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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노무현과 종교

 

J: 노무현은 세례까지 받은 천주교인이었는데 종교 활동에 열심이 있진 않았어. 김수환 추기경이 하느님을 믿느냐?” 고 물었고 노무현은 희미하게 믿는다고 답했고, “확실하게 믿느냐?” 고 재차 묻자 노무현은 잠시 고개를 떨구더니 앞으로 프로필 종교란에 방황이라고 쓰겠다고 대답했어.

 

최초의 반미 사건인 부산 미문화원 사건 때 만난 송기인 신부의 권유로 성당에 다니긴 했지만 성실하게 교리반에 참여하진 않았었다.

 

노무현은 왜 성당에 안 나오냐고 다그치는 신부에게 신부님이 성당에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착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어.

 

개신교인이 아닌데도 개신교가 가장 지향하는 많은 면모를 갖춘 대통령이 아니었나 싶어.

 

 

 

A: 그거 참 아이러니하다. 어쩌다가 이렇게 꼬여 버린 거지?

 

J: 그러게. 사람마다 해석하는 관점은 다르겠지만, 요즘 시국에는 노무현을 그리워 하는 사람이 많을 거야.

 

아무튼 노무현의 삶의 이력에는 천주교보다 불교가 더 많이 등장해.

 

청년 시절 고시공부를 위해 많은 시간을 절에 머물기도 했고, 불교 경전도 탐독했으며 권양숙 여사도 평소 불심이 깊었지. 또한 대통령 재임시절 해인사를 세 차례나 방문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했어.

 

 

 

A: 아마 극우(보수) 개신교는 노무현을 엄청 싫어했지?

 

J: 말도 못했지. 그들의 반정부 집회는 김대중 정권이 아닌 노무현 정권 때 본격화 되었어. 그래서 당시 노무현의 최대 정적은 개신교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지.

 

 

 

 

 

A: 왜 극우 개신교는 노무현을 싫어했지? 단순히 야당 소속이라서?

 

J: 일단 4대 개혁입법(국가 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진상규명법, 언론관계법)을 노무현 정부가 추진해서였어.

 

특히 극우 개신교는 1. 국가 보안법 폐지 2. 사립학교 법 개정에 강력하게 반발했어.

 

국가 보안법 폐지는 자신들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건드는 심각한 사안이었고, 사립학교법 개정은 개신교의 재산권을 위협하는 사안이었기 때문이지.

 

그들의 사고 속에는 국가보안법 폐지’ = ‘반공 전체의 포기라는 도식이 있었어. 즉 국가 보안법이 폐지되면 반공 이데올로기가 모두 소멸해 버려서 자신들의 주도권은 모두 사라질 것이라 여겼던 거지. 이걸 막기 위해 조갑제를 위시한 극우 언론들과 손을 잡고 한기총도 집회에 모습을 드러내.

 

 

 

한기총+조갑제의 놀라운 연합 전선이었지.

 

 

 

A: 국가보안법 폐지는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 만으로 쉽게 이해가 되는데 사립학교법 개정도 반 정부 시위에 중요 역할을 한 거야?

 

J: 오히려 사립학교법 개정은 극우 개신교들이 반 노무현 전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 노무현 정보는 사학의 투명성과 공공성을 높이기 위해 개방형 이사제 도입’, ‘이사장 친인척의 이사 비율 축소 30개 조항을 골자로 하는 개정안을 추진했어. 이를 지켜본 극우 개신교는 정부의 개정안이 사학의 설립 정신을 훼손해 결과적으로 재산권 행사를 어렵게 한다며 강하게 반발했지.

 

 

 

2005년 당시 개신교는 중학교 123, 고등학교 165개의 많은 사학을 운영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이 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일부 목사들은 삭발 투혼을 하기도 했고, 학교 폐쇄 등 강경 조치로 맞서기도 했어. 20016 12월에는 서울 영락교회에서 목사와 성도 3000명이 모여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해 .

 

이 때 극우 개신교는 구체적으로 국회의원들을 압박하기 시작하는데 2007년에 시행될 선거(대선과 총선) 때 그 복수를 하겠다며 사립학교법 재개정을(그 쪽에서 재개정을 요구했어) 반대한 의원들에 대한 낙선운동을 벌여 나가. 당시 한기총이 1차 낙선 대상자 5명의 명단을 발표했는데 이해찬, 장영달, 정세균, 유기홍, 최재성 의원이 여기에 속해 있었어.

 

 

 

A: 교회가 뭔가 이상한데?....

 

J: 본인들의 이익이 걸려 있다고 생각해서 목숨이라도 걸 기세였나봐.

 

 

               -분향소를 찾은 한기총 임원진-

 

 

그 이외에도 종교 단체 기부금 내역 공개, 종교인 과세 등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다 보니 극우 개신교들은 노무현 정부를 향해 엄청 이를 갈았어.

 

 

 

김지방의 [정치교회]를 보면 이런 말이 나와.

 

 

 

민주화 이후 한국 교회는 오히려 자신들이 지난날 누렸던 특혜가 점점 위협받고 줄어드는 것을 경험했다. 게다가 민주화운동으로 온갖 고초를 겪었던 개신교계 인사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같이 보였다. 그러니 정치권 동향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같은 정치인들이 교회의 힘을 인정하고 두려워해주길 은근히 기대한다. 이런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받고, 정권에 불만을 품게 된다. 대형 교회 목회자를 비롯한 개신교계 인사들이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반 기독교 정권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A: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개신교 소속이 아닌 대통령이 꼭 반기독교 정권일까?

 

J: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럴 것 같진 않아. 그가 보여준 삶의 모습과 가치관, 걸어온 길, 내뱉는 말들이 진리에 가까운지, ‘진리로부터 먼지가 더 중요한 바로미터가 아닐까?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토론을 해볼 필요가 있겠지? 중요한 것은 단지 개신교 소속이라고 해서 그 정권이 하나님의 편에 있다고 주장했던 게 그 동안 보여왔던 개신교의 민낯이라는 거지. 그게 옳았다면, 그 열매도 한번 주목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아.

 

 

 

당시 사립학교법 논란에는 강의석 사건도 있었어. 미션스쿨에 다니던 강의석 군은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서울특별시 교육청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고, 이에 대해 개신교계는 그 학교를 종교적 목적으로 세웠는데 고교 평준화 조치로 인해 학생 선발권이 없어지다 보니, 자신들이 원하는 학생 교육이 안되고 있다고 주장했어.

 

어찌 되었든 법원의 판결은 미션스쿨에서도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가뜩이나 사립학교법 문제로 날카로워진 개신교를 더욱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지.

 

 

 

A: 노무현 집권 당시 대규모 반정부 시위도 참 많았지?

 

J: . 무려 18차례나 있었어.

집권 초기에는 반공’, ‘친미를 중심 이슈로 잡았고, 중반에는 사립학교법 개정이 중심 이슈였어. 나중에 말기가 되니 모든 이슈를 다 섞어서 정권 퇴진 투쟁을 벌였지. 요즘 벌어지고 있는 촛불시위와는 근간 자체가 매우 다른 집회였지.

 

2002 6월 여중생인 심미선, 신효순이 미군 차량에 압사당한 후 반미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이런 분위기를 우려한 극우 개신교는 미국의 한국 포기는 다시 남한의 공산화로 이어질 수 있다며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어.

 

 

 

A: ‘반공 이데올로기가 어마 무시하게 파급력이 세구나.

 

J: 거의 게임에서 말하는 치트키 수준이었지. 그나마 시대가 발전해 가면서 새로운 의식을 지닌 시민들이 많아져서, 이젠 더욱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해진 편이야.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겠지만….

 

 

 

당시 극우 개신교가 벌였던 집회를 주도하던 목사들 중 한사랑 교회 김한식 목사는 설교를 통해

 

대한민국이 공산주의 마수에 적화되려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손길은 미국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라고 말했어.

 

김홍도 목사는

 

대한민국은 간첩 천국이며 더 이상 간첩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한국 교회가 친공, 친북, 좌경 세력을 척결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어.

 

 

 

그 다음 사립학교법 재개정문제를 놓고 시위할 때는 극우 개신교가 한나라당과 손을 잡고 노무현 정부를 압박했어. 한나라당 역시 보수 개신교가 자신들의 당을 지지해 주던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니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거지.

 

 

 

도올 김용옥은 이에 대해 종교권력이 역사를 이끄는 신정정치를 한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며 경고하기도 했었어.

 

 

 

A: ‘반공도 중요 키워드지만, ‘친미도 역시 중요한 극우 개신교의 입장이었나 봐.

 

J: 아무래도 선교사 파송 시절부터 미국으로부터 각종 혜택을 입어 온 게 개신교이다 보니…. 6.25 때는 물자도 대주고 얼마나 고마웠겠어?  더군다나 미국 유학파 신학도들의 비중은 64.5 퍼센트에 달했기 때문에 미국식 신학과 사상, 인맥이 계속 제자들에게 대물림 된 측면도 있었어.

 

최근에 세대 교체기를 맞이한 대형교회의 후임 목사들도 미국 유학파가 많지.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도 그렇고

 

 

 

노무현 정권 말기에는(2007) 정부가 마지막으로 손봐야 할 대상으로 1. 재벌, 2. 대형 교회 3. 강남 부자 가 거론되기도 했었다. 재벌은현대’, 대형교회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라는 이름까지 거론되어 조용기 목사와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이 만나 해명을 하는 해프닝도 있었어.

 

 

 

당시 김홍도 목사는

 

내가 반공운동을 하고 좌파정권을 자꾸 까기 때문에 들어간다는 것을 나도 알고 교인들도 아니까이건 좌파사상을 가진 정권이 교회를 파괴하려는 음모에서 비롯된 거예요. 전에는 없었어요. 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일어난 일이지.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가장 미워합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어.

 

 

 

A: 본인이 도덕적으로 법률적으로 잘못해서 구속 당했던 거 아닌가?

 

J: 그러게. 본인들이 자주 쓰는 전략이라 민주주의 세력들도 속이고, 조작하고 가두는 방법을 쓸 것이라 지레짐작 한 것 같은데, 씁쓸하지.

 

극우 개신교는 정권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개신교 독자 세력화를 시작하게 되는데 2004년 제 17대 총선부터 도입된 정당투표제가 있어서 기독교 정당의 창당이 가능케 되었어.

 

 

 

17대 총선에서는 14개의 정당(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자민련, 국민통합21, 가자희망 2080, 공화당, 구국총연합, 한국기독당, 노년권익보호당, 녹색사민당, 민주노동당, 민주화합당, 사회당)이 정당 등록을 마쳤어.

 

당시 첫 기독교 정당인 한국 기독당의 창당을 주도했던 사람은 최수환 장로, 박영률 목사인데 최수환 장로는 전두환의 5공화국 시절 민주한국당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이었어. 박영률 목사는 한기총 총무를 지냈고…..

 

창당대회에서 CCC 대표 김준곤 목사는 전국 개신교 인구가 25퍼센트이고, 투표율이 약 50퍼센트 정도가 될 것이므로 개신교인들이 90퍼센트 정도만 투표하면 전체 유효표 가운데 약 50%를 차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어.그러나 까놓고 보니 당선자는 1명도 나오지 않았다.

 

 

 

A: 사실 기독교의 정당 활동은 북한이 먼저 시작했었지? 아마?...

 

J: .. 북한은 원래 개신교의 주류가 있던 곳이었으니까그들이 대거 월남하면서 남한의 교세가 확 커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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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전두환과 종교

 

 

 

A: 전두환은 좋은 평가를 통 받지 못한 대통령 아닌가?

 

J: 그렇지 12.12 쿠데타로 집권했으니, 박정희한테 잘못된 것만 배운 사례지.

 

전두환의 종교 성향은 논란이 많은데 원래는 천주교인이야. ‘베드로라는 세례명도 있지. 그러나 천주교 수장인 김수환 추기경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었다고 해.

 

재미있는 것은 정작 퇴임 후 그는 강원도 백담사에서 생활하고 나중에는 불교 신자로 변해 있었다는 거야. 이 정도면 순례교인가? 10.27법난 사건 일으키던 집권 당시에는 불교와 원수지간이었지만 백담사 은둔 1주년 후에는 불교적인 신앙 고백도 하면서 신실한(?) 불교 신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어.

 

당시 백담사 주지였던 도후 스님은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가 천수심경을 달달 외운다. 추울 때도 108배를 거르는 법이 없다.” 고 그의 신앙 생활을 나누기도 했어.

 

 

 

A: 전두환의 종교 정책은 어땠을까?

 

J: 그는 힘에 기반한통치를 했기 때문에 역시 말 잘 들으면 잘해주고, 말 안 들으면 때려주는 군부 독재 스타일을 강화시켰어.

 

기독교 방송에 대한 보도 및 방송광고 금지 조치라는 초강경 조치를 해서 언론을 통제하려 했고, 1983년에는 6.20 사업이라고 해서 3군 본부 이전을 위해 신군부가 종교시설을 강제 철거한 사건도 있었어. 이 때 충남 계룡산 일대의 70여 개 군소 종교 시설을 일시에 없어버리기도 했어. 이쯤 되면 깡패라고 불릴 만도 하지.

 

 

 

이 때 개신교는 또 한번 부끄러운 면모를 드러내는데, 그건 1980 8월 개신교의 전두환 장군을 위한 조찬기도회사건이었어. 이에 대비되는 사건은 1980 10’10.27 법난 사건이지. 당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난관에 봉착한 전두환 정권은 종교계에 도움을 요청해. 이 때 개신교는 조찬기도회를 열어 주면서 정권에 빌붙었고, 불교는 이를 거부해. 불교가 이를 거부하다가 10.27 법난 사건을 당해 끌려가서 모욕도 당하고 고문도 당하고 해.

 

 

 

이런 부분들이 개신교의 부끄러운 면모가 아닌가 싶어. 과거를 제대로 갈무리 하지 못한 채, 그냥 덮어두고 달려 오다가 한국 개신교는 본질을 많이 잃어버린 게 아닐까?

 

 

 

A: 조찬기도회 때 전두환 정권을 지지한거야?...어떻게 그 정권이 지지 받을 수 있지?

 

J: 당시 성결교 증경총회장이던 정진경 목사는 어려운 시기 막중한 직책을 맡아 사회 구석구석까지 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했었어.그 뒤 9 30일에 전두환 대통령 당선 축하 조찬기도회도 있었는데 이 때 개신교 대표자들을 포함해 입법부, 사법부, 정치인 등 1344명이 참석했는데 이 두 번의 기도회는 모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후에 열렸어. 불교계는 광주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는 등 전두환 정권을 자극했고 이로 이내 철저한 복수를 당하게 되지.

 

 

 

 

이러한 전두환의 타격으로 불교계가 입은 명예의 실추는 엄청났어. 그래서 1977년 발표한 자료에서 불교 신자는 1290만명에서 1982년도에는 750만명으로 뚝 떨어지고 말아.

 

 

 

불교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정권을 잡을 때까지 전반적으로 박해를 받아왔다고 봐도 될 것 같아. 그러다가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다시 한번 기지개를 펴기 시작해.

 

 

 

A: 개신교는 박정희 정권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었던 건가?

 

J: ‘반공 이데올로기도 있겠다, 이미 권력의 맛도 봤겠다. 극우 기독교 주류들이 노선을 바꿀 필요는 없었다고 판단했나 봐.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성경의 메시지가 그들의 행동 근거가 되어준건지 의심스럽지?.... 그들은 여전히 반공’, ‘친미덕분에 전두환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그 근거는 1980 8 12일에 열린 1980 세계 복음화 대성회가 열렸다는 거야. 연인원 1600만명이 참석해 세계 최대 집회로 기록된 이 집회는 전두환 정권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도저히 성사될 수 없는 행사였지. 당시 1회에 30초를 초과할 수 없는 광고 지침이 있었는데 관영 텔레비전 방송으로 40~50초짜리 광고를 내보내고, 광고료도 25%만 내고 집회 광고를 할 수 있게 해줬지.

 

 

 

전두환 집권 때는 개신교도, 천주교도 대형 종교 집회가 잔뜩 있었어. 그 말은 두 종교가 전두환 정권에게 타협했었음을 의미하지.

 

 

 

전두환은 불교계에도 대형 종교 집회를 하라고 종용했었으나 당시 송월주 스님은 이를 거부해.

 

말이 호국기도회지 전두환 장군을 위한 충성극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 요청은 10.27 법난 사건 한달 전에 발생한 일이니, 전두환은 불교를 한 번 때려줄 기회를 벼르고 있었던 셈이다.

 

 

 

A: 유독 한국 개신교는 군사 정권과 결탁이 많이 되어 있네.

 

J: . 그러다 보니 군사 용어도 개신교에 잔뜩 들어 왔어. ‘총동원 전도주일’, ‘영적 전쟁’ ‘구국 기도회’, ‘새벽 기도 특공대…. 더 무서운건 용어만 군사적인 게 아니라 개신교의 의식 속에서 이런 군사주의 문화가 침투해 들어왔다는 거야.

 

목회도 투쟁적이고, 교회 생활도 전투와 같아서 하나의 목적을 향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군대를 양성하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하지. 담임 목사님의 말 한 마디는 무조건 따라야 하는 규율이 되기도 하고 말이야.

 

 

 

여담이지만 전두환은 천주교의 집회도 많이 지원해 주고,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의 한국 방문에 엄청난 호의를 베풀며 지원을 해. 전두환이 천주교적 종교심이 생겼다기 보다는 자신의 군사정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싶었던 거지.

 

 

 

A: 전두환 집권기에 민족 종교들이 다시 인정을 받게 되기도 했었다지?

 

J: …. 특히 전두환은 무속 신앙을 종교의 반열에 올리며 토착 문화의 지위를 부여해. 1985년에는 한국 민족종교협의회를 창립시켜 과거 유사종교 혹은 신흥종교라는 이름으로 냉대를 받아오던 무속 종교들을 민족 종교라는 이름으로 공인하기도 해.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은 사이비 종교나, 기존의 무속 신앙 등이 융합, 변형 되면서 차근차근 힘을 키워왔다고 볼 수 있지.

 

 

 

A: 전두환 하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빼 놓을 수 없는데, 이 때 개신교는 어떤 위치에 있었던거야?

 

J: 1970년대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종교계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하자 자연스럽게 이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해. 5.18 당시 광주 지역에는 종교계만큼 조직화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거든. 광주 기독교연합회(개신교)와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천주교)가 연대한 사회선교협의회가 중심을 이뤘어.

 

 

        -5.18 민주화 항쟁과 전두환-

 

 

전두환 정권은 이들을 체포하고 탄압하는 식으로 대응했고….

 

5 30일 한국 기독교 청년협의회(EYC)의 농촌 분과장인 김의기가 5.18 학살에 항의하며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7층에서 투신자살을 하고, 69일에는 성남주민교회 김종태가 서울 신촌에서 항의성명서를 발표하고 분신자살을 해.

 

이외에도 많은 종교계의 노력이 있었으나 신군부의 대대적인 탄압, 종교계 내부 이슈로 인해서 종교계의 조직적 저항운동은 어느덧 사그라들어.

 

천주교는 대형 행사 두 번을 준비하느라 전두환 정권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는 분위기였고, 불교는 10.27법난 사건에 대한 수습으로 정신이 없었지.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이 되자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이슈화 되면서 야당과 종교계가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 시작해.

 

 

 

A: 지금까지의 종교계의 저항 운동을 정리해 본다면, 1970년대 종교계에서 진행된 저항운동의 중심축이 반독재민주화운동이었다면 1980년대에 와서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중심이 되면서 반미자주화 운동이 되어갔다고 보면 되려나?

 

J: 중요한 지점이야.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군대의 주둔을 허용했던 미군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도 일어나고 말이지. ‘반미 자주화 운동분위기가 생겨난 게 사실이야. 당시 미문화원 방화 사건도 고신대 신학생이 주도했었던 것으로 확인되면서 신학계 내부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고 봐야겠지.

 

이러한 흐름은 1990년대가 되면서 종교계가 한국 사회의 평화통일 운동을 주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어.

 

 

 

특히 5.18 민주화 운동은 개신교에 상당한 충격을 줬어. 당시 극우 개신교 주류의 근간은 반공’, ‘친미였는데 5.18 이후 미국의 책임론이 제기되면서 반미분위기가 생겨나기 시작했거든.

 

 

 

당시에도 5.18 민주화 운동을 빨갱이들의 반란으로 매도하는 분위기도 상당했었으나 민주화에 앞서 평화통일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어. 선민주주의, 후 통일을 하자는 주장이 선 통일, 후 민주주의로 바뀌기 시작했고 대북 정책의 기조도 반공에서 평화통일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어.

 

 

 

이 때 개신교를 필두로 한 종교계의 통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나. 문익환 목사, 권호경 목사, 김동완 목사 등이 북한을 방문하며 한국 사회의 평화 통일 운동을 주도했지.

 

 

 

이러한 흐름을 지켜보던 기존의 극우 개신교인들은 위기를 느끼기 시작해. ‘반공을 매개로 대북관계를 주도해오던 자신들의 입지가 진보 성향의 평화 통일론자들로 인해 좁아질 것을 우려한 것이지. 그래서 그들은 진보 성향의 KNCC 에 맞서 보수 기독연합 단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1989년에 만들게 되지.

 

 

 

A: 한기총이 이렇게 태동하게 되었던거야?

 

J: ‘반공 이데올로기’, ‘개인의 야욕이 뒤섞여 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어.

 

 

 

 

 

최초의 반미 사건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때 교육원장이던 최기식 신부가 구속되었는데 그가 했던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해.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국가의 소중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가 곧 국가라거나 또는 정권이 무너지면 국가도 무너져 공산화되고 만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국가가 있고 종교가 있다는 말에는 수긍할 수 없다. 공산주의가 두려워 모든 국민이 정부가 시키는 말만 반복하는 사회가 된다면 그 사회는 공산독재국가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 때 최기식 신부는 범인 은닉죄를 적용해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의 실형을 선고 받아.

 

 

 

A: 우리 나라 역사는 정말 격변의 시기가 많다.

 

J: 그랬지. 박정희의 시대를 지나왔더니 전두환의 횡포가 이어졌으니….. 그렇게 1970~1980년대 종교계의 저항운동은 1987 6월 민주 항쟁으로 마침내 꽃을 피워. 6월 민주항쟁이야말로 종교계가 일궈낸 현대사 최고의 사건이었지.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폭로한 성명이 천주교에서 먼저 터져 나왔어.

 

 

 

이를 알게 된 종교계와 재야 시민 단체들은 2 7박종철 군 범국민추도회 3 3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을 갖고 진상규명을 요구해.

 

 

 

그런데 전두환은 4.13 호헌 조치로 국민들의 분노에 불을 지펴 버리지. 이 때 천주교 사제 571명이 단식 투쟁에 돌입하고 사회 각계각층이 호헌 반대지지 선언을 내놓게 되.

 

 

 

그러다가 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고문치사 사건의 범인이 축소, 조작되었다는 충격적인 성명을 발표하게 되고, 6월 민주항쟁의 지도부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본부’(국본)이 만들어져. 이 때 종교계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데, 문익환 목사가 국본의 고문으로 참여하고 박형규, 오충일, 금영균 목사가 지도부로 참여했고 대변인은 인명진 목사가 맡았어. 천주교, 불교 인사들도 있었고

 

 

 

A: 6월 민주 항쟁 당시에 부산 쪽에는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 씨 등이 있었죠? 서울에는 유시민 씨도 있었겠네?

 

J: 그랬지. 우리에게 이름이 익숙한 야당 정치인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어.

 

종교계와 함께 국본의 큰 축을 담당했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역시 상당수의 종교인들이 지도부에 참여했었어. 23개 단체가 연대해 만들어진 민통련은 1980년대 재야 세력의 구심체 역할을 했는데 이 단체의 고문은 함석헌 목사, 김재준 목사, 지학순 주교였고, 상임의장은 문익환 목사, 사무처장은 황인성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총무가 맡았어.

 

또한 종교인이 지도부에 많다 보니 종교 시설을 집회 장소로 많이 이용하기도 했지. ‘명동성당’,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향린교회등이 여러 행사에 사용되었고….

 

결국 1987 6월 민주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커다란 성과물을 만들어 냈는데 이게 나중에 개신교가 권력화 되는 기반으로 작용하기도 해.

 

 

 

 

 

해외 교회들도 종교계 저항운동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는데, 개신교는 WCC, 미국교회, 천주교는 로마교황청, 파리외방전교회, 미국의 메리놀선교회 등이 열심히 도움을 줬어.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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