴급조치 9호 발동-

 

1975년 봄 베트남에 사회주의 통일정부가 들어섰다. 5 13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해 유언비어 날조 유포, 헌법에 대한 부정, 반대, 왜곡, 비방, 헌번ㅂ개정 청원 선전, 선동, 긴급조치에 대한 비방을 모두 처벌대상으로 규정했다. 학생의 집회, 시위, 정치 관여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학생과 학교와 단체에 대해서는 주무장관이 제적, 해임, 해산, 폐쇄 조처를 취할 수 있게 했다. 게다가 이런 조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허가 없이 보도하는 것도 긴급조치 위반이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살지 않으면 누구든 범죄자가 될 수 있었다. 1979 10월까지 4년 반 동안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은 1400여 명이었고 그 중 1000여 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민주화 이후 헌법재판소는 1호부터 9호까지 모든 긴급조치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정부는 대학생들을 대거 제적하고 감옥과 병영으로 보냈으며 대학교수와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했다. 한신대의 안병무, 문동환, 연세대의 서남동, 이계준, 양인응, 김규삼, 고려대의 이문영, 김용준, 김윤환, 이세기 교수를 해직했다.

교수재임용 심사제도를 도입해 이화여대 김윤숙, 덕성여대 염무옹, 한양대 리영희, 연세대 성내운, 송리성 등 400명이 넘는 교수들을 탈락시켰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사주들은 언론자유수호투쟁을 벌인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함으로써 정부에 굴복했다.

 

검찰은 1976 3.1절 명동성당 기념미사에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이우정, 문동환, 윤반웅, 이문영, 안병무, 서남동, 은명기, 문익환, 이태영, 함세웅, 김승훈 신부, 김대중과 이희호, 정일형 의원을 연행했고 정부전복 선동혐의를 씌워 20명을 구속했다.

일제에 징병되었다 탈출한 후 6000리 길을 걸어 임시정부를 찾아갔던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 1975 8 17이리 경기도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2013년 묘소 이장 때 모습을 드러낸 그의 두개골에는 망치 크기의 동그란 구멍이 있었다. 실족사가 아니라 타살이었던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 이후 대학가에서는 작은 규모의 교내시위만 벌어졌다. 대학 교정에 사복형사뿐만 아니라 전투경찰이 상주했고, 시위 주동자는 선언문 첫 문장을 다 읽기도 전에 체포되었다.

1975 4 11, 서울농대의 시국성토대회에서 김상진 씨가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고 반독재민주화투쟁의 단호한 결의를 보이기 위해 칼로 복부를 찔렀다. 5 22일 관악캠퍼스에서 김상진 추도식을 한 학생들이 긴급조치 9호 선포 후 첫 시위를 벌였다 

80명이 체포되었고 29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이처럼 살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1976년 가을 축제 행사 끝에 시위를 벌인 서울대를 시작으로 1977년에는 한신대, 서울대, 감신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고려대, 연세대, 전북대, 국민대 등에서 반정부 교내시위가 일어났다.

1979년까지 이 대학들과 더불어 계명대, 영남대, 강원대, 경희대, 부산대, 동아대, 전남대, 한국외대, 마산대, 경남대 학생들이 교내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시위 소식은 신문과 방송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관련 학생들이 재판에서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1단짜리 단신보도가 나오면 국민들은 그제야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과 함평 고구마 사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등장)

 

중앙정보부는 1979 3월 노동자와 농민, 여성들을 대상으로 시민교육을 하던 크리스챤아카데미 간사 한명숙, 이우재, 황한식, 장상환, 김세균, 신인령 등과 대학교수 정창렬, 김병태, 유병묵, 아카데미 원장 강원룡 목사 그리고 거기서 교육을 받은 농민단체와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대거 구속한 뒤 그들이 사회주의 건설을 획책했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이다.

 

정부가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을 단속하느라 분주했던 1970년대 후반, 다른 곳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었다.

1976년 가을 전라남도에서는 고구마 농사가 풍년이었다. 그런데 농협이 약속과 달리 생고구마를 전량 수매하지 않아 농가의 고구마가 썩어나갔다. 가톨릭농민회가 고구마 주산지였던 함평군에서 고구마 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피해보상요구투쟁을 시작했다.

함평군 고구마 농가 피해 전액이 1억 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농협이 보상을 거부하면서 싸움이 전라남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1977 4월 농민들은 광주에서 거리행진을 벌인 데 이어 서울과 전국 대도시를 돌면서 불합리한 농정의 실상을 폭로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아마 한국전쟁 이후 첫 대규모 농민투쟁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가톨릭농민회를 비롯한 농민단체들이 역량을 키워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을 결성했다. 오늘날 우리가 전농이라고 부르는 단체다.

 

 

<함평 고구마 사건>

 

-YH 무역 사건-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운동이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1979 8월 경찰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YH 무역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 시켰다. 훗날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된 최순영 씨가 지부장이었던 YH 무역 노동조합원들은 돈을 외국으로 빼돌리고 노조를 탄압하기 위해 위장폐업을 한 악덕사업주를 처벌하고 회사를 살려달라는 요구를 들고 신민당에 들어왔고 신민당 지도부는 그들을 보호했다. 그런데 경찰은 제1 야당 당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노동자들을 체포했으며 신민당 당직자와 국회의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얼굴이 떡이 된 박권흠 신민당 대변인 사진이 기억이 생생하다. 이때 YH 무역 노동자 김경숙 씨가 4층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꾸라로 비난받던 이철승 의원을 누르고 신민당 총재가 된 김영상 의원은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고 강력한 반정부 투쟁을 선포했다.

 

 

 

 

-남민전 사건-

 

(김남주 시인 그리고 파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

 

정부는 치밀한 정치공작을 벌여 법원으로 하여금 신민당 총재단 직무정지 가처분 판결을 내리게 했다. 김영삼 총재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유신정권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것을 빌미 삼아 본회의장 주변에 무술경위를 배치한 가운데 공화당과 유정희 의원들끼리 모여 김영삼 의원을 국회에서 제명해 버렸다. 이것이 1979 10 4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시국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경찰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수사진행 상황을 전격 발표했다. 무려 77명을 구속한 대형 조직사건을 터뜨린 것이다.

 

공안당국은 동아건설 회장 최원석 자택의 강도사건을 수사하다가 이것이 단순한 강도사건이 아니라는 심증을 굳히고 저인망식 수사를 펼쳐 남민전 사건을 만들어 냈다. 이재문, 신향식 등이 유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지하조직을 만들고 청년학생위원회를 조직하려 한 것을 북한공산집단의 대남전략에 따라 국가변란을 기도한 사건으로 규정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적용한 것이다.

이재문 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고 신향식 씨는 사형당했다. 다른 관련자들은 최장 10년 징역을 살았다. 일부 인사가 북한과 연계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민주화투쟁 조직인 줄 알고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후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이 사건과 관련해 김남주 시인이 구속되었고, 무역회사 주재원으로 프랑스에 가 있었던 홍세화 씨는 망명허가를 받아 파리의 택시운전사가 되었다.

 

 

 

-부림사건- (영화 <변호인> 관련 단체 등장)

 

1979 10 16, 부산대 학생들이 교내시위를 벌인 다음 삼삼 오오 무리를 지어 거리로 나왔다. 종종 있었던 학생시위였는데 상황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퇴근길 직장인과 시민들이 대거 합세하면서 부산 시내가 거대한 시위장으로 변해 버렸다.

김영삼 총재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 민심이 끓어 오른 것이다. 공안당국은 부산대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의 핵심 고리가 6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양서협동조합이라고 판단했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만들어낸 소위 부림사건은 바로 이 양서협동조합 관계자들을 반국가단체로 엮은 사건이었다.

영화 <변호인>에서 세금전문 변호사 노무현이 인권변호사로 변신한 계기가 되었던 부동연 사건이 바로 이것이다.

 

시위가 낮 밤 없이 계속되자 정부는 10 18일 새벽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해 공수특전단 병력을 투입했다. 부산 시위는 수그러들었지만 경남대 학생들이 시작한 시위에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확산된 마산지역 시위는 더 크게 불붙었다.

창원의 보병 39사단을 투입했지만 10 19일 밤에도 시위가 계속되었다. 5공수여단이 마산에 들어갔다. 군과 경찰은 부산과 마산 일대에서 무려 1600여 명을 체포했다.

 

 

 

-부마항쟁-

 

부마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 우리에게는 아직 연속적, 동시 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할 역량이 없었다. 그런데 부마항쟁의 충격은 집권세력의 내분을 부추겨 유신체제를 무너뜨렸다.

1979 10 26일 밤, 서울 궁정동 안전가옥 만찬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쏜 것이다. 김재규 부장의 군법회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지만 내가 발포 명령을 하는데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에서 200만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냐고 맞장구쳤다.

김재규는 각하자유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10.26은 민주혁명이며 5.16이 정당하다면 10.26도 정당하다고 주장했던 그는 1980 5 24일 교수대에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생물학적 생명을 빼앗은 것은 총탄이었지만 정치적 생명을 앗아간 것은 그 자신이 이룬 성공이었다.

그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대중의 욕망을 무제한 분출시키고 그 탁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산업화의 성공으로 절대빈곤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대중은 다른 욕망에 끌리기 시작했다. 자유, 정의, 민주주의, 인간적 존엄성을 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욕망을 존중하지 않자 많은 국민이 마음으로 그를 버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 그와 같은 민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10.26 사건을 그렇게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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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에서 10월 유신까지]

 

-박정희 시대의 민주주의 투쟁-

 

모든 국민이 군인 박정희의 쿠데타와 대통령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 5.16 3선 개헌, 10월 유신을 환영하고 지지한 국민도 많았다. 그때는 일반 가정에 전화가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5.16에 대한 국민의 판단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여론조사 자료가 없다.

하지만 일반 시민은 물론이요, 대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도 군사정부에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5.16이 일어났을 때 4.19 주역들은 민주당 장면 정부를 지키려고 궐기하지 않았다. 박정희 장군이 여러 차례 공언한 민정이양과 병영복귀 약속을 파기했지만 국민들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무려 일곱 명의 후보가 출마한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강력한 반공주의와 더불어 경제적 자주와 자립을 강조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내걸었다. 그런데 유력한 경쟁자였던 윤보선 후보는 그의 남로당 전력을 폭로하고 민족적 민주주의를 공산주의 또는 결과적으로 공산주의를 편드는 중립주의로 몰아가는 색깔론을 펼쳤다.

박정희 대통령을 추앙하는 산업화 세력이 종북주의이념공세를 벌이고, 민주화세력이 그에 대해 치를 떠는 오늘의 현실과 비교하면 황당해 보이겠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겨우 10년이 지난 시점에 빨갱이 마녀사냥의 위력이 어떠했을지 상상해보라.

막판에 허정과 송요찬 등 야권 후보들이 사퇴해 윤보선 후보가 사실상 야권 단일 후보가 되었다. 민주화 세력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는 민주화 이후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승만 정부 때부터 2012년 대선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정치적 현안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반공, 반북, 경제성장을 내세우는 정치세력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는 현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박정희 후보는 470만 표를 얻어 455만 표를 얻은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간신히 누르고 당선되었다. 하지만 떳떳하게 이긴 것은 아니었다. 군사정부는 호남을 중심으로 흉년이 든 농촌에 원조 밀가루를 대량 살포했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정치를 가동하고 공무원 조직을 선거에 동원했고 군 부재자투표에서 광범위한 부정을 저질렀다. 하지만 박정희 후보가 오로지 부정선거만으로 당선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호남에서 압승했고 1956년 제 3대 대통령 선거 때 진보당 조봉암 후보 표가 많이 나왔던 선거구에서도 이겼다.

도시에서 전반적으로 지기는 했지만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소시민계층과 진보적 청년층의 지지를 적지 않게 받았다. 만약 내가 그 때 젊은 유권자였다면 누구를 찍었을까? 쿠데타 주모자를 뽑기도 싫었겠지만 윤보선 후보도 지지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경제적 자주, 자립이라는 공약을 미국원조를 거부하는 반미주의로, 민족적 민주주의를 가리켜 공산주의를 편드는 중립주의라고 비난하는 어리석음을 어찌 편들 수 있었겠는가.

 

박정희 후보는 미국 원조자금이 52% 를 차지한 6000억 환 규모의 1961년도 추가경정예산을 경제적 대미예속이라고 비판했다. 1959년 시설부문 미국 원조 2 800만 달러 가운데 공업화를 위한 시설의 비중이 22%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들어 미국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심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 원조 총액의 30%를 차지한 미국 잉여농산물 도입으로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농가경제가 몰락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막대한 기업부채 규모와 연간 5000만 달러에 이른 무역적자를 거론하면서 민족경제를 살려내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모두 타당한 현실인식이었다.

 

 

 

-김종필과 김종필-오히라 메모 사건-

 

박정희의 참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다니다 육사로 진학해 군인이 된 후 준장으로 예편한 김종필이었다. 그는 5.16 이후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초대 부장을 지냈고 1963년에는 공화당 당의장이 되었으며 2004년까지 아홉 번이나 국회의원을 했다.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던 전두환 정권 시기를 제외하고, 박정희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까지 무려 40여 년 동안 정권의 2인자역할을 했다. 술도 잘하고 골프도 잘 치며 독서도 많이 한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가운데 하나다. 대선이 끝난 직후였던 1963 11월 초, 그는 고려대학교에서 강연을 한 데 이어 서울대 문리대에 가서 학생들과 토론회를 했다.

 

후일 6.3 사태를 주도한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회(민비연) 소속 학생들이 참석한 이 토론회에서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이 젊은 정치인은 외국자본의 지배를 벗어나 경제적 자립을 이룩한 수구사상, 사대주의, 급진적 서구사상과 자유방임적 퇴폐를 탈피하며 정서적으로는 양키즘을 배격하는 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의 핵심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공화당과 박정희를 민족적 민주주의에 따른 조국 근대화의 추진 주체라고 추켜세웠다.

공화당은 곧이어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에서 의원 정수의 60%가 넘는 110석을 차지했다. 군사쿠데타의 주역이며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사람이 반정부투쟁을 하는 학생 대표들과 공개토론을 한 것을 보면, 그는 낭만적이고 수준 있는 정치인이었던 것 같다. 요즘 보수정당에는 그런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다 .

 

박정희 정부는 한일국교 정상화를 문제로 첫 번째 위기를 맞았다. 한일국교 정상화 협상은 1951년에 시작되었다. 우리 정부는 한일합병조약을 포함해 1910년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이 체결한 모든 조약을 무효로 하고 일제강점기 수탈과 착취에 대한 배상과 징용 조선인의 미지급 임금 등 대일청구권을 행사하려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한반도 주변 해역 50~60해리에 평화선을 선포하고 이를 침범한 일본 어선을 나포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의 요구를 어느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한제국과 맺은 조약은 합법적이로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강점기 수탈에 대한 배상을 할 의사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일본인이 한국에 두고 떠난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주장했고, 한국 정부가 선포한 평화선을 철폐하라고 요구했다 .협상은 아무런 진전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1960년 들어 미국이 새로운 안보조약을 체결해 일본을 동아시아 군사동맹의 중심에 세우고 거기에 한국을 묶으려 했다. 장면 정부는 일본 정부와 청구권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그 성과를 토대로 1961년 말부터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 일본 외상과 협상한 끝에 1962년 가을 무상 3억 달러, 정부차관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을 일본이 제공하는 것으로 청구권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김종필-오히라 메모라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 돈이 청구권 자금이라고 했지만 일본 정부는 경제협력자금 및 독립 축하금이라고 했다. 야당과 재야인사들은 이 합의를 굴욕외교로 규정하고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만들어 전국을 돌면서 집회를 열었다. 1964 3월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이 5.16 이후 처음으로 거리시위를 벌였다. 집회시위는 전국 대학교와 고등학교로 확산되었다. 반정부투쟁이라기 보다는 당당한 대일외교를 요구하는 집단적 의사표현이었다.

 

1964 3 30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의 대학생 대표들을 면담했고 다음 날 전국 대학생 대표들에게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비공식적으로 보여주었다. 정부를 비판하면서 거리시위를 벌이는 대학생 대표들을 대통령이 직접 만나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것은 민주화 이후에도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에는 인내심이 부족했다. 마침 일본 기업들이 공화당에 수천만 달러의 창당자금을 제공한 의혹이 불거졌다.

정권 실세들이 국유지를 부정 불하해 거액을 챙긴 사건도 터졌다. 여기에다 중앙정보부가 대학생들을 감시하고 사찰한 사실이 드러났다. 대학생들에게는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이 부패한 친일세력으로 보였다. 5 20일 서울대 학교 문리대 학생들이 민족적 민주주의 장레식이라는 규탄집회를 열어 박정희 정부의 조국 근대화이념을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공격했다.

 

 

 

-6.3 항쟁, 인혁당 사건-

 

그러자 정부는 대화를 포기하고 힘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거리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고 무장군인들이 법원에 난입해 시위 주동자를 구속하라고 판사를 협박하는 사태도 벌어졌으며 중앙정보부가 시위 주동자들을 불법 연행해 고문했다. 6 3일 박정희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전국적 거리시위가 일어났다. 이것이 6.3 사태또는 6.3 항쟁이라고 하는 대중투쟁이다.

수만 명의 시위대가 중앙청이 있던 서울 세종로 일대 거리를 점거한 가운데 곳곳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졌다. 4.19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정부는 서울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주입했으며 대학에는 휴교령을 내렸다.

 

정부는 야당과 혁신계 인사들을 투쟁의 배후로 지목하고 이념공세를 시작했다. 1964 8 14일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도예종, 이재문, 박현채, 김중태, 김정강, 현승일, 김정남, 김도현 등 기자, 교사, 대학생들이 인민혁명당이라는 지하당을 만들어 국가 변란을획책했고 북한의 지령을 받아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벌였다며 47명을 구속했다.

     <인혁당 사건>

 

그런데 서울지검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 장원찬 등 수사검사들이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며 기소장 서명을 거부했다. 결국 도예종 씨가 반공법 위반으로 최고 징역 3년을 받는 등 일부 유죄선고가 나기는 했지만 북한과 연계된 증거가 드러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1차 인혁당 사건이다.

 

1965 2월 한일 양국 정부 회담 실무자들이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했고 양국 외무부장관은 1965 6 22 [한일기본조약]과 네 건의 협정문에 정식 서명했다.

[한일기본조약]은 한일 강제병합조약을 포함해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체결한 모든 조약과 협정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일본이 대한민국 정부를 유엔결의 제 195호에 따른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바탕 위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했다. 일부 약탈 문화재 반환을 합의한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연안 기점 12해리 수역의 배타적 관할권을 인정한 [어업협정]. 해방 이전 일본 거주 대한민국 국민과 가족의 영주허가를 규정한 [재일교포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무상 3억 달러와 장기 저리 차관 2억 달러로 약국 국민 간의 청구권 문제를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확인한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이었다.

바로 이 협정을 근거로 오늘날까지 일본 정부는 징용, 징병, 정신대,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별적 청구권이 모두 소멸되었다고 주장해 왔다.

 

한일협정 조인과 국회의 비준 절차가 진행된 여름까지 여진이 계속되었다. 2학기가 시작되자 정부는 대학교를 미리 폐쇄하고 학생운동 리더들을 잡아들이는 한편 비판적 언론인을 테러, 납치, 폭행하면서 언론보도를 강력하게 검열하고 통제했다. 서울에 위수령을 내려 다시 군 병력을 투입했다. 9 25일 중앙정보부는 반공법 위반, 내란음모죄, 내란선동죄를 적용해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 학생들을 무더기로 구속했다.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결국 그렇게 끝이 났다. 무려 1000여 명이 넘게 체포되고 350여 명이 내란죄와 소요죄로 구속당하면서 박정희 정부와 2년 넘게 투쟁을 벌였던 청년들은 6.3 세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당시 학생운동 리더로 명성이 높았거나 정계, 학계, 언론계에서 활약을 펼친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중태, 손학규, 이재오, 김덕룡, 현승일, 이명박, 정대철, 이부영, 서청원, 박관용, 하순봉, 김경재 등이 있다. 그런데 그때 거리시위에 참여했던 20대 청년들이 지금은 70대 고령층이 되어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 당을 철옹성처럼 지키고 있다.

 

6.3투쟁은 1.49 혁명의 정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박정희 정부는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정보정치와 언론통제, 대학과 재야인사에 대한 감시체계를 대폭 강화했지만 학생운동과 야당, 재야 또한 투쟁 역량을 비축했다. 정부는 1964년 의료지원단과 공병단 파견을 시작해, 1965년 수송단과 공병으로 구성된 비둘기부대와 해병 청룡부대를 거쳐 1966년 백마부대와 맹호부대에 이르기까지 연인원 30만 명 이상을 베트남 전쟁에 보냈다.

주둔 병력이 최대 5만 명이나 되었다. 그 대가로 미국은 한국군의 현대화를 지원하고 한미 경제협력을 대폭 확대했다. 노무현 정부가 3000명의 병력을 비전투 임무를 주어 이라크에 파병한 2004년에는 전국적인 대규모 반대시위가 벌어졌지만 베트남 파병은 야당이 반대하지 않았으며 국민의 반대여론도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40년 동안 세상이 달라졌고, 세계 평화와 한미관계에 대한 국민의 생각도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권력형 부정부패 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그때가 지금보다 더 예민했던 것 같다. 1966 9 [경향신문]이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특종 보도했다. 사건의 핵심은 일본 미쓰이물산이 울산 한국 비료 공장건설사업과 관련해 100만 달러의 리베이트를 제공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측근들과 삼성 관계자들은 현금 대신 대량의 사카린 원료를 건설자재로 위장해 들여온 다음 이것을 처분해 정치자금과 공장 건설비, 한국비료 운영비로 쓰려고 모의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먹어본 적이 없겠지만 우리 세대는 설탕이 아니라 사카린으로 단맛을 낸 과자와 아이스케키를 먹으며 자랐다. 정경유착과 밀수 범죄의 진상이 드러나자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기로 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차남 이창희 씨가 총대를 메고 대신 구속되었다.

야당은 밀수 재벌 처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두한 의원이 밀수 재벌을 비호하는 국무위원들에게 똥물을 끼얹는 사건도 일어났다. 효창운동장에서 야당이 연 규탄대회에는 수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을 밀수 왕초라고 비난한 장준하 선생을 국가원수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했다. 대학가는 정부와 재벌의 유착과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집회로 끓어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윤보선 후보와 리턴매치를 벌인 1967 5월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 4년 전보다 훨씬 큰 116만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했다. 정부와 공화당은 6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에 필요한 의석을 확보하려고 했다. 대통령과 장관들이 전국을 돌면서 개발공약을 쏟아냈으며 일선 공무원을 선거운동에 동원했다. 중앙정보부와 검찰은 온갖 빌미를 잡아 야당 후보를 구속하고 선거운동원을 구금했다. 공화당 조직은 막걸리, 고무신, , 밀가루, 현금을 집집마다 돌렸다. 공개투표를 하다 발각된 사례도 있었고 미리 기표한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투표함에 집어 넣은 사례도 숱하게 드러났다. 도처에서 야당 참관인을 폭행해 내쫓았고 개표과정에서는 야당 후보 표를 무더기 무효표로 만들었다. 그 결과 공화당은 의원 정수의 74% 130석을 차지했다.

 

 

 

-동백림 사건-

 

부정선거 무효화를 요구하는 규탄집회와 거리시위가 전국의 대학으로 퍼져나갔다. 대학별로 휴업과 조기방학 조처를 내렸지만 시위는 고등학교로 확산되었다. 그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초대형 사건을 터뜨렸다.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한 북괴 대남적화공작단사건, 세칭 동백림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유학하면서 북한대사관과 접촉해 북한을 오갔던 임석진 박사가 조선일보 독일특파원 이기양 기자 실종사건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자신의 행위를 고백한 데서 시작되었다. 중앙정보부는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를 비롯한 관련자 30여 명을 한국으로 유인하거나 대사관에 모은 후 강제 압송했다.

<동백림사건>

1967 78일 수사 결과를 발표한 중앙정보부는 임석진, 정하용, 황성모, 최창진 등 대학교수와 정규명 등 유럽 유학생, 장덕상 중앙일보 파리특파원을 비롯해 무려 66명을 검찰에 송치하고 23명에게 간첩죄 또는 간첩미수죄를 씌웠다. 신민당 6.8 총선무효화투쟁위원회의 장준화 의원과 부완혁 집행위원도 엮어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최종심에서 간첩죄를 선고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정규명, 정하룡, 조영수 등이 사형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모두 1970년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진실이 밝혀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 반면 간첩단 사건의 정치적 위력은 즉각적이었다. 여름방학에 들어가면서 대학가의 6.8 부정선거 규탄투쟁이 식어버렸고 선거무효를 주장하면서 장외투쟁을 벌이던 신민당은 원내로 복귀했다.

 

 

 

1960년대 후반 유럽과 미국은 베트남전 반대와 사회문화 개혁 요구가 뒤범벅된 청년세대의 68혁명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반공주의라는 이념의 벽에 갇혀 있었다. 1968 1.21 사태와 북한의 미국 푸에블로 호 납치사건, 울진, 삼척 무장공비사건이 일어나자 반공, 반북 정서가 하늘을 찔렀고 전국에서 관제 규탄대회가 벌어졌다. 7 20일 중앙정보부는 통일혁명당 사건을 발표하고 158명을 체포해 96명을 기소했다.

이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병영국가북한에 맞서기 위해 대한민국 역시 병영국가로 개조하기로 결심한 듯 보인다. 병영의 기본은 인원점검이다. 정부는 국민 전체를 조직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주민등록제도를 도입했다. 향토예비군을 만들어 군복무를 마친 남자 250만 명을 정기적으로 병영에 소환했고 대학 입시에 반공도덕을 포함시켰다. 초중고 학생과 교사에게 반공교육을 실시했으며 전국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군사교육을 받도록 했다.

 

 

 

-박정희의 3선 개헌 작업 그리고 촛불집회의 시초-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초부터 3선 개헌 작업에 착수했다. 기술적으로는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고 규정한 헌법조항의 12로 고치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먼저 내부의 개헌반대론자들을 회유, 고립시켜 공화당 의원들이 만장일치로 3선 개헌안을 채택하게 했다.

신민당과 재야인사들이 반대투쟁에 나섰고 사태는 한일협정 반대투쟁이나 6.8 부정선거 규탄투쟁과 마찬가지로 대학생 교내집회, 거리시위, 중고등학생 가세, 휴교령 발동으로 이어졌다. 신민당과 재야는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만들어 전국적 반대집회를 열었다.

 

중앙정보부는 집요한 공작을 벌여 일부 야당의원들의 3선 개헌 지지성명을 이끌어냈고 여름방학이 끝났지만 대학 문을 열지 않았다. 일부 대학생들이 전기와 수돗물 공급이 끊긴 학교 도서관을 점거해 장기농성을 벌였다. 학생들은 시 낭송, 노래 부르기, 마당극과 연극 공연을 하면서 농성대오를 유지했는데, 이 새로운 투쟁방식이 세월을 거치면서 시민문화행사와 촛불문화제로 발전했다. 공화당은 1969 9 14일 새벽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이 아닌 별관에서 개헌안과 국민투표법을 날치기 의결했다.

대학이 다시 시위 열풍에 휩싸였고 정부는 휴교령을 내렸다. 10 17일 개헌 국민투표에는 77.1 퍼센트의 유권자가 참여했고 65.1 퍼센트가 찬성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 태세를 완비한 것이다.

 

 

 

 

 

-제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그리고 김대중의 등장-

 

1971 4 27일 제 7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기간 내내 대학가는 교련철폐투쟁으로 끓어올랐고 휴강, 교내집회, 거리시위가 이어졌다. 투표일을 코앞에 둔 4 20, 김재규 국군보안사령관이 서울대와 고려대에 다니던 재일동포 학생들을 포함해 50여 명이 연루된 재일교포 유학생간첩단 사건을 터뜨렸다.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려고 암약하던 유학생 간첩들에게 북한이 교련반대투쟁을 벌이도록 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은 곧바로 교련철폐투쟁을 전격 중단하는 작전상 후퇴를 했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정치 신인이나 다름없었던 김대중 후보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끈질기게 싸운 끝에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정치 지도자 김대중은 바로 이 선거에서 탄생했다.

 

김영삼, 이철승과 3파전을 벌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역전승을 거둔 40대 기수김대중 후보는 미, , , 4대국의 한반도 평화보장론, 3단계 통일론,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대중경제론으로 의제를 선점했으며 향토예비군과 학생 군사교육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책선거를 보여주었다. 4 18 100만 명의 청주우이 모인 서울 장춘단공원 유세에서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도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박정희 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오는 것이라고 예언했다.

재야인사들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해 전국적인 투개표 참관과 부시운동을 조직했고 교련철폐투쟁을 중단한 대학생들이 투개표 참관운동을 시작했다. 정부가 이를 금지하자 수천 명이 신민당 참관인으로 등록해 전국 산간벽지의 투표소로 흩어졌다.

 

이것은 대학생들이 정당과 조직적으로 연대한 최초의 사례였다.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특정 정당과 손잡지 말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깨뜨린 것이다. 김대중 후보는 득표율 8%, 90만 표 차이로 졌다.

공무원을 동원한 관권선거와 금품 살포, 군 부재자 부정투표, 야당 참관인 매수와 부정 투개표 등 만만치 않은 부정선거를 한 사실을 고려하면 사실상 김대중 후보가 이긴 선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곧이어 치른 국회의원 총선에서 공화당은 득표율 4.4% 차이로 신민당을 눌렀다.

하지만 의석의 3분의 2를 확보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합법적으로 개헌을 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10월 유신이라는 현직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는 바로 이 총선에서 배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을 하면 선거제도를 없애 총통이 될 것이라고 한 김대중 후보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박정희 정부는 거칠 것 없는 독재의 길을 갔다. 무엇보다도 언론에 대한 검열과 언론인에 대한 탄압을 대폭 강화했다.

1970년대 초 민주화운동의 톱스타는 단연 김지하 시인이었다. 정부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도적으로 묘사한 담시 [오적]을 발표한 그를 구속했다.

잠시 풀려나 있으면서 다음 작품 [비어]를 발표하자 곧바로 반공법을 걸어 다시 구속했고 잡지 [사상계] [o의 소리]를 등록 취소했으며 잡지 [다리]의 필자와 편집자들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선언을 했지만 언론사 경영진과 편집간부를 협박, 회유해 보도록 통제했다.

정부는 사법부도 장악했다. 검찰이 공안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린 현직 판사들에 대해 수뢰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판사들의 집단사표 제출과 법관 독립선언이 이어졌다. 하지만 판사들은 결국 중앙정보부 통제 아래 들어갔고 헌법의 3권 분립 조항은 효력을 잃었다.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사건-

 

1971년 하반기가 되자 권력형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교련폐지를 요구하는 학생시위가 다시 불붙었다. 정부는 위수령을 발동하고 서울 주요 대학에 군을 투입해 무려 2000여 명의 대학생을 체포했다.

시위 주동자를 제적하고 서클을 해체했으며 교내 간행물을 폐간하고 제적 학생과 교련 수업을 거부한 학생들을 강제 징집했다. 중앙정보부는 사법연수원생 조영래와 서울대생 심재권, 이신범, 장기표, 김근태 등이 정부기관 습격과 혁명위원회 구성 등 9단계의 국가전복 음모를 꾸몄다는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사건을 발표했다.

그래도 민심이 가라앉지 않자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 책동 강화를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안보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서 날치기 처리해 대통령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노동 3권 등 헌법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게 했다. 1972년 유신쿠데타 예행연습을 한 것이다.

 

 

<서울대생 내란예비 음모사건>

 

 

-박정희의 7.4 남북 공동성명-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두 번의 극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첫 번째는 7 4일 남북한 당국이 동시에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이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관계자가 비밀리에 남북을 오가면서 협상한 끝에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명을 받아 대리서명한 공동성명이었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입각해 통일을 추진하기로 한 이 성명이 나오자 국민들은 20년에 걸친 군사적, 이념적 대결이 끝나고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에 들떴다. 두 번째 사건은 그로부터 석 달 후에 일어났다. 10 17일 밤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남북대화와 통일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려면 냉전시대에 만든 헌법을 고쳐 새로운 정치체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화문에 탱크를 세우고 정부기관과 언론사 등 민간 주요 시설에 군을 투입했다.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으며 헌법 효력을 정지시키고 비상국무회의가 국회 기능을 대신하게 했다.

 

 

 

-10월 유신 체제 등장 (그리고 김기춘)-

 

그는 모든 것을 잘 준비해두고 있었다. 계엄령 선포 열흘째였던 10 26일 비상국무회의가 개헌안을 심의하게 한 다음 27일 곧바로 개헌안을 공고했다. 정부는 11 21일 계엄령하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토론이나 찬반운동은 완전하게 봉쇄한 가운데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1.9%가 투표했고 91.5 %가 찬성했다.

 

3선 개헌도 전적으로 찬성하지 않았던 국민들이 종신집권을 열어주는 헌법개정안에 이렇게 압도적인 찬성률을 보인 것은 계엄령의 공포 분위기에 완전히 굴복했기 때문이다. 절반의 반혁명이었던 5.16과 달리 10월 유신은 평화적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완벽하게 차단한 완성형 반혁명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반쪽 민주주의 국가에서 완전한 독재국가로 전락했다.

 

유신헌법의 핵심은 몇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국민은 통일 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뽑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대통령을 뽑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 성향 인사의 출마를 막고 지지자들만 대의원이 되게 함으로써 영구집권의 꿈을 이루었다.

 

둘째,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하고 국회의원을 한 선거구에서 둘씩 뽑도록 선거법을 고쳤다.

여당의원과 대통령이 임명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합치면 의원 정수의 3분의 2가 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국정감사권마저 폐지함으로써 국회를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법률을 통과시키는 통법부로 전락하게 했다.

 

셋째,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과 헌법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부여했다. 대통령이 무제한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10월 유신은 현직 대통령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 없었다. 국회의원 3분의 2의 찬성을 받지 않으면 헌법개정안을 확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폭력으로 국회를 해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신헌법 초안을 만든 인물은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파견 근무를 했던 김기춘 검사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그는 공무원과 공공기관장들을 모아놓고 화끈한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한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켰다. 다시 20여 년이 지난 2013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어 국정운영을 전횡함으로써 기춘 대원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계엄령을 해제한 직후인 12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했다. , , 동에서 하나씩 모두 2359명을 뽑았는데 대의원은 정당에 가입할 수 없었으며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견해를 밝혀서도 안 되었다.

 

12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선거 유세도 공약 발표도 하지 않고 혼자 출마해 100% 찬성으로 당선되었다.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이 된 것이다. 1978년에는 똑 같은 방식으로 제9대 대통령이 되었다. 유신체제는 선거제도 그 자체를 없애버린 완벽한 독재였다.

따라서 그날 이후 민주화운동은 국민이 주권재민의 원리에 입각한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게 되었다. 민주화운동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일으켜 힘으로 정권을 타도하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운동이 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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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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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그리고 민주화의 역사 그리고 현재]

 

산업화를 이룬 동력이 물질의 결핍이 주는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었다면, 민주주의를 세운 힘은 부당한 외적 강제와 제도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와 존엄을 찾으려는 욕망이었다. 민주주의의 요체는 무엇인가.

 

첫째, 주권재민이다. 권력의 정당성 또는 정통성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다수 국민의 동의를 받지 않고 성립된 권력은 인정할 수 없다.

 

둘째, 국가권력의 제한과 분산, 상호견제다.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의 오남용을 막기 위해 입법권과 사법권, 행정권을 분리하고 선출 공직자의 임기를 제한하며 권력기관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게 한다.

 

셋째는 법치주의다. 시민의 자유와 권리는 오로지 법률로만 제한할 수 있으며, 정부는 헌법이 부여한 권한의 범위 내에서 법률에 따라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 피치자뿐만 아니라 통치자까지, 법률은 만인을 똑같이 구속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국가권력과 피 흘리며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

 

 

 

민주화는 전제정치 또는 독재체제를 민주주의 체계로 바꾸는 것이다.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개별적, 집단적 노력과 행동이 민주화 운동이다.

민주화의 역사를 살피려면 먼저 민주주의와 독재를 나누는 기준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앞에서 산업화의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마르크스와 로스토의 경제이론을 활용했다. 민주화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는 20세기의 대표적 자유주의 철학자 칼 포퍼(Karl R. Popper)(1902~1994)의 정치이론을 활용할 수 있다.

포퍼는 어떤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인지 전제정치 체제인지 가리는 기준을 하나로 정리했다. 다수 국민이 마음을 먹었을 때 정권을 평화적으로 교체할 수 있으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다. 그게 불가능한 나라는 독재국가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하는 법률과 제도가 아예 없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 제도가 있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면 그 역시 민주주의가 아니다.

 

1959년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제도는 있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기 나름의 견해를 자유롭게 형성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하지도 않았다.

정부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비롯해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한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짓밟았다.

갖가지 방법으로 부정투표를 저질렀으며, 그것도 모자라 개표 결과까지 조작했다. 다수 국민이 원해도 평화적, 합법적으로 정치권력을 교체할 수 없었다. 이승만 시대의 모든 선거가 그랬다.

 

 

민주주의는 단순한 제도의 총합이 아니다. 제도와 행태와 의식의 복합물이다. 합리적인 제도가 있어도 형태가 비뚤어지면 그 제도는 힘을 잃는다.

권력집단과 유권자의 행태는 욕망과 감정, 의식과 관습을 비롯한 여러 요소에 좌우된다. 좋은 헌법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집권세력 또는 통치자가 헌법과 민주주의 기본원리를 존중해야 하며 시민들이 자기의 권리를 제대로 알고 행사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통치자가 헌법과 법률 위에 군림하고, 시민들이 그것을 별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거나 굴종하면 헌법은 한낱 종이에 쓴 글씨에 지나지 않는다.

 

칼 포퍼는 특정한 계획이나 목표에 입각해 사회 전체를 개조하는 사회혁명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인간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현실조차 있는 그대로 인식할 능력이 없으며, 미래를 옳게 설계할 능력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정한 목표 또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 전체를 재조직하려는 혁명가들의 동기는 고상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청사진이 옳고 훌륭하다는 증거는 없다. 그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다음 그 청사진에 따라 재조직한 사회가 혁명 이전의 사회보다 확실히 훌륭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정의, 평등, 인간해방 등 혁명가들이 내거는 목표가 무엇이든, 어떤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기 위해 폭력으로 사회를 재조직하는 혁명은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로 귀결된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불행하게도 20세기 세계사는 포퍼가 옳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포퍼는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려고 혁명을 하기보다는 현실의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한 사회적 개혁과 개량에 집중하자고 호소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든 종류의 혁명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정치혁명만은 열렬히 옹호했다.

민주주의는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해 최대의 선을 실현하도록 하는 제도가 아니다.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악을 마음껏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민주주의는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악을 최소화함으로써 사회를 지속적으로 개량해나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민중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정당한 행위가 된다. , 민중의 저항권 행사는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세우는 데서 멈추어야 한다.

이것이 포퍼의 주장이다.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유일한 방법은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스스로 조직하고 궐기해 경찰과 군대, 사법기관과 정보기관을 동원한 권력집단의 폭력을 힘으로 제압해야 정치혁명을 할 수 있다.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그 나라의 환경과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 대한민국은 국토가 좁고 인구가 도시에 밀집해 있다. 역사적, 문화적, 인종적 균질성이 매우 높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고 겨울이 너무 추워서 난방시설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정글도 넓은 산악지역도 없다.

북쪽은 철책으로 단절되었고 나머지는 바다로 가로막힌 사실상의 섬나라다. 중국과 베트남, 중남미와 달리 특정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항전을 벌일 수 없다. 중동 국가들처럼 인접국가에 무장투쟁 기지를 만들 수도 없다.

게다가 국가는 엄청난 규모의 상비군과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적합한 저항권 행사 방식이었다.

 

 

 

민주화 운동가들이나 1980년대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테러를 투쟁방법으로 쓰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활동가들은 자금을 마련하고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 집을 털려 했을 뿐 사람을 해치려고 하지는 않았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나 동의대학교 사태에서 무고한 시민과 경찰관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일부러 사람을 죽이려고 일으킨 사건은 아니었다. 독일과 일본 적군파가 벌인 시설파괴, 요인 암살, 항공기 납치와 같은 일은 우리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국적, 동시다발적, 연속적 도시봉기를 일으키려면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 테러는 이에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였다.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대의를 알리고 대중의 관심과 각성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테러와 암살이 아니라 분신과 투신을 선택한 투쟁방식은 세계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렇게 목숨을 버린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전태일 이후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대부분 분신과 투신이었고, 그들이 원한 것은 민주화,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미국의 독재정권 지원 중단, 노동조합활동의 자유보장,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 같은 것이었다.

직업은 주로 대학생과 노동자였다.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1970), 서울대 학생 김상진(1975)과 김태훈(1981), 운수노동자 박종만(1984), 경원대 학생 송광영(1985), 구로공단 신흥 정밀 노동자 박영진, 서울대 학생 이재호, 김세진, 이동수, 박혜정(이상 1986), 서울교대 학생 박선영, 하남 신흥정밀 노동자 표정두(이상 1987), 성남 고려피혁 노동자 최윤범, 운수노동자 이문철(이상 1988), ㈜ 통일 노동자 이영일, 노동운동가 최동(이상 1990), 전남대 학생 박승희, 안동대 학생 김영균, 경원대 학생 천세용,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성남피혁 노동자 윤용하, 광주시민 이정순과 차태권, 보성고학생 김철수, 인천 운수노동자 석광수(이상 1991) 등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다. 분신과 투신은 1986년과 1991년이 가장 많았다. 1986년은 전두환 정권의 인권탄압이 절정을 이룬 가운데 민주화운동이 폭발적으로 확산된 시기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전두환과 미국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가 크게 고조된 시기이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 중반기였던 1991년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크게 허물어진 시기였다. 특히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시위 도중 경찰에 타살당한 사건으로 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이 격화되면서 분신정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청년이 죽음으로 정부를 규탄했다.

 

 

 

연속적,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한 최초의 사례는 3.1운동이다. 3.1 운동의 목적은 민주화가 아니라  민족해방이었지만 그 방식은 민주화운동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두 번째 사례는 4.19 혁명이다. 4.19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한국적 전형이었다. 우리 국민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독재자를 축출하고 정권을 교체하는 최초의 역사적 위업을 이루었다.

 

세 번째 사례는 1987 6월 민주항쟁이다. 승리한 6월 민주항쟁과 비극으로 끝난 광주민주항쟁의 차이는 딱 하나였다.

광주민중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 만약 그때 서울, 부산, 대구, 울산, 대전 등 다른 대도시 주민들이 용기를 내서 함께 궐기했다면 신군부가 광주 한 곳에 그토록 많은 병력을 집중 투입해 시민들을 살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를 상세하게 알고 싶은 독자에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가 엮은 [한국민주화운동사]를 권한다. 본문만 합쳐서 2300쪽이나 되는 세 권짜리 책이다. 정부 수립 이후 노태우 정부까지, 넓은 의미에서 민주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건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두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마치 같은 사건들이 무한 반복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이 수십 년 동안 같은 패턴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 패턴을 최대한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알고리즘이 된다.

 

 

 

-민주화 운동의 반복되는 패턴-

 

집권세력 또는 정부가 독재, 인권탄압,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야당과 재야 인사들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다. 여기서 재야인사란 정치인이 아닌 지식인, 종교인, 문화인 등 영향력 있는 시민사회 리더를 가리킨다. 대중이 크게 호응하지 않으면 집권세력은 신경 쓰지 않고 같은 행태를 반복한다.

그러면 야당과 재야의 투쟁대열에 청년학생들이 가세한다. 교내에서 규탄선언문을 발표하고 항의집회를 하다가 거리시위를 벌인다.

시민들이 여기에 합세하지 않으면 정부는 적당히 진상을 은폐하고 몇몇 책임자를 처벌하는 시늉을 한다. 주동자를 구속하고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한다. 그렇게 해서 투쟁이 끝나고 나면 집권세력은 또다시 독재와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같은 패턴의 투쟁이 또 벌어진다.

이것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호응을 불러일으킬 조짐이 보이면 공안당국이 나선다. 소요사태의 배후에 불순세력과 북한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간첩단 사건, 용공이적단체나 반국가단체 조직사건을 발표한다. 비판적인 언론보도를 통제하고 친정부 언론을 동원해 엄청난 국가적 위기가 온 것처럼 시민들을 세뇌한다. 왠만하면 이런 정도로 상황이 끝난다.

그래도 끝나지 않으면 최루탄과 몽둥이로 무장한 경찰력을 투입해 시위자를 마구 잡이로 연행하고 구속한다. 지치고 겁이 난 시민들은 분노를 삭이며 일상으로 돌아간다. 집권세력은 다시 독재와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가끔은 아주 많은 국민이 의분을 느낀 나머지 야당과 재야, 학생들의 투쟁에 호응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때 민주화 운동의 전국조직이 탄생한다. 야당과 재야, 학생단체, 노동단체와 농민단체 등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모인 전국조직에는 국민협의회국민운동본부라는 이름이 붙는다.

줄이면 국본이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름이다. 국본은 투쟁목표를 제시하고 구호를 정하며 지방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시위 장소와 시간, 행동강령을 선포한다. 이 모든 행동의 전술적 목표는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일으키는 것이며 전략적 목표는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것이다.

그런 사태가 실제 일어날지 모른다는 전망이 나오면 집권세력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남김 없이 동원한다.

국민운동본부의 주요 인사를 체포하고 활동가들을 예비 검속한다. 경찰 병력을 투입해 시위 예정 장소를 봉쇄하고 물샐 틈 없는 검문검색을 벌인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담화를 발표해 소요사태 주동자를 엄벌하겠다고 겁을 준다.

공안기관과 친정부 언론을 동원해 배후에 불순용공세력과 북한이 있다고 비난한다. 이렇게 해서 간신히 진압에 성공하면 집권세력도 잠시 조심한다. 민심을 수습한다며 내각을 개편하고 유화책을 발표한다.

 

그런데도 투쟁열기가 가라앉지 않으면 사태가 정말 심각해진다. 여러 도시에서 동시에 대규모 거리시위가 벌어질 경우 정부는 속수무책이 된다. 예컨대 전국 10대 도시에서 100만 명 정도의 시민들이 동시에 시위를 벌일 경우 전국 경찰을 다 투입해도 제압하지 못한다.

시위대는 큰 길을 점거하고 구호를 외치다가 불리하면 뒷골목을 통해 다른 장소로 이동해 다시 도로를 점거한다. 진압 경찰은 방패와 곤봉, 방독면을 비롯한 보호장비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서 기동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MGM 사의 만화 <톰과 제리>를 연상시키는 싸움이다.

시위대 규모가 커지면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진압 경찰이 거꾸로 포위되어 장비를 빼앗기고 얻어맞는 상황이 생긴다. 결국 경찰은 주요 시설 근처에 병력을 모아 진을 치고 장기전에 들어간다.

서울 같으면 청와대와 세종로 정부청사로 가는 대로와 골목에 병력을 집중배치하고 시위대와 대치하는 것이다. 도심을 장악한 시위대는 여유 있게 정부를 규탄하는 거리집회를 연다. 그러면 점점 더 많은 시민이 모여든다.

 

이럴 경우 정부가 쓸 수 있는 무기는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된다. 계엄령을 선포해 군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위험하다. 시위 진압 능력에 관한 한 군이 경찰보다 나을 게 없다.

유일한 차이는 총을 쏠 수 있다는 것이다. 1964 6.3 사태나 1979년 부마민중항쟁 때 정부는 군 병력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되면 위기를 넘길 수 있다. 하지만 4.19 혁명 때처럼 계엄군 수뇌부가 진압을 거부할 수도 있다. 군이 발포를 하고서도 투쟁을 진압하지 못하면 그것도 큰일이다.

4.19 혁명 때는 경찰관들에게 발포를 지시한 인물 몇몇이 사형을 당했다. 진압에 일시 성공하는 경우에도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 광주민중항쟁 때 특전사 병력에게 발포 명령을 내린 자들은 그 책임을 피하려고 모든 증거를 인멸하고 끝끝내 사실을 부정해야만 했다.

 

1987 6월 전국 수십 개 도시에서 100만 명 이상이 동시에 거리시위를 벌였을 때 전두환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지 못했다. 그 대신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를 앞세워 6.29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약속했다. 군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너무나 위험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는 다양한 불법행위를 수반한다. 도로점거, 투석, 화염병 투척, 야간시위 등 시위대의 모든 행위가 실정법 위반이다. 그러나 다수 국민이 그것을 최고의 법인 헌법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불가피한 행동으로 받아들일 경우, 그 모든 것은 불법이지만 정당한 행위가 된다.

주권재민이라는 민주주의 대원칙을 실현하는 민중의 저항권 행사이기 때문이다. 한국형 민주화의 경로는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민주주의 정치혁명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세 단계를 거쳤다. 4.19에서 10월 유신까지는 민주주의 맹아기라고 할 수 있다. 4.19 혁명은 곧바로 5.16 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이라는 북풍한설을 만났지만 죽지 않고 조금씩 생명력을 키웠다.

10월 유신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 유신체제 9년과 제 5공화국 7년은 성장기였다.

그 한가운데 광주민중항쟁이 있었다. 이 시기 국민들은 민주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열망과 능력을 축적했다. 시민의 힘으로 국가폭력을 이겨내지 않고는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성장기의 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을 지향할 수 밖에 없었다.

6월 민주항쟁 이후 현재까지는 민주주의 성숙기다. 우리는 두 차례 평화적 정권교체를 경험했다. 헌법 정신에 맞게 국가를 운영하도록 권력집단의 행태를 개선했다.

 

……………..

 

그런데 최근 우리의 민주주의가 과연 성숙해가고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고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개탄도 나온다. 그러나 2014년의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민주주의가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인 때도 있었다. 검열과 통제가 사라져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만개했고 대통령과 정부가 권력 행사를 절제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어제 내린 눈처럼 새롭지도 귀하지도 않은 것처럼 여겼다. 하지만 2008년 이후 이것은 착시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대통령과 정부, 집권세력이 헌법을 존중하려고 노력할 때만 제대로 작동한다.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

 

헌법을 무시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정부는 범죄조직과 비슷한 행동을 한다. 예컨대 국가정보원과 국군 기무사령부, 국가보훈처 등 여러 국가기관이 온라인 여론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2012년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것 자체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대통령과 집권당의 대응방식이었다. 대통령과 정부는 헌법정신을 파괴하고 법률을 위반한 국가기관들의 조직적 불법행위를 관련자들의 개인적 일탈로 규정했다.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은 원세훈 국정원장 등 대선 불법개입 주모자들에게 선거법 위반혐의를 적용한 검찰총장(채동욱)을 내쫓으려고 혼외아들로 지목한 어린이의 개인 정보를 불법적으로 수집해 언론에 유포했다. 2014년에는 서울시 공무원이었던 탈북자 유우성 씨를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중국 정보의 공문서를 위조해 법원에 제출한 사실이 드러났다. (영화 [자백] 참고) 국정원장과 검찰총장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고 몇몇 실무자들의 사표제출과 구속으로 끝내려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범죄조직의 행태를 보인 것이다.

 

모든 권력은 집중과 확대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진보든 보수든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감시와 견제가 느슨해지면 누구나 권력을 오남용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이럴 때 시민들이 참여하고 비판하고 저항하지 않으면 민주주의 제도는 껍데기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오늘날 다수의 국민이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 집권탕의 행태를 용인한다. 대통령이 국정수행을 잘한다고 생각하며 상당 기간 동안 제법 큰 격차로 야당이 아닌 집권당을 지지했다. 민주주의 성숙도는 주권자인 시민의 의식과 행태가 좌우한다. 집권세력의 반민주적 행태는 대통령과 여당 정치인들의 교만과 성숙하지 않은 시민의식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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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IMF 가 남긴 후유증 양극화- : 현 정권까지의 흐름]

 

경제위기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경제력 집중을 더 심화시켰다. 거시경제의 혼란과 불확실성은 약자를 몰락시키며 약자가 사라져 생긴 시장의 공백은 더 강한 자가 차지한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IMF 경제위기는 몇 가지 중대한 결과를 남겼다.

더욱 심화된 경제력 집중, 정리해고제 도입과 비정규직 확대, 그리고 이른바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의 현저한 약화였다. 그 결과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몰락하고 노동자의 지위는 약화되었으며 소득격차가 확대되었다.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양극화다.

양극화는 다소 과장된 표현일 수 있다. 더 온건하게는 격차의 확대라고 한다.

 

IMF 경제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벌그룹이 여럿 해체되었다. 그러나 삼성, LG, SK, 현대차, 롯데, 한화, 한진, 동양, 대림, 효성, 코오롱, 두산, 대상, 한솔, 금호, 동부, CJ 그룹 등은 더 거대한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정리해고제 도입으로 대량실업의 공포가 노동시장을 뒤덮자 노동조합은 더욱 약해졌고 실질임금은 하락했다. ‘공장 일을 내 일처럼 근로자를 가족처럼이라는 산업화시대의 구호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으며 평생고용이나 평생직장이라는 개념도 사라졌다.

기업이 정리해고를 사실상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고, 파견과 사내하청 등 간접고용이 널리 퍼진 결과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이 되었고 임금노동자 내부의 임금격차는 크게 확대되었다.

 

김대중 정부가 경제위기의 불길을 잡고 IMF 자금을 전액 상환한 데 이어 노무현 정부는 한국 경제를 다시 안정적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 10년의 진보정권 기간에 한국 사회는 양극화의 깊은 골짜기에 빠져들었다.

IMF 경제위기에서 탈출하고 새로운 발전전략을 찾기 위해 정부는 두 갈래로 노력했다. 첫째는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대세를 형성한 세계 경제환경을 받아들이면서 기회균등과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경제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해 복지정책 또는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민주정부 10년 동안 둘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진보정권은 국민경제를 대체로 잘 관리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각각 5년간 평균 4퍼센트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1인당 국민 소득(GNI) 1998 7335달러였던 것이 2007년에는 22000달러에 다가섰다.

물가상승률도 3% 수준에서 안정되었다. 지속적인 경상수지 흑자를 낸 덕분에 2007년 말에는 2500억 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가 쌓였다. 실업률은 3% 대로 내렸고 달러 환율은 900원 수준으로 외환위기 이전과 비슷해졌다.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의 한국 경제 신인도 역시 외환위기 이전인 A등급을 회복했다. 종합주가지수는 노무현 정부 때 처음으로 2000을 찍었다.

 

 

 

그러나 국민의 실제적 경제생활은 거시경제지표만큼 개선되지 않았다.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경제적 지위는 오히려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은 몇 가지 간단한 통계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소득불평등 또는 소득불균등을 측정하는 지표로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지니계수와 소득 5분위 배율이다. 지니계수는 모든 국민이 완전하게 균등한 소득을 얻으면 0이 되며 한 사람이 모든 소득을 독점하면 1이 된다.

 

지니계수가 0.3 미만이면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0.4를 넘어가면 사회적 불안이 야기될 가능성이 높다. 소득 5분위 배율은 최고 소득계층 20%의 평균소득을 최저 소득계층 20%의 평균소득으로 나눈 값이다. 소득격차가 커질수록 소득 5분위 배율은 높아진다.

 

우리의 소득분배 통계는 부족한 점이 많다. 정부가 소득분배 관련 데이터를 제대로 작성하지 않아 조사기관과 조사방법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예컨대 지니계수는 여러 종류가 있다. 전국 모든 가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있고 2인 이상 도시근로자 가구만을 대상으로 한 것도 있다. 시장소득 지니계수가 있는가 하면 납부한 세금을 제외하고 국가보조금을 더해 산출한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도 있다.

기업이 당기순이익 중 주주에게 배당하지 않고 쌓아두는 사내유보를 소득에 넣기도 하고 빼기도 한다. 이런 사정 때문에 언론인들은 종종 서로 다른 종류의 지니계수를 뒤섞어 사용한다.

 

통계청이 전국 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 소득분배지표를 발표한 것은 2006년이 처음이었다. 2006년도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전국가구 0.330, 2인 이상 비농가 0.312, 2인 이상 도시가구 0.305였다.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는 각각 0.306, 0.291, 0.285였다. 가처분소득 지니계수와 시장소득 지니계수의 격차가 0.02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은 조세와 복지제도를 통한 국가의 재분배 기능이 매우 약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2006년 시장소득 5분위 배율은 전국가구 6.65, 2인 이상 비농가 5.74, 2인 이상 도시가구 5.39였다. 가처분 소득 5분위 배율은 각각 5.38, 4.83, 4.62였다. 시장소득 5분위 배율과 가처분소득 5분위 배율의 격차 역시 그리 크지 않았다. 전국가구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2008년과 2009 0.314로 최고점을 찍었고 2012년에는 0.307로 조금 하락했다.

전국가구 시장소득 5분위 배율은 계속 상승해 2011 7.86으로 최고점을 찍었고 2012년에는 7.51로 조금 하락했다. 전국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모든 소득분배지표가 2006년 이후 지속적 악화 추세를 보인 것이다. 조사방법이 달라지면 지니계수도 달라진다.

통계청과 금융감독원, 한국은행이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산출한 2012년 전국가구 지니계수는 0.357로 예전 방법으로 조사한 0.307보다 훨씬 높았다.

 

양극화의 추세를 보려면 같은 대상을 같은 방법으로 조사한 시계열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래야 외환위기 이전과 이후 소득분배의 상태를 비교할 수 있다. 아쉽게도 그런 분배지표는 전국가구가 아니라 2인 이상 도시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분배지표밖에 없다.

 

……..

 

1990년에서 1996년까지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 …… 그러다가 1997년 이후 현저하게 악화되었으며 그 경향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시장소득 분배지표와 가처분소득 분배지표의 격차는 지니계수가 0.01에서 0.025 내외로, 소득 5분위 배율은 0.2에서 1.0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미약하긴 하지만 진보정권의 복지지출 확대는 가처분소득의 불평등한 분배를 완화하는 효과를 냈다.

 

2010년 이후 분배지표가 악화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연구가 필요하다. 시장소득 분배지표 악화가 멈춘 것은 비정규직 관련 법률의 유예기간이 끝나면서 부분적으로 비정규직이 정규직이나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되는 등 노동시장 양극화 추세가 완화된 것이 원인일 수 있다.

가처분소득의 분배지표 악화가 멈춘 것은 기초노령연금, 노인장기요양보험, 학교무상급식, 보육비 지원 등 새로운 복지제도를 도입하거나 기존 사업을 확대한 것 때문일 수 있다.

만약 이런 추측이 옳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현재까지 시장소득 분배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어왔다. 정부가 조세와 복지지출을 통해 가처분소득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시장소득 분배의 급격한 악화를 상쇄하기에는 부족했다.”

 

………..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국회와 대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2003년 한나라당이 주도해 국회에서 의결한 법인세율 인하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국민기초 생활보장제도와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기초노령연금 등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지만 확대되는 시장소득의 격차 확대를 막기에는 부족했다. 진보정권 10년 동안 임금근로자 가운데 비정규직의 비중이 급속히 증가했다. 집계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비정규직 비중은 2007년에 40퍼센트 넘는 수준까지 증가했다.

명예퇴직이나 정리해고로 직장을 그만둔 사람들이 자영업자로 변신했다. 전체 취업자 가운데 자영업자 비율이 급증해 35%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재벌 대기업들이 소비재산업과 유통업에 진출함으로써 골목상권은 붕괴 상황에 빠졌고 영세자영업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진보정권 10년 동안 연평균 4%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는데도 소득분배가 악화되고 중하위 소득계층의 경제생활이 어려워진 데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더욱 심화된 경제력 집중, 정리해고제 도입, 비정규직 확대, 낙수효과의 약화 등 여러 원인이 있다.

재벌 대기업들은 단가를 일방적으로 깎는 방식으로 협력업체를 약탈했다. 내부거래를 통해 계열사를 부당하게 지원함으로써 그 계열사와 경쟁 관계에 있는 기업의 경영을 악화시켰다.

중소 협력업체의 지불능력 악화는 노동자들의 임금과 근로조건 악화와 고용축소로 연결되었다. 게다가 대기업들은 소비재산업과 유통업까지 진출해 영세소기업과 영세상인들의 몰락을 부추겼다.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비정규직 관련 법률들은 기대와 달리 비정규직의 확산과 비정규직 제도의 악용을 막지 못했다.

중소기업 뿐만 아니라 재벌 대기업들까지 비정규직 제도를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데 악용했다.

사내하청, 파견 등의 명목으로 자기네 회사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에 대한 직접고용을 거부했으며 계약해지 방식으로 비정규직의 노조설립을 막았다.

 

낙수효과 약화도 무시할 수 없다. 예전에는 대기업이 돈을 벌면 전후방 연관효과 때문에 원료나 중간재, 부품을 공급하는 관련 산업과 협력업체도 함께 호황을 맞았다.

그러나 수출대기업들이 가격이 더 저렴한 외국업체의 중간재와 부품을 직접 조달해 쓰는 글로벌 소싱’(global sourcing)을 본격화 하자 낙수효과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국민들은 2007 12월 대선에서 기업인 출신 이명박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써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시켰다. 많은 국민이 7% 경제성장으로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와 세계 7위 경제 대국을 만들겠다는 소위 ‘747공약에 기대를 보냈다. 유권자들은 2012년에도 보수정권 연장을 선택했다.

여론조사 회사들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소득 수준이 낮은 유권자일수록 보수정당 후보를 더 높은 비율로 지지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서민의 경제생활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보수정권이 진보정권보다 경제성장을 더 잘 이루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경제성장률이 높아진다고 해서 저소득층의 소득이 향상되는 것도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1]부자감세다. 이명박 대통령은 법인세와 소득세율을 인하함으로써 재임중 누적효과가 100조원에 육박하는 감세를 했고 혜택은 대부분 대기업 주식 소유자와 고소득층의 몫이었다.

자영업자와 임금근로자 절반이 소득세 면세점보다 낮은 소득을 얻기 때문에 직접세 감세는 중간소득 이하 계층의 국민들에게는 단 한 푼의 혜택도 주지 않는다.

 

대기업의 투자와 부유층의 소비를 유도한다는 목적을 내세웠지만 감세의 투자촉진 효과는 별로 없었다.

둘째는 [2]부동산 거래 규제완화로 단기적 경기부양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동산 가격은 오히려 하락했다. 부동산 투기 시대의 거품이 덜 걷힌 상황에서는 규제완화로 부동산 경기를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셋째는 [3] 4대강 사업이다. 초대형 토목공사를 벌려 경기를 부양하려 했지만 환경을 파괴하고 국가의 돈을 건설회사 금고로 이전시켰을 뿐 고용증대와 경기진작 효과는 거의 없었다.

넷째는 [4] 수출을 증진하기 위해 환율을 인위적으로 올린 정책이다. 이 정책은 미국의 리먼 브러더스 파산 사태와 맞물려 환율 폭등을 일으킴으로써 달러로 표시한 1인당 국민 소득의 대폭 하락을 불렀다. 양극화의 원인이었던 경제력 집중과 오남용,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확산, 낙수효과 감소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는 부자감세 정책을 철회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가 처음 편성한 2014년도 정부 예산안에는 기초노령연금 수급액을 두 배로 올리는 것 이외에 복지지출을 크게 확대하는 정책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철도 민영화 정지작업이라는 비난을 무릎쓰고 수서발 KTX 자회사를 설립했고 비영리 의료법인이 영리 자회사를 세울 수 있게 하는 의료법 개정을 추진했다. 공공부문의 사유화 또는 시장화 정책을 강행한 것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입법과 정책은 전무했고 재벌 경제력 집중의 폐해를 시정하는 경제 민주화 공약도 완전히 실종되었다.

2014년 들어서는 규제를 암 덩어리’, ‘쳐부숴야 할 원수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규제철폐 작업을 시작했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2007년 이명박 후보와의 후보경선 때 내세웠던 줄푸세공약, 다시 말해서 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품고 법질서를 세우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서 4대강 사업 하나를 빼면 곧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이 된다. 소득분배의 개선과 양극화 해소에 관한 한 특별한 기대를 할 수 있는 근거는 찾을 수가 없다.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과의 관계]

 

어느 쪽이 먼저일까? 민주주의를 이루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번영한 것일까, 아니면 경제가 발전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어느 것도 먼저가 아니다.

이 둘은 선순환(Positive feed-back) 관계에 있다. 어느 특정한 시점에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는 어디에서나 함께 진전되었다. 무엇이 이런 선순환 관계를 만드는 것일까?

원하는 삶을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욕망이다. 그렇게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유가 있어야 한다. 자유를 누리려면 물질의 결핍이 주는 억압을 극복해야 하고, 부당한 제도와 낡은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개인의 자기중심적 선택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제를 철폐해야 효과적으로 경제적 번영을 이룰 수 있다고 한 애덤 스미스의 견해가 특수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만 타당하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이미 입증되었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스미스가 틀리지 않았다. 개인의 자유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사회는 경제적 번영을 길게 유지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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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5.16 쿠데타]

 

1961 5 16일 새벽, 2군사령부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이 3500여 명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와 정부청사와 언론기관 등 주요 시설을 점령했다. 대통령과 정부, 국회 등 모든 국가기관의 헌법적 권한과 기능을 폭력으로 정지시키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반공, 한미동맹, 사회적 부패와 정치적 구악일소 등을 열거한 혁명공약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국가 자립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여 기아선상에 방황하는 민생고를 해결함으로써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4), 혁명의 과업을 이루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6)는 것이다.

 

민생고 해결을 내세운 것은 아마도 박정희 소장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병영복귀약속은 의도적인 거짓말이었다.

 

장면 정부는 남로당 경력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박정희 소장을 중용하지 않았으며, 군 내부에는 군부의 정치개입에 반대하는 장성도 많았다. 미국행정부와 주한미군사령부도 마찬가지였다.

혁명에 성공하려면 적을 최소화하고 대중의 신뢰를 얻을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래서 마치 순수한 애국심에서 거사한 것처럼 보이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장군을 군사혁명의원회 의장으로 내세웠지만 쿠데타의 리더는 박정희 소장이었다. 미국 대사관과 미8군은 쿠데타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있었으며,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는 여러 차례 정보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미군이 있으니 쿠데타를 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았으며, 쿠데타가 일어난 후에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장면 총리는 내각과 함께 사퇴해 버렸고 윤보선 대통령은 병력을 동원해 쿠데타군을 진압하자는 맥그루더 미8군사령관의 강력한 제안을 거절했다. 남북분단과 이념적, 군사적 대결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군이 유혈내전을 벌이는 사태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는 군사혁명위원회가 하야를 만류하자 아무 실권도 없는 대통령직에 그대로 머물면서 쿠데타를 사실상 묵인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과 사회단체를 모두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일절 금지했다.

 

박정희 소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꾼 다음 장도영 장군을 밀어내고 스스로 의장이 되었으며 군부의 반대파를 차례차례 제거했다.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정보공작정치를 할 테세를 갖추고 국회에서 자신을 보위할 민주공화당을 창당한 다음 헌법을 바꾸어 의원내각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중심제를 도입했다. 그런 다음 병영으로 복귀한다는 혁명공약 제 6조를 폐기하고 1963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제5대 대통령이 되었다. 득표율 격차는 1.5 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1967년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보선을 꺾고 재선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걸어갔던 독재와 장기집권 경로를 그대로 따라 걸었다. 헌법의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하고 1971년 금권, 관권을 동원한 부정선거로 제7대 대통령이 되었다.

1972 10월에는 또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시대 왕보다 더 강한 권력을 수중에 넣은 다음 대통령 긴급조치를 아홉 번이나 발동해 야당과 비판세력을 목 졸랐으며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납치해 죽이려 했다. 자신의 추종자들만 체육관에 모아놓고 혼자 출마해 100% 찬성으로 제8대와 제9대 대통령이 되었다.

 

5.16은 단순히 제 2공화국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4.19가 만든 모든 것을 파괴해 버렸다. 그러나 4.19 혁명 그 자체까지 죽여 없애지는 못했다. 적어도 말로는 4.19 혁명을 인정했다. 1962 12 26일 공포한 제 3공화국 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 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에 있어서….”. 4.19의거이고 5.16은 그보다 더 의미가 깊은 혁명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4.19는 민중이 궐기해 권력을 교체한 민주주의 정치혁명이지만 새로운 권력 주체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자유가 주어진 것 말고는 바뀐 게 별로 없었다. 그와 달리 5.16의 주체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0만에서 60만으로 대폭 늘어난 군대를 힘의 원천으로 삼고 있었다.

가난한 농업국가 대한민국에는 기술적 효율성과 합법적 폭력을 보유한 군대조직의 압도적인 힘에 맞설 만한 사회집단이 없었다. 박정희 장군은 이 조직의 힘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국가 운영에 필요한 정치세력을 규합했다. 그는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대중이 당장 체감할 수 있는 가시적 변화를 만들기 위해 구악일소를 내세운 혁명공약가운데 가장 쉬운 것부터 실행했다.

 

 

자유당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활개 쳤던 정치깡패 이정재, 인기배우들을 괴롭혔던 영화계 건달 임화수, 전설적 조폭 두목 신정식, 정치깡패를 동원해 부정선거를 저질렀던 내무부장관 최인규, 발포 명령을 내린 대통령 경호실장 곽영주 등의 재판이 5.16 쿠데타로 중단되어 있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그들을 혁명재판에 회부해 사형을 확정한 다음 거리로 끌어내 조리돌림을 했다. 사형수들은 나는 깡패입니다.’ 따위의 우스꽝스러운 플래카드를 들고 덕수궁에서 출발해 서울 시내 중심가를 행진해야 했다.

이것은 북한 인민재판이나 중국 문화대혁명 때 벌어진 것과 비슷한 야만행위였지만, 헌법과 법률의 절차를 제대로 지키느라 재판 절차를 지지부진하게 끌어가던 장면 정부와 비교하면 당시 국민의 눈높이에서는 한결 속 시원한 응징이었다.

 

그런데 혁명인지 쿠데타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쿠데타는 혁명과 달리 민중의 동의와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다.

군대를 동원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군사쿠데타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학술적 개념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5.16을 굳이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경제발전을 이루었으니 결과적으로’ 5.16은 잘된 일이었고, 잘된 일에는 군사정변이나 쿠데타보다 혁명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운영을 잘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5.16이 군사쿠데타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족중흥을 이룩한 위대한 지도자또는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인권을 유린한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하나의 역사인물이 이처럼 극단적인 호오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는 복잡하고 상충되는 특성을 가진 사람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면서 커다란 선과 지독한 악을 행했다. 어떤 면을 중시하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정희 생애-

 

박정희는 동학 접주로 활동한 적이 있는 빈농 박성빈의 2 5남중 막내로 1917 11월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나이 마흔다섯에 태어난 탓에 소년 박정희는 살가운 보살핌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중도 진보 성향 언론인으로서 독립운동을 했던 둘째 형 박상희는 1946년 대구에서 터진 10.1 사건 와중에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소년 박정희는 공부를 잘하고 통솔력이 있었다. 책을 많이 읽었고 이순신과 나폴레옹 같은 군인을 숭배했다. 구미공립보통학교를 나와 대구사범학교에 들어갔는데, 성적이 우수하지는 않았지만 군사과목과 체육을 잘했다. 어른들의 강권에 떠밀려 김호남과 결혼했지만 가정을 제대로 꾸리지는 않았다.

1937년부터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 그는 충성혈서를 동봉한 지원서를 제출해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입학허가를 받았으며, 1940년 제 2기생으로 입교해 1942년 수석으로 졸업한 후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했다. 그때 박정희 생도는 다카키 마사오였던 이름을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꾸었다.

당시 평범한 조선 사람에게 창씨개명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지만, 두 번이나 창씨개명을 하는 일은 흔하지 않았을 것이다. 3등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장교가 된 그는 1944년 만주와 소련 국경지역의 관동군 635부대에 배속되었다가 곧바로 화북 열하성 만주군 보병 제8단으로 전속되어 중국공산당 팔로군과 싸웠다. 만주국은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해 만든 괴뢰국가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패전했고 만주군이 해산되었다.

 

소속이 없어진 박정희는 광복군을 찾아가 제3지대 제 1대대 제2중대장이 되었으며 1946 5월 미군 수송선을 타고 귀국했다.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단기과정을 마친 그는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런데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194811, 박정희 소령은 여수순천반란사건(여순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숙군작업에 걸려들었다. 둘째 형 박상희의 친구이며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였던 이재복의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그는 알고 있는 모든 남로당 인맥을 털어놓고 수사에 협조한 끝에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피고인 중 유일하게 풀려났다.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과 미군 고문관 하우스만이 은인이었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면죄 승인을 받아 그를 구해주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백선엽 장군을 극진하게 예우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예편을 당해 앞날이 막막했던 박정희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했으며 전쟁이 한창이던 1950 12월 대구에서 김호남과 이혼하고 육영수와 결혼했다. 만약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는 쿠데타를 할 수도 대통령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1957년 소장으로 진급해 제7사단장, 육군 제6관구사령관,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재직했다. 장면 정부는 친일 전력이 아니라 좌익 전력때문에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박정희 소장은 제 2군 사령부 부사령관으로 근무하면서 5.16 이전에도 세 차례나 쿠데타를 하려 했다. 첫 번째는 1960 3.15 선거를 전후한 시기였다. 그 다음은 1961 4 19일이었다. 4.19혁명 1주년을 맞아 민주당 정부에 불만을 가진 학생들이 반정부 데모를 벌여 혼란이 벌어지면 그것을 빌미 삼아 쿠데타를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날은 별다른 시위가 벌어지지 않자 두 차례 거사일을 조정한 끝에 5 16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5.16과 관련해 두 사람을 미리 거론할 필요가 있겠다. 먼저 정치 신인 김대중이다. 1924년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난 청년 사업가 김대중은 정치 입문 8년 동안 세 번이나 낙선한 끝에 강원도 인제군 민의원 보궐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가까스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불과 이 틀 후 5.16이 터져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국회의원 선서조차 하지 못하고 의원직을 잃었다. 중앙 정치무대에서는 아직 무명이었던 이 불운한 30대 정치 신인이 불과 10년 후 강력한 야당 대통령 후보가 되어 독재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또 한 사람은 청년 장교 전두환이다. 1931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그는 아홉 살 때 가족과 함께 만주로 갔다가 1년 후 돌아와 대구에 정착했으며 6년제 대구 공업중학교를 졸업한 후 1952년 진해로 와 있던 육군사관학교에 11기생으로 입교했다. 5.16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군단 교관이었던 전두환 대위는 5 17일 육군본부로 무작정 박정희 소장을 찾아가 독대했다. 그런 다음 쿠데타군 실세인 양 육사교장을 압박하고 생도들을 선동해 쿠데타 지지시위를 벌이게 했다. 5 18일 오전 육사생도와 소속 장교, 졸업생 1000여 명은 동대문과 남대문을 거쳐 서울시청 광장으로 행진했다.

전두환 대위가 박정희 소장을 독대하고 육사생도의 시가행진을 사주한 것이 사실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그를 비서관으로 발탁한 것을 보 면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이 때 인연을 맺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하나회라는 육사 출신 장교 사조직을 만들어 대한민국 국군 수뇌부를 장악하고 군사반란과 대학살을 통해 권좌에 오를 것이라고 상상한 사람 역시 없었다.

 

[김대중과 전두환]

 

  

박정희 대통령은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했지만 폭력으로만 통치하지는 않았다. 자발적으로 추종하거나 지지한 국민도 많았다. 18년의 집권기간에 박정희 정부는 농업 중심의 전통사회를 중화학공업을 보유한 산업사회로 만들었다. 고속도로와 항만, 비행장을 비롯한 사회 간접자본을 건설했고 헐벗은 민둥산을 숲으로 바꾸었다. 전국에 상하수도와 전기를 보급했고 기생충과 전염병을 퇴치했다. 나는 이런 것이 커다란 선이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결코 고결한 인간은 아니었으나 독재자로서는 크게 성공한 것이다.

[박정희가 남긴 좋은 것들]

 

 

 

4.19 5.16 둘 모두 일정한 성공을 이루었다. 4.19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50년이라는 긴 세월을 걸쳐 점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10년으로 끝나버린 진보세력의 집권과 심각하게 흔들리는 오늘의 민주주의는 4.19의 승리가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5.16도 성공했다. 박정희 장군은 18년 동안이나 권력을 누렸으며 그 후예인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이 12년 더 집권했다. 서거 33년이 지난 시점에 딸이 국민의 선택을 받아 대통령이 되었으며, 이유가 무엇이든 그는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세계사에서 이만큼 성공한 군사쿠데타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좋아하는 시민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사실 그의 인격과 행위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시민들 자신이 쏟았던 열정과 이루었던 성취, 자기 자신의 인생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박정희 집권 시절, 절대빈곤, 고도성장, 양극화]

 

박정희 정부는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토대를 구축했다.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지배한 것은 기회균등과 공정경쟁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었다. 이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반드시 그렇게 되었어야만 할 이유는 없다. 다른 방식으로 발전을 이루어 지금과는 크게 다른 사회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두 길을 가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박정희 정부이래 개발독재와 재벌 중심의 자본축적, 수출주도형 산업화의 길을 걸었다.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낡은 경제구조를 혁신하지 못했으며, IMF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과거와는 양상이 다른 정글법칙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10년의 진보정부는 역사적 경로의존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사실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에는 연습이나 실험이 없으며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는 바꿀 수 없다. 5.16이 없었다면? 2공화국이 상당기간 지속되었다면? 박정희 장군이 병영으로 복귀했다면? 3선 개헌을 하지 않았다면? 10월 유신을 하지 않고 1975년에 퇴임했다면? 그랬다면 대한민국 경제가 어떤 길을 걸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와 있을까?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다.

기껏해야 일종의 사고실험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사고실험의 결론이 타당한지 여부는 검증할 방법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객관적 사실을 근거로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과 현주소를 점검하고, 그 연장선에서 앞으로 이루어야 할 변화의 길을 탐색하는 것이다.

 

 

한국 경제는 1970년대에 이륙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저 사실일 뿐이다. 그 사실을 곧바로 특정한 가치판단과 규범적 평가로 바꿀 수는 없다. “산업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독재를 해야 했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동시에 이룰 수 없다.” , “독재를 해서 경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민주화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함께 추진해볼 기회를 자기 손으로 봉쇄했다. 물론 그런 기회가 있었어도 실패했을 수 있다. 그러나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근거 역시 어디에도 없다.

독재적인 방법으로 산업화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다양하게 해석하고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각자 나름의 철학과 인생관을 지니고 산다. 똑같은 경험을 해도 철학이 다르면 해석이 달라지며, 경험까지 다르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

 

다른 건 몰라도 경제성장 만큼은 독재, 권위주의, 보수정권이 민주, 자유주의, 진보정권보다 더 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고정관념이다. 한국 경제는 박정희 정권 때 이륙했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1인당 국민소득의 상승폭은 민주화 이후 10여 년 동안이 그 이전보다 더 컸다. 1979~1980년의 불황과 1997년의 외환위기, 2008~2009년의 금융위기는 모두 보수정권이 일으켰다. 김대중 정부가 IMF 경제위기를 수습한 이후부터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까지 진보정권 10년 동안 노태우 정부나 김영삼 정부 시절과 비슷한 상승세를 기록했다.

미국발 국제금융위기가 수습된 후인 2010~2013년의 상승세는 진보정권 때보다 나을 게 없다. 결국 경제성장에 관한 한 보수와 진보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잘했다고 판단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박정희의 경제관 그리고 경제정책-

 

박정희 대통령은 시장과 자유경쟁이 이륙의 선행조건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지 않았기에 민주적 정부라면 결코 선택할 수 없었을 방식으로 이 과제에 도전했다. 그는 성공한 사례를 알고 있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통해 모든 권력을 중앙정부에 집중했고, 그 힘으로 유럽을 따라잡는 산업화에 성공했다. 히틀러는 나치당 독재를 확고히 한 가운데 국가계획에 따라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중화학공업과 군수산업을 집중 육성하는 전시 계획경제를 실행함으로써 대량실업과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을 해소했다.

결말은 침략전쟁 패배로 인한 체제붕괴였지만, 단기적으로는 두 나라 모두 두드러진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승만 박사와 달리 전 남로당원박정희는 자유주의 이념에 갇히지 않았다. 국가가 주도하는 중앙통제식 계획경제가 러시아공산당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볼셰비키 혁명의 지도자 레닌이 사회주의자로서는 처음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했을 때 봉착한 첫 과제는 인민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고 중화학 공업을 신속하게 육성해 자본주의 강대국들에 포위당한 소련의 일국사회주의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참고할 수 있는 전례가 없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는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

레닌은 공산주의자들이 혐오해 마지않던 사적 소유를 일부 허용하는 가운데 국가전략산업을 정부가 계획하고 조직하고 통제하는 절충형의 신경제계획(NEP)을 실시했다. 그가 죽은 후 권력을 이어받은 스탈린은 생산수단과 토지를 완전히 국유화하고 생산과정을 집단화하는 등 전면적인 중앙통제식 계획경제체제를 구축했다.

 

소련은 1941 6월 유럽 동부전선에서 볼셰비키 혁명 이후 24년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유럽 전선에서 연합군과 제휴해 독일과 싸웠고, 태평양 전선에서는 막바지에 미국과 손잡고 일본을 협공했다. 차르체제의 러시아군과 달리 소련군은 중화기로 무장한 현대적 강군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했다.

소련공산당의 중앙통제식 계획경제가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매우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박정희 시대 한국 경제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자본주의 선진국과 제국주의 일본,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을 절반씩 닮은 체제였다.  다시 말해서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기본질서에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결합한 혼합형 경제체제였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경제체제도 그와 비슷하다. 중국공산당의 경제관료들이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을 면밀히 연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개발독재는 똑 같은 개발독재다. 중국 정부의 최고위인사들이 박근헤 대통령에게 보인 인간적 호감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게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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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정책과 산업정책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19세기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애국지사였던 프리드리히 리스(Friedrich List) (1789~1846)의 충실한 제자였다고 할 수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풍미했던 19세기 중반, 리스트는 자신이 독일인이기 때문에 자유무역론을 거부한다고 말했다.

그는 산업기반이 약한 독일이 자유무역을 하면 경제적으로 영국의 패권 아래 편입되어 별 볼일 없는 산업을 가진 2등 국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래서 먼저 높은 무역장벽을 치고 자국의 산업을 육성한 다음, 충분한 실력을 갖추었을 때 국내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스트는 독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 공산품에 높은 관세를 매겨야 한다고 제안했으며, 그런 목적으로 부과하는 관세에 보육관세라는 멋진 이름을 붙였다. 대한민국의 무역정책은 뒤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나라에는 보호무역주의자 리스트의 전략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박정희의 경제정책-

 

박정희 대통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도모했다. 일제의 착취와 수탈과 학살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3억 달러라는 헐값에 넘겨주었다. 베트남전쟁에 청년들을 보내 무려 5000여명을 희생시켰다. 독일에는 광부와 간호사들을 보냈다.

1963년부터 8000여명이 파견된 광부의 학력은 고졸이 50%, 전문대 이상 대학 학력자가 24%였다. 간호사 파견은 1966년 독일 마인츠 대학병원 이수길 박사가 독일병원협회와 한국해외개발공사를 중재한 데서 시작되었다. 1969년 두 기관이 협약을 한 후 11000여 명의 간호사가 독일로 갔다.

 

1970년대에는 중동지역이 외화 획득의 중요한 현장이었다. 1973년 삼환기업의 사우디아라비아 도로 건설공사로 시작한 중동 건설 붐은 남광토건, 신한기공, 대림산업의 요르단, 아랍에미레이트연합, 쿠웨이트 건설수주를 거쳐 1976년 현대건설의 사우디 항만공사로 폭발적 양상을 보였다. 1979년 중동지역에 파견된 한국 노동자 수는 10만 명에 육박했다.

 

박정희 정부는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소위 기생관광을 공공연하게 허용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로 일본인 관광객이 급증했다.

1973년 외국인 관광객 68만 명 중 80%가 일본인이었는데, 그 대부분이 기생관광을 즐기러 온 일본의 하위 소득계층 남자들이었다. ‘외화벌이를 한다면 안 될 일이 없었다. 종로 10곳을 비롯해 서울에만 14, 부산에 7, 경주에 4, 제주도에 2곳의 관광요정이 있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삼청각과 대원각에는 관광기생수가 800명이나 되었다.

여행사와 관광요정, 호텔이 삼각동맹을 맺은 이 국제적 성매매사업은 1973년 한 해에만 2억 달러의 관광수입을 안겨준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중화학공업 투자를 위해 직접 대규모 차관을 도입했고 철도, 도로, 통신, 철강, 석유화학, 금속 등 국가기간산업을 직접 또는 공기업을 세워 운영했다. …..그리고 정부가 한국은행에서 사실상 무제한으로 돈을 빌려 유통시키는 방식으로 물가인상을 유발함으로써 현금과 예금을 보유한 국민을 착취하고 부채가 많은 금융기관과 기업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박정희 정부는 [공산당선언]에서 현대 국가는 부르주아지의 일상사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한 마르크스의 견해가 최소한 진실의 일면을 포착한 것임을 증명해 보였다.

1972년의 8.3 긴급조치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것은 실패한 화폐개혁보다 더 노골적인 사유재산 침해 행위였다. 과도한 사채 규모와 높은 금리 때문에 부도 위험에 빠진 기업이 늘어나자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사채를 동결하고 금융기관 대출로 전환하는 방안을 정부에 건의했다. 박정의 대통령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선포했다.

 

이 명령의 핵심은 기업과 사채권자의 채권채무관계를 즉각 무효화하고, 채무자가 사채를 신고하면 3년 거치, 5년 분할로 시중 사채이자의 3분의 1 수준인 월 1.35 % 의 이자율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사채권자가 원할 경우 사채를 출자로 전환해주고 2000억원의 특별자금을 조성해 기업의 단기성 대출금을 장기저리 대출금으로 바꾸어주도록 했다.

정상적인 자본주의 사회라면 상상할 수 없는 조처였다. …. 채권자의 사유재산을 빼앗고 거기에 국민의 세금을 얹어 기업에 제공한 8.3 긴급조치가 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효과를 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재벌의 등장, 전경련의 탄생-

 

한국 경제는 시장경제체제가 아니었다. 시장의 원리에 따르면 자본은 저절로 수익성 높은 투자 프로젝트를 가진 산업과 기업으로 흘러간다. 그런데 산업화 이전의 대한민국에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시장과 금융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외국이나 한국은행에서 돈을 빌려 만든 투자재원을 정부가 기업에 직접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정부의 실체는 박정희 대통령과 측근 참모들이었다. 아무리 수익성 있는 투자 프로젝트를 가진 사람이라도 정부에 줄을 대지 못하면 자금을 받을 수 없었다. 특혜가 있는 곳에 정경유착과 부패가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재벌체제가 탄생했다.

 

대통령과 참모들의 신임을 받은 기업인들은 물가인상률보다 훨씬 낮은 이자를 내는 정책자금을 받았다. 각종 특혜와 행정 편의를 제공받으면서 국내시장의 독과점 공급자가 되어 소비자인 국민을 착취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여러 산업 분야에 진출해 거대한 기업집단을 형성했다. 삼성그룹 이병철, 현대그룹 정주영, 선경그룹 최종현 등 거대 기업집단을 만든 재벌 창업자들은 그런 일에 빼어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이었다.

정부는 재벌 대기업이 수출을 해서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도록 자금과 세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재벌 총수들은 대통령과 권력실세들에게 통치자금명목의 뇌물을 넉넉하게 바쳤다.

 

5.16 직후 군사혁명정부는 재개 서열 10위권 기업인들을 모두 구속했다. 일본에 출장을 간 덕에 체포를 면한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정축재처리위원장에게 편지를 보내 5.16을 지지하며 부정축재자 처벌 방침에 이의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 시기에 만든 불합리한 세법 아래에서 고용을 창출하고 세금을 납부해 국가운영을 뒷받침한 기업인과 백해무익한 악덕 기업인을 구별해야 하며, 경제인을 처벌해 기업활동을 위축시키면 빈곤을 추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군사정부의 종용을 받고 귀국한 이병철 회장은 1961 6 27일 박정희 소장을 만났다. 그는 법대로 세금을 냈다면 살아남은 기업이 없었을 것이며, 그런 환경에서도 큰 기업을 일군 기업인을 처벌한다면 세수가 줄어 국가운영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구속되어 있던 기업인들은 조국근대화사업에 협력하기로 맹세하고 모두 풀려났으며 각자 일정액의 추징금을 납부했다. 이병철 회장은 박정희 의장을 다시 만났을 때 기업인들에게 벌금을 물리기보다는 공장을 지어 정부에 헌납하게 하는 방안을 건의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이 제안을 수용해 정부가 기업에 투자명령을 내릴 수 있는 법률을 만들고 국가기간산업 시설을 세우기 시작했다.

 

박정희 의장과 이병철 회장의 만남은 국가와 재벌의 발전을 위한 동맹이 계기가 되었다. 5.16 직후 체포되었다 풀려난 기업인들이 만든 단체가 바로 전국경제사범연합회라는 비아냥을 듣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이다. 그 후 재벌 총수들은 대부분 한번 이상 불법 비자금 조성, 회사자금 횡령, 불법 정치자금과 뇌물 제공, 분식회계, 탈세 등의 범죄를 저질러 재판에 회부되었다.

아예 기소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지만 범죄 혐의가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난 경우에도 기껏해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그나마 조금 지나면 대통령이 국민경제 활성화와 기업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그들을 사면해 주었다. “기업의 탈세와 불법은 불합리한 제도 때문이며 기업인을 처벌하면 경제가 위축되어 경제가 침체한다라는 이병철 회장의 견해는 대통령과 판검사, 언론이 모두 추종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삼성그룹의 역사-

 

삼성그룹의 역사는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 전체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이병철 회장은 일제강점기에 정미업과 운수업을 했다. 이승만 정부 때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했으며 한국전쟁으로 대구에 피난해 있으면서 제조업 진출을 준비했다. 가장 먼저 제일제당을, 그 다음에 제일모직을 세웠다.

그는 소비재 독과점 공급자의 지위를 활용해 벌어들인 돈으로 국내은행 주식의 절반을 취득해 금융업 기반을 만들었다. 5.16 이후에는 일본 자본을 끌어와 울산에 한국비료를 세웠으며 동양방송, 용인자연농원 등 미디어와 레저산업에 도전했다. 1970년대에는 전자산업, 조선업, 플랜트사업, 석유화학, 방위산업에 손을 뻗었고 생명보험, 백화점, 호텔사업에도 진출했다.

반도체와 컴퓨터산업은 1983년에 착수했다. 미국과 일본 기업에서 기술을 도입해 초대규모집적회로(VLSI) 64KD 램과 16KS 램 생산을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웨이퍼를 수입해 회로를 입히고 절단해 중간재를 만드는 단순 공정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전후방 연관기술을 개발해 반도체 결정을 키우는 데서부터 완제품을 만드는 데까지 모든 공정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삼성전자는 미국과 일본 기업을 능가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집적기술을 확보했다.

 

요약해서 말하면 제당과 모직 등 수입대체 소비재산업에서 출발한 삼성그룹은 전자, 석유화학, 조선, 기계 등 중화학공업, 정밀기계를 축으로 한 방위산업, 반도체, 컴퓨터, 산업용 전자기기, 유전자공학 등 최첨단 수출산업 분야로 주력업종을 빠르게 교체했다.

이건희 회장 체제로 넘어온 뒤 자동차산업에 진출했다가 실패한 것을 제외하면, 삼성그룹은 하드웨어산업 뿐만 아니라 정보처리 등 소프트웨어, 이동통신기기, 문화콘텐츠, 의료서비스와 의료기기, 연료전지 등 신재생에너지산업 등으로 계속해서 주력업종을 교체하는 데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좋은 나라는 국민이 골고루 잘사는 나라다. 여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경제성장과 소득분배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소득분배에 신경을 쓰다보면 경제성장을 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하려면 소득분배가 되도록 균등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현실을 보면 둘 다 잘하는 나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도 있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은 쪽에 속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국의 소득격차가 다른 나라보다 심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과거보다 격차가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국가 주도 경제개발계획의 실마리를 처음 제공한 것은 UN 이었다. UN은 식민지배와 분단을 거쳐 전쟁의 참화에 빠진 불행한 신생국의 자활을 돕기 위해 한국재건단’(UNKRA)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한국재건단은 1953년 봄 한국 경제의 재건을 도모하기 위한 경제개발계획 보고서를 냈다.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이것을 참고해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계획경제는 공산당이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 탓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은 한동안 허공을 떠돌다가 4.19 혁명 나흘 전에야 겨우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이념적 편견에 사로잡혀 경제발전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을 내팽개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저지른 여러 잘못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중의 절실한 물질적 욕망을 외면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장면 정부는 1961 2경제개발 7개년계획을 수정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요강을 발표했다. 정부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서둘러 작성했지만 집권 민주당과 내각에서 사회주의가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이승만 대통령만 계획경제를 싫어한 건 아니었던 것이다.

장면 총리는 공공재와 국가기간시설을 비롯해 꼭 필요한 만큼만 하겠다면서 계획을 밀고 나간 끝에 최초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군사정부의 손에 넘어갔다.

 

한국 경제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가치가 있는 사건은 두 가지다. 경제성장과 관련해서는 제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이고 소득분배와 관련해서는 IMF 경제위기다. 우리나라는 다양한 소비재 경공업 뿐만 아니라 철강, 자동차, 금속, 석유화학, 조선 등 전통적 중화학공업과 세계 최고 수준의 컴퓨터, 반도체, 이동통신기기 등 첨단산업을 보유하고 있다. 수출입을 합친 금액이 국내총생산과 맞먹을 정도로 무역의존도가 높다. 주요 산업을 거의 모두 소수의 재벌이 장악하고 있다. 이러한 재벌 대기업과 수출 중심 경제구조의 원형이 바로 제 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에 탄생했다.

 

우리나라는 비정규직이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나 된다.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60퍼센트에 불과하며 고용안정성과 근로환경도 현저히 나쁘다. 기업은 사실상 마음대로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으며 노동조합 조직률은 10퍼센트 아래로 내려갔다. 중산층이 줄어들고 빈부격차는 확대되었다. 외국자본이 특별한 규제를 받지 않고 국내시장에 들어오거나 나갈 수 있으며 대기업들은 생산시설 일부를 외국으로 옮겼고 부품과 중간재를 외국에서 조달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기업과 내수기업의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러한 양극화 현상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크게 심화되었다.

 

국민경제가 이룩하려면 활주로와 연료가 있어야 한다. 전통적 경제이론에 따르면 생산의 필수 요소는 자본과 노동력이다. 대한민국에 노동력은 많았지만 자본은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산업화를 하려면 공장건물, 기계, 원료와 중간재 같은 실물자본을 축적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가동하는데 필요한 최초의 자본을 형성하는 것을 자본의원시적 축적이라고 했다.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 과제를 해결했다. 첫째는 봉건적 특권을 자본화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귀족들은 중세 이래 농민들이 가지고 있던 경작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함으로써 토지에 대한 봉건적 특권을 자본주의적 소유권으로 전환했다. 양모 값이 오르자 농민들을 영지에서 추방해버리고 농지를 초지로 바꾸어 농업자본가에게 임대한 소위 인클로저 운동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로 이주해 노동자가 되었다.

 

둘째는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수탈이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등 모든 산업국이 군사력으로 다른 전통사회를 정복해 부와 노동력과 자원을 약탈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했다. 소련과 중국은 다른 방식으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이루었다. 그들은 봉건적 특권을 사유재산이 아닌 국가자본으로 전환했다. 소비재산업에 앞서 사회간접자본과 중화학공업을 먼저 육성했다. 시장 경쟁이라는 사회적 강제나 물질적 부를 향한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혁명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해 국가자본을 쌓았다. 냉전시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이념적, 정치적, 군사적인 면에서 극단적으로 대립했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통하는 점이 있었다.

현실의 사회주의 국가는 생산수단의 소유권과 생산물의 처분에 관한 권한을 자본가가 아니라 공산당 관료들이 행사한 일종의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정책의 초점은 단기간에 대량의 국가자본을 축적하는 데 놓여 있었다.

 

대한민국은 서유럽 국가와 달랐으며 사회주의 국가도 아니었다. 자본화할 수 있는 중세적 특권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다른 나라를 수탈할 능력도 없었으며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생산시설이 조금 있었지만 그나마 한국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어버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실정에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했으며 자본을 해외에서 차입하고 기업으로 하여금 폭리를 취하게 함으로써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이룬 것이다. 최초 해외자본 차입의 주체는 정부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업의 해외 차입을 조금씩 열어주었다.

정부는 독점기업들이 시장지배력을 이용해 폭리를 얻도록 했으며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소비자와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 기업들은 짧은 기간에 막대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진행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특별히 비인간적이고 잔혹했던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어느 곳에서나 자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며 태어났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자본의 원시적 축적또는 이륙을 위한 선행조건 충족을 위한 것이었다. 1 5개년 계획(1962~1966)의 핵심은 전력과 석탄 등 에너지원 확보, 국가기간산업 확충, 철도,도로,항만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 확대, 농업생산력 제고, 수출 증대, 기술 진흥이었다.

공공재 공급과 국가기간산업 육성에 초점을 맞추었던 장면 정부의 계획과 다를바 없었다. 이것은 비행기를 띄울 활주로를 닦는 작업에 해당했다.

 

2 5개년계획(1967~1971) 목표는 식량 자급, 삼림녹화, 화학, 철강, 기계공업 건설, 7억 달로 수출, 고용 확대, 국민소득 증대, 과학기술 진흥, 기술수준과 생산성의 향상 등이었는데 핵심은 화학, 철강, 기계 등 중화학공업 육성이었다. 1 5개년계획의 목표를 달성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중화학공업을 육성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가장 큰 난관은 계획을 실행하는데 필요한 자본이 없다는 것이었다.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려면 다른 어떤 산업보다 막대한 설비투자를 해야 한다. 투자에서 이윤 획득까지 걸리는 시간이 매우 길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축적된 자본이 없었으므로 밖에서 들려오는 것 말고는 단기적 해결책이 없었다. 정부는 한일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전쟁 파병 등을 계기로 일본과 미국 자본을 들여와 중화학공업 건설 작업에 시동을 걸었고 제3 5개년 계획 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얻었다.

 

산업화세력의 주요 인사들은 산업화의 성공과 관련한 이야기를 많이 남겼다. 국민들에게는 김종필, 이후락, 차지철, 김형욱, 김재규, 김성곤 등 음습한 정보공작 정치의 책임자들이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이름을 기억해둘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박정희 시대의 고위 경제관료들이다. 경제개발계획 입안과 집행을 총괄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은 장기영(1964~1967), 박충훈(1967~1969), 김학렬(1969~1972), 태완선(1972~1974), 남덕우(1974~1978), 신현확(1978~1979)이었다. 산업정책과 수출정책을 담당한 상공부장관은 박충훈(1964~1967), 김정렴(1967~1969), 이낙선(1969~1973), 장예준(1973~1977), 최각규(1977~1979)였다. 이 사람들은 대체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국내 명문대학과 외국에서 공부했고 공직을 마친 다음에도 안락한 노후를 보냈다. 비밀결사를 만들고 거리시위를 조직해 독재정권과 싸운 민주화세력의 주요 인사들이 수배, 도피, 체포, 고문, 투옥으로 이어진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숱한 무용담과 인생 드라마를 남긴 것과 달리 그들의 인생에는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인간적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별로 없다.

하지만 그들이 산업화 초기의 국가정책 결정과정에 대해 남긴 기록에는 지적 흥미를 자극하는 이야기가 적지 않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중화학 공업화를 선언했다. 1980년대 초까지 수출 100억 달러와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달성하고, 수출상품 중에서 중화학제품이 절반을 넘기게 하겠다고 장담했다.

수출제일주의, 10년이 넘는 대규모 장기계획, 산업기계, 조선과 운송기계, 철강, 화학, 전자 등 5대 산업의 집중 발전 등이 선언의 핵심 내용이었다.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직접 위원장을 맡았으며 100억 달러 투자재원 조달계획에 따라 첫 3년 동안 31억 달러의 투자자금을 동원했다. 오원철 경제수석, 김정렴 상공부장관, 박정희 대통령이 그 주역이었다.

중화학공업은 방위산업을 증강하고 국군을 현대화하는 데도 필요한 정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 사업은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참모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중화학공업화를 위해 나라 안팎에서 100억 달러를 동원해야 한다는 보고를 받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쟁을 일으키자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일으켰는데도 국민들은 기꺼이 따라주었다. 태평양전쟁 때 패전을 해서 국민들에게 막중한 피해를 주긴 했지만. 이 정도의 사업에 협조를 안 해주어서야 되나.”

 

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에 한국 경제는 이륙을 위한 선행조건을 충족했다. 국제 경제환경이 좋지는 않았다.

베트남전쟁을 치르느라 너무 많이 돈을 찍어낸 탓에 달러 가치가 폭락하자 미국 정부는 1971년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는 금태환 제도를 전격 중단해버렸다. 금본위제와 고정환율제를 축으로 한 전후 국제 금융질서가 무너져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졌다. 게다가 이스라엘과 아랍연합군이 전쟁을 벌인 1973년 가을, 중동 산유국들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나라에 대한 원유 공급을 거부하는 원유 무기화전략을 썼다. 1배럴에 2달러 수준이던 국제 원유가격이 단숨에 다섯 배 이상 뛰어올랐고 국내물가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부는 계속해서 대규모 정부차관을 들여와 기업에 배분했다. 해외 국가채무 규모가 급증하자 나라 안팎에서 외채망국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원유가격 폭등으로 천문학적 규모의 오일달러를 거머쥔 중동 국가의 건설 붐을 적극 활용한 덕분에 한국 경제는 연평균 10퍼센트에 육박하는 성장률을 기록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면서 속도를 냈고 바퀴가 지면 위로 떠올랐다.

 

4 5개년계획(1977~1981) 한복판에 10.26 사건이 터졌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이 계획은 그대로 살아남았다. 4 5개년 계획 목표에 자력성장 구조 확립, 기술혁신과 능률향상 등과 더불어 사회개발을 통한 형평 증진을 포함시킨 것을 보면 박정희 정부의 경제관료들은 한국 경제가 이미 이륙에 성공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륙을 할 때는 추진력과 가속도가 중요하지만 이륙한 후 순조롭게 비행을 하려면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래서 경제정책과 관련해 처음으로 형평이라는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4 5개년 계획 첫해인 1977년에 우리 경제는 100억 달러 수출과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조기에 달성했지만 민들의 삶은 여전히 고달팠다. 부동산 투기 광풍으로 주택가격이 폭등했고 생필품 공급은 여전히 부족했다. 1978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과 사우디아라비아 내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일련의 사건으로 제 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 다시 한번 물가가 폭등했다. 하필이면 그런 시기에 정부가 국가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세율 10% 의 부가가치세를 새로 도입하는 바람에 소비자물가는 더 높게 치솟았다. 민심이 사나워질 수 밖에 없었다.

 

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목표에 형평을 포함시킨 것은 시의적절했지만 정부는 경제적 불평등과 물가 폭등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해소하지 못했다. 10.26 사태와 5.18에 이어 1980년 여름 이상저온 현상이 한반도를 덮쳐 농업마저 대흉작을 기록하자 한국 경제는 경제개발계획 시행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것은 산업화 이후 첫 번째로 맞은 심각한 경제위기였다.

 

경제개발계획은 그 후에도 세 차례 더 수립되었지만 그 의미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1982년에 시작한 제5 5개년 계획의 목표에서 성장이 빠졌다.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의 제6, 7차 계획에는 자율, 경쟁, 개방, 국제화, 기업경쟁력 강화 같은 새로운 목표가 등장했다. 그런 목표들은 국가주도형 자본주의적 계획경제의 점진적 해체를 의미했다. 게다가 1980년대 말 지구촌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식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대세를 형성했다. 국내 대기업과 재벌들이 이미 거대한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정부가 투자재원을 조달해 기업에 할당할 필요도 없어졌다. 결국 1997년의 외환위기와 함께 국가주도형 경제개발계획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 경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세계사에서 보기 힘든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성장 속도에서 한국을 추월한 나라는 중국 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것을 이루기 위해 18년 동안 철권통치를 했다. 위협과 폭력이 항구적이고 효율적인 통치방법이 아니라는 것, 국민들이 국가의 목표를 자신의 개인적 목표로 여기고 자발적으로 협력하면 정부가 폭력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래서 그는 교육과 언론을 통제하고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국민을 세뇌하려고 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는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를 불러들인다.

 

 

 

-산업화의 성공 그리고 그로 인해 초래된 재벌과 정부의 관계 변화-

 

산업화의 성공은 정부와 재벌의 관계를 바꾸어놓았다. 처음에는 정부가 이고 재벌이 이었다. 정부의 사업허가와 자금을 배정받아야 사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업인들은 불법 비자금을 만들어 대통령과 권력실세들에게 바쳤다. 대통령 눈 밖에 나면 어떤 기업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런데 1980년대 3저 호황과 고도성장기를 거쳐 재벌이 막대한 자본을 축적하고 정치적으로도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정부가 권력으로 기업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재벌이 돈으로 정치권력을 관리하게 되었다. 재벌은 대통령과 집권세력뿐만 아니라 야당 정치인에게도 정치자금선거자금을 제공했다. 집권세력에게는 많이, 야당에게는 보험차원에서 적게 주었다. ‘삼성 X파일사건에서 보듯 삼성그룹 같은 재벌은 대통령과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경제부처의 고위공무원과 검사를 포함해 국가권력 행사와 관련한 의사결정권을 가진 사람들 전체를 돈으로 관리하기에 이르렀다. 자본 권력이 국가권력과 정치권력을 포획한 것이다.

 

……….

 

1995 12월 김영삼 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군사반란과 내란목적 살인혐의 등으로 구속하는 계기가 되었던 천문학적 규모의 소위 통치자금은 대부분 재벌 총수들이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 바친 뇌물이었다. 윗물이 혼탁하면 아랫물로 흐리기 마련이어서, 우리 사회 전체가 부패문화에 젖어들었다.

정치권과 정부만 그런 것이 아니다. 기업, 언론, 대학, 문화, 예술계까지도 사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공적 권력을 휘두르는 완장 문화에 감염되어 있었다. 이 모두가 재벌 탓은 아니겠지만 부패문화의 진원지가 재벌과 정치권력의 유착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에게 재벌은 애증의 대상이다. 재벌이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 어렵다. 국민들은 재벌기업이 지은 아파트에 살면서 재벌기업이 만든 텔레비전, 냉장고, 에어컨을 쓰고 재벌기업이 만든 승용차를 탄다. 재벌기업이 만든 옷을 입고 재벌기업이 생산한 스마트폰을 쓰며 재벌기업이 운영하는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경기를 본다. 재벌기업이 만든 화장품을 바르고 재벌 계열의 백화점과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 하며 재벌기업이 공급하는 생명보험에 가입한다.

청년들은 지불능력이 탄탄하고 근로조건이 좋은 재벌기업에 취직하기를 원한다. 자식이 재벌회사에 취직하면 부모는 고시합격이라도 한 것처럼 기뻐한다. 재벌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으며, 어쩌면 우리의 미래마저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 재벌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헌법 위에 군림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국가권력을 통한 정치적, 민주적 개입과 통제 뿐이다. 나는 이것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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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내 인생에서 우남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었던 기간은 겨우 아홉 달이지만 그는 내가 살아갈 나라의 토대를 만들어두고 떠났다.

그 토대는 친미주의와 반공주의가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분단국가라는 것이다. 55년 동안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이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조선과 중국을 오가면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백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이봉창 의사를 높이 숭앙한다.

미국 망명객 이승만 박사가 조국 광복에 기여한 바는 별로 없었다고 본다. 게다가 그는 기회만 생기면 파벌을 만들고 권력을 사유화하려 했으며 12년 장기집권을 한 끝에 독재와 부패,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시민을 살상한 죄로 쫓겨났다.

하지만 인간 이승만이 시종일관 악의 화신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도 한때는 멋진 사람이었다.

시대의 흐름을 남보다 먼저 읽는 안목을 가졌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권력을 장악하는 배짱이 있었다. 개인으로 보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였던 청년 이승만은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언론활동과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다.

만민공동회운동으로 옥살이를 했던 구한말의 이승만은 빛나는 열정과 애국심을 가진 청년지식인이었다. 그는 영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덕분에 대한민국을 지배하게 될 미국 유학파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서 역사학, 국제법,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승만 박사는 1910년 다시 돌아와 한동안 YMCA 전국조직을 구축하는 등 교육운동과 선교활동을 하다가 조선총독부의 검속대상이 되자 미국으로 떠났다. 1913년 하와이에 정착해 교민청년 교육에 힘쓰는 한편 국제정세의 흐름에 맞는 외교활동으로 조국의 독립을 찾는 방안을 모색했으며 무장투쟁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934년에는 일찍이 혼인했던 박승선과 이혼하고 무려 스물다섯 살 젊은 프란체스카 돈너(Francesca Maria Barbara Donner) (1900~1992)와 결혼했으며 1939년에 워싱턴으로 이주했다.

 

훗날 이승만 대통령이 국부로 군림할 때 프란체스카 여사도 국모대접을 받았다. 당시 국민들은 아직 국제감각이 부족해서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 여사를 호주댁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승만 박사는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임시정부 대통령을 할 정도로 널리 인정받는 독립운동가였다.

그런데 투쟁보다는 외교에 치중한 나머지 아무 힘도 없는 국제연맹에 조선을 위임통치 해달라고 청원했다가 탄핵을 당해 임시정부를 떠났다.

그는 강대국 정부에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일에 주력했는데, 특히 미국 정부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으며, 1904년에는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것임을 경고하는 책을 출간해 미국 정가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1941 12월 일본 공군이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그는 이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 조선이 독립할 것임을 예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미리 승인하라고 미국 정부에 청원하는 한편, 내분으로 만신창이가 된 가운데 일본군에 쫓겨 충칭으로 피난해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외로운 망명객이 아닌 임시정부 지도자로 귀국하기 위해서였다.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미리 승인해두지 않을 경우 조선이 독립하면서 소련의 손아귀에 들어가 동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될 것이라고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태평양에서 일본과 싸우는데 소련의 협력이 필요했던 미국의 행정부는 민족주의자들이 이끈 임시정부를 승인하면 소련 공산당을 자극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해서 청원을 거절했다. 이승만 박사는 미국 행정부가 태평양 전쟁 지원을 받으려고 한반도를 소련에 넘겨주기로 밀약했다는 주장을 해서 국무부와 불편한 관계에 들어갔다. 하지만 워싱턴 조야의 반공주의자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아 루스벨트 대통령 부인을 접견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종전이 임박하자 맥아더 장군은 반도 전체가 소련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한반도의 분할점령을 소련에 제안했다. 소련이 이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전범국 일본은 독일과 달리 분할점령을 모면했고, 엉뚱하게도 우리 민족과 국토가 두 동강 났다.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북위 38도선 남북을 각자 점령한 미국과 소련에 있다. 애초에 주권을 지키지 못했고 자기 힘으로 광복을 이루지 못한 것은 우리의 부족함 탓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단의 책임을 우리 민족에게 묻는 것은 강도 피해자에게 범죄의 책임을 지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1945 12 28일 모스크바에 모인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부장관들은 조선이 정통성 있는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중국을 포함해 네 나라가 신탁통치를 하자고 합의했다.

 

이번에도 우리 민족의 뜻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이승만 박사는 즉각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깃발을 들었다.

신탁통치에 찬성한 조선공산당을 매국노로 규정하고 신탁통치와 조선의 완전독립 문제를 다루던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거부했으며 38선 이남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다음 38선을 깨뜨리고 소련군을 쫓아내 북조선을 차지하겠노라고 공언했다.

그는 분단을 기정 사실로 만들고 남한 단독정부의 권력을 차지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분단을 막으려고 38선을 넘나들며 협상을 벌이는 동안 이승만 박사는 차근차근 분단 국가의 권력을 장악할 준비를 했다.

그는 신탁통치를 통해 좌우동거 통일정부를 만드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투철한 반공주의자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합리적인 전략일 수 있었다.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면 분단을 막을 수는 있지만 통일국가의 권력을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길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멀리 있지만 소련은 국경을 맞댄 나라였고, 일제 강점기 국내외에서 끈질긴 투쟁을 벌였던 공산주의자들은 조동조합과 농민단체를 비롯해 이념적으로 잘 무장한 전국조직을 보유하고 있었다. 국내 정치기반이 없었던 이승만이 신탁통치체제에서 권력을 장악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정치인 이승만은 한반도에 지구촌 냉전체제의 모델하우스를 세웠다.

제주 4.3 사건을 비롯해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일어났지만 1948 5 10일 한반도의 북위 38도 이남지역에서는 유엔 감독 아래 국회의원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승만은 제헌의회 의장이 되었다. 제헌의회는 대한민국 헌법을 채택했고 7 20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8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했다.

UN 38선 이남지역의 선거가 자유로운 가운데 공정하게 치러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했다.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라고 한 것은 아니다. ‘나의 조국대한민국 정부는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소련군이 점령한 38선 이북에서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다른 국가가 탄생했다. 1948 8 25일 우리의 국회의원 총선과 비슷한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유권자 대부분이 투표했고 단독 후보에 대한 찬성률도 거의 100퍼센트였다. 최고인민회의는 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했으며 9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평과 그리고 반민특위 이슈]

 

국회 본청 중앙 로텐더 홀을 지나 의원식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편에 1999년 한나라당 의원들이 세운 이승만 동상이 있다.

대통령 이승만이 아니라 국회의장 이승만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상을 세운 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건국함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막았으니 독재를 한 잘못은 잘못대로 비판하되 그 업적은 업적대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에는 가정이 필요 없다고 하지만, 때로 가정은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만약 우리가 신탁통치를 받아들여 좌우가 동거하는 통일정부를 만들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었을까?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 잠재적인 위험은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공산화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통일국가로 가는 길과 북한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고 남한에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길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분단을 거부한 민족주의자는 전자를 선택했지만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은 차라리 후자가 낫다고 판단했다.

 대표자가 바로 이승만 박사였다. 분단국가를 세우는 것이 그로서는 합리적인선택이었다.

독재, 부패,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수많은 시민을 살상했지만 그는 분단국가를 세움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확실하게 막았다. 온갖 비판을 무시하고 국회에 동상을 세운 국회의원들은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정통성 있는 국가로 만들었다면 이런 주장도 그나마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은 너무 많이 했다.

 국가의 정통성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라는 주장은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으며 남북 모두 유엔 회원국이 된 후에는 그런 의미조차 잃었다. 국가의 정통성은 특정한 이념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빛나는 이념을 내세운다고 해도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국가의 정통성은 내부에서 형성된다.

내세우는 이념이 무엇이든 국민이, 민중이, 인민이, 또는 대중이 그 나라의 국민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국가의 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복종할 때,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무질서에 대항해 공동체를 지키려고 헌신하려는 태도를 보일 때, 그 국가는 정통성 있는 국가가 되며 자연스럽게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다.

 

식민지에서 풀려나 만든 신생국가는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정통성을 가질 수 있다.

첫째는 역사적 대의명분이다. 신생 대한민국의 긴급과제는 일제 잔재를 청산해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우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한 사람들이 국가를 세우고 운영해야 했다.

둘째는 경제적 효율성이다. 민중을 빈곤에서 해방하고 물질적 삶을 개선해야 국민이 최소한의 기대를 품고 국가에 복종, 협력하게 된다.

셋째는 민주적 정당성이다. 헌법에 따라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고 주권재민 또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실현해 정치적 정당성을 지닌 정부를 세워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오로지 권력의 단맛을 누리는 데만 몰두했을 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승만 시대 대한민국이 정통성 없는 국가였다고 하면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는 당신, 북으로 가라!” 그렇게 소리 지른다.

그럴 일이 아니다. 현대사 55년 동안 우리 국민은 처음에 없었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크게 자랑해도 좋을 일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화를 낸다는 말인가.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정통성을 일부 지니고 출발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정상적인 가치관과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북한 체제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며 북한에 살러 가지고 않을 것이다. 통일운동을 하러 북한에 간 사람들 역시 북한을 좋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엄연한 독립운동가였다.

인간적, 정치적 호불호는 있을지언정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워야 할 국가원수로서 경력에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특히 일본에 대해 혐오에 가까운 반감을 보였다.

극단적인 사례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예선전이다. 국제 축구연맹 (FIFA) 이 본선 티켓 16장 가운데 딱 한 장을 아시아에 배정했고 한국과 일본만 참가신청을 했다. 아직 외교관계가 없어서 선수들이 상대방 국가에 들어가려면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인이 우리 땅에 발을 들여놓게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몰수패를 당할 위기에 봉착한 축구계 인사들이 홈경기 허가를 청원하다가 나중에는 두 경기 모두 일본에서 할 수 있게라도 해달라고 애원했다. 대표팀 이유형 감독은 이승만 대통령의 출국허가를 받으면서 이기지 못하면 선수단 모두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고 말했다. 도쿄에서 열린 두 경기에서 한국팀은 1 1무를 거두어 본선에 나갔다.

마흔여덟 시간 동안 비행기를 몇 차례 갈아타고 경기 전날 심야에 겨우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한 대표선수들은 헝가리에 아홉 골, 터키에 일곱 골을 먹고 탈락했다. 가슴 아픈 사연을 들은 스위스 시민들이 보낸 위문품과 위로편지가 만신창이가 된 대표팀 숙소로 쇄도했다.

 

그런데 그랬던 대통령이 정치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손을 잡았다.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했다가 광복 후 친미’, ‘반공의 깃발을 들고 살아남은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일본군 장교는 국군 장교가 되었으며 조선총독부를 위해 일했던 특고형사는 경찰 간부가 되었다.

판사, 검사, 공무원, 교사, 지식인, 경제인도 모두 독립국가의 지배층이 되어 예전보다 더 큰소리치며 살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입증하려고 여러 근거를 제시할 필요는 없다.

독립운동가를 추적하고 체포하고 고문한 일제강점기 조선인 특고형사의 대표선수였던 노덕술을 구하려고 국회를 짓밟은 사례 하나로 충분하다.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1948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와 특별경찰, 특별검찰, 특별재판소를 설치했다.

일제 군대, 경찰, 행정기관의 고위직을 지냈거나, 지위가 높지 않아도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데 악명이 높았거나, 관직은 없었지만 유명 지식인으로서 일본 왕과 조선총독부를 찬양하면서 징용, 징병과 근로정신대 등에 지원하라고 선동했거나 일제의 침략전쟁 군비조달에 큰돈을 기부한 기업인들이 용의자였다.

반민특위는 동기가 어떠했든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드러난 지위와 활동내용을 기준으로 조사대상자를 선정했다.

 

반민특위는 일단 682명을 조사해 559명을 특별검찰에 송치했다.

특별검찰이 그중 일부를 기소하자 특별재판소가 재판을 열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가 헌법의 삼권분립 정신을 해친다면서 반민특위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 절정은 1949 1월 반민특위가 노덕술을 체포한 사건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을 즉각 석방하고 반민특위 관계자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그에게 노덕술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악랄하게 고문했던 일제 특고형사가 아니라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공산당을 때려잡은 대한민국의 경찰관이었다.

노덕술이 국회보다 더 중요했다. 이때 살아남은 노덕술은 후일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고문해 반국가 인사 또는 간첩으로 조작하는 고문수사의 노하우를 대한민국 경찰과 정보기관에 전수했다.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김근태 의장을 참혹하게 고문한 이근안과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 씨를 죽인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형사들은 모두 노덕술의 후에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국회 프락치 사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반민특위 해체와 정부요인 암살 음모를 꾸몄다가 실패하자 반민특위법 제정과 특위활동에 앞장선 젋은 국회의원들을 간첩으로 몰아 구속했다.

소위 국회프락치 사건이다.

분개한 국회는 정부가 체포한 국회의원들을 석방하라는 결의안을 의결했다.

그러자 군중 수백 명이 반민특위 사무실로 몰려와 반민특위의 공산당을 숙청하라고 외쳤다. 반민특위는 이 난동사건을 일으킨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 등 주모자들을 체포했다. 그러자 친일파는 곧바로 역습을 펼쳤다.

내무차관 장경근과 치안국장 이호, 시경국장 김태선이 서울 중부경찰서 병력을 데리고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경대장 오세윤을 체포하고 권승렬 특별검찰부장의 권총을 빼앗았다. 강원도와 충청북도 등 다른 지역 특경대원들도 지역 경찰 병력에 무장을 해제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서울시경 사찰과 소속 경찰 440명이 반민특위 간부 교체와 특경대 해산, 경찰의 신분보장을 요구하면서 집단사표를 냈다. 서울시경 소속 경찰 9000명은 전원 사표를 내겠다며 정부를 압박했다.

 

국회는 반민특위를 원상복구하고 특경대를 습격한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특경대 습격을 지시했다고 한 데 이어, 반민특위활동이 민심을 해치고 있어서 특경대를 해산하겠다는 담화문을 낸다.

경찰이 특별조사위원과 특별검찰관의 집을 수색하고 사무국과 재판부의 서류를 탈취했다. 겁을 먹고 굴복하는 국회의원이 늘어났다.

결국 국회는 공소시효를 단축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일을 할 수 없게 된 김상덕 반민특위 조사위원장과 특별조사위원 전원, 일부 특별검찰관과 특별재판관들이 사표를 냈다. 국회는 친일파 비호세력을 주축으로 새로운 특위를 구성했다.

반민특위는 이렇게 막을 내렸고, 국회는 1951년 반민법을 폐지했다. 처벌받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친일파를 처단하고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대한민국의 약점이 되었다.

북한의 집권세력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이 엄청난 항일무장투쟁을 해서 자기 힘으로 조국을 해방한 것처럼 선전했고, 가랑잎으로 나룻배를 짓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었다는 식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들이 소련공산당의 지원을 받거나 중국공산당과 손잡고 항일무장투쟁을 한 것은 어쨌든 사실이었다.

북한 권력자들은 친일행위자들이 대한민국의 집권세력이 된 사실을 자기네의 체제 우월성을 선전하는 소재로 삼았다.

남조선은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 식민지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도덕적 우월감은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하기 위해서라면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이는 것도 정당하다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2013 6월 국가정보원이 공개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남쪽이 자주성이 결여되어서남북관계가 풀리지 않는다고 거듭 비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주이념은 지금까지도 북한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남아 있다.

 

반면 남한의 민족주의자들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채 미국에 종속되어 살고 있다는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독재의 빛과 어둠이 공존했던 1980년대 대한민국 사회 한복판에서 주사파가 탄생한 배경에는 바로 이 뿌리 깊은 민족주의적 열등감이 놓여 있었다.

 

친일파 청산 문제는 반민특위 해산 이후 65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았다.

2005 12월 국회가 친일재산환수법을 제정했지만 친일파 후손들은 조상이 민족을 배신해서 얻은 토지를 되찾겠다는 소송을 포기하지 않았다.

2013년에는 만주군 장교 출신이자 6.25 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의 동상 건립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이승만 대통령 덕분에 처벌을 모면한 친일반민족행위 용의자들은 대부분 천수를 누린 다음 자연사의 축복을 받았다. 결국 친일행위자에 대한 응징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정부와 국회, 권력기관은 물론이요, 경제계와 문화계에도 친일행위를 한 장본인이 권력을 쥐고 있는 경우는 이제 거의 없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 민족사적 정통성을 결여한 채 출발한 이유와 과정을 엄정하게 평가하고 철학적으로 소화하는 것 뿐이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시민들과 함께 그 일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원래 이름은 반민족문제연구소였다. 이 연구소는 [친일문학론]으로 지식인 사회의 일제 잔재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친일인명사전] 발간 계획을 세웠던 임종국 선생 빈소에서 설립 발의가 이루어졌다.

1989 11월의 일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파 후손들의 명예훼손소송과 발행금지가처분소송, 심각한 재정난을 모두 이겨내고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기까지 강만길, 백낙청, 윤경로, 염무웅, 최병모 등 200여 명의 역사학자와 지식인, 변호사, 종교인들이 편찬위원회에 참여했다.

1000여 명의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10만명의 국민모금 참가자들의 돈을 모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 11월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반민특위가 적용했던 것과 거의 같은 기준에 따라 선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4776명의 이름과 직위, 활동 내용을 수록했다.

 

 

 

 

 

[김일성]

 

1912년 평양 근처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형직은 독립운동을 한 민족주의자였고 어머니 강반석은 모태 기독교인이었다. 중국 길림 육문중학교에서 공산주의자가 된 김일성은 1931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후 중국공산당 유격대와 만주군벌 부대, 조선인 유격대가 함께 활동한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다.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조선 민중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1937년 백두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이 조국광복회와 손잡고 압록강을 건너 함경북도 갑산군 보천보의 경찰주재소를 습격해 큰 충격을 준 보천보 사건에서부터다.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한 국내신문이 홍비’(공산당 강도)가 일으킨 이 범죄를 제법 크게 보도했다. 온 나라에 입소문이 돌았다. 김일성은 1940년대 초 일본 관동군의 공세에 밀려 소련으로 퇴각했다 광복이 되자 북한으로 돌아와 이미 조직되어 있던 인민위원회를 장악했다.

 

민족의 분단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포병 소위 안두희는 1949 6 26일 경교장에서, 3.8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민족의 분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

이승만 정권의 소행임을 암시하는 정황이 많았지만 안두희는 입을 다문 채 죽었고 배후는 끝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공산당이 국민당을 상대로 한 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국 대륙은 1949 10 1일 마오쪄둥을 국가주석으로 하는 중화인민공화국 깃발 아래 들어갔다.

소련과 동유럽에 이어 중국까지, 지구 표면 절반이 붉은 깃발에 덮인 것이다.

미국과 서유럽은 공포감에 사로잡혔고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열전에서 막 벗어난 지구촌은 이념적 상호비방과 경쟁적 군비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냉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4.19 혁명-

 

국가 정통성의 두 번째 요소는 경제적 효율성이다.

국가가 민중에게 지속적인 승인과 복종을 요구하려면 잘살게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는 절대빈곤에 빠진 국민의 경제생활을 개선하지 못했다. 그것이 이승만 대통령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제조업과 광업, 전력 등 일제 강점기 산업의 중심지는 북한이었기 때문에 분단 직후 산업기반은 북한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게다가 북한은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을 빠르게 정비했다.

반면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발전계획을 세워 생산력을 높이고 국민의 생활을 개선하는 정책을 거부했다. 대한민국은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성과를 내기 시작한 1970년대 초까지 경제적으로 북한에 뒤졌다.

 

 

 

국가정통성의 세 번째 요소는 민주적 정당성이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주권재민의 원리와 합법적 절차에 따라 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정부는 헌법과 법률에 의거해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다수 국민들이 원할 때는 평화적, 합법적으로 정부를 교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럴 때 국가는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을 짓밟고 국회와 법률을 무시했으며 부정선거를 일삼았다. 처음에는 국회에서 선출되었지만 국회를 탄압해 지지기반을 잃게 되자 헌법을 바꾸어 대통령직선제를 도입했고 온갖 부정선거를 저질러 재선에 성공했다.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없애는 헌법개정안이 국회에서 한 표 부족으로 부결되자 소수점 이하를 떼버리고 찬성률을 반올림해 가결을 선포하는 기괴한 반칙까지 저질렀다. 소위 사사오입 개헌이었다.

 

민족사적 정통성도 없고, 경제적 효율성도 없으며, 민주적 정당성마저 없는 정부가 들어선 나라는 정통성 있는 국가일 수 없다. 결국 국민들이 저항권을 행사하기로 결심했다. 역사적 대의명분과 경제적 효율성은 당장 어쩌지 못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민주적 정당성이라도 가진 정부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4.19 혁명이었다.

 

 

 

 

-3.15 부정선거-

 

이미 12년을 집권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나이 80이 넘어서 또다시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선거일은 1960 3 15일이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선거 직전 지병으로 별세하고 말았다. 현직 대통령이 단독 후보가 되었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는 하나마나였다. 문제는 자유당 이기붕 후보와 민주당 장면 후보가 맞붙은 부통령 선거였다.

4년 전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 후보는 장면 후보에게 졌다. 연로한 대통령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 경우 부통령이 권한을 대행하는 만큼, 자유당은 무슨 짓을 해서든 이기려고 했다.

그래서 당 조직뿐만 아니라 국가 행정조직까지 총동원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오늘의 선거문화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투개표 조작을 감행한 것이다.

 

혁명의 첫 징후가 나타난 곳은 대구였다. 1960 2 28일 일요일에 수성천변에서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 연설회가 열렸다.

그런데 대구의 국공립고등학교에 등교령이 내렸다.

영화 관람이나 토끼 사냥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일요일 등교령의 목적은 학생들이 장면 후보 연설회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상고 등 시내 거의 모든 고등학교 학생들이 교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독재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함성을 내지르면서 대구 중심가를 달렸다. 이것이 대구 시민들이 자랑하는 2.28 학생의거.

 

3.15선거는 단순한 부정선거가 아니라 완전한 조작선거였다.

금품으로 유권자를 매수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정치깡패를 동원해 야당 선거운동을 방해했으며 3인조, 5인조로 함께 투표하면서 누구를 찍는지 서로 확인하게 했다.

야당 투표 참관인을 내쫓고 공개투표를 하게 했다. 이기붕에게 기표한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집어 넣었다.

이 모든 과정에 내무부 공무원과 경찰이 개입했다.

부정선거를 너무 열심히 한 탓에 이기붕 득표율이 100%에 육박했고 이기붕의 득표수가 유권자 수보다 많은 곳도 허다했다.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긴급 지시를 내려 이기붕의 득표율을 79%조정했다.

 

민주당은 3.15선거를 국민주권을 강도질한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원천무효를 선언했다.

곳곳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경상남도 마산 시위가 특히 격렬했다. 그런데 이날 시위에 나갔던 고등학생 김주열 군이 행방불명되었다. 27일이 지난 4 11, 그는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시신으로 떠올랐다.

로켓 모양의 최루탄이 눈에서 뒷머리를 관통한 채 그대로 있었다. 격분한 시민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경찰서 무기고에서 수류탄을 탈취해 경찰서장실 앞에 터뜨리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부정선거와 인권유린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정부는 이 시위를 공산당 조직이 조종한 폭동이라고 비난했다.

 

4.19혁명의 불길을 피워 올린 것은 고등학생들이었다. 대학생들은 수많은 중고등학생이 체포되고 맞고 다치고 죽은 다음에야 집단으로 투쟁에 참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려대학교 학생시위였다.

4 18일 오후 고려대학교 학생 3000 여 명이 지금은 서울시의회로 쓰는 당시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평화로운 집회였다.

그런데 대한반공청년당 깡패들이 대오를 지어 학교로 돌아가는 학생들을 종로 4가 천일백화점 근처에서 습격했다. 그들은 각종 흉기를 마구 휘둘러 유혈이 낭자한 참극을 벌였다.

이날의 투쟁을 기억하기 위해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지금도 해마다 4 18일에 수유리 일대를 뛰는 마라톤 행사를 한다.

 

4 19일 아침 이승만 대통령 관저 경무대와 서대문 이기붕의 집 앞에 중학생과 초등학생을 포함해 수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 시위대는 대통령 면담과 김주열 사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경무대 정문을 밀고 들어가려 했다.

서대문 이기붕 집의 상황도 비슷했다. 경찰이 총을 쐈다.

두 곳에서 21명이 죽고 172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렇게 되자 시위는 단순한 부정선거 규탄을 넘어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혁명으로 치달았다.

오후 3시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시민들은 경찰 총기를 빼앗아 곳곳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날이 저물자 서울 시내에 계엄군이 진입했다.

그런데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이 군의 선제발포를 공개적으로 금지했다. 이승만 정권을 지켜줄 의사가 없다는 뜻을 밝힌 셈이었다. 시민들은 두 팔을 벌려 계엄군을 환영했고 탱크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었다.

 

시위는 연일 계속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는 시간문제로 보였다. 4 25일에는 대학교수들이 거리로 나왔다. 매카나기 주한미국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를 권고했다. 법무부장관 권승렬, 외무부장관 허정도 하야를 요청했다.

4 26일 오후, 마침내 대통령 담화가 나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하면서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덧붙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였던 육군 소위 이강석은 4 28일 새벽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남동생 이강욱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자살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주한 미국대사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하와이로 간 이승만은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65 7월 세상을 떠났다.

 

1960 4 29일 국회는 만장일치로 내각책임제 개헌을 결의했다.

4.19 혁명 와중에 직을 사임한 장면 부통령 대신 수석 국무위원이었던 허정 외무부장관이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았다.

국회는 내각제 개헌안을 처리하고 총선을 실시해 새로운 양원제 국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대통령에는 윤보선, 총리에는 장면을 선출해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다.

 

4.19는 미완의 혁명이었다. 부정선거 규탄으로 시작해 민중의 힘으로 독재자를 축출하고 새 정부를 세웠다는 점에서는 분명 성공한 정치혁명이었지만 그 혁명을 완성할 능력과 의지를 가진 주체가 없었기에 혁명의 정치적 결과는 기존 정치세력 민주당의 집권으로 귀착되었다.

자유당이 사라지자 정치의 중심은 민주당 구파와 신파의 당내 노선투쟁과 권력다툼으로 옮아갔다. 장면 정부는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군사정변에 무너졌으며 혁명은 완성되지 못한 채 역사에 남았다.

그러나 4.19가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중이 궐기해 권력자를 축출하고 정권을 바꾼 위대한 사건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4.19는 신생국가 대한민국이 정통성 있는 국민국가를 향해 내디딘 첫걸음이었다. 4.19를 겪으면서 우리 국민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체득했다. 다음 인용문은 이 혁명을 촉발한 청년학생들의 정신적 각성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회 4.19 선언문-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세요.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씁니다. 저도 생명을 바치더라도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니,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기뻐해 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했습니다.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 양이 남긴 편지-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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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한국 현대사 훑어보기]

 

[나의 한국 현대사] 요약-유시민 저, 2014년 발간-

 

 

 

 

 

알아둬야 할 내용이 많아서 대부분 그대로 발췌했고, 복지,경제,문화의 변천사 등은 생략된 부분이 많습니다.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내용, 국가와 정부가 정의와 진실을 져버렸던 사건들 중심으로 기록을 남깁니다.

특히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 시기를 좀 더 중점적으로 발췌했고 그 이후의 사건들은 상대적으로 짤막하게 남겼습니다.

근현대사 전체를 균형감 있게 훑어보고 싶다면 이 책 전체를 1독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간첩조작, 안보관련 내용은 나중에 여건이 되면 다른 책 몇 권의 내용과 함께 묶어서 글로 남기고 싶어서, 이번엔 제외시켰습니다)

 

 

 

이 쪽 분야 책은 통 읽어본 게 없어서 비교가 어렵긴 한데, 유시민 씨 글이 개인적으로 맛깔나게 잘 읽히고, 특정 인물의 부정, 부패를 조목조목 서술하다가도 그 인물이 행했던 좋은 점들에 대한 부분도 나름 제시를 해 주면서 최대한 진실에 가까운 역사를 서술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엿보였습니다.

(혹자들은 유시민 씨도 분명 명확히 지향하는 방향성과 색깔이 있다고 말할 것이고, 그건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래서 이 책으로 한번 정리를 해 봤습니다.

 

(글 좀 맛깔나게 잘 쓰고, 역사 서술이 훌륭한 명저를 아시는 분들은 제게 좀 알려 주세요)

 

 

일단 이런 류의 책을 볼 때 꼭 명심해야 할 중요 전제를 기억합시다.

 

 

 

흐름 속에 있는 것은 사건만이 아니다. 역사가 자신도 그 속에 있다. 어떤 역사책을 집어들 때, 책 표지에 있는 저자의 이름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출간 일자나 집필 일자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것이 때로 훨씬 많은 것을 누설한다.

 

-에드워드 H. [역사란 무엇인가] –

 

 

 

사고하는 역사가는 엄밀하게 말하면 과거의 문제를 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긴급하게 해결을 요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의 역사성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책임감 있게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역사를 회피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야만 하는 긴장관계를 견뎌 내야만 한다.

 

-한스 위르겐 괴르츠,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역사는 주관적인 기록이다.

 

누가 쓴 어떤 역사도 과거를 [원래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현재]는 가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현재의 모든 사실은 발생과 동시에 과거가 된다. 과거는 거대한 임시수용소와 같다. 흐르는 시간에 실려와 퇴적된 모든 사실이 그곳에서 망각과 소멸의 운명을 기다린다. 어떤 역사가가 내민 구원의 손길을 잡은 소수의 사실만이 요행히 그 운명의 집행을 잠시 유예받는 [역사적 사실]이 된다. 사실 자체에는 선택할 권리가 없다. 그것은 역사가의 몫이다. 그래서 같은 시대에 대해 100명의 역사가는 100가지의 서로 다른 역사를 쓸 수 있다. 하나의 시대에 대해 같은 사람이 서로 다른 역사를 쓸 수도 있다.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객관적인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착각일 뿐이다. 사실은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 역사가가 허락할 때만 말을 한다. 역사가는 제멋대로 사실을 만들거나 바꿀 수 없지만 사실의 노예인 것도 아니다. 사실과 역사가는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 자기의 사실을 가지지 않은 역사가는 뿌리 없는 풀과 같고 자기의 역사가 없는 사실은 죽은 것이다.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들의 지속적 상호작용이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은 전문 역사연구자가 쓴 민족사에서부터 평범한 시민이 쓴 소박한 개인사까지 다 마찬가지다. 역사는 어떤 사실을 선택해서 어떤 관계를 맺어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18대 대통령 선거 분석]

 

2012 12월 박근혜 후보는 제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됨

 

-열여섯 곳의 광역시도 중에서 서울, 광주, 전남, 전북 네 곳에서만 졌다.

 

-경기도와 대전, 제주도는 적은 격차로 이김

 

-대구, 경북, 부산, 경남, 울산, 강원, 충북, 인천에서는 모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둠.

 

 

 

일종의 세대전쟁이었다.

 

-박정희 시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청년들은 압도적으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함.

 

-유신시대에 유년기를 보낸 40대는 문재인 후보를 조금 더 지지함

 

-박정희 시대에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던 50대와 이승만 정부도 겪었던 60대 이상 고령 유권자들은 압도적으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함.

 

 

 

2012년 대선의 실체는 역사전쟁이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극단적으로 갈라진 세대별 투표성향은 한국현대사를 대하는 감정과 태도의 차이와 관계가 있다. 젊은 유권자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추앙하지도 않지만 격렬하게 미워하지도 않는다. 경제를 발전시킨 공로가 있는 옛날의 독재자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들이 문재인 후보를 더 많이 지지한 것은 문화적으로 조금 더 친밀하게 다가오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 서 고령유권자들이 과거의 독재를 지지했다고 해석할 수도 없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발전 공로를 인정하자고 하는 사람들도 철권통치와 인권유린까지 옹호하지는 않는 게 보통이다.

 

나는 고령 유권자들이 투표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과 시대를 인정 받으려 했다고 추측한다. 그들은 일제강점과 해방공간의 혼란, 참혹한 전쟁과 절대빈곤의 고통을 견뎌내고 기나긴 군사독재의 시대를 통과해 오늘에 이르는 동안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룸으로써 대한민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하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후 빈손으로 노후를 맞았다.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 그 삶과 시대를 인정받으려는 소망을 표현하는 적절한 방법은 아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2012 12월에는 그것 말고는 적절한 표현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가설로 2012년 대선 결과를 어느 정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서론]

 

우리의 역사전쟁에는 분명한 주체가 있다. 하나는 5.16과 산업화 시대를 대표하는 세력이다. 그들은 한국 사회 모든 영역의 상층부를 장악한 채 단단하게 결속해 있다.

거대 재벌, 대기업 경영자와 임원들, 저마다 종편방송을 거느린 거대 신문 사주와 고위간부들, 법원과 검찰과 군대와 경찰 등 합법적 국가 폭력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권력 기관의 고위인사들, 그 신문과 방송에 출현하면서 부와 명성을 얻는 지식인들, 그리고 그 모두를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새누리당이다.

 

그들은 [근대화세력], [산업화세력], [보수세력], [애국세력]을 자처하지만 정치적 반대 진영에서는 [유신잔당], [5공잔재세력], [특권세력], [냉전세력] 또는 [수구꼴통]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권력을 모두 장악하고 행사해왔다. 그런데 1998 2월부터 2008 2월까지 정치권력 하나를 빼앗긴 적이 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악몽으로 남아 있다. 그들을 가리키는 여러 표현 가운데 [산업화세력]을 선택한 것은 그것이 호불호의 감정과 가장 멀다고 생각해서다.

 

 

 

다른 하나는 4.19, 5.18과 민주화 시대를 대표하는 세력이다. [민주화세력], [양심세력], [진보세력]을 자처하지만 반대 진영에서는 [빨갱이], [좌경용공], [종북좌파] 라고 부르는 이 세력은 한국 사회 모든 영역의 낮은 곳에 흩어져 있다.

인권과 사회정의, 한반도 평화와 환경보호를 실현하려고 애쓰는 수많은 시민단체들, 노동조합, 협동조합, 언론운동단체를 포함하는 크고 작은 공동체들이다.

 그들은 주로 온라인에서 소통하며 가끔 오프라인에서도 대규모로 결집해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대통령 탄핵 규탄 촛불집회], [국정원 선거개입 규탄 촛불집회] 같은 대형 이벤트를 만들어냈다. 그들 중에는 자기가 일하는 분야에서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다. 지속적으로 연대하거나 물질적 이익을 주고받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기네들끼리 심하게 다툰다. 정치에서는 2014년 현재 새정치 민주연합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거대 자유주의 정당과 정의당, 통합진보당, 노동당, 녹색당 등 작은 진보정당들이 이 세력을 대표한다. 민주화세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딱 10년 동안 정치권력 하나만을 장악한 적이 있다.

경제권력과 언론권력 등 사회의 다른 모든 권력은 언제나 산업화세력의 수중에 있었다. 민주화세력을 지지하는 시민들은 그 10년에 대해 깊은 불만과 짙은 그리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한국 현대사는 이 두 세력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다. 때로 피가 강물처럼 흘렀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가까운 미래에 종결될 가능성도 없다. 대중이 둘 모두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서로 적대적인 두 세력과 그들이 대표하는 두 시대를 모두 인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는 모두 우리의 과거다.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시대와 김대중, 노무현의 시대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 둘 중 하나만을 긍정한다면 역사와 현실의 절반을 부정해야 한다. 이것이 온전한 역사인식과 현실인식일 수는 없다.

 

 

 

색깔과 모양이 크게 다른 두 시대는 국민들의 내면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 이 현상은 2012년 대선뿐만 아니라 과거 대통령들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에서도 똑같이 드러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을 산업화세력으로 분류하자.

김영삼 대통령은 원래 민주화세력에 속했지만 산업화세력의 품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한 만큼 그쪽에 넣어야 한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민주화세력으로 분류하자.

2014년 현재 국민들의 전직 대통령 선호도는 둘로 팽팽하게 나뉘어 있다.

40대 이하에서는 노무현과 김대중의 합이 압도적으로 높고 50대 이상에서는 박정희와 박근혜의 합이 훨씬 높다.

지역별, 연령별 호감도 분포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박근혜, 문재인 후보 지지도 분포와 거의 비슷하다.

 

 

 

 

 

산업화세력을 보수, 민주화 세력을 진보라고 할 경우 대한민국 국민은 보수와 진보 두 진영으로 확연하게 나뉘어 있다.

 

이것은 정치적 분립을 넘어서는 문화적, 철학적 대립을 내포한다.

 

삶에 임하는 자세,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대한 견해, 그리고 한국현대사에 대한 인식 등 모든 면에서 두 진영은 서로 다르다.

 

 

 

물론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보수와 진보는 한 사회에 동시에 존재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각과 지향의 차이가 크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사회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변화 속도가 너무나 빨랐던 탓에 생긴 현상이다.

서유럽에서는 300여년에 걸쳐 진행된 변화가 우리나라에서는 겨우 50년 동안에 일어났다.

그래서 절충하기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큰 차이가 세대 대립양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2012년 대통령 선거는 단순한 정당 사이의 권력 다툼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관과 인생관의 투쟁이었고, 서로 다른 문화의 갈등이었으며, 서로 다른 역사인식의 충돌이었다.

 

 

 

 

[1959년 전후]

 

대한민국은 학대와 굶주림, 질병으로 숨이 넘어가는 어린아이와 같았으며 공식적으로는 국제연합(UN), 실제적으로는 미국이라는 이웃이 그 아이를 구해주었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출생과 성장을 도운 양아버지와 같았다. 우리는 미군정의 감독과 보호를 받으면서 정부를 세웠으며 미군은 북한의 침공을 받아 사경을 헤매는 대한민국을 구해주었다. 우리는 미국의 후견과 지원을 받으면서 산업화를 이루었다.

미국을 위해 아무 원한도 없는 베트남에 대규모 전투부대를 보냈으며 부시 대통령의 명분 없는 이라크전쟁 파병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미군은 60년 넘게 수도 서울 한복판에 사령부를 두고 있다. 좋은 양아버지였든 아니든, 미국이 양아버지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국에 대하여..]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의 내전인 동시에 동서냉전의 개막을 알린 국제전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50 6 25일 대한민국을 침략했다.

북한은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 주석의 동의를 받고 소련 스탈린 수상의 지원을 받으며 전쟁을 시작했다.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김일성은 한 달 안에 [통일전쟁]을 끝낼 심산이었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이 인민군의 총공세를 죽기 살기로 막아내는 동안 유엔군이 상륙했다. 인민군이 압록강까지 밀려났을 때 중국인민지원군이 들어왔다. 결국 1953 7, 유엔군과 조선인민군,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들이 전쟁의 승패를 가르지 못한 채 군사정전협정에 조인했다. [6.25에 대하여..]

 

 

 

 

 

1959년 대한민국 인구는 2400만명이었다. 해마다 100만 명씩 아기가 태어나 인구 증가율이 3%를 넘었다. 경제활동 인구는 760만명이었다.

미성년자가 많고 여성들이 가정에 머물렀기 때문에 경제 활동 참가율이 30% 밖에 되지 않았다. …. 당시 국민들은 평등하게 가난했다. 1959년 국내총생산(GDP) 19억 달러, 1인당 GDP 81달러 수준으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우간다, 토고와 함께 국가 순위 밑바닥에 있었다. 필리핀과 태국, 터키는 우리의 두 배가 훨씬 넘었다.

유럽 선진국들은 1000달러, 미국은 2000 달러를 웃돌았다. 대한민국은 국내총생산의 10%나 되는 2억 달러의 해외원조를 받으면서 전쟁고아를 돌볼 능력이 없어 대거 유럽과 미국에 입양시켰다. GDP가 물질적 생활수준을 정확하게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비공식 거래와 자급자족 경제활동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세계 최빈국 대열에 있었다는 것은 다툴 여지가 없다.

[1959년 가난했던 전후 대한민국…]

 

 

 

열세 살이 넘어서도 한글을 깨치지 못한 사람이 450만 명이었다. 부끄러워서 감춘 사람도 있었으며 국한문을 혼용한 신문과 책을 읽지 못하는 [독해문맹]은 더 많았다. 한이 맺힌 부모들은 굶는 한이 있어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도 교사들은 개천가 자갈밭에 천막을 치고 피난민 자녀들을 가르쳤다.

 

…..

 

전문대학을 포함한 고등교육 진학률이 15% 도 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대학 졸업장만으로도 보수와 근로조건이 상대적으로 좋은 관리직, 전문직, 사무직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중소기업과 생산직, [3D 일자리]는 대학을 가지 못한 85%의 몫이었다.

 

[1959년 교육받지 못했던 대한민국..]

 

 

 

토지와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실시하는 사회주의는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을 처음부터 내포하고 있었다.

게다가 실제 사회주의 혁명은 개인주의와 민주주의 문화 전통이 거의 없었던 나라에서 먼저 일어났다. 소련 사회주의는 스탈린 개인숭배와 결합했고 중국 사회주의는 마오쩌둥 개인숭배로 흘렀으며 북한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개인숭배로 나아갔다.

김일성 주석은 항일투쟁 경력, 공산당 당원 자격, 소련 점령군의 후견, 대중적 명성, 연대조직의 지지, 육체적 활력 등 여러 면에서 우세했기 때문에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 전쟁 이후 남로당 출신 박헌영을 비롯한 경쟁자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교조주의를 청산한다면서 또 다른 교조인 주체사상을 내세웠다. 주체사상은 마르크스주의와는 관계가 없는 극단적 관념론이다. 3대째 생물학적 유전자를 따라 권력을 대물림하는 나라가 사회주의를 표방한다는 사실을 무덤 속의 마르크스가 안다면 크게 화를 낼 것이다. 

[사회주의와 전체주의, 그리고 북한]

 

 

 

 

 

북한은 [미제 식민지 남조선의 해방]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전쟁까지 일으켰지만 대한민국은 오로지 자기를 지키는 데 급급했다. 이승만 정부는 [북진통일], [멸공통일]을 외쳤지만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않았으며 헌법이 명시한 민주주의를 실현하지도 않았다.

국민을 빈곤에서 구해내는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다. 국부를 자처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무능하고 이기적인 [폭력가장]이었을 뿐이다. 국민의 삶은 불안하고 비참했다.

 

1959 7 31, 이승만 대통령이 정적 조봉암을 법살했다.

청년 시절 열혈 공산주의자로서 투옥과 고문을 당하면서 반일투쟁과 노동운동을 벌였던 죽산 조봉암은 해방 후 조선공산당과 결별했다.

정치에 투신해 국회의 헌법기초의원으로서 제헌헌법을 만드는 데 기여했으며 대한민국 정부의 첫 농림부장관이 되었다. 처음으로 직선제를 실시한 1952년 제 2대 대통령 선거에서 80만 표를 얻어 2위를 했고, 1956년 제 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유엔 보장하 민주방식에 의한 평화통일 성취] 1호 공약으로 내걸고 선거 직전 별세한 민주당 신익희 후보를 대신해 이승만 후보와 맞대결을 벌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 투개표에도 불구하고 유효표의 25%가 넘는 216만 표를 얻었다.

 

조봉암 선생은 1954 3월에 발표한 [우리의 당면과업]이라는 글에서 군사적 무력통일과 더불어 선거방식에 의한 정치적 통일도 검토해야 하며 어떤 경우든 공산주의를 이기려면 민주진영이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황하기 짝이 없는 [북진통일론]을 비판하고 [평화통일론]을 에둘러 주장한 죄로 교수형을 당한 그는 사형집행 임석 검사에게 말했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1959년의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지 않고는 권력의 불의에 대항하거나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나라였다.

제헌헌법은 민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대한민국에는 민주주의가 없었다. 신체의 자유, 사상과 표현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보장되지 않았다.

대통령과 정부를 찬양할 자유만 있었을 뿐 비판할 자유는 없었다. 정부의 정책을 추종할 권리는 있었지만 반대하거나 다른 대안을 제시할 권리는 없었다.

 

당시 정부는 국민을 보호할 최소한의 능력도 없었다. 1959 9 11일 강력한 가을태풍이 한반도를 덮쳤다.

최대 풍속 초속 85m의 대형 태풍 사라였다. 영남지역을 집중 타격한 사라는 사망, 실종자 849, 부상자 2533, 이재민 40만명, 선박 파손 9329, 유실 경작지 2000 제곱킬로미터, 재산 피해액 1700억 원이라는 대재앙을 안겨주었다.

정부는 태풍의 진로와 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보급되기 전이어서 정보가 있다고 해도 신속하게 전파할 수단이 없었다. [이승만이 집권했던 그 시절…]

 

  

 

1959년에는 평등하게 가난한 독재국가였던 대한민국이 2014년 현재는 불평등하게 풍요로운 민주국가가 되어 있다.

산업화시대에 생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외환위기 이후 밀어닥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더 심각해져 대한민국은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수렁에 빠졌다. 노동자와 자영업자 내부의 소득격차가 크게 벌어졌으며 중산층이 얇아졌다.

서민들은 한번 빈곤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정리해고를 허용하고 사내하청과 파견 등 비정규직 제도를 합법화한 탓에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으며 괜찮은 직장을 가진 사람도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쟁이 심화되었고 부모의 학력과 소득수준이 자녀에게 상속되는 경향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수출기업과 내수기업,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경제력 격차가 확대되는 가운데 대자본의 중소협력업체 수탈과 계열사 간 부당거래, 대형 유통자본의 골목상권 장악 현상이 벌어지는 중이다.

 

[1959년도의 경제와 2014년도의 경제]

 

 

 

2014년이 되어서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휴전선의 존재와 분단 상황, 그리고 그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과 태도다.

1953년의 정전협정은 60년이 지나도록 그대로 있다. 남북의 이념적, 군사적 대결상황을 종료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남북 당국자들은 1972 [7.4 남북공동성명], 1991 [남북기본합의서], 2000 [6.15 공동선언], 2007 [10.4 공동선언] 에서 평화공존과 교류협력에 합의했다.

한때 우리 국민은 금강산과 개성을 볼 수 있었다. 여러 우여곡적이 있었지만 개성공단은 지금도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이 끝나지 않은 분쟁지역으로 남아있다. 이명박 정부 때 금강산과 개성관광이 중단되었다.

천안함 사건이 있었고 북한이 해안포로 연평도를 포격했다. 전임 대통령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합의한 문서는 사실상 모두 효력을 잃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개성공단마저 잠시 문을 닫기도 했다.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 회담은 2008년 이후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북한 당국은 종종 험한 말로 대한민국을 비난하고 위협한다. 남한의 반북단체들은 북한의 체제와 권력자를 비난하는 전단을 날려 보낸다. 북한이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논리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한민국은 이제 [난민촌]이 아닌데도, 많은 국민이 여전히 [난민촌 정서]를 지니고 있다. 북한이 호전적인 병영국가로 남아 있는 한 우리의 [난민촌 정서] 역시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을 몸소 겪은 고령층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정서는 [문화유전자]에 담겨 전후세대에게 상속되었다. 북한을 대할 때 우리는 대체로 이성을 따르기보다는 감정에 휘둘린다.

6.25 전쟁에 대한 원한이 있다.

대통령을 죽이려고 했던 1968 1.21 사태와 1983년 아응산 테러사건을 비롯해 정전협정 발표 이후 60여 년 동안 북한이 저지른 적대적 군사행동의 상처와 기억이 있다. 북한 동포들이 굶고 병들어 죽어간다는 뉴스를 볼 때 느끼는 안타까움이 있다. 굳건히 유지되는 독재체제와 3대 권력세습에 대한 혐오감도 있다. 어찌 이런 감정이 생기지 않겠는가. 하지만 대한민국이라고 해서 결백한 것은 아니다. 우리도 북한에 대해 비슷한 일을 했다. 국민들이 그 사실을 잘 모를 뿐이다. 

 [1959년도의 분단상황과 2014년도의 분단상황]

 

 

1959년 국민의 가장 강력한 욕망은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 북한의 위협과 사회 내부의 혼란에서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문제였다.

사람들은 이 욕망을 충족할 수 있게 해주기만 한다면 어떤 사람이나 집단에게도 복종할 뜻이 있었다. 4.19에서 5.16까지 1년을 제외하면, 국민들은 정부 수립 이후 1987년까지 40년 동안 권력에 굴종하며 살았다.

이승만 정부는 [멸공통일],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는 그와 더불어 [경제발전]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힘으로 대중을 억눌렀다. 격렬하게 저항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을 기꺼이 받아들이거나 어쩔 수 없이 굴복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에 근접해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자원을 어느 정도 확보한 다음에야 대중은 분명한 태도로 자유와 민주주의, 사회정의와 인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7 6월 민주항쟁은 그렇게 해서 일어났다.

 

[Maslow의 욕구위계이론에 따른 한국 근현대사 분석]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그렇지 않다. 흙먼지 날리는 거리에서 김밥을 팔아 모은 재산을 대학에 기부하는 할머니는 생리적 욕구나 안전에 대한 욕구를 다 충족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면서 자기 몸에 불을 붙였던 청년 노동자 전태일도 그렇다.

목숨을 걸고 농장을 탈출해 도시로 달아났던 19세기 중반 미국의 흑인 노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사로잡았던 욕망은 사회적 존경, 자기 존중, 존엄, 정의, 자유 같은 것이었다. 인간의 여러 욕망 사이에 엄격한 위계는 없다.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우선순위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느슨하게 해석하면 욕망의 위계 가설은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무척 유익하다.

 

[Maslow의 욕구위계이론에 variability 가 있음을 나타내주는 예시]

 

 

 

 

 

 

 

 

대한민국의 변화를 추동한 힘은 대중의 욕망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리의 현대사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20세기 지구촌에는 많은 신생국이 있었다. 그 나라 국민들도 똑 같은 욕망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왜 모든 신생국에서 대한민국과 같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것은 환경과 능력이 달랐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거침없이 질주할 수 있는 사회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국민들은 개별적, 집단적으로 욕망을 실현하는 방법을 신속하게 터득했다.

 

우리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폐허에서 출발했다. 40여 년간 제국주의 수탈에 시달린 끝에 민족과 국토가 분단되었으며  정부 수립 직후 전쟁이 터졌다.

전쟁의 포연이 휩쓸고 지나간 대한민국에는 도덕적, 정치적 권위와 경제적 힘을 가진 지배층이 존재하지 않았다.

 

중세 지배층이었던 조선의 왕실과 사대부, 양반계급은 망국과 함께 무너졌으며 3.1 독립투쟁의 힘을 받아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세운 독립투사들은 조선왕조 복원이 아니라 새로운 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조선의 지배층은 일제의 억압에 굴복하거나 협력함으로써 도덕적 권위를 상실해버렸다. 혁명이 아니라 망국이 봉건체제를 해체한 것이다. 수많은 민족지사가 중국과 러시아로 건너가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안타깝게도 40여 년의 간난신고를 이겨내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재산을 모은 기업인들이 있었지만 해방공간의 사회정치적 혼란과 한국전쟁을 견뎌내지 못했다. 일제하에서도 봉건적 특권을 유지했던 지주계급은 토지개혁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권위와 힘을 가진 지배층이 존재하지 않는 그라운드 제로사회였다.

 

제헌국회는 계급제도를 부정하는 민주공화제 헌법을 채택했지만 우리 국민은 그때까지 민주공화국이 무엇인지 듣지도 배우지도 겪지도 못했다.

큰 틀에서 볼 때 제헌헌법은 유럽과 미국의 헌법을 복사한 것이었다. 해방공간의 권력이 미군정이었기 때문에 민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민주공화국은 사유재산제도와 법치주의의 토대 위에서 개인의 인권과 자유, 창의성과 경쟁을 북돋우는 체제이며, 정부와 의회 지도자를 선출하고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을 분산해 서로 견제하게 함으로써 국가가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분권적 정치 시스템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삼는다.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 한 욕망을 표출하고 추구할 자유를 무제한 인정한다.

물론 그런 헌법을 채택했다고 해서 실제로 그런 나라가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민 누구나 국가에 대해 자유와 기본권 보장을 요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제도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배적 사고방식의 산물이지만, 외부에서 어떤 제도가 이식되는 경우에는 거꾸로 제도가 그에 맞는 사고방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광복 이후 세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민주주의 원리를 배웠다. 현실성이 있든 없든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다.

4.19 혁명을 일으킨 최초의 주역이 고등학생들이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제헌헌법은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가진 나라들이 지구촌의 주도권을 움켜쥔 20세기 문명사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었다.

 

대한민국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신천지였다.

하지만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는 권력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냉전시대가 올 것임을 일찌감치 예견한 빈손의 망명객이승만이 탁월한 수단을 발휘해 대통령이 되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줄을 대어 일본인이 두고 떠난 적산을 불하받은 사람들이 신흥자본가로 등장한다.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하며 살았던 군인, 경찰, 판검사, 교사, 공무원들이 그대로 남아 대한민국의 권력기관과 행정조직을 장악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함으로써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우려 했던 국회 반민특위는 친일파의 역습에 해산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있어야 할 자리를 독재와 반칙, 부정부패가 점령해버렸고, 헌법은 그저 이념으로만 존재할 뿐 현실을 지배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승만 시대 전후]

 

 

자유와 존엄에 대한 열망은 정부 수립 13년째였던 1960 4.19혁명으로 터져 나왔으나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사정부는 물질에 대한 욕망 충족을 부추김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는 개발독재체제를 구축했다.

박정희 시대 대한민국의 지도이념은 반공잘살아보세였고 국가 목표는 수출 100억 달러‘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달성이었다.

전국이 공사장 먼지와 굴뚝 연기로 뒤덮였고 걸신들린 부동산 투기 열풍이 온 나라를 달구었다. 거대한 소비재산업과 중화학공업이 형성되었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그라운드 제로대한민국을 질주했다.

그 욕망의 탁류는 누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대중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던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둑을 터뜨려 물길을 냈고 그 욕망의 탁류 위에서 위험천만한 역사 래프팅을 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4.19의 외침에는 자유데 대한 갈망과 아울러 삶의 기본적 욕구조차 해결할 수 없게 만든 이승만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실려 있었다.

 군사정부는 그 원망과 분노에 화답함으로써 무려 25년 동안 독재를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유, 인권, 정의, 존엄,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80년 봄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그 욕망은 1987 6월 화산처럼 터져 나왔고 결국 김대중, 노무현의 진보정권 10년을 만들었다.

 2007년과 2012년 대통령 선거는 우리 현대사가 서로 다른 욕망의 전차가 부딪쳐 만든 것임을 다시 확인해주었다.

[유시민이 바라보는 이승만,박정희 시대의 개략적인 대한민국]

 

 

 

 

 

어떤 사람들은 4.19보다는 5.16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은 4.19를 좋아하고 5.16을 미워한다. 둘 모두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4.19를 좋아하고 5.16은 싫어한다. 하지만 5.16이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했거나 오로지 나쁜 결과만 남긴 사건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둘 모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4.19를 좋아하는 것은 4.19를 만들어낸 욕망과 4.19가 만든 변화를 5.16을 일으킨 욕망과 5.16이 만든 변화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시민이 바라보는 4.19 5.16 의 의의]

 

 

 

모든 민주주의는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프랑스 정치가 토크빌(Alexis de Toqueville) (1805~1859)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

옳은 말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라면 당연히 정부의 수준은 그 나라의 민주주의의 수준, 달리 표현하면 주권자인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다.

이 말을 반대로 해석하면 독재국가에서는 정부의 수준과 국민의 수준이 다르다는 뜻이 된다.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고 언론을 통제해 여론을 조작하며, 정부를 찬양하는 교과서로 아이들을 세뇌하고, 공포를 조장해 대중을 길들이는 독재체제에서는 정부와 국민의 수준이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내게 큰 위안을 주었다. 우리 국민은 훨씬 더 훌륭한 정부를 가질 자격이 있다.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하기만 하면 우리도 미국이나 서유럽처럼 수준 높은 정부를 세울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믿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이것은 공부와 경험이 아직 부족한 청년의 낙관적 믿음이었을 뿐이다.

토크빌의 말은 민주주의 국가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만약 어떤 사회가 독재자의 발밑에 놓여 있다면 그 체제는 누구의 수준을 반영하는가? 독재자의 수준과 국민의 수준 모두를 반영한다.

국민의 수준에는 훌륭한 사람을 권력자로 선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를 쟁취할 능력도 포함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 심지어는 전두환 정부조차도 모두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 정부였다고 생각한다.

그 때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민주주의를 손에 넣을 만한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대통령을 국민이 선출하기 시작한 1987년 이후 여섯 명의 대통령과 그들이 이끈 정부가 우리 수준에 맞는 정부였다는 것은 다툴 여지조차 없다.

 

[국민의 수준이 그 나라의 정부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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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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