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유다의 배신은 예정인가? 자유의지인가?

 

43page 부터 시작

 

 아무래도 유다의 배신이 던지는 골치 아픈 신학적 질문은 예정과 자유의지에 관한 것입니다.

문제 상황을 설정하기 위해 극단적인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인간의 자유가 배제된 채 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행동인가?” 아니면 반대로 유다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에 따른 것이지 하나님의 예정과는 무관한 것인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 주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고 둘 다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도 간단치 않습니다 .

 

만약에 전자라면, 유다에게는 도덕적 책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도덕의 전제는 자유입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없다면 그의 행동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A를 선택할 수도 있고, B를 원할 수도 있는데, A를 결정할 수 있어야 도덕이 성립됩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장발장과 같은 처지에 있다고 해서 빵을 훔치지 않으며, 신부의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새롭게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에서 정당방위를 제한적이나마 인정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는 극한적 궁지에 내몰린 경우, 예컨대 상대방이 살인의 의도로 신체적 위협을 가할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상대의 신체와 생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정당방위로 보고 무죄로 간주합니다.

만약에 유다의 행동이 자신의 자유의지 없이 필연적인 하나님의 예정을 수행한 것이라면, 그는 무죄가 될 것입니다.

 

 만약 후자라면, 유다에게 도덕적 책임을 부과할 수 있지만, 신앙에 치명적 과오가 발생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하여 바울은 벅찬 감동으로 외칩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 ( 11:36, 새번역). 아브라함 카이퍼의 명제처럼,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땅과 영역은 한 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정을 어떻게 이해하든 간에, 하나님이 창조 세계 전체를 포괄적으로 섭리하고 계신다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유다의 행동이 전적으로 그 자신에게만 있다면, 하나님은 구속사의 정점인 십자가 사건에서 그저 한 손님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신이 어느 신학적 캠프에 속해 있든지 간에, 예정과 자유의지 중 어느 한쪽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하면서도 자유의지를 버리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얼마간 약화되더라도 예정을 강조하는 것이지 자유의지 자체를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정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각시킨다고 해서 하나님의 예정을 전혀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결국 어느 쪽에 서느냐, 그리고 양자를 어떻게 조정할 것이냐가 관건이지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행동은 하나님의 예정이면서도 자유의지가 개입된 것으로 보아야겠지요. 

 

예정과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을 야기하는 성서의 본문은, 대표적으로 구약에서는 선악과와 출애굽기의 바로, 신약에서는 유다일 것입니다.

세 텍스트 중에서 이 주제에 관한 가장 풍부한 본문은 출애굽기의 바로입니다. 하여, 저는 바로의 행동에 대한 출애굽기의 서술을 중심으로 예정과 자유의지 혹은 필연과 자유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이를 유다의 경우에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유다에 관한 본문과도 조화와 일치가 있어야겠지요.

 

다만, 솔직히 먼저 밝혀 두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저는 그리스도인이자 목사라는 것입니다. 신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모두를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자유에 따른 책임을 강조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출애굽이나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뜻과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행동에 대한 최종적 책임은 유다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지 맹신이나 미신은 아닙니다. 유일무이한 창조주 신앙을 갖고 있는 이로서 하나님의 에정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또 도덕이란 인간의 자유에 기반을 둔 것이니 유다의 행동은 그 자신의 선택이므로 책임은 그 자신에게 있다고 보는 것은 신앙을 별개로 치더라도 합리적인 사유입니다.

 

다른 하나는, 저는 예정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예정론에 대해 공부할 겸해서 스프라울(Sproul) [알기 쉬운 예정론]을 사서 펼쳐보았습니다.

이것이 예정인지는 몰라도 예정을 정의한 대목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예정이란 우리의 최종 목적지, 즉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에 의해 천국이나 지옥이 결정된 사실을 의미한다.”(각주) 물론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모순되지 않는다”(각주) 고 밝히고 있지만, 저는 예정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을 흔쾌히 수용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실을 허용하시기로 결정하셨다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그것을 미리 정하신 것이다.” (각주). 그렇다면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것을 두고 누가 그 결정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요?

해서, 저는 C.S 루이스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저는 전적 타락의 교리를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볼 때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스스로 타락했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깨닫지 못할 것이고, 경험적으로 볼 때에도 인간의 본성에는 선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각주). (‘전적 타락에 대해 고민해 보기)

 

 

물론 스프라울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를 역설 혹은 신비로 설명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마치 모든 것을 결정하시는 것으로 그분의 주권과 예정을 결정론에 가깝게 해석하는 것은 못내 아쉽습니다.

 

그럼, 바로의 강퍅함에 대한 출애굽기로 들어가 보도록 하지요.

먼저 성서는 그의 마음이 강퍅하게 된 것의 주체가 하나님과 바로 모두라고 언급합니다.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였다” (7:13,22 ; 8:15 ; 9:35)는 표현과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 (9:12 ; 10:20,27)는 표현, 이렇게 두 가지 표현 양식이 공존합니다.

바로는 모세의 요구와 신하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제 스스로의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해서 노예로 붙잡아 둡니다.

하나님 역시 그런 바로의 행동을 예측하시고 모세에게 일러 주실 뿐 아니라 버젓이 예상하시면서도 연달아 재앙을 일으키십니다.

주체로서 하나님은 바로 자신의 고집을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각주)

 

 

 

하나님과 바로, 양자 모두가 바로의 강퍅한 마음에 주체라는 설명을 주목해야 합니다.(각주).

신과 인간이 동일하게 행동의 주체임을 출애굽기는 묘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를 모순 없이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는 어느 하나도 없앨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설명의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 좀더 성경적이고 합리적입니다.

 

저는 종종 이런 비유를 들곤 합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장미에는 인간의 자유라는 가시가 돋쳐 있고, 인간의 자유라는 장미에는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가시가 있다고요.

그래서 예정을 강조하다 보면 자유가 가시가 됩니다.

그렇다고 그 가시를 죽 밀어 버리면 아무런 위험도 없지만, 장미 본래의 아름다움은 많이 사라질 것입니다. 장미꽃을 사랑하는 자는 그 날선 가시마저도 장미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사랑의 한 요소로 감내해야 합니다.

그럴 때, 가까이서 보면 둘 사이의 갈등이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한데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운 것입니다.

 

바로의 완고한 마음의 책임은 궁극적으로는 그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의 마음이 강퍅해서 내 백성을 내보내라는 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집을 꺾지 않고 거절할 것이라고 야헤 하나님은 여섯 번이나 모세에게 주지시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만약’(if)이라는 단서를 단 가정법 형식으로 세 번이나 말씀하십니다.(8:2 ; 9:2 ; 10:4) “네가 만일 그들 보내기를 거절하고 억지로 잡아두면”(9:2) 번역본에 따라 4 23절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네 번이 됩니다.

 

 

이라는 조건문은 바로의 행동이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라 그가 마음먹기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다시 말해 바로의 거절은 미래의 가능성이지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굳이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경고를 할 필요가 없을 테고, 그런데도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찾아간다면 그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기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재앙을 현실화한 것은 바로 자신입니다. 바로가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낸다면 제국을 침몰시킨 그 엄청난 열 가지 재앙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행동에 따라 하나님의 대응 또한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명백히 거부하고 거역했습니다.

 

사실 바로의 선택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고 당연하기까지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남자만 60만명이었습니다.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하면 2백만에서 3백만에 육박할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이집트를 떠날 때 함께 따라나온 그 밖의 다른 민족들도 많았습니다.(12:38).

이는 고대 이집트 제국의 노동력의 절대 다수를 차지합니다. 이런 그들이 한꺼번에 모두 빠져 나간다면 제국의 운명은 불 보듯 뻔한 것입니다. 멸망입니다.

그러니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이집트를 떠나는 것은 절대 허용할 수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미국, 아니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꺼번에 한순간에 모두 떠난다면 그 후 초래될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 보낼 수 없습니다.

 

거부한 바로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은 열 가지 재앙 뿐 아니라 완악한 대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9:18, 새번역).

그러니까 스스로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긍휼히 여김을 받지만, 마음을 악하게 먹고 끝까지 미련스럽게 고집을 피우면 그 강퍅한 마음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신다는 겁니다.

레온 모리스의 해석이 참 좋습니다. “이 구절은 물론, 성경 어디를 살펴봐도 하나님이 스스로 강퍅하게 되지 않은 자들을 먼저 강퍅하게 하셨다고 나와 있는 곳은 하나도 없다.” 하여, 마음을 강퍅하게 한다는 말은, 하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더욱 꾸역꾸역 엇나가는 길을 걷는 이들의 영적 실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간곡한 설교는 도리어 듣는 청중의 마음을 더욱 완강하게 만듭니다.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하였어도 그들이 행치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말로 그들에게 응하게 하였느니라 하라” (11:8).

인간의 마음은 예레미야의 말처럼 어떤 만물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거짓되고 썩고 부패하였습니다.(17:9).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애타는 구애와 경고는 죄악된 본성과 성품을 충동하여 더욱 못된 짓을 일삼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인간은 청개구리처럼 반응합니다. 하지 말라는 짓은 더 열심히 잘도 합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바로에게, 그리고 예레미야를 통해서 유대에게 말씀하신 것은 재앙을 내리기 위한 명분 쌓기가 아니라 구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호의를 거절하고 스스로 무덤을 팠습니다. 유다에게도 그리스도의 호의가 없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많았습니다.

유상섭의 [설교를 돕는 분석 요한복음](규장)에 따르면, 요한복음에만도 제자 중 하나는 자신을 믿지 않으며 마귀라고 주의를 주셨고(6:64, 70~71), 유다가 돈을 착복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재정 유용을 그칠 것을 기대하고 기다리셨으며(12:6),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유다를 염두에 두고서 다 깨끗하지는 않다고 하셨습니다.(13:10~11).

또 세족 후에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 것이라고, 즉 배반할 것이라고 예고하셨고(13:18), 더 나아가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 것이라고 공개적이며 직접적인 경고를 계속하셨습니다.

 

마지막은 예수님이 빵 한 조각을 찍어서 유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부분은 논란이 많은 본문입니다. 그 때 주님은 유다에게 희한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13:27, 새번역). 언뜻 보기에, 유다복음의 주장처럼 예수님이 유다가 배신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으므로 그 일을 하라는 것, 그래서 유다의 배신은 예수의 요청이라는 유다복음의 논리가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육체라는 굴레를 벗어던져 구원을 이루게 해 달라는 예수의 요청이라는 것입니다.

 

허나 유다복음의 해석과 달리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의 진의는 유다의 결단을 촉구한 것입니다. 식사를 할 때에 음식을 한 조각 건네는 것은 우정의 표시입니다.(각주) 유다의 배신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선의와 호의를 베푸는 것은 유다의 심중에 품고 있는 음모를 중지할 것을 따뜻하게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끝내 예수와 그분의 우정 어린 호의를 거절했고, 이를 요한복음은 그 순간 사탄이 그의 마음에 들어갔다고 표현함으로써 유다의 결정이 무엇이었는지 보여 줍니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가룟 유다 사건에 대해서 가장 잘 쓰여진 책 중 한 권입니다. 김기현 목사님의 깊은 영성과 지식이 잘 녹아져 있는 대표 저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 딜레마

 

저자: 김기현 목사님

 

24~31page

 

 

 

가룟 유다는 누구인가?

 

 가룟 유다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먼저 그의 이름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과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다는 영예롭고 대중적인 이름이었습니다.

그 뜻은 찬양입니다. ( 29: 35). 칼 바르트에 의하면, 독일어로는 감사(thnks)라고 합니다. 히브리식 이름을 표기하면 Judah이고, 헬라식으로는 Judas입니다.

성서에서는 야곱의 넷째 아들에게서 유다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했습니다. 그 후 통일왕국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포로기 이후 귀환한 이들이 대개 유다 지파나 남왕국 출신이 많았기에, 유다는 자연스레 민족 공동체 전체를 일컫는 이름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성서에는 유다라는 이름이 많습니다.

신약 성서에만도 유다라는 이름이 여섯 번 등장합니다.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인 유다( 6:16, 1:13), 예수님의 형제이자 유다서의 저자인 유다( 13:55), 백성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킨 갈릴리 유다(5:37), 다메섹에서 눈을 보지 못하게 된 사울이 잠시 기거했던 집의 주인 유다( 9:11), 바사바라 하는 유다( 15:22), 그리고 가룟 유다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시리아로부터 잠시나마 조국을 독립시키고 마카비 왕조를 열었던 이의 이름도 유다였습니다.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e).

 

 

 

 

오늘날의 유대교(Judaism)라는 이름도 유다와 관련이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이들을 유대인이라 지칭한 이후로 유대인(Judean)은 그들의 공식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불행하게도 유다는 유대인의 전형으로 각인된 것입니다.

지금은 마치 유대인이 아닌 듯 여겨지는 또 한 사람의 유대인과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다가 유대인의 대표명사가 된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추론입니다. 다만, 그의 이름 때문인 듯 합니다. 둘의 이름과 발음이 너무 흡사합니다. 혼동하기가 쉽지요. 유다와 유대. 제 친구 김일승과 김일성처럼 말입니다.

 

두 번째로, 유다 이름 앞에 붙는 가룟은 논란이 참 많습니다.

가룟, 공동번역에서는 가리옷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권터 슈바르츠라는 학자에 의하면 아홉 가지 해석이 있다고 합니다. 이를 클라센은 네 가지로 분류했는데, 이 중에서 그런 대로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동네 이름입니다.

그의 고향이 아마 가룟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라는 이름은 가룟 지역 출신의 유다인 겁니다. 이 추론이 맞다면 가룟은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그리욧(15:25, Kerioth)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네게브 지역의 텔 퀴리옷(Tel Qirrioth)일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 유력한 해석은 그가 시카리(Sicari)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그가 시카리라고 명명한 열심당(Zealots)의 명단에 유다라는 이름이 많이 언급됩니다. 그의 책에는 유대(Jude)라는 사람이 19, 유다가 13명인데, 그들 대부분이 열심당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베드로가 아닌 시몬이 바로 이 열심당 일원입니다.( 6:15). 이들은 이교도인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참 왕인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원조는 마카비이고, 그들의 후손들은 마사다에서 로마와 저항하다 일천 여명이 자살하기도 했습니다.

 

만일 유다가 이 열심당원이라면, 그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처럼 이스라엘 나라의 구속, 곧 정치적 해방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로마의 식민지 시절인데다, 구약에서 예언한 바 다윗 왕조의 회복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종교적 열정이 결합된 것이 열심당이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가슴에 품은 젊은이라면 이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겠지요.

그래서 그 기대가 배반당하자 예수를 부인했다는 가설이 많은 이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 어디에도 그가 열심당과 연루되어 있다는 징후를 읽을 수 없는 마당에 그의 이름 하나만으로 그를 열심당원이라고 확언하기에는 증거가 미비하여서 여간 미심쩍은 것이 아닙니다.

 

오경준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성경에는 없다] (홍성사)에서, ‘이스카리옷시카리로 보기에는 원어적으로 어렵고, 시카리들은 광장에서 민족 반역자나 로마 군인들을 암살할 정도로 대담한 반면, 유다는 자살한 것이나 세리 마태를 제치고 돈을 관리하는 것으로 보아 성격이 소심하거나 꼼꼼하여 성격이나 기질상 사카리에 맞지 않을 것이라 언급합니다.

, 그가 제자단의 금고의 돈을 빼돌렸다는 요한의 기사를 토대로 보건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만큼 유다는 이상주의적이지 않고 도리어 현실주의자일 공산이 크다고 언급합니다.(각주)

 

성서에서 유다를 열심당원으로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에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하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그가 사카리인지를 확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가설로 새겨들을 필요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가 열심당이었다고 단정하고 그들이 추구했던 하나님 나라와 메시아 기대가 배신당하자 예수님을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성서의 기록에도 맞는 정확한 묘사는, 유다가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열두 사도. 요한복음을 제외한 세 복음서에는 열두 사도의 명단이 있습니다. ( 10:2~4 ; 3:16~19 ; 6:14~16). 유다에 관련된 특이 사항이 있다면, 각 명단에서 유다는 항상 맨 꼴지에 있다는 것, 그리고 유다는 예수를 판 자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다를 사도의 한 명으로 언급하면서도 그가 예수를 팔았다는 과거 전력을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그리고 또박또박 적어 둔 것이 참으로 희한해 보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도라는 말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으로 문자적으로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도가 되겠지만, 신약에서 사도라 불린 사람들은 열두 사도가 아닌 경우 직접적으로는 바울과 바나바( 14:14), 암시적으로는 주의 형제 야고보(1:9)였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특별한 소수의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의 관심은 유다를 사도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모든 신자를 일컫든 아니면 특별한 소수의 무리이든 이른바 누가 사도인가 하는 것보다는, 유다가 그 사도들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에 제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도를 뽑으셨다는 것 못지않게 특별히 유의해야 할 점은 12라는 숫자입니다. 12는 구약의 열두 지파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던 숫자는, 이제 교회가 영적 지위를 차지할 것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새 세상에서 인자가 자기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라온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19:28).

열두 사도는 새로운 하나님 백성 공동체인 교회로 하여금 구약의 이스라엘을 연속적인 측면에서 계승하게 할 뿐 아니라, 비연속적인 측면에서 진정으로 완성하도록 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 건설을 위해 사소들이 해야 할 일은 세 가지입니다.(3:14~15).

예수와 동행하는 것, 보냄을 받고 전도하는 것,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열두 명의 명단에 이름이 기재된 유다에게도 분명 이런 역할과 특권이 부여되었을 것입니다.

하여, 유다도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했을 겁니다. ( 10:8). 그리고 돌아와서 아마도 70명의 제자들처럼 기쁨과 놀라움에 겨워 말했을 것입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10:17).

그랬다면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10:18)라는 칭찬과 격려의 말씀도 들었을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신하고, 귀신마저도 항복할 만한 영적 권세를 지녔고, 실제로 그런 경험도 한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이런 유다의 배신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뭘까요? 이 사람 유다는 누구일까요? 열두 사도의 명부에 이름이 등재되어 있으면서도 예수를 판 자라는 불명예가 항상 따라다니는 이 사람, 유다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이 이방인 선교를 하는 것과 유대인이 구원받는 것의 상관 관계를 설명합니다.(9~11).

유다와 관련해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대목은 11장의 돌감람나무 이야기입니다.

원래 가지에 문제가 있어서 그 가지들을 꺾어 버리고 새로운 가지를 접붙였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가지인 우리 이방인에게 주는 교훈은, 원래 있던 가지고 아낌없이 잘라내신 분이 우리 또한 높은 마음을 품고 교만하면 그들과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우리 모습입니다.

열두 사도였던 그가 예수를 판 자가 되었습니다.

그토록 놀라운 특권과 능력의 소유자였던 유다가 배반자 유다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유다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유다와 베드로처럼 예수를 부인하고 배신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현재의 축복과 형통함에 우쭐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바로 서면 하나님의 너그러운 인자하심이,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습니다.

 

 

 

내가 율법의 삶을 사는지, 은혜의 삶을 사는지를 분별하는 좋은 잣대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 또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내가 한 것이 자꾸 생각나는지, 아니면 주님이 내게 해주신 것이 생각 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한 일이 생각나면 불평하게 되고, 주님이 하신 일이 생각나면 감사하게 됩니다.

과거의 영광스러운 성취와 지위가 영원불변할 것으로 착각하여 자긍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일수록 얼른 잊어버려야 유익합니다.

나 역시 유다처럼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할 수 있습니다. 오직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3:14, 공동번역)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예수는 역사다 / 저자 : 리 스트로벨

 

 

 

344Page

 

 예수의 전기는 신뢰할 만한가?

 

나는 한 때, 복음서는 단지 종교적 선전물로서 절망적일 정도로 과장된 상상력과 복음주의자들의 열정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문제에 관해 우리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권위자 중의 한 명인 크레그 블롬버그는 복음서에 목격자들의 증언이 나타나 있고, 전혀 실수가 없는 정확성의 표시가 있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폈다. 이 전기들은 매우 초기의 것으로서 단지 꾸며 낸 전설이라고 설명할 수 없다.

사실 예수의 기적, 부활, 그리고 신성에 대한 근본주의적 신앙은 기독교 운동의 가장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의 전기는 면밀한 검토를 견뎌낼 것인가?

 

블룸버그는 복음서 저자들이 신뢰할 만한 역사를 보존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할 만한 능력도 가졌으며, 설명하기 곤란한 자료도 기꺼이 포함시킬 정도로 정직했고, 편견 때문에 왜곡 보도를 하지도 않았다는 납득할 만한 주장을 했다.

핵심적 사실에 대한 복음서들 간의 일치와 세부 사항에서 드러나는 약간의 차이는 오히려 이야기에 역사적 신뢰성을 부여한다. 게다가 초대 교회에서 가르친 예수에 관한 사실들이 동시대 사람들이 보기에 과장되었거나 틀렸다고 알려졌다면, 초대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뿌리를 내리고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복음서는 8가지 증거 검사를 모두 통과했다.

 

 

 

예수의 전기는 신뢰할 만한 상태로 보존되었는가?

 

세계적인 학자인 브루스 메쯔거는 다른 고대의 문서와 비교해 볼 때 신약 성경의 사본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많으며, 기록 연대도 원본과 상당히 가깝다고 말했다.

 

현대의 신약 성경은 99.5 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본문 간의 차이가 없고, 중요한 교리는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초대 교회가 어떤 책을 권위 있는 책으로 볼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사용한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예수에 관한 가장 훌륭한 기록이다.

 

 

 

 

예수의 전기 이외에 신뢰할 만한 증거가 있는가?

 

우리에게 있는 예수에 관한 역사적 문서는 고대의 다른 종교의 창시자에 대한 문서보다 뛰어나다라고 에드윈 야마우치가 말했다.

성경 외부의 자료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치유 사역을 한 메시아이고, 십자가에 못박혔고, 이 수치스런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은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하나님으로서 경배했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어떤 전문가는 예수의 생애, 가르침,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100가지 이상의 사실을 확증해 주는 39개의 고대 자료를 증거 서류로 제시했다.

게리 하버마스라는 학자에 의하면, 7개의 세속 자료와 여러 개의 초기 신경이 바로 가장 초기의 교회에 분명히 존재했던교리인 예수의 신성과 관련된 것들이다.

 

 

 

고고학이 예수의 전기를 확증하는가 아니면 반박하는가?

 

고고학자 존 맥레이는 고고학적 발견이 신약 성경의 신뢰도를 높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일찍이 어떤 발견도 성경적 언급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았다.

게다가 고고학은 신약 성경의 약 4분의 1을 기록한 누가가 특히 신중한 역사가라는 것을 입증했다. 한 전문가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렷다.

누가가 많은 수고와 노력으로 역사적 사실을 (세부 사항에까지) 보고하는데 정확성을 기했다면, 어떤 논리적 근거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훨씬 더 중요한 문제, 예를 들면 예수의 부활과 같은 사건을 기록할 때 경솔하다거나 부정확했다고 가정할 수 있는가?”

 

 

 

역사적 예수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와 동일한가?

 

그레고리 보이드는, 예수가 자신의 말로 여겨지는 대부분의 말을 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단체로 언론에 많이 등장하는 예수 세미나 모임은 신약 성경의 사고에서 극좌파에 해당하는 극소수의 급진적 주변 학자들을 대표한다고 말했다.

그 세미나는 처음부터 기적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의심스러운 기준을 채택하고, 몇몇 참가자들은 매우 의심스러운 성질과 신화적 성격을 지닌 문서들을 높이 평가했다.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신들에 관한 신화로부터 출현했다는 생각은 면밀한 검토 결과 무너지고 만다. 보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가 제자들이 말한 바로 그 사람이라는 증거는 예수 세미나의 좌파 학자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유보다 엄청나게 빠른 시기의 것이다.” 요컨대,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는 역사적 예수와 동일하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정말로 확신했는가?

 

벤 위더링턴은 확실히 전설의 반달로부터 안전한 초기의 전통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예수가 최상의 그리고 뛰어난 자기 이해를 했다는 점을 보여 줄 수 있었다.

위더링턴은 증거에 기초해서 말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습니까? 그에 대한 답은 예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보았습니까? 그 대답도 예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마지막 메시아라고 보았습니까? ,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못한 사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까? 아니오, 그는 그렇게 믿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그가 미쳤기 때문인가?

 

유명한 심리학자 게리 콜린스는 예수가 어떤 부적절한 감정을 보인 적이 없으며, 현실 세계와 접촉했고, 영리했으며, 인간성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소유했고, 깊고도 지속적인 관계를 누렸다고 말했다.

 “예수님이 어떤 정신 질환을 겪었다는 흔적을 결코 찾아볼 수 없습니다.”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에수는 기적을 통한 치유, 자연을 다스리는 놀랄 만한 능력의 입증, 비할 데 없는 가르침, 사람들에 대한 신적인 이해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최후의 입증인 부활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예수는 하나님의 속성들을 가지고 있었는가?

 

성육신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고 완전한 존재가 유한한 존재가 된 사건은 우리의 상상력을 활짝 펼쳐줄 만하다.

하지만 뛰어난 신학자인 카슨은 예수가 신성의 특징을 보여 준 많은 증거가 있음을 지적했다. 많은 신학자들은 빌립보서 2장에 기초해서 예수가 인간의 구속이라는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독립적으로 사용하는 권한을 버렸다고 믿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약 성경은 예수가 궁극적으로는 전지, 무능, 무소부재, 영원성 그리고 불변성을 포함한 모든 신적 자질을 소유했음을 명확히 확증한다.

 

 

 

예수는-예수만이-메시아의 정체성과 조화를 이루었는가?

 

예수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에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속할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했다.

사실 십여 권의 구약 성경의 예언들은 진정한 메시야만이 꼭 들어맞을 지문을 남겼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사기꾼을 배제하고 진짜 메시아의 자격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했다.

예수만이 전 역사를 통해 이 예언적인 지문에 정확히 들어맞았는데, 이는 가히 천문학적인 가능성을 뚫은 것이다. 1조의 13승분의 1의 확률을 맞춘 것이다. 이런 사실은 바로 예수의 정체성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함을 확증해 준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속임수였는가?

 

알렉산더 메드럴은 의학적, 역사적 자료를 분석함으로써, 예수가 폐와 심장을 꿰뚫은 크게 갈라신 상처는 말할 것도 없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끔찍한 고통을 견디고서 살아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그가 십자가 위에서 기절하고 죽은 체했다는 생각은 기초적 증거가 빈약하다. 로마의 사형 집행인들은 희생자 중 한 사람이라도 십자가에서 살아서 내려온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에, 잔인할 정도로 효율적으로 자신들의 일을 처리했다.

비록 예수가 고통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았더라도, 죽은 자나 다름 없는 그의 상태는 결코 그가 무덤을 뚫고 영광스럽게 승리했다는 전제를 가진 세계적인 운동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의 시체가 무덤 속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사실인가?

 

윌리엄 레인 크레그는 부활절의 영원한 표시인 예수의 텅 빈 무덤이 역사적인 사실이었다는 놀랄 만한 증거를 제시했다.

빈 무덤은 매우 초기의 자료, 예를 들어 마가복음과 고린도전서 15장의 교리에 그대로 기록되거나 암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자료들은 그 사건과 기록 연대가 너무 가까워서 전설의 부산물이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복음서에서 여자들이 텅 빈 무덤을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사실은, 그 이야기의 진실성을 뒷받침해 준다. 예수의 무덤의 위치는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회의론자들도 조사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은 로마의 당국자들과 유대인 지도자들을 포함해서 그 무덤 속에 아직도 예수의 시체가 있었다고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오히려 그런 행동을 할 아무런 동기나 기회가 전혀 없는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꾸며 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설은 심지어 오늘날 가장 회의적인 비평가조차도 믿지 않는 이야기다.

 

 

 

예수는 부활 후에 정말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는가?

 

예수가 부활 후에 나타났다는 증거는 그의 생애에 대한 기억이 왜곡되어 신화로 수년 간에 걸쳐서 점차로 발전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부활에 관한 전문가인 게리 하버마스가 말했듯이 부활은 매우 초기부터 교회의 중심적 선포 내용이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고대 신경에 보면,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난 개인들의 특정한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바울은 1세기의 회의론자들이 스스로 그 문제의 진실성을 결정하도록 하기 위해 그 사람들과 직접 얘기해 보라고 도전하기까지 했다.

사도행전에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매우 초기의 확증들이 곳곳에 널려 있는 반면에, 복음서에는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영국의 신학자 마이클 그린은 예수의 출현은 고대의 어떤 사건보다도 잘 증명된다예수가 부활 후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을 의심할 어떤 합리적 이유도 있을 수 없다.”라고 결론지었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
728x90
반응형
SMALL

약 10년 전에 근본주의, 세대주의 관련하여 정리해 본 글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극단적 세대주의가 양산해 낸 폐단]

요한 계시록과 다니엘서의 짐승’, ‘적 그리스도’, ‘666’, ‘음녀’, ‘동방’, ‘열 뿔등을 임의로 해석하며, 임박한 종말론을 주장하며, 이 세상을 하나님과 사탄의 두 대결구도로 보는 이원론적인 주장을 하기도 하며, 양태론과 기독론, 구원론에서 이단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P.S: 기독교는 하나님과 사탄의 힘을 동등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아무리 강력한 영적 존재라 해도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시대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서 사탄이 최후의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시대라고 보는 게 더 성경적입니다.)

(P.S2: 양태론을 주장하는 건 모든 세대주의자들이 그러는 건 아닙니다. 일부만 그러고 있습니다. 양태론은 정통 기독교가 주창하고 있는 삼위일체와 다른 개념입니다. 양태론이란 three person in one nature(한 본질을 지니신 세 분의 다른 존재)라는 삼위일체의 특성과는 달리 한 분 하나님만이 단일하게 계시고 때에 따라 다른 모습(양태), 즉 어쩔 때는 성령, 어쩔 때는 성자 예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다는 이론으로서 사벨리우스가 주창했습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님 이라는 구분이 사라지다 보니 삼위일체 하나님의 독특한 인격성은 사라지고, 신비주의적이고 막연한 신성만 남게 된다는 치명적 오류가 있어서 개신교 진영에서는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세대주의]

 

(1)19세기 말 플리머스 형제의 초기 지도자였던 존 넬슨 다비에 의해 주장된 일련의 신학적 사조입니다.

(2)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3)19세기에 미국 교회사, 정치사의 독특한 토양에서 생겨난 근본주의라는 노선의 일부라고 보면 됩니다. (근본주의 중에서 가장 지적인 형태로 나타났던 게 세대주의다. 그래서 세대주의자들이 복음주의 지성에 끼친 악 영향이 실로 대단했습니다.)

(4) 세대주의 중에서도 극단적인 세대주의는 굉장히 위험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대주의이다.> 라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5) 이러한 세대주의는 구원파 등의 한국 이단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들도 있습니다.

(아래 댓글로 구원파와 세대주의는 관련이 없다는 글을 올리신 분이 있으니 정확한 진위 여부를 확인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관련 단체와 세대주의가 전혀 상관이 없다면 기존에 알려져 있는 교리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반박 등을 댓글로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반적인 특징은

(1)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엄격한 구별

(ex) 그래서 마지막 때에는 이스라엘 12지파에서 12000명씩 회심하여 144000명을 이룰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을 읽어 보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렸으며[3:29], 그리스도인을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기록한 부분도 있는 걸로 볼 때, 이와 같은 이스라엘과 다른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구별 시키려는 시도는 성경적 근거를 확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2) 문자적인 해석

(ex) 세대주의자들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천년을 정확히 1000년으로 해석합니다.-> 요한 계시록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건 아주 위험합니다.)

(그러나 일관성이 없어서 ‘1은 또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천년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원칙과 기준이 딱히 없는 것이죠)

(3)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근원적 목적으로서 구원의 완성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에 더 주목하는 태도

 

좀 더 구체적인 특징

세대주의:

(1) 하나님이 인류와 맺으시는 관계를 몇 개의 예리하게 분리되는 시대로 나누어서 성서를 이해하는 태도.

(2) 성서가 아담으로부터 신약 성서의 마지막까지 또 성서에 예언된 종말의 세대까지, 이러한 시대들 혹은 세대들에 대한 분명한 신적 해석을 제공한다고 봅니다.

(3) 하나님이 역사를 초월적으로 다스리신다는 믿음을 옹호합니다.

(4)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성서관과 그에 따른 성서 해석(그러다 보니 성서 비평에 취약했음)

(5) 예언 해석에 초점을 맞추는 강경한 성서 문자주의

Ex) 그래서 그들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재림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일어나야 한다는 이중 재림을 주장합니다. 즉 대환난 이전에 예수님이 한 번 재림하시고, 그 이후에 천년왕국의 통치 이전에 다시 한번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것입니다. -> 이단적인 종말론을 태동시키는 촉진제로서 작용했고, 이와 같은 이중 재림은 성경적 근거도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6)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반박: [19:23~24]을 보면 천국하나님의 나라는 병행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두 용어는 서로 호환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대주의의 방법론: 성서적 진리(특히 세상의 종말에 대한 진리)를 입증해 내기 위해 성서 전체에서 뽑아낸 구절을 적절히 배열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문자주의를 수용합니다.

 

세대주의가 인기 있는 이유:

(1)성서의 예언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고 현재 상황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해석해 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예언이 나름 해석 되는 것 같으니까 신이 나는 것이죠)

(2)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인기 있었던 이유는 통제를 벗어난 세상 속에서 미래에 대한 전천년주의적 관점을 지니게 해 줌으로써 복된 소망과 더불어 왜 상황이 이렇게 나쁘게 흘러가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줬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몇 백년 전에 현재의 혼란을 예언했다는 것을 알고 묘한 위안을 얻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성경의 무오성이라는 중요 교리를 철저히 지켜 내려고 학문적인 노력도 나름 많이 했습니다. -> 정통 신학에서 유일하게 긍정하는 세대주의자들의 업적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긍정할 만한 요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악영향이 더 많았거든요.)

 

진보적인 세대주의자는 그나마 역사적 개신교와 비슷한 개념을 많이 취하려고 하지만, 일반적인 세대주의자들은 기성 교회의 쇠퇴나 배교, 그에 따른 문명의 타락,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지 않은 기존의 제도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할 필요성 등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이단들이 아주 좋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이론을 적극 수용해서, 기성 교회들을 싸잡아서 비난하는데 사용했죠)

 

 

 

근본주의(또는 세대주의)가 미친 영향들

 

(1)  반지성주의를 만연케 만들었습니다. 즉 임박한 재림과 예언의 은사를 강조하여 학문의 필요성을 경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지성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싸잡아서 종교주의자로 매도해 버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단에 빠지는 분들을 보면 가방끈이 좀 짧은 어머님들이나, 순진한 분들이 참 많아요. 배우지 못함에 대한 열등감 등을 교묘하게 비틀어서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립니다. 잔인하게도…)

(2)  성서 해석이 지나치게 단순하다 보니 성서 비평앞에 취약함을 보입니다.

(3)  성서 구절을 신적 진리라는 완성된 그림을 얻어내기 위해 골라서 끼워 맞추는 데만 필요한 퍼즐 조각처럼 취급해 버립니다.

(4)  극단적인 본질주의를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특정한 공식으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나 인간의 상태, 세상의 운명과 같은 모든 문제에 관한 성서적 진리의 본질을 포착해 낼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그에 따라 특정 시대에 가장 중요해 보였던 문제를 이해하고 정의하는 데 역사가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5)  이전 세대로부터 내려온 지혜를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교만에 가까운 자기 확신을 지녔습니다.

Ex) 루이스 스페리 체이퍼(Chafer)는 말했습니다. “신학계에서 정해 놓은 과정대로 연구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편견 없는 마음으로 신학을 연구하고 성서가 실제로 가르치는 바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반박-> 굉장히 객관적이고, 엄밀한 태도를 취한 듯 하지만 사실 자신이 생각한 바가 진리라고 독단적으로 주장하는 것과 다름 없다. 자신의 해석법에는 검증의 잣대를 대지 않겠다는 것이다.

 

è 이런 독단적인 태도의 맹점: 자신의 신학 사상을 포함한 모든 신학 사상이 교육이나 경험과 같은 개인적, 문화적 요소와 그 신학자가 속한 전통에 의해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다는 것을 간과한 태도입니다.(자체적인 논리적 오류를 지닌 주장입니다.)

 

(6)  대중에게 매우 퍼뜨리기 쉬운 극단적 형태의 초자연주의를 전하느라, 자연적 영역을 고려할 만한 시도가 없었고, 진리의 내용 자체가 상당히 영지주의적이게 되어버렸습니다. (, 자연, 세상 정치, 윤리, 인간 존재 등에 대해서는 성경적인 답안을 거의 내 놓지 못했습니다. 맨날 종말 이야기만 하고, 이상한 단어 해석에만 집착하느라 성경의 Quality 를 땅으로 떨어뜨려 버렸습니다.)

(7)  시대 자체를 들여다 보는 불편하고 중요한 작업은 하지 않고, ‘시대를 해석해 보려는 기이한 시도였습니다.  

(8)  세계적인 사건이 터질 때마다 성서를 복잡한 국제 윤리를 풀어 가는 지침으로 활용하기 보다는 수정구슬처럼 사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모호한 성경 예언의 세부사항에 대한 성취라고 자부하면서..)

 

[몇 가지 알아둘 내용들]

지난 10년간 일부 세대주의자들은 소위 전통적인 세대주의에서 극단적인 요소를 많이 제거하긴 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들이 세대주의의 주류는 아닙니다. 그러니, 그다지 받아들여 주기 어렵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성서를 방어할 때, 성서 원본의 무오성을 주장했습니다.(성서의 저자들이 인간임을 완전 망각하고 고려도 안 하고 있습니다. 성서 저자들의 삶의 경험과 문화적 배경 등에 대한 고려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실수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은 전혀 생각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근본주의(특히 세대주의) 비판하기

(1)  이 운동이 미국에서 각광 받는 동안 복음주의 공동체는 하나님 아래에서 자연 세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인간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왜 인간의 본성은 그런 모습인지, 문화의 축복과 위험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통찰을 거의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대한 이해력을 놓여주지 못함.)

 

근본주의자들의 공헌점: 그래도 무신론주의, 유물론주의 토양에서 초자연주의를 지켜냈습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성서에 정말 충실했다는 점은 칭찬할 만 합니다.

(그들이 끼친 악 영향을 생각하면, 이런 칭찬도 해 주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100번 양보해서 힘겹게 칭찬해 줄 순 있을 것 같습니다.)

 

결론

성서 예언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의 정서적이며 우주적인 차원을 계시하는 것이지 신자들에게 세상의 종말에 대한 완전하고 상세한 미리보기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은 역사적으로(문화적,인간적 요소 고려), 자연적으로(상징,상상력,서술 양식 고려), 그리스도 중심적으로(성서의 통일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에 있다는 관점) 해석해야 합니다.

(그냥 단어에서 단어로 jumping 해서 쉽게 쉽게 해석하려고 하다가는 세대주의자들의 말에 완전 매료될 수 있고, 신천지 같이 비유 풀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덥석 잡히는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는 기회로서 읽는 것이지 퍼즐을 풀듯이 예언을 찾아 가는 방식으로 읽는 게 아닙니다.

 

-마크 놀 교수님, 이인규 권사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

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