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부끄러운 과거'에 해당하는 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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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해방전후 시기의 기독교

J: 이렇게 일제의 탄압에 적당히 타협하며 명맥을 유지하던 기독교는 한반도를 둘러싼 마지막 제국전쟁인 미일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한국 개신교도 중요한 변화를 맞게 되.

 

A: 미국이 주도권을 쥐면서 기독교는 더욱 날개를 달게 되었겠는걸?

J: 아무래도 그렇겠지. 일제 강점기 말에는 조선총독부에서 미국인 선교사 전원 추방, 개신교 신사참배 강요, 교단의 인위적 통합, 군소교단 해산, [성경], 찬송가]의 부분적 사용 금지 등 개신교 말살 정책을 펼치고 있었는데, 미국의 승리가 확실시 되면서 기독교는 그 어떤 종교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지.

 

미국의 선교사들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미군정은 효과적인 수행을 위해 한국의 문화, 역사, 언어 등에 익숙한 선교사들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해. 그러다 보니 선교사들이 종교 영역 뿐만 아니라 미군정을 도와 건국 과정에도 깊게 개입을 하게 되지. 이 또한 개신교의 권력화를 태동시켰다고 볼 수 있어.

 

요약하자면 해방 이후부터 1948 8 15일까지 3년여 동안 개신교는 1. 통역정치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2. 적산배분을 통해 경제적 기틀을 마련하고 3. 개신교 대통령인 이승만을 통해 제도적 특혜를 받으면서 짧은 시간 안에 급속도의 성장을 이루게 되.

 

A: 세 가지 이유를 조금 더 설명해 줄래?

J: 당시 개신교는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미국 유학파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에 미군정 참여에 개신교인이 대거 포함되었고, 선교사들도 중요 역할을 많이 맡았어.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 말 추방당했던 조지 윌리엄스(George Williams) 목사가 농업 고문으로, 호러스 언더우드는 군정 고문 자격으로 있었으며 당시 미군정 부처장 19명 중 11명이 개신교인이었고, 미군정 최고위직에 임명된 한국인 50명 중 35(70%)이 개신교 신자였어. 그 당시 개신교인 비율이 전체 인구의 1%도 안되었던 걸 감안하면 높은 수치인 걸 알 수 있지. 이와 같이 통역 가능한 인물들을 활용하다 보니 개신교인이 정치에 많이 참여하게 되었고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어.

 

그 다 음 적산은 일본이 소유했던 재산인데 이걸 개신교가 많이 받게 되었어. 월남 목사인 김재준, 한경직 목사는 미군정의 도움으로 일제의 천리교 재단을 접수해서 교회를 세워. 가장 큰 천리교회가 있던 저동에는 영락교회가, 두 번째 큰 천리교회가 있던 자리에는 경동교회가 설립되었어.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긴 한데, 그 당시 적산을 거의 착취하듯이 개신교가 빼앗아 간 것이 문제였어. ‘천리교라는 종교의 문제성은 둘째 치고서라도,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기독교의 어두운 부분을 분명 가지고 있지. 이건 나중에 시간이 되면 나누도록 하자.

그리고 세 번째는 개신교 대통령인 이승만이 친 기독교적 정책을 많이 내세웠다는 점이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점에는 미국과의 친밀한 관계가 큰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가 개신교에 상당히 많은 특혜를 줬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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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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