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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송: 서구적 개인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공동체 강조가 쉽게 정당화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적 근거도 쉽게 찾을 수 있고요. 그러나 그런 이야기에서 늘 간과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개체성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살아남아 있었다면, 서로 다른 것을 포용해 주는 태도인 '관용', 요즘 똘레랑스(Tolerance) 라고 부르는 그것이 교회의 주요한 특징으로 나타나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공동체 이야기를 하면 '다양성' 보다는 '동질성'만 잔뜩 강조하고, 포용력이나 인내심은 점점 잃어 가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강영안: 재미난 지적입니다. 그것은 공동체성의 변질이라고 봐야겠지요. 성숙한 개인성이 전제되어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이지, 그것이 없으면 그냥 집단이지요.

​동질성을 강조할수록 집단성이 강화됩니다. 타자성이, 심지어는 이질성이 어우러져서 색깔을 낼 때라야 진정한 공동체가 가능합니다.  (집단성(collectivity)는 공동체(community)와 다르다는 논의가 있었음)

기독교 신앙으로 제한해서 이야기하자면, 에베소서에서 강조하듯, 한 하나님,한 성령, 한 주님을 고백하면서도 색깔의 차이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관심이나 직업이나 처한 상황은, 죄가 아닌 한 '선의 씨앗(seed of goodness)'이 될 수 있고, 선을 확장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면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수용해야 진정한 의미에서 공동체입니다.

다른 색깔이나 다른 모양을 배제해 버리고 완전히 동질화한다면 그것은 폭력이지요. 사실 그런 의미의 공동체는 생명을 자라고 번성하게 하기보다는 질식시키고 죽인다고 봐요.

공동체의 강조는 살림의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죽임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없지 않겠어요?

​양희송: 1970년대 이후 한국 개신교가 급속하게 규모를 키우던 때의 전형적인 전도 방법이나 집회 방식은 한 가지 모델을 빈도를 늘리거나 강도를 높이면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영리> 같은 전도 책자로 단순하고 정형화된 내용을 복음의 핵심으로 전도해 왔고, 대형 집회나 부흥회 등은 주로 사람들을 압도하는 스케일로 개최하고 정서적 일체감이 강하게 고양되도록 했지요. 그런 것이 반복적으로 오랜 기간 축적되어 오늘날 복음주의 내 대중 정서의 밑바탕을 이룰 뿐 아니라, 공동체 내부를 규율하는 방식과 바깥을 대하는 태도에 뿌리 내린 것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이런 진단이 틀리지 않다면 어떻게 기독교 신앙 안에서 개체성을 중요한 특질로 재발견하고 그것을 고양시킬까 하는 질문이 아주 크게 다가옵니다.

강영안: 시간 순서로 보면 개체성 확립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그 개체는 개체로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해 가야 합니다.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개체를 성장시켜 주는 요소이기도 하구요. 이렇게 본다면 개체성 강조에만 머물 게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행동하고 사고하는 데까지 성장하도록 도와야죠.

​그런데 개체성도 여러 색깔, 여러 모양이 있고 여러 위치에 있을 수 있지요. 그런 것이 어우러져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텐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신앙고백이죠.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공산주의자에게 '공산주의 선언(Communist Manifesto)' 이 있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신경(Creed)' 즉 신앙고백이 있어요. 모든 기독교 전통을 하나로 묶어 주는 공동의 신앙 고백으로 '사도신경'(Apostles' Creed)' , 아타나시우스 신경(Athanasian Creed)',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Nicene-Constantinople Creed)' 이 있습니다.

 

 

다 같은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기독교에는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가톨릭도 있고, 그리스 정교회도 있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도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도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칼뱅을 따르는 개혁파(Reformed) 교회가 있고, 루터교, 침례교, 감리교, 오순절 교회도 있지요. 서로 다르지만 이 모든 교회를 하나로 묶는 공통의 요소는 신앙고백입니다.

신앙고백의 일치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서로 다르게 형성되고 성장했지만 하나의 교회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희송: 신앙고백의 중요성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더라는 것이 교회사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신앙고백은 같은 듯하나 구체적인 사안에서 입장이 달라지면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정치적 사안이나 문화적 취향에서 견해가 갈라지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를 믿는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로 비약하고 밥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서로 다른 예수를 믿는 것 아닌가?" 하고 반문하게 됩니다.

​강영안: 지역이나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전통이 형성된 것, 색깔이 다르거나,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거나, 오른쪽에 있거나, 왼쪽에 있거나 누구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가톨릭에 대해, 정교회에 대해 형제자매라 이야기해야 하지요. 그런데 현실을 돌아보면 우울한 일들을 많이 봅니다. 한 교회 안에서도 최근 몇 년 사이 여러 문제에 대해 입장의 양극화를 경험했잖아요.

이라크 파병을 할 것이냐, 노무현 정부를 어떻게 봐야 하느냐, 이명박 정부는 어떻게 봐야 할 거냐, 촛불 시위에 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 등, 아주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교회 안에서 심한 양극화를 보였습니다. 한 공동체라고 하면서 구체적 사안에서 의견 차이가 발생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통적으로는 교회에 의견 차이가 생기면 공의회(Council)를 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 등을 열어서 의견 차이를 조정하고 하나의 교회로 나아가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다릅니다. 사회적으로, 신앙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부딪힐 때 함께 심사숙고할 자리가 없습니다. 노회와 총회는 사실상 일반 성도와 무관한 회의가 되었거든요. 목사와 장로들 모임이고, 성도들이 관심 두고 묻는 물음은 안건으로 올라가지 않아요.

어떤 교회도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교회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숙고하고 결정하지 않아요.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큰 난관이나 결함이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생각해요.

 

 

내가 '공교회성'(Catholicity)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보는 까닭이지요. 공교회성은 내가 속한 지역교회뿐만 아니라 이 교회와 저 교회가 다 주 안에서 하나의 교회라는 거죠.

 

나는 장로교 고신교단에 속하는데, 장로교 통합, 장로교 합동 등 국내의 여러 장로교단 간에 공동의 문제를 놓고 숙고할 수 있는 채널이 없습니다.

 

연합체가 없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공교회성의 관점을 가지고 연합체들이 활동을 하는 건 아니에요. 한국처럼 복잡한 일이 자주 일어나는 나라에서 성도들이 어떤 입장을 취할지 방향 제시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공교회적인 의견을 모으고 행동을 유도하는 절차가 없기 때문에 이라크 파병이라든지 촛불 시위 등을 접하면서 교회 안에서 젊은이들과 기성세대의 견해 차이가 생각보다 훨씬 커지지 않았나 해요.

양희송: 공교회성과 관련해서 제가 흥미롭게 생각한 것이, 공교회성은 내부적으로는 전체 교회를 대표하는 체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로 집약되고, 대외적으로는 '공적 책임'(Public Responsibility)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로 귀결된다고 보는데, 교구체제(Parish system)을 '공간으로 분할하는 경우'와 '사람으로 분할하는 경우'에서 공적 책임을 이해하는 방식이 꽤 차이 나는 것 같습니다.

 

공간에 따라 교구를 분할하고, 구심력이 강한 감독제(Episcopal)를 택하는 가톨릭, 성공회, 감리교 등은 목회활동 외에 교구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목회적 관심 범위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에 반해 회중교회(Congregationalism) 전통인 침례교, 오순절 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가 가진 교회론은 '신자들의 공동체'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만을 목회의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이러다 보니 교단 난립 문제도 가세해서 한 건물에 교회가 서너 개 들어오는 경우도 생깁니다.

여기서는 어떤 그리스도인이 교회 바로 옆에 산다 해도 우리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아니면 목회 대상으로 삼으면 안되지요. 혹은 아무리 멀리 살아도 우리 교회에 출석하면 목회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회중교회적 전통에서는 '교회 안'과 '교회 바깥' 이라는 구분이 가톨릭과는 다른 의미에서 뿌리 깊게 존재합니다. 이들은 '교회 바깥'에 관심을 표명하는 방법은 언제나 '멤버십 확장', 즉 '선교' 아니면 '전도'로 정당화되어야 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그것이 '구제' 또는 '사회봉사'도 종종 '선교'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적 관심, 정치 참여 등을 놓고 이것이 '선교냐, 아니냐' 라는 논란이 나옵니다.

'공교회성의 회복'이 모든 교단이나 교회에서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강영​안: 기본적으로 개신교는 종교개혁 이후 무수한 분열을 통해, 엄밀한 의미의 공교회성을 상실했다고 봐야겠죠. 저는 여러 점에서 종교 개혁을 지지하고 그 전통 안에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열이 개신교의 최대 비극이라 생각해요. 그런데 한국 교회를 보세요. 각 교단 총회와 교단 연합기구인 한기총이나 NCC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기총이나 NCC에서 공교회성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해요.

칼뱅은 '보이는 교회' 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나눌 때 보편성을 갖는 교회는 비가시적 교회,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생각했거든요. 과거에서 미래에 걸쳐 있고, 전 세계에 확대되어 있는 모든 교회가 결국은 하나의 공교회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죠.

그런데 공교회성을 가톨릭에서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주교체제'로 의미를 부여하지만 사실 '공교회성'은 '우리가 한 분 주님을 모신다'는 것이 가장 기본입니다.

장로 교회든, 루터교회든, 순복음 교회든 '한 주님을 모시는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는 의식이 현재 한국 개신교회에 결여되어 있고 부족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묻고 답하다] 에서 -​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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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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