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청산'에 해당하는 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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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이승만과 종교

 

A: 대통령이 지닌 종교가 정치에 미친 영향력에 대해서 좀 더 듣고 싶어. 이승만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쭉 한번 설명해 줄래?

 

J: 일단 이승만은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목사로 불렸어. 그도 한때는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1899년 경시청에 체포되어 한성감옥에서 5 7개월을 보내기도 해. 6개월 간의 고문과 독방수감, 처형의 공포 속에서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새 삶을 찾게 되지. 그래서 감옥에서 죄수 40명을 개신교로 개종시키기도 했고 그러다가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지. 그는 민족운동과 개신교를 결합한 새로운 정치 실험에 관심이 많았어.

 

 

 

A: 이승만 개인이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건 알겠는데, 그게 당시 한국의 기독교 정세와 어떻게 연대를 하게 된거지?.. 그게 직접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칠 만큼 거시적인 결과를 낸 게 있었어?

 

J: .. 아주 많았어.

 

 

 

건국 이후 개신교는 대통령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해.  이승만 집권기에는 1948, 1952, 1956, 1960년 네 차례의 정, 부통령 선거가 있었어. 이 중에서 국민이 직접 표를 행사한 선거는 1952년이 처음이었지. 이 두 번째 정, 부통령 선거 때 개신교는 아주 적극적으로 대선에 개입해. 한국 기독교 연합회( KNCC의 전신)는 기독교 선거대책 위원회를 조직하고 열심히 이승만 대통령 만들기에 힘을 써.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국기에 대한 경례주목례로 바꾸고, 군대에서 군종제도를 실시한 멋진 개신교인임을 열심히 강조했지.

 

 

 

1952 74일자 [기독공보] 사설을 한번 볼까?

 

 

 

우리의 영도자는 애국자요 실력자요 또한 크리스천이기를 원한다우리 대통령은 독재자가 아니요 신앙자다….. 매일 아침 5시에 예배 드리고 감옥전도제, 종군목사제, 국기주목례를 제정하여 전도의 길을 열어준 신앙자다. 우리 대통령은 한 가지 일에만 독재자다. 공산당 토벌에만 독재자다.”

 

 

 

 

 

 

이런 식으로 이승만이 분명 헌법 질서를 교란시키고, 부당한 독재를 하려 했으며 부정선거를 했고 수 많은 이들의 학살을 방조한 혐의가 있음에도 이 모든 건 공산당 토벌을 위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고, 그거 빼고는 정말 다 기독교 친화적이라는 칭찬을 하고 있는 것이지.

 

 

 

그 이후에 개신교 후보 이승만과 천주교 후보 장면 간의 대선 경쟁은 두 종교간의 대결 구도로까지 전개되면서 부끄러운 종교의 단면을 보여주고 말지.

 

 

 

A: 왜들 그렇게 자기 종교 대통령을 밀어 주려고 안달이지?

 

J: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거대한 개신교 나라를 만들고 싶어하는 꿈이 있었고, 친 개신교 정책을 많이 펴다 보니, 그게 실제적으로 종교 활동을 하는데 영향을 미쳤던 것이지. 이를 지켜보던 천주교도 그런 혜택을 꿈꿨을 것이고

 

 

 

이러한 개신교의 과도한 선거 개입은 일반인으로 하여금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하기도 했어.

 

 

 

A: 이승만의 기독교적 정책을 좀 더 나눠줄래?

 

J: 그는 첫 국회인 제헌의회를 기도로 시작하고 대통령 취임식 석상에서도 자신의 종교 성향을 자주 드러냈어. 그리고 그가 재임 기간 중 펼친 친개신교적 정책들을 몇 가지 나눠볼께.

 

 

 

먼저 제헌의회 선거일을 연기시키는 사건이 있었어. 당시 첫 국회의원 선거인 제헌의회 선거일은 1948 59일 일요일이었어. 그런데 한국기독교연합회 등이 주일을 피해 다른 날에 선거를 하자고 요청을 해서 하루 늦춰진 5 10일 월요일로 연기되었지.

 

두 번째는 국영방송을 통해 선교를 허락한 점이야. 1947 3월부터 매주 주일마다 국영방송인 서울중앙방송을 통한 복음 전도가 이뤄졌어. 각 종교 단체보다 확실히 개신교에 비중을 많이 줬지.

 

세 번째는 건국 이후 첫 민간 방송으로 1954년 기독교방송(CBS)가 인가된 점이야. 정부 수립 후 설립된 첫 번째 방송국이 기독교 방송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지.

 

네 번째는 이승만은 해마다 성탄 메시지를 발표했는데 1953년 메시지에서는 남북통일의 숙원들을 또 새해로 미뤄야 하는 오늘! 세계적인 명절날 크리스마스를 또 맞이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검소하고 경건한 태도의 잔치가 필요하다라고 말했고, 국회에서도 성대한 파티를 열었어.

 

다섯째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주목례로 바꾼 점이야. ‘국기에 대한 경례는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신사참배의 아픈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에 개신교들은 이 사건을 수치스럽게 여겼어. 이 때문에 개신교인 사이에서는 신사참배를 연상시키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일이 종종 벌어져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었지. 그 당시 국기에 대한 경례는 국기에 허리를 굽혀 절하는 방식이었는데 개신교는 이를 우상숭배로 여겼어. 그래서 이승만은 이 의식을 주목례로 바꿔 버리지. 오른손을 왼쪽 심장에 대고 국기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 거야.

 

 

 

A: 정말 개신교가 혜택을 많이 입긴 했었구나.

 

J: 그랬지. 특히 방송 관련해서는 KBS, MBC, TBC 등 공중파 3대 방송 체제는 1960년대 들어서야 만들어졌고 불교방송, 평화방송 등 타종교 방송은 기독교 방송이 설립된지 36년 정도가 지난 1990년이 되어서야 설립되니 그 차이가 어마어마하지.

 

 

 

또한 군대, 교도소, 경찰서에 개신교 선교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다 보니 국가 기관과 밀접한 결탁을 할 수 있는 토대가 생겨. 이승만 정권 이후 박정희, 전두환 등 군부 독재가 이어지잖아. 근대 내에 투입된 개신교는 권력을 맛볼 만한 위치에 서게 되지. 또 개신교 기념일인 크리스마스가 이승만 정권 때 공휴일로 지정되기도 해.

 

 

 

1954년 군종 현황을 보면 개신교가 87.8%, 천주교가 12.1% 로 나타나 개신교 편중 현상이 상당하지. 군종 제도 덕분에 군과 개신교가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향후 등장할 군사독재정권과 개신교가 협력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이 제도는 꼭 기억해 둬야 해.

 

 

 

A: 정말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기독교를 바라보니, 이전에는 안 보이던 게 많이 보인다.

 

J: 응 크리스마스도 공휴일 제정이 1949년에 이뤄졌는데 불교의 석가탄신일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975년도에나 공휴일로 지정되.

 

 

 

J: 이제 마지막으로 개신교가 이승만 정권 당시 어떻게 정치, 교육 등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 간략하게 알아볼께.

 

 

 

당시 개신교의 정치 참여는 타종교에 비해 월등했어. 이승만 초대 내각을 보면 정, 부통령과 국무총리를 제외한 21개 부서장 가운데 9 (42.8%)가 개신교 신자였고 그 중 2명은 목사였어. 그리고 1952년부터 1962년까지 장, 차관, 고급 공무원, 대사, 장성, 의회 지도자를 지낸 298명을 살펴보니 개신교인이 39.2%, 불교인이 16.2%, 천주교인 7.4% 로 나왔어.

 

국회도 1946 12 7일 발표된 입법의원 90명 가운데 23% 21명이 개신교 신자였고 목사가 7명이나 포함되어 있었어.

 

당시 개신교 신자 비율이 인구 대비 6% 미만이었다는 상황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지.

 

 

 

A: 한국의 정치와 개신교는 따로 분리해서 볼 수 없을 정도구나.

 

J: . 미국의 역사도 그런 요소가 많긴 하지만 우리 나라는 군부독재 시절도 길고 했기 때문에 더더욱 개신교의 역사를 배제해선 안될 거야. 군대 내 개신교 인맥도 한번 살펴보면 이승만의 심복으로 부산 정치 파동을 해결한 원용덕 조선경비대 초대사령광은 독실한 감리교 장로였고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과 정일권, 이형근도 군내 개신교도 였어. 해군에는 손원일 참모총장이 있었는데 역시 독실한 개신교도였어. 해병대를 창설한 김성은 참모장 역시 개신교인이었어. 공군에는 최용덕 육군항공부대 사령관이 대표적인 개신교인이었어. 김구 선생의 아들이자 제 6대 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김신 총장 역시 공군 내 개신교 인맥에 속한다.

 

 

 

A: 왜 한국의 근현대사가 극우 기독교, 군부 세력, 군부 정권 등과 같이 움직였었는지 조금 감이 오는데?

 

J: 그렇지…. 그 기원을 찬찬히 훑어 보면, 좀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지?

 

 

 

J: 그 당시 개신교는 교육에도 영향력이 컸어. 1956년 개신교는 10개 대학, 1개 간호학교, 11개 신학대, 57개의 중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지. 그 당시 개신교 대표 대학교인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이화학당과 이화여자전문학교, 숭실전문학교 졸업생만 합쳐도 당시 대졸 학력 인구의 15~18% 에 달했어.

 

 

 

그러다 보니 개신교는 그 어떤 세력보다 고급 지식인을 많이 보유한 집단이 될 수 있었어.

 

 

 

A: 그런 역사의 흐름을 고려한다면 정말 한국 근현대사는 개신교의 역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구나.

 

J:  그렇지. 그렇다면 왜 작금의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극우적인 발언을 하면서, 특정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지도 고민을 해 봐야 할 것 같아.

 

 

 

6.25 전쟁이 가장 큰 계기였어. 이는 남한, 북한에 강한 트라우마를 남긴 정쟁이었고 250만명이 사망했으며 산업시설과 공공시설의 80%가 파괴된 처참한 전쟁이었어. 더군다나 같은 민족끼리 벌인 전쟁이니 그 마음의 상처는 어마어마했을 거야.

 

 

 

그러다 보니 이념적으로 남한에서는 반공, 친미’, 북한은 친공, 반미로 극단적인 쏠림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 와중에 개신교는 북한에서 남한으로 잔뜩 이동하게 되.

 

 

 

즉 초기에는 개신교 교세가 남한보다 북한이 월등히 높았는데 북한 정권과 이념적으로 싸워오던 북한 개신교인들이 대거 남하하면서 갑자기 남한의 교세가 증가하게 되. 당시 한반도 전체의 3/1의 개신교인이 월남을 할 정도였으니….당시 장로교의 평양신학교, 감리교의 성화신학교 출신 목회자와 신학생 1200명이 포함되어 있었어.

 

 

 

그러다 보니, 갑자기 남한은 개신교 부흥국가가 되어 버렸고 남한 개신교에는 뿌리 깊은 반공 성향이 심겨지게 되었어.

 

 

 

더군다나 월남한 북한 개신교인들은 남한 개신교의 새로운 권력층을 이루게 되었지. ‘반공이라는 매개체가 군부 독재 정권의 입맛에 맞다 보니 그 둘은 열심히 협력하면서 이 나라의 권력을 누릴 수 있었어.

 

 

              -한국 전쟁 당시 모습-

 

 

실제 영락교회, 광림교회, 금란교회, 소망교회, 충현교회, 성락교회 등 쟁쟁한 대형교회들이 다 북한 출신 목회자에 의해 성장한 교회들이야.

 

 

 

왜 요즘 많은 대형 교회 목사들이 극우적인 발언을 하면서, 촛불 민심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조금은 유추가 가능하지?

 

 

 

A: 그런 역사가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

 

 

 

J: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이승만 정권은 1960 3.15 부정선거를 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해. 315일 마산에서 시작된 부정선거 항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어 마침내 4.19혁명이 일어났거든.

 

 

 

그런데 이승만이 다니던 정동제일교회는 이승만과 부통령인 이기붕의 당선 축하 전보를 발송하며 3월 마지막 주에는 당선 축하 예배도 드리기로 결심해. 감리교 신자인 이화여자대학교 김활란은 “4.19 사건은 우리가 교육을 잘못시켜 발생한 것이니 우리 모두 이승만 대통령께 사과하러 가자고 말하기까지 해.

 

 

 

A: 선고를 조작했는데, 어떻게 교회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J: 이미 권력과 결탁한 개신교는 정직의 가치를 잃어 버리고, ‘정의를 잃어가기 시작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은 의미가 없다고 보는 정서는 이렇게 초창기부터 깔려 있었지.

 

국민들도 이런 개신교의 태도에 분노해서 서울 종로5가 기독교 회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하기도 했고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4.19 순국학생합동 위령제를 불교식으로 치르기도 해.

 

개신교 스스로가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우를 범한 것이지.

 

 

 

그 이후에 이승만이 하야하고 장면 내각이 등장하는데 천주교도인 장면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천주교도 열심히 정치에 개입한다. 이승만은 이를 제지하려 했고 말이다. 장면이 집권했던 1 8개월이라는 짧은 재임 기간에도 정치권의 천주교인 비율이 이전의 7.4%에서 11.9%로 늘어나게 되고 국회의원 숫자도 눈에 띄게 증가하지. 또한 장면은 이승만이 개신교에 주었던 특혜 정책 일부를 바꾸기도 했어. 대표적으로는 형목제도를 바꿔 놓은 점이지.

 

 

 

A: 그런데 이승만 정권 때 미처 이루지 못한 과거사 청산에 대한 부분도 약간 다뤄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가 놓치고 간 어두운 과거를 논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부분일텐데….

 

J: 잘 알고 있구나.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되면서 일제잔재 청산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진행되었는데 대개는 친일 목사 처단, 신사참배 문제가 주요한 한국 기독교의 과거 청산 이슈였어. 그 와중에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논의를 하지 못했지.

 

일단 1948년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제헌헌법 제 101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 (서기 1945-인용자 주) 8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이 삽입되면서 친일파 처단의 법적 정당성이 마련되지.

 

그래서 1948 9 22일 국회는 친일파 처단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고 이 법의 실행기관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조직해.

 

 

 

당시 반민특위의 예비조사 결과 7천 명에 달하는 명단이 작성돼. 그 중에 교회 지도자들도 상당수가 있었어. 당시 반민특위에 검거된 교회 지도자는 크게 네 가지 유형이 있었어.

 

1.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유형 (ex) 비행기 헌납운동, 교회종 헌납운동)

 

2.     언론매체나 출판물을 통해 징병제를 찬성하고 적극적으로 선전한 유형

 

3.     조선총독부가 주도적으로 조직한 친일단체의 간부로 활동한 유형

 

4.     신사참배를 반대하거나 반일적인 설교를 한 목사 및 교인들을 일제 경찰에 밀고한 유형

 

 

 

여기서 4번이 바로 밀정이라 일컫는 이들로서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서 가장 악명이 높았어. 왜냐하면 가장 비열하고 치사한 수법으로 친일을 한 유형이었거든.

 

 

             -반민특위 모임-

 

 

당시 친일 목사들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위였다는 증언을 많이 했어.

 

A: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그런 불의에 동참해도 된다는 거야?

 

J: 그들이 말하는 교회,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교회는 결국 제도적 교회였을 뿐인거지. 교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정신, 신념 등에 대한 부분은 그 중요성을 대폭 축소시켜야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였던 거야.

 

친일 목사를 두둔했던 민경배 교수는 천황 중추의 일제 헌법 아래에서 교회 자체의 생존 자체가 국법상 불가한 때였으며 만약 일제와의 타협이 없었다면 교회는 지상에서 소멸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 주장하며 결국 그들의 친일 행위 덕분에 한국교회가 세계적인 교회를 이룰 수 있었으니 이를 심판하기 보다는 부등켜 안고 함께 눈물을 흘려야한다고 강조했지.

 

 

 

A: 상당히 교묘한 궤변 같은데?.... 그럴싸한가???

 

J: 만약 이들의 논리가 맞다면 일제 강점기 때 일제의 구약성서 폐기 정책에 호응했던 전필순 목사의 행위는 교회의 보존을 위한 일이었다는 건가? 학생들에게 일제의 침략 전쟁에 나가 싸우라고 권유한 양주삼 목사도 교회 유지를 위한 선을 행한 것이 되고 말겠지? 또한 신사참배 반대자들의 동태를 일제 경찰에 밀고한 김길창 목사의 행위도 교회의 소멸을 막기 위한 부득이한 행동이었고 말이야. 그들의 논리에는 모순이 많았어.

 

 

 

A: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사태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어? 나름 신실한 개신교 장로 대통령이었잖아?

 

J: 그는 여러 수단을 동원해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해. 이 과정도 이야기 할 게 굉장히 많지만 요약하면 이승만은 친일 청산을 어떻게든 막으려 했어.

 

 

 

이승만은 1. 반민특위 습격사건(1949.6.6), 2. 국회 프락치 사건(1949.6.20), 3. 김구암살사건(1949.6.26) 을 통해 극우 반공 체제의 골격을 만드는데, 반민특위 습격사건 당시 친일 청산에 힘쓰던 국회의원들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극우반공주의자들은 반민특위는 공산당의 앞잡이다등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친일파인 손홍원과 김정한이 지도하던 국민계몽회가 이 를 주도했다는 거야.

 

 

 

A: 가만 보니, 이승만 정권 때 반공 이데올로기가 태동하기 시작했구나. 그리고 친일파들이 자신들의 죄악과 수치심을 가리기 위해 그 수치심을 반민특위에게 전가했던 건 아닐까? 그들을 공산당, 빨갱이로 취급하면서….

 

J: 충분히 그러한 심리적 해석이 가능한 상황이었어. 죄를 저지른 자들이 오히려 칼을 들고 피해자를 공격하는 격이라고나 할까?

 

 

 

A: 김구 암살 사건은 아직도 미스테리인가? 당시 단독정부 수립 때 김구는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이었지?

 

J: 맞아. 그러다 보니 김구 암살 배후에 이승만, 미국 개입설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고 해.

 

결국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괴롭히면서 자신의 세력 기반인 친일세력의 안정화를 구축하고 국회 프락치 사건을 통해 자신의 행보에 제동을 거는 제헌국회를 길들여 갔지. 또한 자신의 라이벌인 김구는 서북청년회라는 북한에서 온 극우 청년 단체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지. 이러다 보니 반민특위는 와해되고 친일파 청산의 노력은 좌절되고 말아.

 

 

 

A: 친일파들이 살아남아 오히려 기득권이 되어 버렸으니 일제 치하 식민지 유산이 더욱 강한 영향력을 미쳐 왔겠네.

 

J: 맞아. 과거사 청산의 핵심은 친일파 척결이라는 인적 청산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당시의 구조,체제를 청산하는 게 더 관건이었지. 식민지배의 경험을 통해 남한 사회에 구축된 국가주의적 사고 방식, 행동 양식을 걸러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그 기회를 놓쳐 버린거…..

 

 

 

A: 아쉽다. 과거를 다시 돌아보고, 문제를 바로 잡는 과정이 얼핏 별거 아닌 것 같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개신교에 미친 영향력도 크겠다. 더군다나 개신교 장로였던 이승만이 그런 부분을 간과했다는 점은 뼈아픈 기억이 되겠어.

 

J: 맞아. 물론 모든 우리 사회 문제가 친일파 문제, 과거사 청산을 못한 문제 때문에 생긴 건 아니라지만, 이 부분도 중요한 한 요인이라고는 볼 수 있겠지.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다 나눌 순 없지만, 반민특위가 힘을 잃고 나서 친일 관련 이슈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금기어가 되어 버렸고, 그 이후에도 용감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문제는 잘 해결되지 않았어.

 

또한 어떤 목사는 친일 행위로 죄를 반성해야 할 처지임에도 마치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 운동가로 선전되기도 했었어. 전필순 목사의 예가 바로 그러한 경우지. 이 사람의 말도 안되는 사기극은 따로 찾아서 공부해 볼 필요가 있을 정도야.

 

 

 

그리고 이승만 정권 당시 제주 4.3 사건은 제주도 전체 인구 10분의 1에 해당하는 3만명이 학살당한 사건인데 그 당시 서북청년회가 제주도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데 기여를 했어. 그 이후에 여순사건도 있었고…..그런데 서북청년회는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와 연관이 깊었어. 그 이외에도 보도연맹 사건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이 모든 과정 속에 극우 개신교가 깊게 개입되어 있어.

 

 

 

극우 개신교들은 당시에 이승만이 삼선 집권을 하게 만들기 위해 3.15 부정선거도 열심히 도와주고, 천주교인 장면이 대선 경쟁에 합류하자 천주교를 무너뜨리기 위해 다양한 음모론과 흑색선전을 하기도 했어.

 

 

 

A: 이렇게만 보니 한국 개신교의 역사가 너무 암울하고 엉망인데?

 

J: 분명 훌륭한 역할을 해왔던 분들도 있었겠지만, 주류가 워낙 극우 개신교 집단이다 보니, 그들 중심으로 이뤄졌던 역사의 서술은 어두운 부분이 많았던 게 사실이야.

 

특히 이승만 정권 때와 박정희 정권 때는 극우 개신교의 흑역사가 너무 많다 보니, 지금은 다 말을 할수도 없을 지경이지. 그냥 큰 가닥만 잡고 가는 선에서 만족하자구.

 

[대통령과 종교]라는 책에 나온 내용을 대화 형식으로 각색해 봤습니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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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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