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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김영삼과 종교

 

J: 김영삼은 독실한 개신교 집안으로 유명해. 그는 민주화 활동을 하며 박정희 정권 때부터 열심히 저항 운동을 해 왔으나 막판에 3당 합당을 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고 노무현 대통령 등은 김영삼의 기회주의를 척결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었지.

 

그러나, 김영삼이 집권하고 나서 하나회를 척결하고 금융실명제를 도입 하는 등 좋은 영향도 많이 미쳤었어.

 

 

 

A: 김영삼 씨는 문익환, 문동환 형제 목사의 아버지인 문재린 목사가 시무하는 보문동 신암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지?

 

J: . 그 뒤로도 문 목사 형제와는 가깝게 지냈고 서울 역삼동에 있는 충현교회를 1965년도부터 다니기 시작했어. 그는 교회 내 장로 서열이 꽤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

 

김영삼은 오랜 정치적 역경을 신앙의 힘으로 버텨왔고, 자신을 순교자로 여기며 순교의 각오로 그 고된 민주주의의 여정을 이어왔다고 고백했어.

 

1983 5 5.18 광주 민주화운동 3주년에 전두환 군사독재에 대항하며 목숨을 걸고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는 23일간의 단식투쟁도 신앙의 힘으로 버텼다고 해.

 

김영삼이 가장 좋아했던 구절은 [이사야 41 10~11] 이었고

 

 

 

A: 개신교의 장로가 대통령으로 출마한다고 했으니 개신교 측은 이승만 대통령 때의 향수를 느꼈겠는걸?

 

J: 그랬지. 이승만 이후 30여 년 만에 개신교인 대통령을 기대할 수 있는 순간이었으니까….

 

당시 1992 12, 63빌딩에서 열린 김영삼 후보 초청 조찬기도회에는 1000명이 넘는 목회자가 참석해서 개신교의 열띤 분위기를 볼 수 있었어.

 

본격적인 장로 대통령 만들기운동이 시작될 조짐을 보였다고나 할까….

 

더군다나 김영삼의 개신교 사조직인 나라사랑협의회’(나사협)의 역할은 대단했어. 나사협은 충현교회의 김차생 장로가 1987년에 만든 조직으로 선거 당시 전국 170여 개 지역에 지역 본부를 두고 있었지. 나사협은 선거 기간에 나라를 위한 기도회명분으로 김영삼을 위한 대교회 선전전을 펼쳤어. 김영삼도 개신교계를 겨냥해, ‘주일에는 선거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지지를 호소했지.

 

 

 

당시 김영삼과 친분이 있는 개신교 인사들이 한 일간지에 소개되었는데 이름을 보면 다 극우로 분류되는 개신교 목사들이 대부분이었어.

 

 

 

김영삼 장로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이 시기는 대형 교회들이 본격적으로 선거 기간에 정치 견해를 피력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어.

 

, 산업화, 도시화를 거쳐 오면서 개신교의 덩치가 커지고, 교세가 확장되어 그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어.

 

 

 

A: 대형교회들이 정치적 견해를 피력할 때 별 문제는 없었어?

 

J: 그들 뒤에는 든든한 한기총이 있었는 걸 뭐. 개별적으로 성장한 대형교회가 한기총을 중심으로 빠르게 조직화되거나 세력화 되었으니 가능했던 일이야. 대형교회+한기총의 세트 집단은 나중에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 때 정치적인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해.

 

 

 

A: 그렇다면 김대중, 노무현은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활동을 했을 거고, 이명박 정권 때는 최고의 파트너가 되었겠네?

 

J: 바로 그거야. 우리가 언론 매체를 통해 한번씩 들어 봤을 법한 많은 기독교의 발언들이 정권이 바뀌면서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잘 보면 극우 개신교 세력(대형교회+한기총)이 어떻게 움직여 왔는지 예측할 수 있어.

 

 

 

1990년대에는 교인 숫자 자체가 1000만을 넘어서는 시대였어. 물론 이 속에는 수 많은 사이비 종교들도 섞여 있겠지만….

 

교회 숫자도 1990년대에는 35000개를 돌파하지.

 

 

 

개신교는 단순히 교세만 커진 게 아니였어. 1996년 제 15대 총선에서 여의도 순복음교회와 소망교회는 소속 신자 중에서 무려 6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해.

 

2004년 제 17대 총선에서는 소망교회가 7, 사랑의 교회가 5, 중앙침례교회가 3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고 말이야.

 

이에 덧붙여서 지방자치 단체장, 고위 공무원, 기업체 대표 등 각계각층의 영향력을 지닌 인사들까지 합치고 나면 교회의 영향력은 그 어떤 사회 단체보다 막강했지.

 

 

 

 

 

A: 교회의 세습 문제, 교회의 문어발식 확장, 교회의 자금 횡령 등 여러가지 도덕적 비리들도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유독 불거졌던 거구나. 더군다나 교회가 정치 권력과 결탁하기까지 했으니 문제가 더 많아졌겠네.

 

 

 

J: . 더군다나 신학적으로도 율법주의니, 근본주의 신학이 만연하고 너무 보수적인 신학에 편중되어 있는 한편, 소위 아르뱅주의라고 불리는 신학의 뒤섞임 현상까지 겹쳐져셔 교회의 문제는 한층 복잡해 지고 말았어.

 

다시 김영삼의 이야기로 돌아가 볼께.

 

김영삼은 재임 기간 동안 특별한 개신교 특혜 정책은 없었어. 오히려 종교의 형평성을 위해 군종의 비율을 4:1에서 2:1로 조정해서 불교계에 유리한 개정을 시행해 줘. 그나마 김영삼이 보여준 친 개신교 정책은 2년제 신학 대학을 4년제로 승격해 준 정도였지.

 

김영삼 집권 당시 대표적인 종교 차별 사례는 1. 육군 제 17사단 훼불 사건(1993), 2.국군중앙교회 과잉경호 사건(1996), 3.육군특수전학교 인분투척사건(1997) 등이 있었어. 유독 종교 편향 구설수에 많이 올랐던 대통령이기도 했어.

 

이 사건들은 모두 군대에서 일어났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먼저 육군 제 17사단 훼불 사건은 한 장교가 효율적인 창고 관리를 위해 사용하지 않는 법당을 폐쇄하고 불상을 야산에 버린 사건이었어.

 

두 번째 사건은 국군중앙교회 과잉경호 사건으로 대통령에 대한 경호상의 이유로 인근 법당과 성당 출입을 통제하면서 발생했어. 당시 국군중앙교회 예배에 참석한 대통령에 대한 안전상의 이유였지만 타종교에서는 반발이 거샜었고….

 

세 번째 사건은 육군 교육사령부 산하 특수전학교에서 석가탄신일을 2주일 앞두고 부대 법당에 인분이 뿌려지면서 발생해. 당시 교육 과정 속에서 개신교를 강제로 믿게 하고, 불교를 미신으로 매도하는 등의 탄압이 있었다고 해.

 

 

 

A: 김영삼 대통령 때는 유독 대형 사, 사고도 많았던 것 같아. 가장 하이라이트는 IMF 사태였을 테지만 그 이외에도 가스 폭발 사고, 열차 전복,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서해 훼리호 침몰 사건 , 그리고 뜸하던 무장공비 침투 사건까지…..

 

 

 

 

 

 

J: 그러게. 이런 사건, 사고가 잦아지자 불교계는 대통령이 불교를 경시해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라고 주장하기도 했었어.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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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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