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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월 유신 ~ 6월 항쟁 : 직접적 언론통제와 종속적 유착관계

 

독재권력이 국민의 주권을 박탈한 시대였기 때문에 언론이 사회적 권력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정치권력은 언론시장 신규 진입을 봉쇄하고 취재와 보도의 자유를 제한했으며, 언론인에 대한 협박과 테러를 자행하고 보도와 편집에 직접 개입했다.

협조적인 언론사에 대해서는 이윤 추구의 기회를 열어주되 권력의 나팔수가 되기를 거부하는 언론사에 대해서는 경제적 기반을 공격했다.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폐합, 보도지침은 이 시기의 권언관계를 증언하는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종속적 유착관계는 전두환 정권의 몰락이 분명하게 예고되었던 6월 항쟁 전야에 가서야 비로소 동요의 조짐을 보였다.

 

 

2) 6월 항쟁~2001년 1월:선택적 상리공생과 제한적 대립

6월항쟁의 승리와 더불어 선거를 통하지 않고는 정권을 창출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

독재시대의 종속적 권언유착은 종말을 고했다. 권언관계는 대등한 상리공생으로 발전한다. 양측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만큼 정치권력은 유력 언론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했다.

김영삼 정부가 언론사 세무조사를 유야무야 처리한 것은, 정치권력이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독자적인 사회적 권력으로 언론이 성장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언론사는 자기의 입맛에 맞는 정치권력이 탄생하도록 적극적으로 국민의 의사 형성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적 상리공생은 안정성이 약하다.

다수 국민의 여론이 정치권력에 비판적일 경우 언론은 이윤과 사회적 권력의 확대를 위해 정치권력과 제한적 대립각을 연출한다.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양김 혐오증 유발(87년)과 노골적인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92년)를 했던 유력 언론사들이 이들의 집권 후반기에 가한 대정부 공격은 대등한 상리공생이 얼마나 불안정한가를 보여준다.

김대중 정부가 2000년도에 정기 세무조사를 하지 않는 등 집권 초기 3년 동안 지난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했던 유력 언론사와의 대립을 회피한 것은 소수파 정권이라는 약점과 경제난 등 불리한 환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권세력으로서 선택적 상리 공생의 수혜자가 되려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3) 2001년 1월~현재: 선택적 상리공생의 일시적 붕괴

2001년 1월 김대중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 이후 상황은 1987년 이후 약 15년간 계속되어온 권력과 언론의 선택적 상리공생과 제한적 대립관계가 일시적으로 무너진 과도기다.

김대중 정부는 유력 신문사와의 상리공생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고, 합법적 수단인 세무조사를 통해 언론사의 물질적 토대와 사주들의 특권을 공격하고 신문고시를 부활시켜 신문시장의 불공정 경쟁행위를 규제하고 나섰다. 그러나 구속된 유력 신문사 사주들은 보석으로 풀려났다.

 

부활한 신문고시는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언론개혁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동력과 국민의 지지를 상실했다.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의 선택적 상리공생이 어떤 식으로 되살아날지 알 수 없다.​

 

-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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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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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흑역사] 책의 내용을 참고해서 대화 형식으로 재구성 해본 글입니다. 한국 근현

대사와 한국의 교회사가 밀접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에 한국 교회의 본질적 문제를 고민하는

분들이라면 이와 같은 내용들은 잘 숙지해 두시길 추천 드립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일제 강점기 시대 일본과 미국 선교사의 결탁

 

A: J. 한국 기독교 요즘 왜 이런데?

 

J: 뭐가?

 

 

 

A: 도덕적으로도 엉망이라는 기사가 많이 나오고, 극우 정치 세력들과 자주 손을 잡는 것 같더라? 기독교가 지향하는 바가 원래 이런 거야?

 

J: 도덕적인 부분의 타락은 분명 심각한 문제인 것 같아. 물론 훌륭한 목회자들도 많이 있지만 이들의 소식은 언론이나 대중매체에 잘 공개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문제지. 대형교회처럼 이슈화 되기 좋고, 권력과 잘 결탁되어 있는 무리들 속에서 문제들이 잘 불거지는 것 같아. 기독교가 극우 정치 세력과 결탁해 가는 과정은 한국의 교회사를 자세히 들여다 봐야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아.

 

 

 

A: 한국의 교회사?... 좀 더 자세히 말해 줘!

 

J: 일단은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미국 선교사들이 보여준 모습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구나.

 

 

 

A: 그 분들 덕분에 한국이 복음화 되고, 기독교가 전파된 거 아니야?

 

J: 물론, 그렇지. 좋은 일을 참 많이 해주고 가긴 했어. 그런데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어두운 측면들이 있었어. 그 부분을 나눠 볼께.

 

 

 

J: 1910 년을 전후로 한국 기독교는 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했지. 장로교회는 1907년 최초의 노회(지역조직) 1912년 총회(전국조직)을 발족해. , 북 감리교회는 1910년을 전후로 별도의 연회조직을 만들고 말이야. 그러다가 1930년도에 합동을 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를 탄생시킴으로써 한국 기독교는 하나의 사회조직이 되.

 

A: 꽤나 오래 전부터 한국 기독교는 태동했었구나.

 

 

 

J. 그렇지. 그런데 식민지 시절 초대 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는 조치를 취해. 예를 들어 선교사의 명의로 되어 있는 교회 부지, 전답, 주택 등의 소유권을 인정해 줄 뿐만 아니라 면세 특권도 부여했지.

 

 

 

A: 왜 일본이 한국에 온 선교사들에게 그렇게 잘 해줬지??

 

J: 이는 일본의 조선병합에 대한 국제 여론이 나아지기를 기대했던 이토 히로부미의 계산이 깔려 있던 거였어. 한국에 온 선교사들에게 잘해주면 국제 무대에서 일본의 이미지가 더 개선될 걸 알고 있었던 거야.

 

 

 

 

 

A: 그런 뒷 이야기는 있는 줄은 몰랐는데…..

 

J: 물론 1910년 일본의 조선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한국에 온 선교사들을 압박하는 정책을 취했었어. 1915년 포교규칙을 제정해 선교의 자유도 제한하고 미션스쿨의 종교교육도 금지했지.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일본조합교회를 식민지 조선에 침투시키는 간사한 방법도 써.

 

 

 

A: 그렇지. 교회와 선교사를 탄압하는 일본의 모습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걸?

 

J: . 그런데 1919 3.1 운동이 시작되면서 조선총독부는 기독교 정책을 온건하게 바꾸기 시작해.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해 진 것이지.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에 온 선교사들에게도 잘해주게 된 거야. 한국에 온 선교사들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게 미국 선교사였으니까….

 

 

 

A: 어떤 방식으로 선교사들에게 잘 해 준거야?

 

J: 그들의 선교사 회유정책의 핵심은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를 보수화하여 식민지배의 한 축으로 삼는 것이였어. 그걸 가능케 했던 건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고, 그들에게 특권을 주는 방식이었지.

 

 

 

A: 이미 1900년도 초반부터 기독교는 보수화 되었던 거구나.

 

J: 그런 셈이지. 국가 정부와 결탁해서 이득을 취하고 재미를 보는 모양새가 그 당시에도 어느 정도 있었어.

 

 

 

 

J: 구체적으로는 일본은 포교규칙을 개정해서 교회로 하여금 자유로운 선교를 가능케 하면서 교회의 숫자는 크게 증가하게 되지. 그리고 1915년 조선총독부가 교육과 종교의 분리 원칙을 내세우며 금지했던 미션스쿨의 종교 교육도 나중에는 허가를 내줘.

 

 

 

A: 미션스쿨이 허가를 받은 과정에서도 일본의 도움이 있었구나.

 

J: 그러다 보니 미션스쿨은 지정학교로 인가된 이후에 일제가 요구하는 교과가정을 따르기 시작했고, 다른 학교들도 지정학교로 인가 받기 위해 총독부의 눈치를 보며 그들에게 잘 보이려는 입장을 지니게 되어 버렸지. 경신학교, 계성학교, 신흥학교, 신성학교 등의 미션스쿨들이 지정학교로 인가된 후 일제가 요구하는 교과과정을 따랐던 아픈 기억이 있어.

 

 

 

A: 미션스쿨이 그렇게 중요한가?

 

J: . 식민지 시기 장로교회의 재정 총회록을 보면 미션스쿨의 유지와 운영에 가장 큰 몫이 할당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어. 그러다 보니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장로교회는 미션스쿨을 유지하기 위해 타협했던 부분이 있었지.

 

 

 

A: 일제에게 타협한 미션스쿨은 어땠을까?

 

J: 그러다 보니 나중에 일본의 아시아, 태평양 침략 전쟁을 벌였을 때 미션스쿨들은 이를 지지하는 부끄러운 교육기관이 되어 버렸지.

 

 

 

A: 결국 미션스쿨을 세워서 바른 기독교 정신을 함양한 그리스도인을 양성하고픈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과정과 그 수단과 그 중간 과정은 어두운 타협이 있었던 건가?

 

J: 말하자면, 그런 부분이 있었지.

 

 

 

J: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선교사 회유정책 중 기독교단체의 법인설립을 허용해 준 부분이 아주 중요했어. 이게 1920년도에 있었던 일인데 그 이전에는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는 재산을 개인 명의로만 등기해야 했어서 안정적인 재산 보호가 어려웠어.

 

A: 그러면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생기면 교회의 권리가 잘 보장되지 않았겠구나.

 

 

 

J: 그렇지. 그러다가 1919 3.1 운동이 있고 나서 선교사들은 교회 및 선교사 명의로 재산을 등기할 수 있는 법인 설립을 요청하였고, 총독부는 1924년에 이를 수용했어. 이를 계기로 기독교 단체는 재산권 행사의 주체가 되어 법의 보호를 받으며 재산을 지킬 수 있게 되었지.

 

 

 

 

 

A: 교회의 재산이 이 때부터 축적될 수 있는 구조가 된건가?

 

J: 그런 측면도 있었지. 그 당시 세금 감면을 받았던 기록도 남아 있고…. 무엇보다도 이런 여러가지 혜택을 받고 나서 선교사들은 조선총독부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거야. 당시 한 잡지에서는 선교사들이 그 아래에 있는 신도에게 향하여 정치운동과 종교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모든 권세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니 권세자에게 굴복하라고 일러주는 모습을 꼬집을 정도였지.

 

 

 

J: 이렇게 선교사들이 일본을 돕는 형국이 되면서 식민지 조선 백성들은 반감을 키우게 된 측면도 있어.

 

 

 

J: 그리고 재단법인의 설립으로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는 기득권은 지킬 수 있게 되었지만 조선총독부의 통제를 받기 시작해. 재산목록과 사업상황, 지출과 수입 등 재산상황과 관련된 정보들이 조선총독부에 보고되는 식으로 말이지. 장로교회도 지속적으로 조선 총독부에 의존을 했는데 기독교인 공동묘지 설치를 위해 총독부와 교섭하기도 하고, 총회 참석자의 경비 절감을 위해 철도 할인권을 총독부에 요구하기도 해.

 

A: 서로 이익을 주고 받기 시작하니까 감시하고 의존하고 뭔가 관계가 꼬이기 시작하는 걸?

 

 

 

J: 그러게. 이러한 역사적 정황 속에서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는 제도적 기독교화되기 시작해. 제도화 된 기독교는 국가권력에 대한 절대적 의존성을 지니고 조직의 생존과 확장에만 큰 관심을 두기 시작하지. 그러다 보니 교회의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속성과 의미에 대한 고민은 약해지고 눈에 보이는 교회, 눈에 드러나는 교회 건물, 눈에 보이는 교회 재산 등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되기 시작한 거……. 소위 메가처치 현상도 이렇게 기독교가 제도화되면서 발생한 측면이 있는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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