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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안: 목회자는 신학교에서 일상적 삶과 관련된 지식을 얻고, 그런 방식으로 성도들을 훈련시킬 수 있도록 훈련받아야 해요.

적어도 총론적인 훈련은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드리기가 민망하지만 제가 아는 한 이런 훈련을 하는 신학교가 한국에 한 군데도 없어요. 전통적인 신학 분류 방식에 따른 교육이 아직도 신학교 교육을 지배하고 있어요.

기독교 신앙이 세상의 사상과 문화, 과학과 예술, 정치, 경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폭넓게 읽고 생각하고 공부할 수 있는 신학교가 없습니다.

신학 교수조차도 이야기를 나눠 보면 기독교 세계관으로 통합적 사고를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신학 교수들은 전공을 벗어나 통합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면서 각 학문과 삶과 신앙을 연결시키는 사고를 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 아닌가 해요.

 

그렇기 때문에 신약을 가르쳐도, 구약을 가르쳐도, 교회사를 가르쳐도 단편적이고 일면적인 것만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교회사는 교리사 중심이거나 교회 사건사 중심에 그치거든요. 주로 교회 지도자 중심이고요. 그렇게 가르치니까 교회사에서 노동자의 역할이 뭐고, 의사의 역할이 뭐고, 간호사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런 직업이 언제 생겨났고, 왜 생겨났는지, 왜 화가들은 근대에 와서 일상적 삶의 세계를 그리게 되었는지 관심이 없지요. 왜 공회나, 교황이나, 사건이나, 지도자만 중심에 놓고 교회사를 가르쳐야 합니까?

사실 이 내용을 가지고 2007년 5월 <목회와 신학> 대담 때 풀러 신학교 총장인 리처드 마우(Richard Mouw)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평신도 사역을 위한 커리큘럼을 어떻게 운영하느냐 물었더니 풀러신학교에는 '평신도 사역 연구소' 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곳에서 연구한 것이 커리큘럼에 반영되는지도 물었어요. 실상 그렇지 않다고 하더군요.

전통적인 네 가지 분야, 즉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이 주류를 이룬다는 뜻이에요.

이런 분류는 현대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가 도입한 방식입니다.

겨우 200년의 역사를 가진 방식인데, 지금은 거기에 '기독교 윤리학', '기독교 상담학' 등을 좀 더 붙여서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이죠.

 

사실 이건 학문적인 분류방식이지,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 커리큘럼 분류로는 적당하지 않아요.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신학교는 대학에 있는 신학대학, 곧 Divinity School 또는 School of Theology 가 아니라, 그야말로 각 교파의 신학교 곧 세미나리(Seminary)인데, 단어 뜻을 보십시오. '세미나리'는 라틴어 세미나리움(Seminarium), 곧 '모판'에서 온 말이에요. 세멘(Semen)은 씨를 뜻하지요. 볍씨나 고추씨를 뿌려서 키워 내는 모판, 이것이 세미나리의 어원이에요.

신학교는 이렇게 보면 일종의 '양성소'예요.

목회자를 키워 내는 양성소. 그런데 이걸 '신학대학원'이라 부르니 무슨 대단한 학문을 하는 곳으로 착각하는 거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슐라이어마허 이후 근대 신학교육은 마치 학자를 키워 내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커리큘럼을 그렇게 짰지요. 신학 교육의 목적, 방법, 과정을 전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키만큼 성숙한 사람, 온전한 사람(엡4:13)으로 자라가고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섬기도록 훈련할 수 없습니다.

-[묻고 답하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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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안: 지금 말한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죠. 한기총이나 NCC가 한국 교회를 대변하는 기관으로 지목되고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은 1980년 이후 상황이지요. 교계연합기구의 등장 이전에는 각 교단이나, 대표적인 기독교 지도자가 그 역할을 상징적으로 했지요.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이나, 고신이나 합동 측에서도 그런 분들이 계셨지요. 그분들이 돌아가신 뒤에는 한기총이나 NCC가 마치 한국 교회를 대변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어요.

이같이 한국 교회를 대변하는 것은 그야말로 목사들의 모임이지요. 장로들도 별로 관여하지 않고 더욱이 일반 성도들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양희송: 그리고 가톨릭과 달리, 개신교 연합기구들은 그 구조상 아래로부터 위임의 절차가 일관되게 연결되지 못하고 중간 중간 연결고리가 다 끊어져 있기 때문에 상징적 수준을 넘어서는 실질적 대표성을 말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강영안: 가톨릭의 경우에는 위에서 위임을 하지요. 교황에서 추기경으로, 추기경에서 대주교로, 대주교에서 주교로, 주교에서 각 본당 신부로 내려옵니다. 일종의 위임이고 명령이며 권면 방식으로 내려옵니다.

 

그러나 사실 개신교는 그런 구조 자체도 없잖아요. 위아래 소통할 수 있는 통로 자체가 없으니, 정부에서도 편의상 한기총이나 NCC를 통로로 삼아 업무를 진행하는 것이 쉬웠지요.

목사들도 나름의 통로로 교단의 목소리를 내봐야 들리지 않으니까 연합의 이름으로 교회의 의견을 발표하고 정치적 입장을 취해 온 것이 사실이지요.

얼마 전에 방송국에서 기독교에 비판적인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어요. 한기총을 중심으로 거세게 항의했더니, 방송국에서 그 프로그램 마지막에 한기총 대표의 의견을 이야기하도록 했다고 해요. 그런데 나오지 않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의견을 들었어요. 전혀 설득력 없는 이야기였다지요.

그런 상황을 보면서 "목사님들이 다 선수가 됐구나" 라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목사님들이 모두 선수가 되어 공도 차고, 운동장을 누빈다는 말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적 목소리를 내는 주요 역할을 목사님들이 맡으려 해요.

마치 현장에서 뛰는 선수처럼, 대단한 착각입니다.

 

목사님들은 선수가 아니라 성도들을 키워 내고 양육하는 코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축구로 말하자면 벤치에 앉아서 코치 일을 보아야 해요. 선수로 뛰는 것은 성도들이에요. 경제나 정치나 문화 영역은 그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갖춘 성도들이 해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개혁주의 관점에서 목사들의 영역을 중심에 그렸죠.

그러니까 정치, 경제, 사회, 언론, 문화 영역 등 각 분야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 공동체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일이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 성도 그룹이 해당 분야에 의견을 내고, 필요할 경우 법 개정을 요구하거나 시민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목사들은 성도들을 선수로 키워서 전문 분야로 내보내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교회의 개념이 너무 넓기는 한데, 그때 교회는 목사만 말하는 건 아니거든요.

- [묻고 답하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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