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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악한 것을 배격하려는 열심에서 정당한 것까지 정죄하고, 선한 것을 정당하게 취급하려는 욕심에서 부패한 것까지 수용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타락이라는 이름으로 창조를 거부하고 , 창조라는 이름으로 타락을 용인할 위험을 안고 있다.

 

[춤과 그리스도인의 삶] 이라는 보고서에서...

 

 

 

기독교 세계관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필수적으로 읽고 넘어가야 할 고전 중 한 권이다.

(여러 기독교 세계관 책을 읽어 봤지만, BEST 10 권 안에는 넣어줄 수 있다.)

 

이 책은 먼저 '세계관' 에 대한 이해를 도와 주며 , 그 다음에 성경 속에 나와 있는 '창조' , '타락' , '구속' 의 연속적인 흐름을 세계관의 측면에서 설명해 주고 있다.

 

그 뒤에 '구조' 와 '방향' 이라는 개념을 소개해 주고 있는데 , 알아 두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요즘은 ,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심도 있게 분석해 놓은 책들이 꽤 나오고 있어서 , 그러한 책들을 보고 나서 이 책을 보면 뭔가 '생각하는 것 만큼 대단하지 않은 걸?' 이라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 이 '창조,타락,구속' 이라는 심플한 개념이 그 이후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니 , 세계관의 아버지격인 서적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일단 세계관은 무엇인가?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 이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물론 , 한 사람이 지니는 '세계관' 이 항상 내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 하며 , 이러한 주장을 단순화 시키지 않는 신중함도 보여 주고 있다.)

 

세계관이 중요한 이유는 , 이러한 세계관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기능' 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할 때도 있고 , 의식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또한 , 크리스천으로서 , 세계관은 '성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점검 받아야 함' 을 이 책은 강조하고 있으며 , 자신이 지닌 세계관이 성경적일 때만 우리 삶이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다고 저자는 힘 주어 이야기 한다.

 

 

이들이 견지하고 있는 개혁주의 세계관의 특징을 3가지로 요약하자면..

 

1. '창조' 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2. '타락' 은 창조 세계에 한 구석도 빠짐 없이 철저히 영향을 끼친다.

 

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 은 타락만큼이나 그 범위가 넓어 , 창조의 지평은 동시에 죄의 지평이며 또한 구원의 지평이다.

 

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런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은 한 군데도 빠짐 없이 모든 영역에 미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기에 , '성과 속' 을 교묘하게 분리하려는 일련의 사조를 저자는 배격한다.

 

소위 '이분법적 사고' 라고 하여서 , 이성과 합리성의 영역 , 그리고 믿음과 신앙의 영역을 분리하려고 했던 수 많은 지식인들,종교인들의 활동을 배격한다.

 

(이 관점은 '실존주의'를 포용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사상 자체도 반대하거니와, 실존주의로 물든 '신정통주의 신학'도 배격한다. 그러나, 세상을 해석해 내는 '온전성'의 측면에서 어떤 쪽이 더 '현실'에 잘 부합하는 주장을 하는지는 양측의 이야기를 다 듣고, 숙고를 해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프란시스 쉐퍼 등의 노선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건 이들은 칼빈주의적 기독교 세계관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 세계관 공부를 하다 보면 쉐퍼가 지닌 한계, 칼빈주의 기독교 세계관의 문제점들도 제법 드러난다. 실제 삶을 살아보면 더더욱 그 공백이 크게 느껴지고 말이다.

 

그에 이어서 나오는 '구조' 와 '방향' 이라는 개념을 살펴보자.

 

'구조'  '창조 의 질서 즉 어떤 사물의 불변적 창조 구조 혹은 그것으로 하여금 그 실체가 되게 하는 것' 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리고 '방향''죄와 구속의 질서, 즉 한편으로는 타락으로 인한 창조의 왜곡 혹은 변질을 ,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의 구속과 회복을 지칭' 한다.

 

이 말을 쉽게 예를 들어 나눠 보자.

 

즉 우리가 접하는 공학,예술,기술,학문,문화,학교,회사,감정,합리성 등 수 만가지 개념들이 그 본질(구조) 자체는 선한 것이지만, 방향이 잘못 잡혀 있어서 왜곡되었다고 보는 게 이 저자의 특징이다.

 

그러면서 당부하기를 , 구조와 방향을 헷갈려서는 안된다고 이야기 한다.

 

분명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을 '선' 하게 창조하셨고 , 인간이 '타락' 하여서 그러한 '선' 한 '구조' 를 지닌 것들을 '악' 의  '방향' 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라면 , 일부 세력들은 그 개념들 자체가 내재적으로 '악' 을 소유하고 있다고 이야기 하며 그 '구조' 자체를 '악' 으로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 이러한 인간의 사고를 '영지주의적 성향' 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 예로 드는 것들이 플라톤,그리스 철학,루소,대부분이 낭만주의,철학적 무정부주의,대부분의 심층심리학,하이데거,자크 엘룰 등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는 '복귀'(Repristination) 이 아닌 , '회복'(Restoration)  을 외쳐야 하며 , 만약 '에덴 동산' 시절로 돌아가자고 이야기 하는 것은 원시적인 미발전의 상태를 갈망하는 사고이며 , 우리는 역사적,문명적 진보를 이루는 게 마땅하다고 이야기 한다.

(이에 반해 자크 엘룰 등은 , technology(기술) 자체를 '악' 으로 규정하는 특징이 있다.)

 

 

그리하여 , 읽고 쓰는 능력을 개발하고 , 도시화를 진행하고 , 산업화 혹은 내연 엔진 등도 권장하는 게 마땅하다고 이야기 하는데...

 

이 부분은 각자의 의견에 맡기는 게 좋을 것 같다.

(낸시 피어시의 [완전한 진리]도 이와 비슷한 노선을 지지하는 듯 하다. 그러나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를 보고 나면 이 논리의 한계점을 간파할 수 있다. 몇도 정도의 각도로 방향이 틀렸는지를 누가 교정할 것이고, 그 기준은 어떻게 세울 것인가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가득한 개념이다.)

 

이러한 '발전' 이 선험적으로 수반하는 '환경 오염' 등의 문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런지....

(니콜라스 월터스포트의 저서라든지, 존 스토트 목사님의 [현대사회의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등을 같이 읽다 보면, 이 책의 내용을 전적으로 수용하긴 어려워진다.)

 

성경적 신앙은 진보적이며 , 결코 반동적이지 않다는데.... 그리하여 인류 역사를 동산에서 도시로 가는 움직임으로 봐야 하며 , 이러한 움직임은 성경적으로 권장된다고 말하는데, 말은 그럴싸한데 실제적인 적용이 늘 아쉽다.

 

쟈크 엘룰의 말처럼 , 인간의 '지식' ,'발전' 이 넘어서는 안 될 '선' 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질문이 오히려 더 와닿는 경우도 많다. 

 

이미 , 현대 사회 속의 예술,문화,공학,기술,사회제도,교육,정치 등 등은 심각한 인본주의의 늪에 빠져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말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감도 안 잡힌다)

 

어디서부터 소위 '왜곡' 된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 '올바른 방향' 을 잡고 나면 , 이들의 발전이 가능은 한걸까?

 

아직은 , 잘 모르겠다. (아무도 정답을 내놓긴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 하나님의 '창조' 가 전 영역에 영향을 미쳤으며 , '타락' 의 범위도 방대했고 , '구속' 도 구석구석까지 이루어 질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기독교 세계관에 한 획을 긋는 대단한 업적이자 성과라고 생각한다.

 

한번 쯤 고민해 볼 필요가 있으니 , 일독을 권한다.

 

(N,T Wright 같은 경우는 창조-타락-구속 이라는 도식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걸 반대하며 이보다 훨씬 더 풍성한 Narrative 를 가지고, 성경을 읽어 내려가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하기도 한다. 일단, 기독교 세계관의 주류 견해이기 때문에 이 책 정도는 꼭 읽어 두고 이후의 논의를 전개해 나가면 좋을 것 같다.)

-> 사실 N.T Wright 의 주장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 같긴 하다.

 

이 책은 공부를 하다 보면 동의하긴 어렵지만, 거쳐 가지 않고는 갈 길이 없는 통과 의례와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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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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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진리]로 칼빈주의적 기독교 세계관의 절정을 맛보여 준 낸시 피어시의 신작 [세이빙 다빈치] 는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다. 미학과 철학 신학 과학을 넘나드는 이 책의 거대한 이야기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야를 굉장히 넓혀준다. 책을 읽고 나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서 공유한다. (참고로 낸시 피어시의 저서들은 인용구 등을 사용할 때 철저히 출처를 밝혀두기 때문에 출처에 대한 의심 없이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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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감각자료]


모든 세계관은 일말의 진리를 담고 있다. 경험주의에 담긴 진리는 창조주가 그분의 창조세계에 우리가 접근할 수 있도록 우리의 오감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복음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경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사도요한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메시지가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요일1:1,새번역] 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은 로마의 통치자들에게 말할 때, 예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은 "어느 한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행26:26, 새번역] 지적했다. 그 일은 공적인 사건이었고, 그 일을 목격한 많은 증인들이 당시에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러므로 증인들이 반대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면 사도들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복음서는 목격자들의 증언에 근거하고 반대신문과 검증이 가능한 공적 진리의 기록이라고 주장한다. 경험적 자료를 존중하는 복음서의 입장에 힘입어 학자들은 신약 성경 속 사건들의 역사적 증거를 탐구하는 경험주의 형식의 변증론을 개발했다.


이러한 변증 방식은 1700년대 Nathaniel Ladner의 [복음 역사의 신빙성] 에서도 볼 수 있고, 게리 하버마스(Gary Habermas)의 [역사적 예수]와 N.T 라이트의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같은 책에 드러난 최신 연구 성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중립적인 관점에서 입증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세계관이 걸린 문제다.


그렇지만 신약 성경 속 사건들에 대한 세속주의적 해석에 대해 역사에 근거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일은 가능하고, 그 과정에서 그러한 해석의 출발점이 되는 세속주의 세계관에 문제를 제기하는 일 또한 가능하다.


경험적 방법론을 내세우는 현대 과학도 성경적 세계관에 큰 빚을 지고 있다.


기독교가 등장하기 전, 그리스인들은 주로 논리의 관점에서 과학을 정의했다.


그리스 고전철학은 사물이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고, 과학은 형상에 대한 지식이라고 정의했다. 형상은 수처럼 이성적이고 영원한 것이므로, 과학은 수학처럼 논리적으로 필연적일 수 밖에 없었다. 과학의 진리는 경험적으로 발견한 내용이 아니라 엄격하게 논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과학을 이런 식으로 정의하게 되면 애초부터 경험적 조사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따라온다는 문제가 있다.


어떤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기만 하면 될 뿐, 그것을 직접 살펴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추론만으로 대상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모두 끌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냄비를 살펴보자.


냄비의 목적이 액체를 끓이는 것임을 알게 되면, 그것이 액체를 담을 수 있는 특정한 형태를 가져야 하고, 가열할 때 타거나 녹지 않도록 금속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 등을 연역할 수 있다.


이런 연역적 방법은 모든 지식의 본이 되었고, 그 결과로 고전 사상가들은 구체적인 실험과 관찰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독교 신학자들은 몇 세기에 걸쳐 성경 본문을 숙고하는 과정에서 그리스식 과학의 정의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전능하시니 세상을 수많은 다른 방식으로 만드실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그분은 우주를 원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창조하실 수 있었다.


자연의 질서정연한 패턴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것이 과학을 향해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 상아탑에 앉아 어떤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연역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가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살펴보고,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질서를 창조하셨는지 알아내야 한다.


한마디로, 관찰하고 실험해야 한다. 17세기에 뉴턴의 친구 로저 코츠는 이런 식으로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자연이 "하나님의 완전히 자유로운 뜻"에서 생겨났고,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관찰과 실험으로" 그것을 배워야 한다고 썼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우주론에 따르면 모든 요소가 각기 '자연스러운' 위치를 찾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수사이자 수학자였던 마랭 메르센은 그런 식의 연역적 추론에 반기를 들었다.


역사가 존 헤들리 브룩은 이렇게 썼다.

 

 


 

"메르센이 볼 때 우주에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주의 중심이 지구의 자연스러운 위치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분이 원하시는 곳에 두시며,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였다."


이것으로 볼 때 현대 과학의 실험적 방법도 성경의 창조주 개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과학 초기의 과학자들은 "연역에 근거한, 논리적으로 확실한 지식"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관을 거부했다.


대신에 그들은 경험적 증거에 근거한 개연성 있는 지식이라는 과학의 새로운 정의를 받아들였다.


철학자 리처드 팝킨이 지적한 대로, 신학자들은 "서구 사상에서 너무나 큰 역할을 감당한 영국 경험주의"가 탄생하는데 과학자와 철학자 못지않게 중요한 몫을 했다.


-낸시 피어시 [Saving Davinci] 210~213page] -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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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에 쓴 글이니 지금에 와서는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사유를 확장시키고, 새롭게 글을 써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일단 큰 골격은 유지해도 될 것 같아서 올려 봅니다.

 

 

 

크리스천에게.

 

크리스천! 안녕. 

 

중요한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아. 이런 관련 정보들을 잘 알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 여쭙고 씨름하면서 내가 서 있는 지점을 찾아 두는 건 인생을 살아가는데 유익한 측면이 많을 것 같아. 특히 넌 진리에 대한 열망과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에 대한 중요성에도 많이 노출되었었고, 그러한 호기심과 달란트를 또한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고민들은 지속적으로 해 보는 게 도움이 되리라 믿어. (너의가는 길을 숙고할 때도 언젠간 응용될 날이 오리라….)

 

일단 전제 자체는 인간이 불완전하고, 연약하며, 죄가 많아서 언제든지 오류나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이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하게 될 말들도 몇 년 후에는 분명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핵심은 변하지 않고 유지될 거야.)

 

두 번째로는 이와 같은 치열한 고민들은 답이 잘 나오지 않더라도 계속적으로 씨름해 나가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과정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기에….)

 

마지막으로는, 어떤 답을 내릴 때는확신하기 보다는, 좀 더신중한 편에 서는 게 좋을 것 같고, 서로 대립되는 주장들이 있을 때는 양쪽을 다 공부하고, 통합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앙의 본질은 인격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 이라고 정의할께. 또는 인격이신 하나님을 전 존재를 걸어 알아가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아.

 

이와 같은 Base를 깔아 두고, 고민을 좀 더 해야 할 것 같아.

 

한국 교회는 대체적으로 정통신학(칼빈주의)이 주류인 것 같고, 상당히 보수에 가까운 것 같아.

 

일반적으로는 장로교고신이 보수의 극단에 가깝게 분포하고 있을 것이고, 그 이외에도 합동,통합,기장 등다양한 분파가 있을 거구…(‘고신보다합동을 더욱 극단으로 두는 견해도 존재함)

 

한국에서 본격적인 신학을 체계화 시킨죽산 박형룡교수님은 미국에서 유학할 당시 웨스트민스터 신학 대학교에 있던메이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었어.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교 자체가 정통신학에 철저히 서 있는 학교였고, 그 이전에 세워진 프린스턴 신학 대학교가 기존의 정통신학을 버리고,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 들인 것에 대한 반발로 태동하게 되었어. 메이첸은 그 중에서도 가장 확고하게 정통신학을 지키고 싶어 했었지.

 

그러한 스승을 둔 박형룡 교수님의 가르침은 총신대학교 조직신학과에서 시작되었고, 그 분의 제자들이 한국 장로교 신학의 주축을 이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아.(‘정암 박윤선교수님 등 걸출한 분이 많으셨어)

 

 

 

미국에서는 장로교인의 숫자가 미미한 편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유독 장로교가 주류에 가까운 것 같아. 일단 대한 예수교 장로회와 한국 기독교 장로회가 분열할 때는 성서의고등비평을 수용하는 문제를 가지고 분열을 했었어. (이 부분은 이따가 자세히 언급해 볼께)

 

그 이외에도 일본 강점기 당시 신사 참배 문제를 놓고 고신이 분리 되어 나가고…..

 

WCC라는 세계 기독교 연합 활동이 있는데, 이 속에서는 모든 교파와 카톨릭까지 손을 잡는 분위기인데 이와 같은 타협을 거부하는 측을 합동이라 분류하고, WCC 참여에 찬성하는 쪽은 통합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

 

(카톨릭을 어느 정도 포용해야 하는 가의 문제는 또 하나의 거대한 쟁점이 되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생략할께. 좀 어려워서..)

 

일단 요약을 하자면, 한국에서는 장신대(통합)나 한신대(기장) 쪽은 정통신학(칼빈주의)에 국한되지 않고, 프린스턴 대학교 처럼신정통주의 신학에 상당히 열려 있는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아.

(장신대에 계시는 조직신학 교수님인김명용 교수님이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 전파에 열심이 있어 보이셔)

 

그 이외에 고신이나 합동 등은 여전히 칼빈주의 신학에 높은 우선순위를 주고 있구….

 

그렇다면신정통주의 신학정통신학을 구분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신정통주의 신학은 20세기에 활동했던칼 바르트라는 신학자의 견해를 많이 따라간다고 보면 될 것 같아.

(정통신학은 16세기 종교 개혁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던 존 칼빈(장 깔뱅)의 계보를 잇는다고 보면 됨. 개혁주의 신학은 대개정통신학과 동의어로 많이 사용되지만, 화란 계열<네델란드>아브라함 카이퍼등의 신학을 같이 융합시켜서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아. 하지만, 지금 현재 나의 신학적 견해로는개혁주의의 범위는칼빈정통신학이나, 화란 계열신학모두를 포괄하고도 더 큰 범주를 의미해야 한다고 생각해. , 칼 바르트의신 정통주의 신학까지도 포함하는 표현이 되어야 할 것 같아.) (이 견해는 나중에 수정될 수도 있음)

 

여기 까지 논의를 해 놓고, 내 신앙 이야기를 잠깐만 할께

 

 

일단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나서는 C.S 루이스와 프란시스 세퍼에 매료되어 그와 비슷한 색깔을 견지하려고 했었어.

 

C.S 루이스는 성공회 소속이라서 정통신학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지만, 내가 볼 때는성경에 계시된 기독교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보였어.

 

반면에 프란시스 쉐퍼는 극도의 보수주의는 아니였다지만, 여전히 칼빈주의 신학에 철저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어.

(20세기에 이 두 사람처럼 기독교를 변증하려고 애 쓴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에, 내겐 두 사람이 정의의 사도로 보였어. 지금도 존경하고, 좋아하고, 본받고 싶어 하는 분들이고)

 

그런데 프란시스 쉐퍼가 누누히 비판했던 게 바로칼 바르트였어. 내가 C.S 루이스와 프란시스 쉐퍼의 수 많은 번역서들을 읽고 나서 내렸던 잠정적 결론은, ‘칼 바르트는 기독교에 아주 위험한 짓을 범한 잘못된 신학자구나!! 였어.

 

또한 프란시스 쉐퍼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일명문화 선교라는 용어를 주창해 냈고, 그의 제자들인 오스 기니스나 낸시 피어시(‘완전한 진리의 저자)의 저서들을 읽어 보면, 기독교 세계관의 중심 주장을 들을 수 있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주류는 이러한 정통신학(또는 개혁주의)에 기반을 둔 칼빈주의 신학자, 목회자가 주축을 이루고 있어. (물론, 기독교 세계관 운동 그 자체에 반대를 하는 분들도 있을터.)

 

è  기독교 세계관 운동 그 자체를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면, 나는 칼빈주의적인특정 세계관 운동에 대한 반대는 충분히 수긍이 가고, 합리적인 것 같지만 이런 논의나 고민 그 자체가 의미가 없다라고 말해 버리는 건 좀 위험한 것 같아. 관계 중심적이고, 인격으로 세상 속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거라지만, 관계를 맺게 될존재들은 결국 세상(문화)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언어를 익히지 못하고,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한다는 건 자체적인 모순이 있어 보여.

è  (물론, 이런 모종의 movement 복음과 혼동하는 시류도 위험하긴 마찬가지 일꺼야. 가령, ‘창조과학같은 경우는 근본주의 계열의 문자 해석과 방법론을 가지고 만들어진 theory 중 하나인데, 마치 이 창조과학이 말하는 모든 내용을 부정하면 하나님을 부정하고, 구원을 잃어 버릴 것처럼 이야기 하는 분들은복음과 자신들의신념을 착각한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마크 놀이 쓴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이 이 관점에 힘을 실어 줄거야)

 

(일단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입장과 중요성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한다는 전제 하에서)

 

리처드 니버가 쓴 <기독교와 문화>를 읽어 보면, 크리스천이 문화(세상)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5가지로 분류를 해 둬.

 

그 중 개혁주의적인 세계관은 5번째에 해당되구

 

나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분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누리며 살아가던 중 큰 문제에 봉착했었는데, 그건 바로 기독교 세계관의 5번째 견해가 논리상으로는 가장 성경적이고, 그럴싸해 보이는데 늘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는 점이었어.

(이건 모 대학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치시는손화철 교수님’, ‘양희송 교수님도 공통적으로 하는 고백이었고, 다른 수 많은 교수님들도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었어.)

 

작은 예를 하나만 들자면, 군대에 들어가서 프란시스 쉐퍼에게 열심히 배운 데로, 모든 문화를 변혁시켜야 겠다고 각오를 했었어.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미술, 역사 등 등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적인 문화가 세워질 수 있다는승리주의적인 견해들’……

 

그러나……

 

현실은 암울하기 그지 없었어. 세상 속에 들어가서 내 믿음 하나 지켜 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고, 세상은 전혀 그리스도적인 문화에 관심이 없었어….(딱히 이게 바로그리스도적 문화! 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빈약했고, 그게 뭔지 알려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그 때 느꼈던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 아무 것도 내 힘으로 할 수 없고, 복음을 전하고자 열심히 공부했던 모든 것들이 Useless 하게 보였어. 깨질 것 같은 두통 속에서 신음하던 중, 오직 하나님만이 한 영혼을 바꾸실 수 있고, 내가 전해야 할 복음은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 사역’(고전2:2) 뿐임을 깨닫게 되면서 점차 인격이신 하나님을 알아가고, 경험하게 되었어.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쟈크엘룰과 같은 신학자들의 저서를 탐독하게 되었고 이 분이 서 있는 입장은 기독교 세계관의 4번째에 해당되었어. 이 지점에는 마틴 루터나 사도 바울도 서 있었는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는 다분히 역설적인 것이다!! 라는 관점이었어.

 

이 영역은 실제로 세상 속에서 살아 보니 공감이 되고 인정이 되는 부분이었어.

마치 우리의 삶은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아서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그 순간의무게 중심을 찾아 내서 굳건하게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또한 내가 어제 진리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적인 삶과 세상 속에서의 삶의 세밀한 균형점을 발견했다고 해서 안심하고 살 수 없으며, 한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새로운 무게 중심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내야 한다는 관점이었어. (변증법적 신학이라고도 불리는..)

 

정말 그러하더라구…..

 

 

 

분명 논리상으로는창조-타락-구속이 맞아 보였어. 창조된 모든 것이 선하지만, 그 모든 게 타락의 범위 안에 들어갔으며, 마지막 때에 온전하게 구속될 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문화가 사실 선한 건데,(ex) , 노래, , 연극, 영화, 정치, 경제 등 등) 지금 그와 같은 선하던 것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까 방향을 바로 잡아 주면 그본질’(구조)는 선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성화될 것이다라는 관점. (이게 정통신학이 견지하는 5번째 세계관)

 

è  이 관점의 맹점은 누가 기준점이 되어서 방향을 바꿔줄 것이며, 그 방향이라는 걸 어느 정도까지 바꿔 줘야 창조 본연의선함을 유지할 수 있냐는 것. 그리고 그 본질(구조) 자체가한 건 정말 아무 것도 없을까? 라는 질문을 남겼어.

è  그리고 최근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 한 명인 N. T. Wright(‘톰 라이트라고 불리는)는 이와 같은정통 신학창조-타락-구속이라는 그림 자체에 반대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어. ‘성경이라는 장대한이야기’(Narrative)를 이와 같이 단순한 구조로 환원시켜 버리는 건, ‘성경의 놀라운 권위를 훼손할 수 있다는 참신한 주장이야. , ‘창조-타락-구속도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중요한 흐름이긴 하지만, 성경은 그 이외에도 더욱 섬세한 역사적 맥락과 상징적 맥락들이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하고 있기에 보다 더 넓은 관점이 요구된다는 것이지.

 

그 이외에도 몇 가지 참신한 세계관 적 견해가 있지만

 

결국 이 4번과 5번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만 남게 되더라구….

(난 이 두 가지를 섞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내가 그토록 찬양하고 열광하던 프란시스 쉐퍼 등의 논리가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고, 그가 그토록 반대하던 칼 바르트의 주장도 들어보기 위해 김명용 교수님이 쓰신 <칼바르트의 신학> 을 읽게 되었어.

(또한 쉐퍼가 경계하던 실존주의에 대해 알기 위해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마틴부버, 사르트르 등의 글을 읽어보게 되었어. 그리고 학부 시절에 <실존치료>라는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쉐퍼의 주장이 상당히 허술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어...그 이후에 쉐퍼가 많은 사역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었어.)

 

è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지니는 위험성에는 철저히 동의를 하지만, ‘실존주의적인 사고그 자체는 비성경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깊이 있고, 진리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아 보였어. 이건 단지 지식적인 차원이나 논리적인 차원에서만 그러한 게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그와 같은 사고가 얼마나 귀하게 쓰이는 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영역이었어.

(간혹, ‘정통신학이 견지하는, 변증론에 익숙한 사람들이실존주의를 지독히 경계하는 발언들을 많이 해. <창조과학> 활동을 많이 하는 분들 중에도 마냥실존주의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만 말해 둘께)

 

칼 바르트가 제시하는 신학은 칼빈이 <기독교 강요> 등에서 주장했던 내용의 연장선 상에 있었어. , 칼빈에게 빚을 많이 지고 있어 보였어. 그래서신정통주의 신학이라고 불렸던 건 아닌지….. 칼빈의 교리가 워낙 체계적이고, 성경에 잘 기반하고 있어서 누구든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을래야 않을 수는 없었어. 하지만, 칼 바르트는 더 나아가서 칼빈의 교리 중 성경적이지 않아 보이는 영역들을 잘 수정하고, 발전시켰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

 

è  일단 칼 바르트는 구원 받을자와 버림 받을 자가 모두 예정되어 있다는 칼빈의이중 예정론등을 반대했었어.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버림 받을 자 예정이 상호 모순되기 때문이었지. (이외에도 몇 가지 중요한 주장들이 칼빈과 다른 의견을 보였는데, 칼 바르트의 의견이 와닿는 게 많더라구)

 

(오히려, 내가 서 있는 지점이 칼 바르트에 가까웠고, 내가 경험했던 하나님과의 이야기를 더욱 잘 서술해 주는 신학이라는 느낌을 받았어. 물론, 그의 이론에서 동의가 안 되는 몇 가지가 있긴 했어. 특히 teleological suspension of ethics 라는 개념은 난 아직은 와닿지 않더라구.. 하지만, 거의 모든 영역에서는 칼빈주의 신학의 맹점을 잘 수정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이 균형감 있게 강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그런데, 이 지점에서 고민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

 

사실 어떤 목사님들은 유독칼빈주의 신학에 서서 설교를 많이 하시는데, ‘계시의 정지라든지, ‘하나님과의 대화는 이 시대에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하는 경우도 있어.

(이 문제에 대해서는알리스터 맥그라스의 회신을 통해 입장을 밝힌 바 있었지)

 

그런데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칼빈주의 신학을 견지하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동의해야 한다는 Rule 이 있거든. 그 신앙고백 1장에서 말하고 있는게계시의 정지이고……..그런 목사님들은 그 틀에 충실했을 뿐……. (수 많은 분파로 나뉘어진장로교측에서 자신들의 연합을 추진할 때,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합의점이 바로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기도 해.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이신이승구 교수님의 글과 논문을 근거로 볼 때..)

 

하지만, 말이 거창하게 들려서 그렇지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은 내가 알고 있고, 경험한 바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 속에서 전부는 아니지만 필수적인 부분을 차지한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에 고민을 다시 해 보게 되었어. (무엇보다도 정통 신학이 그토록 강조하는성경’(Scriptura) 속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가능하다는 근거들이 무수히 적혀 있지)

 

다행인 것은 황영호 목사님이나 윤진규 목사님 김형겸 목사님은 이런 영역에서 상당히 열려 있기 때문에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가질 수 있었고, 옥스퍼드 대 신학교수로 재직 중인 알리스터 맥그라스에게 여쭤 봤을 때, (현존하는 최고의 복음주의 계열 신학자) 그는 감리교에서 가지고 있는 웨슬리안 사대행이라는 교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4가지를 이야기 하더라구

(그가 답해 준 관점이 내가 동의하고 있고, 내가 경험하고 있는 방법과 거의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나는 그 지점에 서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어.)

è  위에서도 언급한 N. T. WRIGHT(톰 라이트) 교수님은, 웨슬리안 사대행,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4가지 루트인성경’, ‘전통’, ‘이성’, ‘경험중에서 마지막 범주인경험의 범주를 비판하긴 해. (하지만, 이 영역은 가장 많은 위험성과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해도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해. 이론과 실재를 연결시킬 만한 더욱 매끄러운 Categorization(범주화)이 존재한다면 누군가 연구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우리가 정통신학의 틀 속에 갇히지 않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온전한 진리를 끊임 없이 찾아가지 않으면 어떤 목회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사유가 제한될 수 있음을 힘주어 강조하고 싶어.

 

일부 목사님이성령 체험등에 대한 극도의 경계를 보이시는 이유는 그 분들 스스로가 겪으셨던 아픈 기억들도 큰 이유가 될 것이고, 요즘신비주의 적인 성령 사역이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경계로서도 그러하셨던 것 같아.

 

(그와 같은신비주의 영성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아. 일단 요즘 성행하고 있는예언자 학교등을 수료하여, 자신들이 꾼 꿈이나,  예언에 엄청난 권위를 부여하는 일부 성도들은 부지불식간에 성경 읽기를 등한시 하고, 자신들이 느끼는 심상이나 이미지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경우도 많아….. 그런 입장에 확고히 서 있는 사람들과는 대화가 잘 이뤄지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입장은 이미하나님의 입장 equal하게 되어 버리기에……) <그들의 인식 속에서>

 

 

 

즉 스펙트럼을 그려 보면, 오른쪽 끝에는 완전한 계시의 정지와 이 시대에 더 이상 성경책 이외에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수 없다는 보수 측의 장로교나 근본주의자가 있다면 그 그래프의 왼쪽 끝에는 오순절, 순복음 계열의 성령파들이 있을 거야. 그들은, 성경이라는 명확한 기준점을 위험하게 넘어서는특이한 체험이나기사,이적을 무분별하게 강조하곤 할거야

 

우리는 중간 어디 쯤을 견지하고 있는 게 가장 좋을 것 같구. 그 스펙트럼은 온건 장로교나 감리교, 침례교 쪽에 가까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꼭 이렇게 분류시킬 수 있는 건 아니야. 소속은 한 쪽 극단이더라도, 그 사람이 살아내고 있는 신앙 생활은 진리에 가까울 가능성도 분명히 있어)

 

참고로 내가 책을 분별해서 읽을 때십자가 복음에 잘 서 있고, 말씀으로 단단하게 무장되어 있고 성령님의 역사도 제한하지 않고 민감하게 깨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책들은 대개침례교쪽에 많이 있더라구. (그렇다고 침례교로 옮기자는 말은 아니야…..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인간적인 신학의 틀에 메이지 않고, 오직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어.)

Ex) 헨리 블랙카비 목사님이 쓰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데이비드 플랫 <래디컬>, 여주봉 목사님 <십자가의 복음> , 손기철 장로님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 , 정원 목사님 <주님의 마음, 주님의 임재 속으로>,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의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등은, 신앙의 본질이 인격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음을 균형감 있게 잘 말해 주고 있어 보였어. (여기서 손기철 장로님 같은 분들은성령 사역’, ‘치유 집회도 많이 하시기 때문에 한국 정통 장로교에 계신 분들은 매우 경계하고 있어. 그들은, ‘계시의 정지라는 교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개인적 체험과 깨달음으로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는 일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당연히 경계할 수 밖에 없어. 그리고 정원 목사님의 다른 책들은 아직 추천을 잘 못하겠어. 약간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하지만 저 책은 상당히 좋아.)

 

 

 

그 이외에도 청교도 신앙을 견지하는 정통신학의 대변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 같은 경우는 성령님의 임재에도 상당히 깨어 계시기 때문에 상당히 좋아하는 분이고(물론 카톨릭을 이단시 여기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나 존 스토트 목사님이 힘쓰신에큐메니컬 운동에 함께 하지 않으려 한 점에서 기독교의분열을 조장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그 분 입장에서는 나름 옳다고 생각한 길을 지키려고 한 결정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실지 의문일 때가 많아.) 아까 언급한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신앙도 참고하기 참 좋은 것 같아. (그 이외에도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스펄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등의 삶을 들여다 봐도 성경과 성령의 조화가 잘 이뤄지고 있어)

(찰스 스펄전의 설교집은 정말 최고!!!!!!....이런 믿음의 조상이 있어서 너무 다행)

 

말하고 싶은 요지는, 성경에 계시된 구속사는 당연히 완성된 게 맞지만 그와는 별개로 하나님은 인격체이시고 지금도 말씀하실 수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점이 강조되는 게 더욱 성경적이라고 난 주장하고 싶어. (이런 고백은 이미 칼바르트의 신학 틀 속에 포함이 되어 버려…)

 

è  보수 장로교 어르신들은 이와 같은 고백을 허용해 버리면 성경의 권위가 훼손되고, 너도 나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여 각종 이단을 양산하고, 분별력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 해….. 이러한 경계도 매우 중요하고 맞는 말이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경 그 자체를 신으로 모시는 게 아니라, 성경이 계시하는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는 점이 강조되는 게 더욱 맞다고 생각해. (이 역시 칼 바르트 신학에 포함된 고백이더라구)

è  종교 개혁 당시에 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가 워낙 강조되다 보니, 사람들은 정말 성경만을 보려고 했었어. 그러다 보니, 안정성은 뛰어 나고 모가 난 행동을 하지는 않게 되었다는 큰 장점도 있었지만 동시에 성령님의 존재는 있으나마나 한 게 되 버리는 문제점이 생기더라구. (사실 그 분들 논리를 따라가면 기도를 할 필요도 없게 됨….. 기도는 철저히 관계성에 속해 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듣고 구하는 시간이며, 그 분을 만지는 시간인데 이와 같은 논리가 먹혀들 자리가 없더라고……….그냥 성경을 읽고 그 내용에 지식으로 동의해서 끄덕이면 그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여기시는 분도 많아……….만약 이 정의가하나님의 음성 듣기라면, 바리새인이 저주를 받을 이유는 단 하나도 없어야 할 텐데…. 라는 큰 의문을 남겨…)

 

특정 교단은 큰 문제다!!! 이런 말은 유익하지 않은 것 같아. 심지어 그 분들이 <계시의 정지>를 주창하며,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로막는다 해도 칼빈주의 신학이 지니고 있는 수 많은 강점들과 견고함 또한 높게 보고 있거든. (답이 잘 나오지 않아도 연합은 해 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칼빈이 주장한 핵심 5대 강령인 TULIP 이라는 교리가 있는데, 그 중 T에 해당하는 Total Deprivity(전적 타락) 같은 부분은, 감리교에서는 반대를 하지만 난 이 부분이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는데 굉장히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고 있어.

 

그 이외에도 I 에 해당하는 Irresistable Grace(저항할 수 없는 은혜), P에 해당하는 Perseverence of Saint(성도의 견인) 등의 교리도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를 향한 무한한 사랑이 잘 드러나 있는 성경적인 교리라고 믿고 있어. (결국 가장 근간이 되는 베이스는 나 역시 칼빈주의 신학에 가까워 보이긴 해)

 

그리고 최근에 어떤 목사님이 최근에 <마지막 신호> 라는 데이비드 차? 선교사님 책을 추천하셨는데(영풍 문고에 갔더니 신앙 서적 베스트 셀러에도 올라와 있더라걱정이 된다), 이 책이 말하는프리 메이슨’ , 666 배리칩에 대한 의견들은 정통신학에서도 경계를 하고 있고, 나도 정통신학자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어.(이와 같은 책을 추천하는 목사님들은 대개하나님의 음성 듣기’ , ‘성령의 기름 부으심등에 매우 익숙한 분이실 가능성이 커. 그래서 개방된 사고 속에서 누군가가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면 그들의 논리를 일단 따라가 보게 되고, 결국은 극단적인 예언자적 메시지나 문자적 해석도 충분히 거부감 없이 수용해 버리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내가 원하는 바는 성령님의 자유로운 임재하심을 제한하진 말되, 철저히 성경에 기반하여 민감하게 분별하며 하나님께 길을 구해야 하는 섬세한 지점을 찾아 나가는 거…)

(그런데, 데이비드 차 선교사님의 간증을 직접 듣고 나눠준 어떤 형의 말을 들어보면, 참 진실되고 가슴을 후벼파는 스토리들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어디까지 문을 열어 놔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만약 저와 같은 고백들이 허용되어 버리면 다른 이단들을이단이라 부를 만한 근거가 매우 빈약해 진다는 위험성이 커서……….일단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는 볼 수 있고, 참고 정도는 할 수 있으며, 개인적으로 마음에 담아둘 수는 있지만 이 메시지들을복음의 일부로 여기고 마냥 전하기가 위험해 보여)

è  김우현 감독 등처럼 존경하는 분들도 이와 비슷한 발언을 할 때가 많으시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긴 힘들 것 같아. 더욱 선명하게 비춰 주실 날이 있겠지……

 

마크 놀이 쓴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이나, 류대영 교수님이 쓰신 <미국 종교사> 등을 함께 읽어 보면, 19세기에 태동한 근본주의자(세대주의자)들의 독특한 요한 계시록 해석법 등을 알게 되고 그 연장선 상에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다양한 문자적 해석, 예언들의 문제점을 보게 되는 것 같아.

(일말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건 아니지만,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영상이나 블로그 카페에 있는 이런 류의 기사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게 더 맞는 것 같아……가령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음녀는 카톨릭의 마리아라든지, 적 그리스도는 유럽 어딘가에서 실제로 나타날 것이라든지…..윌리엄 왕자가 적그리스도라든가……이런 류의 말들은 One of the possibility 정도로는 받아 들일 수 있지만, ‘진리의 일부라고 보기에는 너무 무리수가 많아 보여………100번 양보해서 정말 그런 이상한 해석이 성취한다 해도 그걸 모른다 해서 우리가 버림 당할 이유도 없고……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붙드는 자는 구원을 받는 것이기에해석이 일관되게 하나로 모아지면 좀 더 진지하게 기도해 보겠는데, 워낙 의견들이 다르니………)

 

이런 면에서 정통신학의 역할도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

 

결론은치열하게 고민하며, 신앙의 본질을 살아내고 경험하며 알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

 

그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지점을 바르게 알고 움직일 줄 아는 자세….

 

그리고 우리가 특정 교회에 다니고 있다면 그 목사님의 철저한 신학에 많이 노출이 될 것인데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창조적으로 사고하는 마음도 계속 지니면서 열심히 존경해 드리고 좋은 것을 알아가되, 진리의 문제에서는 내적인 씨름을 그치지 않아주길 부탁하며…..(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이기에 늘 한 몸이라는 연대의식과 친밀한 중보는 잊지 않아야 함)

 

세상은 날로 혼탁해 지고, 영분별 하기가 정말 힘들어 지는 시대이기 때문에 섣불리 답을 내리기 보다는 더욱 경험하고, 알아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

 

 

 

 

[핵심 이야기]

 

1.     평신도지만, 우리의 첫째 사명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이웃에게 하나님 사랑을 전하는 것이므로 신학적 공부는 게을리 하지 말 것. 그래서, 장로교에서 중요시 여기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 등과 아울러, 감리교, 침례교, 오순절 등 포괄적인 공부를 해서 가장 성경적인 지점을 찾아 나갈 것.

2.     균형과 긴장을 철저하게 유지하기. 진리는 중간 어디쯤에 있다는 말이 있을 만큼, 이 시대 속에서 민감한 균형점을 찾아가는 건 중요할 것 같아. 가령,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다양한 성령 사역자들의 활동들을 보면 분명 그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고, 권장할 부분도 많지만 워낙 질병 치유나 눈에 보이는 기적에 집중하다 보니 예수님과 그 분의 인격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더라구…. 그런 류의 운동은 주의 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 같고, 또한 반대 극단에 있는 것처럼 율법에 너무 메여서 성경 속문자에 머물러,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만드는 모종의 교리적 틀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필요한 것 같아. 극단은 늘 위험하며, 양 극단이 과도하게 변질되었을 때 각종 이단이 양산되었음을 기억하며

3.     프란시스 쉐퍼와 C.S 루이스가 했던 역할들은 참으로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아. 지금에 와서는 쉐퍼의 핵심 주장들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긴 하지만, 그가 세상과 소통하려 했으며 기독교는 논증이나 토론을 할 수 없는 철저한 전제로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한 다른 보수주의 신학자들에 비하면 정말 많이 열려 있는 분이기 때문에 그의 사역은 높이 살만한 것 같아. 여전히 두 사람을 존경하고 있고, 알아가는 중.

è  세상과의 소통을 잃어 버리면, 기독교가 아무런 역할을 해낼 수 없다는 점을 잘 알려줘서 빚을 많이 진 분들.

4.     그리고 내가 칼빈이니, 칼 바르트니 어려운 신학자들 이름을 언급했지만 정말 중요한 건신학을 공부하고 나서 그 신학에 나를 끼워 맞추는 게 아니라, 내가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알아가고 그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살아 왔는데, 정신을 차리고 신학을 조금씩 공부해 보니 이미 내가 했던 경험들이 신학의 스펙트럼 속에 포함되어 있더라는 것….. 결국 역사 속에 하나님이 심어 두신 신학자들의 활동들을 벗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라는 점……(이런 측면에서 신학은 중요해 보여…)

5.     한국에서 칼 바르트를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매도하는 분들도 인터넷을 포함해서 꽤 있는 것 같던데, 정통 칼빈주의 신학의 틀에서 바라볼 때 자유주의라는 것 뿐이지, 실제로 독일에서 칼 바르트는 보수주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 같아. 이들이 구분되는 여러 가지 요인 중 가장 이슈가 되었던 건성경 무오설부분인데, 정통신학 측에서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으니 오류가 있으면 안 된다는 입장이고, 성경을 학문적으로 비평하고 분석하려 했던고등 비평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의 출현을 극도로 경계했어. 그들이 성경이라는 신령한 경전을 인본주의적으로 비평하는 건 있을 수 없다는 관점이었지. 여기서도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은데, 모든 성경은 결코 오류가 없다는 쪽은 요즘은 별로 힘을 얻지 못하고 있어. 왜냐하면, 고등비평에서 말을 굳이 안 해도 우리가 그냥 성경을 읽어도 분명오류가 있기에….. 그런데오류라는 말을 쓰면 사람들이 하도 오해를 많이 해서 그냥불일치’(discrepancy)가 있다고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즉 내용의 오류를 말하는 게 아니라, 4복음서 등에 흔히 등장하는 시간의 오류, 인물의 오류 등 단어에 오류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사람들은 이걸 인정하지 않더라구칼 바르트는 이런 영역에서 열려 있었어. , 인간의 불완전함을 통해 완전한 진리를 드러내시고자 했기에 단어나, 연대의 불일치가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라고 주장했던 게 칼 바르트였어. (지금에 와서 보면, 이 고백이 가장 맞아 보이는데 정통 신학 하시는 분들은 그걸 납득할 수 없나 봐, 왜냐하면 성경의 권위가 너무 훼손되어서 그런 허점이 있는 경전을 진리라고 주창하기가 힘들어 질까 봐 두려워 해. 계몽주의를 거쳐서 과학적이고 분석적 사고를 잘 하는 사람들의 비판에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이지..) 그래서 내 놓은 타협안은 성경의 사본들에는 이런 글자의 불일치가 많지만, 성경 원본에는 결코 그런 불일치가 있지 않았을 거라는 주장을 요즘 하고 있어. (그래도 꽤 깨어있는 장로교 신학자 분들이 지지하실 듯) -> 여기에도 맹점이 있다면, 모든 사본이 하나 같이 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고, 완벽히 일치하는 사본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 말은 원본 또한 그와 같이불일치를 내포한 채 기록되어져 있었기에 그걸 필사한 사본이 조금씩 틀린 게 아니냐고 해석하는 게 일단 논리적으로는 당연히 맞는 말인데, 이런 류의 비평을 결코 허용해선 안 된다고 그 분들은 말씀하고 있어.

 

참 중요한 이슈들이 많아. 나눌 말이 많지만 이 정도만 나눠 둘께.

늘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만지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길

그리고 그 하나님을 전하기 위한 최선의 지점을 찾기 위해 씨름하며 기도하길.

무엇보다도 우리는 함께연합해야 하기에, 바른 지점을 주장할 때도 늘분열을 조장하는 글과 말과 행동은 지양하자.

마지막으로 어떤 입장이 되었든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관점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면, 모든 논리는 뒤집힐 수 있다는 점. 분명히 피력해 두고, 글을 마칠께.

 

[성경 무오설]과 관련된 부분은, 따로 글을 올려 줄께!

 

-기존에 우리가 들어 왔던장로교적 틀을 약간 벗어난 관점을 전개하고 있지만, 찰스 스펄전, 조나단 에드워즈, 마틴 로이드 존스, 칼빈, 성 어거스틴 등이(최근에는존 파이퍼 목사님) 보여주는 탄탄한 신앙적 고백들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두 지점을 연결시킬 수 있느냐 하는 점에서는 좀 더 기도하며, 공부해야 할 것 같아. ‘칭의라는 이슈를 놓고 현대 신학자들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데, 이와 같은 부분들도 양 측의 의견이 모두 팽팽하기 때문에 답이 내려질지는 잘 모르겠음.(무엇보다도 가장 큰 target이 되었다는 점에서장로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고, 또한정통신학의 정통성 또한 일견 증명이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진리를 분별한다는 명목 하에, 너무 많은 정죄와 판단을 일삼진 않았는지…. 우리가 특정 교파의 흐름에 너무 익숙해 진 나머지 참과 거짓을 분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우선하는서로 사랑하라는 명제를 너무 단순히 여겼던 건 아닌지 반성해 보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님과 나의 사귐]

 

 나는 어떤 길로 가야 해요?’ 라는 질문을 던질 때, 예수님은 잠잠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란다.’ … 나를 잡으렴…. 나를 만지렴…. 나를 보렴…..나를 받아 들여 주렴……네가 나와 같이 걸어가게 될 때, 네 마음 속의 수 많은 질문들은 사라질 거란다……..미래를 주도하고픈 너의 욕망은 사라지고, 모든 주도권을 내리게 되기에 참된 자유와 평강 속에서 삶을 꾸려 나가게 된단다. 무언가를 잘 보일 필요도 없고, 무거운 의무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되고, 그저나의 생명과 나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면 되는 거란다……….내가 곧 길 그 자체며, 내가 곧 생명 그 자체란다…….십자가를 붙들고, 나와 다시 관계를 맺자꾸나…….오직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만 난 너와 관계 맺을 수 있단다……. 가자꾸나함께….난 분명한 목적과 뜻과 의중을 지닌 인격체 하나님이란다. 내가 널 창조한 분명한 목적이 있고, 구체적인 계획도 있단다. 그러나내가 원했던 건 어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었으며, 지금 이순간너와 함께 사랑할 수 있고, 관계 맺을 수 있는 것을 열망했단다. 네가 나의 사랑을 경험하는 순간, 순간을 결코 포기하지 않게 될 것을 난 확신한단다. 넌 다른 것을 구하지 않게 되고,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내 소망이 주께 있나이다.’[시편39:7],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편27:4]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3:7~9]. 를 고백하게 될 거란다.

 

그저 기도할 뿐…..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계속 함께 할 것을 확신하며

 

샬롬!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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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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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소개

최용준 목사 (기독교 철학)

-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B.A.)
-
미국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Westminster Theological (M. Div.)
-
네덜란드 암스텔담 자유대학교 철학부
   Vrije Universiteit te Amsterdam (Drs.)
-
남아프리카공화국 포체프스트롬 대학교 철학부
   Potchefstroom University for Christian Higer Education (Ph. D.
기독교 철학)
-
독일 쾰른한빛교회 담임목사,
- VIEW, KUIS
교수(기독교 세계관, 기독교 철학)
-
유럽밀알선교단 이사
-
현재 2006 8월부터 2008 현재까지 벨기에 브뤼셀한인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세미나] (주최:학문과 신앙 연구소 , 기독교적으로 가르치기 모임 (기가모)

학문과 신앙 그리고 문화(Faith, Science and Culture) : 헤르만 도예베르트의 선험적 비판(The transcendental critique of Herman Dooyeweerd)

[강의 시작]

1880년대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자유대학을 설립. ‘영역주권이라는 제목으로 opening 연설을 했었는데,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라는 그의 비전을 분명하게 밝혔었다.

 

카이퍼의 비전이 지금도 계속 우리 대학에서 이어지고 있는지는 ,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그러한 spirit 이 없어진 것은 아니고, 계속해서 적지 않은 학자들에 의해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도예베르트는 카이퍼의 이론을 우주론적 철학으로 더욱 발전시켰다.

 

[문화의 개념] 학문과 신앙과 문화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문화가 가장 포괄적인 개념이다.

è 정의:

인간활동의 총체 및 그 활동의 산물이며, 주위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통해 발전된 삶의 양식 또는 라이프 스타일 그리고 인간의 삶을 향상시키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역사적이고 동적인 과정.

 

손봉호 교수님,강영안 교수님의 지도 교수님인 반 퍼슨 교수의 문화관

1.    자연에 대한 개발(transforming nature)

->자연과의 interaction 을 통해 계속 새롭게 변혁시켜 나가는 거다.

2.    현실에 대한 관점(A perspective)

è 각 문화에 맞는 관점이 존재.

3.    세계의 개현(opening up of the world)

è 반 퍼슨, 도예 베르트 교수 모두 이 개현이라는 말을 쓴다. , 이 세상은 되도록 open 되도록 만들어 짐.

4.    전략(strategy)

è 한국 문화나 음식 들이 전략적으로 개발 된다.

5.    학습 과정(learning process)

è 세대를 초월해서 계속 대물림 되는 것이다.

6.    오픈 시스템(open system)

è 계속 발전되는 것이다.

7.    인간의 자유 및 책임성(human freedom/responsibility)

è 인간의 인격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8.    신적 영역(the zone of the divine)

è 가장 궁극적으로 문화는 신적 영역이 있다. 즉 모든 문화는 신앙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도예 베르트 교수의 문화관 (아주 systematic 하게 논지를 전개하시는 분이다.)

1.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현상(individual and concrete phenomena)

è 각 지역에 구체적인 현상들

2.    현실의 한 국면 내지 양상: 핵심적 요소는 , 형성력 (an aspect of reality : its essence is , formative power)

è 문화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피조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힘이기 때문에 , 문화의 핵심은 형성력이라고 봄.

3.    문화는 하나의 , 사명(culture as a task (Aufgabe)

è 이뤄 나가는 하나의  task .

 

[문화상대주의 및 민족 중심주의]

1.    문화진화론 및 유럽중심주의 비판

è Primitive culture 라는 말은 이제 잘 안 쓴다. 너무 서구 중심적 발언이라고 생각해서 말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이라는 말도 틀린 거다..그들은 인도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도 서구 사람들이 붙인 것이므로 , 그들을 요즘은 native American 이라고 부르곤 하는 거다. (문화 진화론)

è 반 퍼슨 교수님은 도예베르트 교수님이 너무 유럽 중심주의라고 비판을 하심. , 보르노빈 교수님의 제자들도 도예베르트의 이런 부분들을 많이 비판한다.(반 퍼슨, 도예베르트 , 보르노빈 교수님 모두 기독교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침)

2.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

è 이 두 가지를 다 구별하자.

 

[도여베르트의 문화개현이론]

15개 양상 (15aspects)

규범적 양상의 개현 과정(opening process of normative aspects)

규범적 양상의 법칙면:규제적 원리(Law side of normative aspects : regulative)

è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 법을 가지고 창조하셨는데 자연법’ , ‘규범이 있다고들 한다. 자연법은 자연 과학적인 법칙 이고 , 사실이고 변경 불가능하지만, 문화의 법은 규범적이라서 우리가 순종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규범적 양상은 잘못 갈 수도 있으므로 , 우리 인간이 어떻게 그것을 형성해 나가느냐를 고민해 나가는 거다.

인간의 형성:구성적 역할 (human formation: constitutive)

판단규범:통합화,다변화,개인화(criteria: integration , differentiation , individualization)

è 어떤 문화가 더 발달된 문화인지를 평가하는 기준이 있는데 , 그게 이런 것들이다.

è 모래알 처럼 분리된 게 아닌 , 통합된 세상

 

[문화의 종교적 근원성] (목사님이 정리해 보심)

1.    동양문화: 정적, 자연과의 조화 강조(oriental culture: static, harmony with nature)

2.    서양문화: 동적,합리적, 개인의 독창성(Western culture: dynamic, rational , creativity of individual)

è 개개인이 더 드러난다. 인물화에서도 개개인이 더 강조되어 있고 ,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global perspective 를 얻기도 했었고…. (어느 정도 성경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듯…culture mandate 등도 적용하고…..)

 

[기독교적 문화관]

1)    창조(creation) -> 문화의 시작(the beginning of culture)

2)    타락(fall into Sin) -> 문화의 왜곡(the distortion of culture)

3)    구속

4)    완성

 

 

[기독교적 문화관의 내용]

[11:36] 이 가장 잘 압축된 구절이라고 보심.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 기원(origin)

그로 말미암아 있고:과정(Process)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 목적(Purpose)

 

Form(창조)-> deform(타락) -> reform(구속) -> transform(완성)

 

[1.창조-문화의 기원]

창조의 정의 : Creator (창조주) -> Law() -> Creature (피조물)

도여베르트가 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이유는 그가 법학자라서..

[창조법의 두 종류]

1)    자연법-> 사실들(facts,is) ex) 중력의 법칙

2)    문화적 규범 -> 가치들(values) ex) 십계명

[문화의 범위]

1)    이 세상의 만물은 다 피조물이다.(The whole reality is thoroughly creaturely)

2)    하나님의 주권,주되심,왕되심(아브라함 카이퍼,칼빈도 이걸 강조함)

(the sovereignty , Lordship and Kingship of God)

(그래서 아브라함 카이퍼가 자유대학을 설립한 거다.)

 

[문화의 발전]

1)    창조는 하나의 open system 이다.(문화도 마찬가지고..)(튤립이 오므러져 있다가 점점 퍼져 나가는 것처럼)

2)    문화명령(cultural mandate) : 창세기1:28(발전에 대한 명령),2:15(보존에 대한 명령)~

(도여베르트의 xxxx 책에서 이 용어가 처음 언급됨)(아담이 동물의 이름을 짓는 것 부터가 , academic 한 활동이라고 보심….동물을 잘 관찰하고 , 그들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을 짓는 다는 것은 , 그 당시의 the highest level 의 학문 수행을 한 것이 아니겠는가.)(식물도 잘 관찰하고 , 그것들을 개발해서 가인과 아벨에서 농경 사회까지 이끌게 만들고…)

3)    응답적 인간(Homo respondens)

4)    동산에서 도성으로

 

(에덴 동산에서 호마노 등 , 지하 자원도 언급이 되어 있다나…….아담과 하와에게 이런 것들을 개발하라고 주신게 아닌가 생각해 보심)

[문화와 역사의 응답성]

하나님의 말씀(독일어:Wort) -> 인간의 응답(antwort )-> 책임진다(verantworten) -> 책임(verantwortlichkeit)

 (독일어가 논리적이고 , 과학적이라서 이 언어를 쓰심)

(responsibility= response+ability)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대한 이야기….)

 

[문화적 대리자로서의 인간] (‘동산에서 도성으로’)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했던 모든 학문활동 들이 문화 활동들이 계시록에서는 완성된 도성으로 바뀌어져 묘사되어 있다고 보심.

 

[문화의 완성자 하나님]

‘(만물이)그를 위하여 있습니다.(11:36)

순환론적 역사관

직선적 역사관

창조는 완성을 지향한다.

 

[창조의 언약성]

하나님의 신실하심(33:20~21 , 25~26)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my covenant with the day and my covenant with the night)

(하나님이 신실하셔서 우리가 학문을 할 수 있는 거다)

 

[:하나님의 형상]

     1)    삼위일체 하나님(Trinitarian God)

2)    인간(Human Being)

3)    ,진리,거룩함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The Father, the divine architect

The son , the divine builder[3:1~4]

The holy spirit , the divine artist [1:2][26:13]

 

[악의 문제]

C.S LEWIS 의 말을 인용하심.

 

 

[타락-근본적인 문제]

1.    타락의 범위(The Scope of the Fall)

-죄의 우주적 영향(the cosmic effect of sin)

2.    창조와 죄와의 관계(The relation of creation and sin)

-몸과 기생충(body and parasite)

3.    구조와 방향(structure and Direction)

-일반은총(common grace)

[11,12] 장을 비교해 보면 , 두 가지 학문의 방향성을 볼 수 있다.

가인의 후손들은 계속 동쪽으로 가면서 , 학문 활동을 하는데…..악기 만드는 사람도 있었고 , 나중에 바벨탑을 짓는데 , 건축과 모든 문화 활동의 합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가인의 후손들의 학문 활동의 final product 였다….. 그들은 실패했는데 ,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인본주의적인, 내재주의적인 학문관을 가졌으므로 , antinomy(배율) 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다른 방향으로 감…..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서 믿음으로 한 걸음 , 한 걸음 나아 갔었다.

[실락원] , [악의 문제]

 

4.왜곡된 창조세계(12:2)

5. 우상: 하나님과 인간의 왜곡

1)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2)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모든 –ism 들은 다 도여베르트는 우상으로 본다. (이 모든 것들이 학문의 한 면 만을 절대화 하고 있으므로 우상이라고 말한다.)

타락한 인간은 우상을 만드는 공장과 같다라고 말함 -> Calvin ..

 

[죄의 가능성]

1.    창조에서 타락까지(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

2.    타락에서 구속까지(타락의 영향력 아래에 있으므로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상태)

3.    구속에서 완성까지(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상태)

4.    완성 후.(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

 

[궁극적인 해결]

-완성된 회복: restoration accomplished

1) 회복으로서의 구원 (에피테제<Epithese> : -> 인간의 신체 일부를 회복시키는 것…..독일에서는 에피테티커 라는 직업이 있다….. 여러 의사가 협력하여 이런 일을 한다. 눈 한 쪽 없는 사람의 얼굴도 성형 시켜 주고….

2) 화해

3) 새로운 피조물(Renewal) : 고후5:17

4) 자연을 회복하는 은총

 

[구속사] 1) 원시복음:3:15 , 2) 노아와의 언약: 6:8,9:9~17 (노아도 ship builder 였다..상당히 학문적 연구가 되었어야 , 이런 걸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그냥 나무 가져다 붙인 게 아니다.)

(노아가 자신의 지식,학문 문화 활동들을 집약시킨 게 방주다.), 3) 아브라함과의 언약(12:1~9,할례를 통해) , 4) 모세와의 언약 출:20 (안식일) (애굽에서는 우상을 만들 때 쓰이던 금속,자원들이 나중에는 하나님의 성막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이것도 문화적인 활동이다.)(재료는 애굽에서 왔지만, 이게 금송아지를 만드는 게 아니라 법궤,지성소,성막 등을 만드는 데 쓰임…..바른 방향성을 회복한 것이다.) , 5) 다윗과의 언약(삼하:7 , 왕관) -> 왕관,성전 짓기 등이 다 문화 활동이었다. 6) 새 언약:26:27~28 (컵 이 상징으로 쓰임) (예수님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심) (니고데모 같은 높은 학자도 만나고 , 천한 사람도 만나면서 문화 활동을 하심)(나중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 각자의 보물을 들고 드러간다는 계시록 21장 말씀의 성취가 아닐까)

 

[예수님의 사역]

1)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재성( 12:28 , 13:12 , 10:38)

2)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

 

[구속의 성취와 적용]

1)    예수 그리스도

[교회:하나된 공동체]

1)    그리스도의 한 몸

2)    한 믿음 , 한 소망, 한 사랑, 한 세례

3)    인종과 민족, 문화와 언어를 초월한 하나됨.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인의 삶]

D-day(초림) , v-day(재림) (우리의 학문적,문화적 , 우리의 살마 전체가 성화되어 가는 과정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라이프 스타일]

1.    목표(Goal) : 오직 하나님의 영광

2.    동력(Dynamic) :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

3.    동기: 하나님에 대한 믿음/사랑/감사

4.    상황

5.    기준

청교도 학자의 말 -> Theozoia (lilving onto God)

 

[21:1~4] (주해)

1)    새 하늘과 새 땅

2)    우주적인 새로움

[2] 거룩한 성:새 예루살렘]

-> 1) 신부로서의 교회: 가장 사랑스럽고 친밀한 교제

2) 가장 거룩한 도성

3) 가장 평화로운 도성

(21:16) -> 정 육면체 를 묘사함…perfect 를 상징 , 구약에 나타난 지성소의 완성이 천국인 것이다…. 가로,세로,높이가 같다는 건 , perfect harmony 를 나타낸다.

(새 예루살렘의 모든 재료가 보석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모든 활동의 완성 작품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3)함께 하시는 하나님

 : 1 )제단: 아브라함, 야곱 , 2) 성막: 모세 , Shekinah (히브리어로 성막을 덮은 구름’) (쉐키나,쉐카이나)

3)    성전:솔로몬 , 에스겔-요호와 삼마(the LORD is there) , 4) 성육신- 임마누엘 , 5) 성령의 강림, 베드로도 상당히 지성적으로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구약도 정확하게 잘 인용하고 6) 새 예루살렘

(4) 영원한 축복)

- 모든 눈물을 씻기심

-다시 사망,애통,,아픔이 없음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교제

-영원한 안식

-온전한 지식 (그 날이 오면 , 온전해 질 것이다….지금은 다 알 수 없지만)

-거룩,기쁨,섬김,풍요,영광,예배의 삶

(계시록 21장 후반부에 , 열왕들이 자신의 보화를 들고 주님께 나아간다는 구절이 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모든 학문활동,모든 문화활동의 열매를 가지고 나아갔을 때 그것을 기뻐 받으신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보심) (학문과 문화의 연속성이 있음을 믿으심, 물론 비연속성도 있음을 고백하심..)

 

[6. 도여베르트의 선험적 비판]

이론적 사고의 선험적 비판이란 무엇인가?(what is the transcendental critique of theoretical thought?)

[헤르만 도여베르트의 사상]

1.    의미로서의 실재

è 의미라는 용어를 많이 쓴다…..’실재라는 건 철저하게 dependent 한 것이지 , 자충족적일 수는 없다고 보기에 의미로 실재를 설명하고자 함.

2.    실재의 기본 구조

-선험적 기본 이념

1) 만물의 기원

2) 의미의 총체

-> 이 세상의 모든 총체들을 한 점에서 볼 수 있는 , 아르키메데스의 지랫대와 같은 point 를 이르는 말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 피조물들을 totality 를 가지고 볼 수 있을지에 대한 idea .

3) 우주적 시간으로 연결된 의미의 다양성

-> 이 다양한 것들을 어떻게 구슬을 줄로 꿰듯이 꿸 수 있느냐를 고민함.

-> 우주의 다양성을 연결하는 건 시간이라고 봄. 우리는 시간의 제한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실재 , ‘기본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3가지 기본 이념)

( 3가지는 모든 철학의 전제가 된다고 봄….이 선험적 기본 이념을 수용해야 한다고 본다.)

 

[헤르만 도여베르트의 사상]

1.    개체 구조(individuality structure) -> 창조에 의해 주어진 구체적 사물의 법적 질서

2.    양상 구조(Modal structure) : 예기, 회기 및 핵을 가진 특정한 양상.

è ,공간,운동,물리(무생물),생물(식물),감각(동물),분석(논리),역사(문화),언어,사회,경제,,,윤리,신앙 등의 측면에서 분석이 가능하다.(다 합치면 사람)

Ex )쓰고 계시는 포인터를 가지고 개체 구조가 있고, 이걸 양상 구조 측면에서 각기 다뤄 주심..

(법학도 현실의 법적 양상논리적 체계가 합쳐져서 법학이 된다고 봄.)

(두 양상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가 하나로 합쳐지면 그게 학문이 된다고 봄)

 

[이론적 학문 활동의 중립성 비판]

1.    의미의 총체성을 지향하는 이론적/철학적 사고

2.    이 지향의 방향성은 자아에 의해 결정됨

3.    이 자아는 다시 기원에 의존함.

(이런 철학적 사고도 종교적 뿌리에 의존한다고 본다.)

 

[법과 종속체]

     1) : 피조물과 창조주의 경계

2)    종속체: 그 법에 종속된 물체

3)    창조주:법의 제정자 : Law-Giver …..

(법의 제정자를 모르면 , ‘그 자체를 절대화 시켜 버린다…..ex) 도교,천리교 등..)

 

영역 주권의 원리-> 정부,교회,학교 의 영역 등이 있음을 아브라함 카이퍼가 처음 주창했는데 , 도여 베르트는 처음에 말한 15개의 양상은 각각의 독립적인 주권이 있는데 이들은 서로 서로 연결된다고 봄

마음: 4:23 (인간의 집중점)

모든 양상들을 초월하는 집중점/초점

인간의 삶에 있어 근원과의 관계

삶의 방향이 결정됨

 

[이론적 사고의 선험적 비판]

1.    이론적 사고의 종교적 뿌리 발견 (그의 주 저서다.)

2.    이론적 사고의 선험적 비판

3.    서양 사상/xxxxxxxxxxxxxxxx

 

[첫 번째 방법]

철학: 의미의 총체성에 대한 탐구

이론적 사고의 종교적 뿌리를 밝힘

문제: 이 철학의 정의에 동의하지 않음.

è 철학의 정의에 대해 인본주의 철학자들이 반대를 함.

 

[두 번째 방법] (비판 받고 나서 , 다시 고민하다가 두 번째 방법을 제시함)

이론적 사고의 분석

이론적 종합: 인간 존재의 집중점

-> 종합은 인간 존재의 집중점에서 일어나는데이건 결국 마음의 기원을 지향할 것이라고 말함……물론 이런 말에도 비판이 가능하다……..그러나 도여베르트는 ….. 이 모든 게 종교적 전제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마음의 기원을 향한 지향

 

이론적 사고는 종교적 전제를 가진다.

 

[7.서구 사상/문화의 종교적 기본 동인]

* 희랍/로마: 질료(자연을 숭배)와 형상(인간의 이성을 더 중요시)-> 처음에는 질료를 강조하다가, 형상을 강조했었다네………-> 도여베르트가 이걸 분석하고 , 내적 모순을 지적해 낸다….’양승훈 교수님이 쓰신 , [그리스도인으로 공부를 한다는 것은]출판사:CUP-> 이 책의 뒤에 부록에 학문의 세속화라는 도여베르트의 논문이 있는데 , 이걸 목사님이 번역하심……..이걸 참고하기…….Loose of western culture 라는 책을 보면 더 잘 나와 있다네

중세: 자연과 은총 ->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야기 , ‘자연과 은총을 합치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함…. 중세 시대 모든 학문과 문화는 이 두 가지 motive 에 의해 이뤄졌다고 봄.-> 이건 오래 가지 못하고 분리되어 버림..-> 윌리엄 오캄이 , nominalism (유명론) 을 가지고 갈라 버린다….. ‘신 존재 이론은 이름만 있는 것에 불과하다면서 다 잘라 버림…. -> 그래서 르네상스, 어거스틴의 개혁주의로 갈라져 버림…….

근대: 자연(자연과학적 이상)과 자유(인격 이상,personality ideal) -> 자연과학이 다 발전하면 그 인간은 학문의 바벨탑을 만들 수 있다는 모더니즘이 태동함. 그러나, 이 둘이 함께 가지 못하더라. 자연과학이 발전되면 발전될수록 , 모든 게 원인과 결과로 결정되어 버리니 , causality 가 인간의 자유를 없애 버리더라….자유의 여지를 남기지 않더라그러므로 자연과학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자유는 잃어버리게 된다고 말함….

 

기독교적 동인: 창조, 타락, 구속

->기본적 성경적 동인으로 돌아가자고 도여베르트는 주장함.

도여베르트가 문화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된 것은 , 1945년도 이후에 유럽인들이 새로운 유럽을 어떻게 세워 나갈지에 대해 반성할 때 등장한 말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 이전부터 기독교 학문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등장한 것고 , 도여베르트나 , 폴러노빈? 교수는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고 , 그들의 제자들은 기술,사회 철학, 문화 철학 등에 대한 발전을 더 시킴 (최근에 한국에도 몇 번 오심)

 

도여베르트의 선험적 비판을 적용해서 불교,샤머니즘,유교 등을 다룬 글도 자료집에 나와 있음.

도여베르트가 이런 걸 만든 이유는 , dialogue 를 하겠다는 것이고 , antithesis? Confrontation 을 하겠다는 것이다…….

도여베르트는 법 철학자라서 , 문화에 대해 날카롭게 다루지는 못했지만 scale 을 크게 만들어서 큰 그림을 그리게 도와준 건 대단한 거다..서구 문화 전체 , 문화 전체를 비판한다는 게 대단한 거다.

 

[김현정 교수님의 이야기: 심리학적으로 , 창조,타락,구속을 어떻게 해석해 낼지를 고민해 보기 시작하심.] (함석헌 선생님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에 보면, 우리 역사 역시 하나님의 은혜,주권 가운데 있는 역사라면 이 글을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인가………우리는 네델란드 인이 아니므로……)(손봉호 교수님이나 , 강영안 교수님이 도여베르트로 가지 않고 , 반 퍼슨 교수님 쪽으로 가신 것도 도여베르트의 자문화중심주의를 의식한 건 아닌지…)

도여베르트의 철학의 틀은 칸트와 후설이었기 때문에 , 이 사람의 사상에 동양적 사상이 들어올 여지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반 퍼슨 교수님은 한국,아시아에 대해 잘 알아서 동양에 대한 insight 를 많이 지니고 계셨었다. 야콥 끌락베이크라는 분도 동일한 비판을 하심. 이 분도 동양 사상이나 아프리카  문화에 대해서도 open mind 를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의 근대사회는 복음,기독교의 공헌이 지대했다.

다른 교수님의 comment :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치고 계시는 분임. 기독교적 정치학 등의 책들은 나오는데 , 기독교적 공학……..’착하게 살자로 귀결되는 건 아닌가……딱히 잡히는 게 없다나

가르치시는 교수님이시지만 ,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다뤄 주심

(ex) 예수를 믿는 정치인이 뭐가 다르냐?......독일 같은 경우를 보면 기독교 민주당의 정책 자체가…., 노동당 등이 사민당과 다른 게 많이 있다네……그리고 네델란드의 Christian union 등도 , refugee 에 대해 , 가정에 대해 , 청소년 문제에 대해 , 조금은 다른 의견을 내기도 하신다.)

(‘윤리적 문제’….. ‘인간의 책임으로 귀결된다나…..) (기술을 아무리 잘 발전시켜도 , 인간의 윤리적 문제가 노출되면 바벨탑이 세워질 수 있음을 경고하심..)

 

근대 과학 (인본주의에 기반한) 을 세워 두고 , 그 위에 하나님을 얹혀 둔 느낌이 난다고 , 세계관 가르치는 교수님께서 말씀하심. (도여베르트는 모더니즘자체는 , 일반 철학자들도 포기했다고 봄….인간의 자율성,이성에 대한 환상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깨졌으므로 …..)(도여베르트는 77년도에 돌아가셨기에 , 지금의 상황은 이해를 잘 못하시겠지………..도여베르트 교수님의 제자들은 , ‘기술주의에 대한 강한 경계를 보임……..윤리적 의식 없이 기술이 발전되면 , ‘바벨 culture’ 가 된다고 우려함.

 

[학생들의 질문]

구조,총체성,뿌리 등에 대한 용어를 도여베르트가 쓰는 게 , 이미 모종의 이성적 전제가 들어가 있어서 , 포스트 모던적 사고에서는 , 해체주의라든지 , 구조주의라든지 …… 이게 안 먹힐 수도 있다. ..

 

도여베르트는 인본주의적인 철학을 개혁시키기 위해 모든 단어를 새로 만듬.

‘totality 자체도 없다라는 말도 , 하나의 명제가 된다.

[1:8~10] 를 근거로 삼아서 , totality 를 이야기 하기도 했었다네

 

희랍 철학에 있는 아르케라는 origin 이 존재하고……그가 말한 기원은 꼭 종교적인 개념이 아닐 수 있다.

 

[헌법 가르치는 법학부 교수님의 질문 -> 15개의 전제 중에서 , ‘political 양상을 안 만들었을까?]

è 그러게요..ㅎㅎㅎ

 

[개혁주의 멤버의 질문] -> 쉐퍼와 도여베르트의 비교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간접적으로는 연결이 된다. 궁극적인 agenda 는 같은데 , 도여베르트는 철학적 방법론 안에서 그걸 이룬 거고 , 쉐퍼는 좀 더 문화적인 영적인 approach 를 했다.

쉐퍼는 반틸과도 가까웠는데 , 반틸은 처음에는 도여베르트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 common ground 를 계속 이야기 하는 도여 베르트를 싫어 함………반틸은 그런 건 없다고 봄

아브라함 카이퍼도 일반 은총에 대한 3권에 대한 두꺼운 책을 씀

(그러므로 , 비기독교인의 이야기 속에서도 , 얻을 게 있다고 보심)

 

*구글 이미지를 활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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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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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 피어시의 [완전한 진리]에 나온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낸시 피어시의 '칼빈주의적 기독교 세계관'이 지닌 장점과 단점들이 분명히 있으며 피어시가 지지하는 '지적설계'는 고민해 볼 만한 매력적인 방향성이나, 기독교 신학에서는 비판할 여지가 있는 가설입니다. 어찌 되었든 '무신론적 진화론'이 교조주의적인 색채를 띄게 되면서 관련 학문들도 상당히 극단적인 주장을 하고 있고 이와 같은 개념이 전반적인 사회, 학문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피어시의 견해에 동의를 하든, 하질 않든 이 책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기독교인이라면 한번쯤 고민해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 와 함께 읽으면 방향성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신록적 진화론이 일반 사회에 미친 영향력>

자연주의적 진화를 과학 수업에서 가르치면-> 윤리와 종교에 대한 자연주의적 견해로 이어짐-> 역사 , 사회 , 가정 등의 모든 교과 가정으로 번져 나감.

 

과학에 대한 자연주의적 정의->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주입시킴.

 

보편적 다윈주의 시대 의 도래(과학적 이론의 영역에서 포괄적인 세계관으로 변모한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점

이것저것을 조금씩 보는 경향이 있다. (프란시스 쉐퍼 왈)

è  가정 붕괴 , 학교 폭력 , 비도덕적 오락, 낙태 , 생명 윤리 등의 개별적 이슈에만 관심을 가지고 큰 그림을 못 봄.

è  세계관의 전환이 주된 원인.(궁극적 실재-> 비인격적 물질 , 에너지, 비인격적 우연) 

è  지적설계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그는 모든 것이 기원에 대한 견해에 달려 있음을 통찰.

 

 

진화 심리학(사회 생물학의 최신판)

è  빠르게 성장하는 분야 (다윈주의를 사회적 , 문화적 이슈에 적용)

è  전제: 자연 선택이 인간의 몸을 산출했다면 그것이 인간의 믿음 및 행위의 모든 측면도 설명해야 한다는 것

è  새로운 책들은 무진장 쏟아지는 실정

 

<Theme: 도덕>

ex1) [도덕적 동물] , [도덕의 진화론적 기원](Evolutionary Origins of Morality)

è  책의 요점: 우리의 친절 , 이타주의는 모두 우리의 생존을 돕고 , 더 많은 자손을 생산하는데 유익하기 때문이다. (도덕은 자연선택의 산물)

è  윤리란 , 우리의 유전자가 우리를 교묘하게 속여서 서로 협력하게 만든 하나의 환상이다.

è  우리가 선한 이유: 자연선택 때문이다.

 

Ex2) [마귀 같은 남성: 인간 폭력성의 근원을 찾아서](Demonic Males : Apes and the Origins of Human Violence)

è  우리가 악한 이유: 자연선택 때문이다.

è  성경 속의 원죄를 겨냥함.

è  9.11 사태도 도덕적 악과 상관 없다라고 주장(폭력의 성향이 DNA 에 쓰여져 있었을 뿐)

 

<Theme: 종교>


ex1) [우리는 신들을 믿는다.](In God We Trust) , [종교 해설: 종교사상의 진화론적 기원](Religion Explained : The Evolutionary Origins of Religious Tgought)

è  신경 체계가 복잡한 수준까지 진화했을 때 , 뇌가 빠지기 쉬운 불량상태가 바로 종교 에 대한 겨념이다.

 

<Theme: 정치>

ex1) [다윈주의 정치학: 자유의 진화론적 기원](Darwinian Politics: The Evolutionary Origin of Freedom)

 

<Theme: 경제학>

ex1)[진화론적 과학으로서의 경제학](Economics as an Evolutionary Science)

 

<Theme: >

ex1) [진화론적 법리학 또는 법 , 생물학 , 문화: 법의 진화](Evolutionary Jurisprudence or Law , Biology and Culture : The Evolution of Law)

 

<Theme: 교육>

ex1) [천재의 기원: 창의성에 대한 다윈주의의 관점](Origin of Genius : Darwinian Perspectives on Creativity)

è  지성(intelligence): 다양한 아이디어를 일단 창출한 다음 가장 적절한 것[적자] 만 선택되는 과정으로 정의함.

 

Ex2) [진화와 문학이론] (Evolution and Literary Theory)

è  영어 교사를 구체적으로 겨냥한 책

 

<Theme: 의료 분야>


ex1) [
진화 의학] (Evolutionary Medicine) , [우리는 왜 병에 걸리는가: 다윈주의 의학이라는 새로운 과학](Why we get sick: The New Science of Darwinian Medicine)

 

ex2) [다윈주의 정신의학](Darwinian Psychiatry),[심리치료실의 유전자: 진화심리학 탐구](Genes on the Couch : Explorations in Evolutionary Psychology)

è  심리 치료사를 위한 책

 

<Theme: 여성>


 ex1) [
나뉘어진 노동: 근로여성에 대한 진화론의 견해](Divided Labours: An Evolutionary View of Women at Work)

 

<Theme: 부모의 사랑>

ex1) [신데렐라에 관한 진실: 부모의 사랑에 관한 다윈주의의 견해](The Truth About Cinderella: A Darwinian View of Parental Love)

 

<Theme: 경영>

ex1) [최고 경영인의 본능: 정보화 시대에 인간 동물 관리하기](Executive Instinct : Managing the Human Animal in the Information Age)

 

<도발적인 주제들>

ex1) [욕망의 진화: 인간의 짝짓기 전략](The Evolution of Desire: Strategies of Human Mating)

 

ex2) [아담과 하와: 인간의 성의 진화](Adam and Eve: The Evolution of Human Sexuality)

 

ex3) [메이팅 마인드: 섹스는 어떻게 인간 본성을 만들었는가?](The Mating Mind: How Sexual Choice Shaped the Evolution of Human Nature)

è  이 책의 저자인 제프리 밀러는 PBS 방송의 진화 시리즈에서 예술적 표현마저도 일종의 성적인 과시로 시작되었다는 설명을 내 뱉음.

 

 

 

<Theme: 9.11 사태>

è  진화 심리학자들은 현실세계에 자신들의 이론을 적용할 기회를 얻음.

è  [뉴욕 타임즈] 의 과학담당 부서까지 동원됨.

è  기사 왈:1. 구조대원들의 영웅심리가 진화의 산물이다

     2.이타적 행위: 친족 선택의 산물!!(자신의 유전자가 친자식 뿐 아니라, 가까        운 친적에게도 전해짐을 염두함)-> 이타적 행위의 목적: 자신의 자손을 퍼트릴 기  회 증진

1) 게임이론에 기초한 이타적 행위 분석 -> 협조전략(맞대응하기) 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하는 최상의 방법이기 때문에 이타적 행위를 한다라고 주장.

(여기서 계속 말하고 있는 이타주의는 일반적인 의미의 이타주의는 아니다. 이것들은 단지 자기이익의 확장된 형태일 뿐이다.)

 

<기독교인의 입장>

è  참된 이타주의야 말로 기독교에 대한 강력한 변증 제공!

è  9.11 사태 등에서 보여준 영웅적인 자기 희생: 인간의 본성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도덕적 존재) 로만 설명 가능

 

<진화 심리학의 문제점>

-> 유전학이나 신경학에 근거한 실제적 자료의 부재

è  추측만 무성함.

è  다윈적 근본주의라는 비판까지 들음(다윈주의 자체가 경직된 정통교리가 되었음을 함축하는 도발적인 문구다)

 

솔직한 답변: 유전학자 알렌 오르 왈-> 참으로 난처한 사실은 인간 안에 있는 도덕이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된 것인지 , 진화된 것이 아닌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조금도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일단 진화론적 전제를 받아들인 후에는 증거의 여부가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다윈주의적 설명을 인간 행위에 적용하는 것은 그저 논리의 문제에 속한다.)

 

<Theme: 강간>

ex1) [강간의 자연사: 성적 강제 행위의 생물학적 기초](The Natural History of Rape: Biological Bases of Sexual Coercion)

è  강간: 생식의 성공을 극대화하려는 진화론적 적응 현상.

 

다윈주의자의 단순한 논리: 어떤 행위든지 오늘까지 살아남은 것은 진화론적 이점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Theme: 유아살해>

스티븐 핑거 왈: 신생아가 병들었거나 그 생존이 불확실한 경우에는 손실을 감수하고 가장 건강한 놈들을 선호하거나 나중에 다시 시도할 수 있다. 고 말함.

 

문제점: 1) 신생아 살해가 진화에 의해 선택된 것이라는 증거는커녕 유전적 특질이라는 증거도 없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 하는 쌍둥이 연구와 염색체의 위치와 DNA 순서는 어디에 있는가?)

(결국 우리가 지닌 건 어떠한 증거도 아니고 ,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궁극적인 진화심리학의 약점: 너무나 신축성이 뛰어나서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유아살해를 자신들의 논지로 설명해 내는데 , 그렇다면 왜 대다수의 어머니가 자기 아기를 죽이지 않는지를 물어보면 그것도 진화가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떤 현상과 더불어 그 반대되는 현상도 설명하는 이론은 사실상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셈이다.)

 

<결국 성경의 메시지와의 대립이다>

*요즘은 진화론자들이 나서서 진화론이 도덕의 기초를 무너뜨린다고 선언하고 있다.

 

<Theme: 도덕(ex)동물과 성관계)>

다윈의 혁명에 담긴 완전한 함의를 끌어내다 보면 동물과의 성관계도 지지하는 말이 나올 수 있다. (프리스턴 대학의 피터 싱어가 주장했었다.)

<동물과 인간을 발달 단계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니, 이럴 수 밖에 없다.>

 

ex1) 2002년 브로드 웨이에서 염소, 또는 누가 실비아인가?(The God , or , Who Is Silvia?)라는 공연이 있었음. (수간이라는 주제가 일반 대중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함)

 

문화: 지배적인 세계관에 따른 논리적 결과를 표현하게끔 되어 있다.

 

Ex2) 몇 년 전 빌보드차트 상위 200곡 중 17위로 뛰어오른 블러드하운드 갱의 노래

è  얘야, 너와 나는 단지 포유동물일 뿐이야. 그러니 디스커버리 채널의 걔네들처럼 우리도 하자. (원숭이처럼 옷을 입고 괴상한 섹스 자세 취함)

è  이 책의 저자의 친구가 8살 정도 되는 소년 두명이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걸 듣게 됨.

 

 

 

<다윈화 되는 문화>
과거: 대부분의 사회과학자들이 진화의 함의를 제한하고자 생물학과 문화 사이에 담을 쌓아 올렸다. ( , 진화가 인간의 몸을 창조했으나 그 후 인간이 문화를 창조했고 , 문화는 생물학에서 독립된 것이라고 그들은 말함)

è  생물학적 결정론이 이 방파제에 막혔었는데 , 요즘 진화 심리학 때문에 벽이 무너지고 있다.

 

사회적 다윈주의(사회 생물학)=> 적자생존의 개념을 통하여 무자비한 자기이익의 추구를 부추겨옴.

è  이게 하나의 분파인 진화심리학을 만들어 냈고 , 이 영역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아짐.

다윈주의의 전제를 수용하면: 일관성을 유지하라는 압력을 받게 되며 문화의 전 영역에 적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Theme : 문화>
ex1) [
문화의 진화](The Evolution of Culture)

ex2) [문화의 다윈화 현상](Darwinizing Culture)

 

보편적 다윈주의vs보편적 설계

 

<모순 덩어리 진화 심리학>


진화 심리학이 뜨는 이유: 자신들이 종교의 신화가 아니라 과학의 탄탄한 기반에 바탕을 둔 도덕을 제공한다고 약속하기 때문이다.

 

모순점: 만일 우리의 생각이 모두 진화의 산물이라면 , 진화심리학이란 생각 자체도 진화의 산물이다. 인간의 정신이 만든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 그것도 진리가 아니라 생존하는 데 유용할 따름이다.

(다윈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진화론만은 옳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말을 따르면 , 객관적 진리란 존재할 수 없다.)

 

ex) (영어로) 나는 영어를 할 줄 모른다고 말하는 것.

Ex2) 도덕적 절대명제가 절대 없다고 주장하는 것

Ex3) 내 동생이 우리 부모님의 유일한 자식이다 라고 말하는 것

 

 

<그들의 문제점2>

이론을 평가할 때 , 실제적인 시험을 해 봐서 우리가 그 이론에 기대어 살 수 있는지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 본성에 걸맞는지를 확인해 보는 것이다.

è  다윈주의 진리 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의문시한다. 모든 진리 주장은 다윈주의의 빛에 비추어 보면 적나라한 권력 투쟁이다-> 냉소주의 야기

è  도킨스 등도 자신의 저서에 모순된 글들을 많이 나겨둠.(수사학적 스킬 발휘)

è  결국 진화 심리학에 기대어 살 기가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è  수 많은 진화 심리학 지지론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포명할 때 , 도덕적 자유 , 개인의 결정권 등을 예외적으로 합리화시키는 현상은 , 결국 그들이 무엇을 믿든지 간에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도약을 시도)

 

기독교 신앙

1) 더 일관성 있고 , 모순적이지 않은 합리적인 것이다.

2) 현실세계에도 잘 부합한다.

 

신앙의 도약을 하는 모습: 자신의 세계관은 이쪽 방향을 가리키는데 실제적인 경험이 다른 방향을 가리킬 경우, 자기가 공언한 세계관에 기초해서 일관성 있게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계관의 충돌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라서 과학자들에게 판결을 맡길 수 없다.

 

만일 다윈주의가 옳다면, 종교와 도덕은 사실 의 영역이 아니라 가치의 영역에 속한 상층부의 비합리적 신념에 불과한 셈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가 객관적 진리라는 주장을 포기하면, 그들의 신념이 비판을 면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허락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거래가 보장하는 안전은 거짓이다. 왜냐하면 자연주의적 진화라는 지적 제국주의가 너무 거대해서 가치의 영역마저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도킨스는 종교를 정신의 바이러스로 비난하면서,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정신을 침범하는 악성 감염 이라고 했다. 사실의 영역이 계속해서 가치의 영역을 포위해 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의 목적>
거룩함과 완전함이라는 영적 이상을 따름으로써 하나님 및 동료 피조물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우리가 지닌 도덕은 목적론적이다.)

 

EX) 회의주의자 협회의 회장이자 [Skeptics] 잡지의 발행인인 마이클 셔머도 과거에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인데 , 진화론을 배우면서부터 탈회심을 하였고 , 그 뒤에 이러한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었다.(직접 고백한 말이다)

 

EX2) 사회 생물학의 창시자인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 윌슨도 하나님을 참 잘 믿었던 사람이었는데,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나서 , 진화가 지닌 함의를 모든 것에 관련 지어볼 수 밖에 없게 되었단다. (직접 고백한 말이다.)

 

젊은이들이 대학에 가려고 집을 떠나기 전에 그들에게 기독교가 종교적 진리일 뿐 아니라 모든 실재에 관한 진리임을 가르쳐서 미리 준비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기독교는 총체적 진리이다.

 

è  우리가 자녀들에게 그 정도의 확신을 심어 주지 못한다면 그들은 세속세계에서 직면할 인지적 전쟁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진화심리학자-> 다윈주의를 눈앞에서 노골적으로 적용하는 그야말로 진화의 기동타격대라고 할 수 있다.

 

 

<철학적 다윈주의>

EX1) 스탈린-> 러시아 정교회의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그가,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가 다윈의 책을 읽고 나서부터였다.

 

그 뒤에 그는 무신론자가 되어 공식적인 무신론 국가를 만들기 위해 자기 국민을 문자 그대로 수백만이나 살해했다.

 

19세기 말, 다윈주의가 대서양을 넘어 미국 연안에 도착할 때 , 새로운 학파가 이것을 수용했는데 그들은 바로 철학적 실용주의자들이었다.

è  핵심 가정: 만일 생명이 진화한 것이라면 인간의 정신도 진화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모든 인문과학-심리학. 교육학. 법학. 신학-이 거기에 기초해서 다시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è  미국의 유일한 자생적 철학

 

 

 

철학적 실용주의자들의 주장들

è  여러 문명을 이룩한 위대한 원리들은 초월적 진리가 아니라, 서로 경쟁하는 사상들 가운데 생존경쟁에서 이긴 것들이다. 라고 주장함.

è  정신은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답한다.

è  전통적 유신론과 자유주의적 유신론을 모두 배격한다.

è  다윈주의를 정신에 적용하려는 진화 심리학자의 영향을 많이 받음.

è  영혼의 과학이던 심리학 분야가 행동주의로 옮겨가기 시작함.

è  어떤 생각이 보상을 제공할 경우,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부른다고 주장.

è  신념은 일종의 예측-내기 도는 도박- 이라고 주장하기도 함.

è  제임스 왈, 우리의 사고방식에서 참된 것 이란 곧 편리한 것이다. 이는 우리의 행동양식에서 옳은 것 이 편리한 것을 뜻하는 것과 같다.

 

 

<기독교의 주장>

우리의 인지적 기능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우리는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실용주의에 있는 일말의 진리>

è  어떤 신념체계가 참되다면 당연히 실제 세계에서 제대로 작동(실용적) 해야 한다.

 

BUT, 실용주의적 검증을 통과했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주장을 진리로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진리인 것은 실용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실용적이라고 해서 다 진리는 아니다?)

 

상층부를 차지하던 낭만주의와 하층부를 차지하던 경험주의 , 공리주의가 있었다면 이도 저도 아닌 실용주의가 이 둘을 통합시켜 버렸다. 그러나 말이 통합이지 다윈의 진화를 하층부에 집어 넣자, 생각은 생존 가치에만 의거해 선택된 정신적 돌연변이로 축소되어 버렸다. 한 마디로 실용주의는 이 두 층을 결합한 게 아니라 자연주의의 그물을 상층부에 던져 그것을 하층부로 끌어내렸고, 그 결과 상층부에는 포스트모던적 비합리주의회의주의만 남게 되었다.

 

<미국을 변화시킨 사상>

<Theme: 신학>

찰스 샌더스 퍼스가 실용주의자 가운데 이 영역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함.

è  범심론을 수용함(우주에 있는 모든 것이 정신이나 의식을 갖고 있다는 사상)

è  과정 신학으로 이 관점이 들어옴.(굉장한 성장을 보이고 있다.)

è  과정 신학: 하나님과 세계과 끊임없는 변화와 진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가르침.

è  과정 신학은 엄밀하게 범신론(모든 것이 하나님) 이 아니라 범재신론(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상) 이다.

è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창조하는 공동 창조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창조하는 공동 창조자이기도 하다.

è  죽음 이후의 내세란 없다.

è  전통적 유신론에서 완전 벗어남.

è  전지하지도 않고, 전능하지도 않으며 오직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이 세계와 함께 진화하는 존재일 뿐이다.

è  이 논지가 일부 복음주의 진영에 흘러가서 열린 유신론을 만들어 냄.

è  이 단어 자체가 실용주의자의 언어를 반영한 거다. (열린 우주를 주장함, 이 세계는 하나님조차 미리 알 수 없는 세계다.)

è  진화론적 신학을 가르치게 되는 교회와 신학교를 우리는 막아야 한다.

 

 

 

<Theme: 법학>

철학적 실용주의를 법에 적용하여 하나의 운동을 일으킴: 법적 실용주의 탄생

è  올리버 웬델 홈즈 2세가 20세기 법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침

è  (독일의 관념론에서 나온) 역사주의 법학파+(영국의 경험주의에서 나온)분석주의 법학파를 함께 엮음.

è  역사주의 학파쪽 의견: 법의 근원이 진화 중에 있는 관습에 불과하다는 생각 도입

è  분석주의 학파쪽 의견: 법의 평가기준이 사회과학에 의해 측정된 사회적 호용이라는 생각 도입.

è  판사들이 법을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 법을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은 많다. (ex) 로 대 웨이드 abortion decision)

è  , 법정이 판결을 내릴 때 법이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 법정이 선호하는 사회적 결과에 근거해 판결했다는 것이다.(법적 실용주의의 유산들이다.)

 

<Theme: 교육>

존 듀이가 교육의 방법론 분야에서 20세기에 가장 큰 공헌을 함.

-> 기독교를 버리고 자연주의 철학을 채택함.

-> 이 교육철학이 적용되자, 선생은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촉진 시키는 역할을 할 뿐인데 , 학생들이 다양한 실용적 전략을 시도해서 자신에게 가장 효과가 있는 것을 발견하도록 지도할 뿐이다.

-> 모든 가치들은 균등한 것으로 취급해야 하며 학생들은 자기가 개인적으로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분명히 하면 된다. 교사는 어떤 면으로든 지도적 역할을 해서는 안되며, 오직 학생들이 스스로 대안들을 견주어 보고 스스로 결정하도록 옆에서 코치 역할만 하라고 엄격히 지시 받는다.

-> 이러한 접근의 저변에 깔린 가정은 철학적 자연주의다. 윤리에 대한 자연주의적 접근은 어떤 초월적 표준도 인정하지 않는다.

-> 듀이는 주장하기를 우리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을 분명히 하는 일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왜나하면 종교적, 도덕적 도그마가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지시하기 때문에 우리의 경험은 왜곡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을 분명히 하려면 이전의 도덕적 도그마에서 우리의 생각과 정서를 해방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 이러한 방식의 수업 예 ex) 가장 친한 친구를 살해하는 계획 세우기

-> 구성주의 교육으로도 응용되어지고 있다.

 

[구성주의 교육]

è  지식이 사회적 구성물이라면 교육의 목표는 학생들에게 자기 나름의 지식을 구성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è  외부에 객관적 실재가 있어 배우는 자에게 알려진다고 보지 않고 , 오히려 배우는 자가 자기 나름의 실재를 능동적으로 구성한다고 가정한다.

è  듀이의 진화론적 인식론이 직접 적용된 결과다.

è  유명한 구성주의자 왈, 생물학자에게 있어 , 어떤 살아있는 유기체가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생존하는 한 그것은 유효한 것이다. 구성주의자에게 있어, 어떤 개념과 모델과 이론 등은 그것들이 창안된 맥락에서 적합하다고 판명된다면 그것들은 유효한 것이다.

 

<문제점 지적>

è  만일 지식이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한다면, 같은 논리가 기독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기독교 역시 사회적 힘들의 산물일 뿐이 되는 것이다.

è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진리 주장을 사회적 구성물로 환원해 버리는 급진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을 포용하게 되는 셈이다.

 

<미국의 철학자 로티>

è  그가 보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핵심: 진리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이다.

è  우주의 광선이 DNA 분자 속에 있는 원자들을 뒤섞어 돌연변이를 만드는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나 바울이나 뉴턴의 위대한 작업도 우주의 광선이 그들 뇌 속에 있는 중요한 중성자들의 정교한 구조를 뒤섞은 결과 생긴 것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è  객관성이란 개념을 배격하면서도 역설적으로 한 가지 생각만은 틀림없는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바로 다윈주의 (정신이 다윈의 진화의 산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공격>
만일 그들에게 일관성이 있다면 자연주의적 전제를 견지하는 이들은 과학과 도덕을 비롯한 다른 모든 분야의 지식에서 포스트모던적 회의주의를 품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포스트모던적 회의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자신의 전제에 따른 결과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실용주의는 실용성이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

(실용주의가 어떤 생각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 실용성 곧 그것이 사회적 욕구와 목표를 달성하는 지 여부다.)

 

<결론>
->
성경의 계시 교리가 사실과 가치, 상층부와 하층부 간의 간격을 메우는 유일한 길이다. 실용주의자들이 그 둘을 함께 묶어 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다윈의 진화를 하층부에 배치하자, 생각은 생존 가치에만 의거해 선택된 정신적 돌연변이로 축소되고 말았다.

-> 우리의 신앙에 내포된 위대한 주장에 충실하려면, 기독교가 가치의 영역으로 밀려나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형이상학적 겁쟁이의 옷을 벗어 버리고 승리를 확신하면서 공세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또한 기도와 영적 능력으로 무장하고 오늘날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을 보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리더십 아래 발벗고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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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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