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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10월 유신에서 10.26까지]

 

-고려대 침투 간첩단 사건, 검은 10월단 사건, 전남대 함성지 사건, 남산 부활절연합에배 사건-

 

 

 

유신 이후 1979 10월의 부마항쟁까지 7년동안, 대중적인 반정부투쟁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야당, 재야인사, 지식인, 대학생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지키려고 저항했다가 구속되고 박해받은 사건들이 있었을 뿐이다. 유신정권의 철권통치는 너무나 강력했다.

 

중앙정보부는 예방적 목적에 입각한 조직사건을 연달아 터뜨렸다. 국민 대중의 불만이 팽배해도 뇌관을 제거하면 화약고가 폭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973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김낙중을 중심으로 한 고려대 침투 간첩단 사건’, 내란음모 혐의를 씌운 고려대 검은 10월단 사건’, 시인 김남주와 역사학자 박석무를 엮어 넣은 전남대 함성지 사건’, 박형규, 권호경, 김동완 등 기독교 목회자들을 구속한 남산 부활절연합예배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들이 한 일은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만들거나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치적 의사표시를 한 것 뿐이었다. 구속영장도 없이 수십 일씩 불법 구금한 가운데 고문을 해서 받아낸 진술서 말고는 북한과 연계되거나 내란을 모의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김대중 납치사건,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

 

1973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대중 씨를 도쿄 호텔에서 납치해 현해탄에 수장하려 한 것이다. 이 사건을 실행한 주일 외교관은 나중에 두둑한 현금을 들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던 그의 아들 성김(Sung Kim) 35년이 지난 2008년 주한 미국대사가 되어 서울에 돌아왔다.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을 죽이지 못하고 자택 근처에 내려주었다. 대학가에서 다시 유신철폐투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0 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시작된 교내시위가 경북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으로 번져 나갔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는 10 25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가 사망했다. 중앙정보부는 그가 총책 이재원에게 포섭되어 북한에 갔고, 공작금을 받고 정보를 제공하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자백하고 조사를 받던 중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2006 2월 법원은 국가의 배상판결을 내림으로써 중앙정보부의 고문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를 사실상 인정했다.

11월 들어 대학생들의 동맹휴학과 교내시위가 전국 대학으로 번졌으며 경기고, 대광고, 광주일고 등 고등학교까지 확산되었다.

 

 

 

-박정희의 긴급조치 1, 2, 4호 발동 그리고 민청학련 사건-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 결의대회를 열었고 재야인사들의 시국선언도 줄을 이었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시작하자 신민당이 합류했고 문인들도 집단으로 가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마침내 유신헌법이 부여한 비상대권을 휘둘렀다. 1974 1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한 것이다. 정부는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개헌을 청원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개헌청원 서명운동 주동자들을 대거 구속해 군법회의에 넘겼다.

대학생들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유신반대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전국적인 연대를 모색했다. 1974 3월 개학과 동시에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민청학련(민주청년학생연맹)이라는 이름을 기재한 유인물이 뿌려졌다. 4 3일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민청학련이라는 반국가단체를 뿌리 뽑기 위한 긴급조치 4를 발동했다.

민청학련에 가입하거나 연락, 선전, 수업거부, 집회, 농성, 관련 사실에 대한 보도를 모두 처벌대상으로 삼았다.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해 비상군법회의에 회부하며 형량을 최소 징역 5년에서 사형까지로 정했다.

비상군법회의는 이철, 유인태, 김병곤, 나병식, 김지하, 이현배, 여정남에게 사형을, 유근일 등 일곱 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사형을 구형받은 후 최후진술에서 영광입니다라고 말했던 그들은 1년도 지나기 전에 모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대통령도 그들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

 

- 2차 인혁당 사건와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그런데 1974 5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가 10년 전 지하로 잠복한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반국가단체를 재건하려 했다고 발표한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 또는 2차 인혁당 사건은 달랐다. 정부는 그들이 재일조총련 간첩과 함께 민청학련을 배우 조종했다고 주장했다. 군법회의는 민청학련 관련자까지 포함해 무려 열네 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의 실상을 알린 것은 김지하 시인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75 2월 석방된 그는 [동아일보]에 연재한 옥중수기 [고행1974]에서 하재완과 이수병 등 인혁당 사건 구속자들에게 들은 중앙정보부의 잔혹한 고문과 허위조작 실상을 폭로했다. 이 수기는 김지하 시인의 재구속,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 기자 대량해고 사태로 이어졌다.

정부의 압력을 받은 기업들이 광고를 취소해 [동아일보] 광고 지면이 백지로 나왔다. 그러자 시민들이 돈을 보내 [동아일보]를 격려하는 광고를 실었다. 내 기억에 최후까지 남은 기업광고는 안국약품의 감기약 투수코친이었다. “동아일보 만세, 투수코친도 만세!” 라고 쓴 독자 광고도 기억난다.

 

민청학련 사건은 반정부투쟁을 뿌리 뽑으려고 한 정부의 의도와 달리 민주화운동을 대중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1974 12 25일 민주화세력은 민주회복국민회의를 창립했다. 윤보선, 백낙준, 유진오, 김재준, 김수환, 정일형, 강신명, 김대중, 윤형중, 함석헌, 이병린, 천관우, 이희승, 이태영, 김영삼, 홍성우, 함세웅, 한승헌 등 저명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이 중심이었다. 김영삼 씨를 총재로 선출한 신민당은 적극적인 개헌 투쟁에 나섰다. 박정희 대통령이 곧바로 역공을 취했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의 신임을 묻기 위해 국민투표를 하겠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그는 국민투표에 자신이 있었다. 언론자유와 토론을 모두 봉쇄한 가운데 행정조직을 동원해 찬반 국민투표를 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야당이 거부의사를 밝혔지만 1975 2 12일 국민투표를 밀어붙였다. 투표율 79.8% 에 찬성률 73.1% 가 나왔다. 1972년 유신헌법 제정 당시의 투표율 91.9 % 에 찬성률 91.5% 와 비교하면 둘 다 현저히 낮았다.

 

1975 4 8일 대법원(재판장 민복기)은 서도원,김용원,이수병, 우홍선, 송산진,여정남,하재완,도예종 등 대학생이 아닌 인혁당 관련 피고인 여덟 명의 항소를 기각해 사형을 확정했고 다음 날 새벽 정부는 그들을 지체 없이 사형시켜버렸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국제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함세웅 신부 등 가톨릭 사제들이 장레미사를 지내려고 하자 경찰은 크레인을 동원해 영구차를 탈취해서 화장해버렸다.

문정현 신부는 시신을 지키려고 경찰에 맞섰다가 차에 깔렸다. 그가 다리를 저는 것은 그때 입은 부상 때문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최근 발매된 [악마기자 정의사제] 책을 보시면 잘 나와 있습니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관련자들은 민주화 이후 열린 재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재심 판결을 하면서 사법부의 잘못을 사과했고 국가가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박정희의 긴급조치 9호 발동-

 

1975년 봄 베트남에 사회주의 통일정부가 들어섰다. 5 13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해 유언비어 날조 유포, 헌법에 대한 부정, 반대, 왜곡, 비방, 헌번ㅂ개정 청원 선전, 선동, 긴급조치에 대한 비방을 모두 처벌대상으로 규정했다. 학생의 집회, 시위, 정치 관여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학생과 학교와 단체에 대해서는 주무장관이 제적, 해임, 해산, 폐쇄 조처를 취할 수 있게 했다. 게다가 이런 조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허가 없이 보도하는 것도 긴급조치 위반이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살지 않으면 누구든 범죄자가 될 수 있었다. 1979 10월까지 4년 반 동안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은 1400여 명이었고 그 중 1000여 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민주화 이후 헌법재판소는 1호부터 9호까지 모든 긴급조치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정부는 대학생들을 대거 제적하고 감옥과 병영으로 보냈으며 대학교수와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했다. 한신대의 안병무, 문동환, 연세대의 서남동, 이계준, 양인응, 김규삼, 고려대의 이문영, 김용준, 김윤환, 이세기 교수를 해직했다.

교수재임용 심사제도를 도입해 이화여대 김윤숙, 덕성여대 염무옹, 한양대 리영희, 연세대 성내운, 송리성 등 400명이 넘는 교수들을 탈락시켰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사주들은 언론자유수호투쟁을 벌인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함으로써 정부에 굴복했다.

 

검찰은 1976 3.1절 명동성당 기념미사에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이우정, 문동환, 윤반웅, 이문영, 안병무, 서남동, 은명기, 문익환, 이태영, 함세웅, 김승훈 신부, 김대중과 이희호, 정일형 의원을 연행했고 정부전복 선동혐의를 씌워 20명을 구속했다.

일제에 징병되었다 탈출한 후 6000리 길을 걸어 임시정부를 찾아갔던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 1975 8 17이리 경기도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2013년 묘소 이장 때 모습을 드러낸 그의 두개골에는 망치 크기의 동그란 구멍이 있었다. 실족사가 아니라 타살이었던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 이후 대학가에서는 작은 규모의 교내시위만 벌어졌다. 대학 교정에 사복형사뿐만 아니라 전투경찰이 상주했고, 시위 주동자는 선언문 첫 문장을 다 읽기도 전에 체포되었다.

1975 4 11, 서울농대의 시국성토대회에서 김상진 씨가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고 반독재민주화투쟁의 단호한 결의를 보이기 위해 칼로 복부를 찔렀다. 5 22일 관악캠퍼스에서 김상진 추도식을 한 학생들이 긴급조치 9호 선포 후 첫 시위를 벌였다 

80명이 체포되었고 29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이처럼 살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1976년 가을 축제 행사 끝에 시위를 벌인 서울대를 시작으로 1977년에는 한신대, 서울대, 감신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고려대, 연세대, 전북대, 국민대 등에서 반정부 교내시위가 일어났다.

1979년까지 이 대학들과 더불어 계명대, 영남대, 강원대, 경희대, 부산대, 동아대, 전남대, 한국외대, 마산대, 경남대 학생들이 교내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시위 소식은 신문과 방송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관련 학생들이 재판에서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1단짜리 단신보도가 나오면 국민들은 그제야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과 함평 고구마 사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등장)

 

중앙정보부는 1979 3월 노동자와 농민, 여성들을 대상으로 시민교육을 하던 크리스챤아카데미 간사 한명숙, 이우재, 황한식, 장상환, 김세균, 신인령 등과 대학교수 정창렬, 김병태, 유병묵, 아카데미 원장 강원룡 목사 그리고 거기서 교육을 받은 농민단체와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대거 구속한 뒤 그들이 사회주의 건설을 획책했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이다.

 

정부가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을 단속하느라 분주했던 1970년대 후반, 다른 곳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었다.

1976년 가을 전라남도에서는 고구마 농사가 풍년이었다. 그런데 농협이 약속과 달리 생고구마를 전량 수매하지 않아 농가의 고구마가 썩어나갔다. 가톨릭농민회가 고구마 주산지였던 함평군에서 고구마 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피해보상요구투쟁을 시작했다.

함평군 고구마 농가 피해 전액이 1억 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농협이 보상을 거부하면서 싸움이 전라남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1977 4월 농민들은 광주에서 거리행진을 벌인 데 이어 서울과 전국 대도시를 돌면서 불합리한 농정의 실상을 폭로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아마 한국전쟁 이후 첫 대규모 농민투쟁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가톨릭농민회를 비롯한 농민단체들이 역량을 키워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을 결성했다. 오늘날 우리가 전농이라고 부르는 단체다.

 

 

<함평 고구마 사건>

 

-YH 무역 사건-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운동이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1979 8월 경찰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YH 무역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 시켰다. 훗날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된 최순영 씨가 지부장이었던 YH 무역 노동조합원들은 돈을 외국으로 빼돌리고 노조를 탄압하기 위해 위장폐업을 한 악덕사업주를 처벌하고 회사를 살려달라는 요구를 들고 신민당에 들어왔고 신민당 지도부는 그들을 보호했다. 그런데 경찰은 제1 야당 당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노동자들을 체포했으며 신민당 당직자와 국회의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얼굴이 떡이 된 박권흠 신민당 대변인 사진이 기억이 생생하다. 이때 YH 무역 노동자 김경숙 씨가 4층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꾸라로 비난받던 이철승 의원을 누르고 신민당 총재가 된 김영상 의원은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고 강력한 반정부 투쟁을 선포했다.

 

 

 

 

-남민전 사건-

 

(김남주 시인 그리고 파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

 

정부는 치밀한 정치공작을 벌여 법원으로 하여금 신민당 총재단 직무정지 가처분 판결을 내리게 했다. 김영삼 총재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유신정권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것을 빌미 삼아 본회의장 주변에 무술경위를 배치한 가운데 공화당과 유정희 의원들끼리 모여 김영삼 의원을 국회에서 제명해 버렸다. 이것이 1979 10 4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시국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경찰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수사진행 상황을 전격 발표했다. 무려 77명을 구속한 대형 조직사건을 터뜨린 것이다.

 

공안당국은 동아건설 회장 최원석 자택의 강도사건을 수사하다가 이것이 단순한 강도사건이 아니라는 심증을 굳히고 저인망식 수사를 펼쳐 남민전 사건을 만들어 냈다. 이재문, 신향식 등이 유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지하조직을 만들고 청년학생위원회를 조직하려 한 것을 북한공산집단의 대남전략에 따라 국가변란을 기도한 사건으로 규정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적용한 것이다.

이재문 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고 신향식 씨는 사형당했다. 다른 관련자들은 최장 10년 징역을 살았다. 일부 인사가 북한과 연계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민주화투쟁 조직인 줄 알고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후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이 사건과 관련해 김남주 시인이 구속되었고, 무역회사 주재원으로 프랑스에 가 있었던 홍세화 씨는 망명허가를 받아 파리의 택시운전사가 되었다.

 

 

 

-부림사건- (영화 <변호인> 관련 단체 등장)

 

1979 10 16, 부산대 학생들이 교내시위를 벌인 다음 삼삼 오오 무리를 지어 거리로 나왔다. 종종 있었던 학생시위였는데 상황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퇴근길 직장인과 시민들이 대거 합세하면서 부산 시내가 거대한 시위장으로 변해 버렸다.

김영삼 총재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 민심이 끓어 오른 것이다. 공안당국은 부산대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의 핵심 고리가 6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양서협동조합이라고 판단했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만들어낸 소위 부림사건은 바로 이 양서협동조합 관계자들을 반국가단체로 엮은 사건이었다.

영화 <변호인>에서 세금전문 변호사 노무현이 인권변호사로 변신한 계기가 되었던 부동연 사건이 바로 이것이다.

 

시위가 낮 밤 없이 계속되자 정부는 10 18일 새벽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해 공수특전단 병력을 투입했다. 부산 시위는 수그러들었지만 경남대 학생들이 시작한 시위에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확산된 마산지역 시위는 더 크게 불붙었다.

창원의 보병 39사단을 투입했지만 10 19일 밤에도 시위가 계속되었다. 5공수여단이 마산에 들어갔다. 군과 경찰은 부산과 마산 일대에서 무려 1600여 명을 체포했다.

 

 

 

-부마항쟁-

 

부마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 우리에게는 아직 연속적, 동시 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할 역량이 없었다. 그런데 부마항쟁의 충격은 집권세력의 내분을 부추겨 유신체제를 무너뜨렸다.

1979 10 26일 밤, 서울 궁정동 안전가옥 만찬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쏜 것이다. 김재규 부장의 군법회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지만 내가 발포 명령을 하는데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에서 200만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냐고 맞장구쳤다.

김재규는 각하자유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10.26은 민주혁명이며 5.16이 정당하다면 10.26도 정당하다고 주장했던 그는 1980 5 24일 교수대에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생물학적 생명을 빼앗은 것은 총탄이었지만 정치적 생명을 앗아간 것은 그 자신이 이룬 성공이었다.

그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대중의 욕망을 무제한 분출시키고 그 탁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산업화의 성공으로 절대빈곤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대중은 다른 욕망에 끌리기 시작했다. 자유, 정의, 민주주의, 인간적 존엄성을 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욕망을 존중하지 않자 많은 국민이 마음으로 그를 버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 그와 같은 민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10.26 사건을 그렇게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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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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