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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배신은 예정인가? 자유의지인가?

 

43page 부터 시작

 

 아무래도 유다의 배신이 던지는 골치 아픈 신학적 질문은 예정과 자유의지에 관한 것입니다.

문제 상황을 설정하기 위해 극단적인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인간의 자유가 배제된 채 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행동인가?” 아니면 반대로 유다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에 따른 것이지 하나님의 예정과는 무관한 것인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 주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고 둘 다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도 간단치 않습니다 .

 

만약에 전자라면, 유다에게는 도덕적 책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도덕의 전제는 자유입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없다면 그의 행동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A를 선택할 수도 있고, B를 원할 수도 있는데, A를 결정할 수 있어야 도덕이 성립됩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장발장과 같은 처지에 있다고 해서 빵을 훔치지 않으며, 신부의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새롭게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에서 정당방위를 제한적이나마 인정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는 극한적 궁지에 내몰린 경우, 예컨대 상대방이 살인의 의도로 신체적 위협을 가할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상대의 신체와 생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정당방위로 보고 무죄로 간주합니다.

만약에 유다의 행동이 자신의 자유의지 없이 필연적인 하나님의 예정을 수행한 것이라면, 그는 무죄가 될 것입니다.

 

 만약 후자라면, 유다에게 도덕적 책임을 부과할 수 있지만, 신앙에 치명적 과오가 발생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하여 바울은 벅찬 감동으로 외칩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 ( 11:36, 새번역). 아브라함 카이퍼의 명제처럼,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땅과 영역은 한 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정을 어떻게 이해하든 간에, 하나님이 창조 세계 전체를 포괄적으로 섭리하고 계신다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유다의 행동이 전적으로 그 자신에게만 있다면, 하나님은 구속사의 정점인 십자가 사건에서 그저 한 손님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신이 어느 신학적 캠프에 속해 있든지 간에, 예정과 자유의지 중 어느 한쪽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하면서도 자유의지를 버리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얼마간 약화되더라도 예정을 강조하는 것이지 자유의지 자체를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정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각시킨다고 해서 하나님의 예정을 전혀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결국 어느 쪽에 서느냐, 그리고 양자를 어떻게 조정할 것이냐가 관건이지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행동은 하나님의 예정이면서도 자유의지가 개입된 것으로 보아야겠지요. 

 

예정과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을 야기하는 성서의 본문은, 대표적으로 구약에서는 선악과와 출애굽기의 바로, 신약에서는 유다일 것입니다.

세 텍스트 중에서 이 주제에 관한 가장 풍부한 본문은 출애굽기의 바로입니다. 하여, 저는 바로의 행동에 대한 출애굽기의 서술을 중심으로 예정과 자유의지 혹은 필연과 자유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이를 유다의 경우에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유다에 관한 본문과도 조화와 일치가 있어야겠지요.

 

다만, 솔직히 먼저 밝혀 두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저는 그리스도인이자 목사라는 것입니다. 신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모두를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자유에 따른 책임을 강조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출애굽이나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뜻과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행동에 대한 최종적 책임은 유다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지 맹신이나 미신은 아닙니다. 유일무이한 창조주 신앙을 갖고 있는 이로서 하나님의 에정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또 도덕이란 인간의 자유에 기반을 둔 것이니 유다의 행동은 그 자신의 선택이므로 책임은 그 자신에게 있다고 보는 것은 신앙을 별개로 치더라도 합리적인 사유입니다.

 

다른 하나는, 저는 예정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예정론에 대해 공부할 겸해서 스프라울(Sproul) [알기 쉬운 예정론]을 사서 펼쳐보았습니다.

이것이 예정인지는 몰라도 예정을 정의한 대목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예정이란 우리의 최종 목적지, 즉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에 의해 천국이나 지옥이 결정된 사실을 의미한다.”(각주) 물론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모순되지 않는다”(각주) 고 밝히고 있지만, 저는 예정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을 흔쾌히 수용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실을 허용하시기로 결정하셨다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그것을 미리 정하신 것이다.” (각주). 그렇다면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것을 두고 누가 그 결정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요?

해서, 저는 C.S 루이스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저는 전적 타락의 교리를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볼 때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스스로 타락했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깨닫지 못할 것이고, 경험적으로 볼 때에도 인간의 본성에는 선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각주). (‘전적 타락에 대해 고민해 보기)

 

 

물론 스프라울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를 역설 혹은 신비로 설명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마치 모든 것을 결정하시는 것으로 그분의 주권과 예정을 결정론에 가깝게 해석하는 것은 못내 아쉽습니다.

 

그럼, 바로의 강퍅함에 대한 출애굽기로 들어가 보도록 하지요.

먼저 성서는 그의 마음이 강퍅하게 된 것의 주체가 하나님과 바로 모두라고 언급합니다.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였다” (7:13,22 ; 8:15 ; 9:35)는 표현과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 (9:12 ; 10:20,27)는 표현, 이렇게 두 가지 표현 양식이 공존합니다.

바로는 모세의 요구와 신하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제 스스로의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해서 노예로 붙잡아 둡니다.

하나님 역시 그런 바로의 행동을 예측하시고 모세에게 일러 주실 뿐 아니라 버젓이 예상하시면서도 연달아 재앙을 일으키십니다.

주체로서 하나님은 바로 자신의 고집을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각주)

 

 

 

하나님과 바로, 양자 모두가 바로의 강퍅한 마음에 주체라는 설명을 주목해야 합니다.(각주).

신과 인간이 동일하게 행동의 주체임을 출애굽기는 묘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를 모순 없이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는 어느 하나도 없앨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설명의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 좀더 성경적이고 합리적입니다.

 

저는 종종 이런 비유를 들곤 합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장미에는 인간의 자유라는 가시가 돋쳐 있고, 인간의 자유라는 장미에는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가시가 있다고요.

그래서 예정을 강조하다 보면 자유가 가시가 됩니다.

그렇다고 그 가시를 죽 밀어 버리면 아무런 위험도 없지만, 장미 본래의 아름다움은 많이 사라질 것입니다. 장미꽃을 사랑하는 자는 그 날선 가시마저도 장미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사랑의 한 요소로 감내해야 합니다.

그럴 때, 가까이서 보면 둘 사이의 갈등이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한데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운 것입니다.

 

바로의 완고한 마음의 책임은 궁극적으로는 그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의 마음이 강퍅해서 내 백성을 내보내라는 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집을 꺾지 않고 거절할 것이라고 야헤 하나님은 여섯 번이나 모세에게 주지시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만약’(if)이라는 단서를 단 가정법 형식으로 세 번이나 말씀하십니다.(8:2 ; 9:2 ; 10:4) “네가 만일 그들 보내기를 거절하고 억지로 잡아두면”(9:2) 번역본에 따라 4 23절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네 번이 됩니다.

 

 

이라는 조건문은 바로의 행동이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라 그가 마음먹기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다시 말해 바로의 거절은 미래의 가능성이지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굳이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경고를 할 필요가 없을 테고, 그런데도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찾아간다면 그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기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재앙을 현실화한 것은 바로 자신입니다. 바로가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낸다면 제국을 침몰시킨 그 엄청난 열 가지 재앙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행동에 따라 하나님의 대응 또한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명백히 거부하고 거역했습니다.

 

사실 바로의 선택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고 당연하기까지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남자만 60만명이었습니다.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하면 2백만에서 3백만에 육박할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이집트를 떠날 때 함께 따라나온 그 밖의 다른 민족들도 많았습니다.(12:38).

이는 고대 이집트 제국의 노동력의 절대 다수를 차지합니다. 이런 그들이 한꺼번에 모두 빠져 나간다면 제국의 운명은 불 보듯 뻔한 것입니다. 멸망입니다.

그러니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이집트를 떠나는 것은 절대 허용할 수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미국, 아니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꺼번에 한순간에 모두 떠난다면 그 후 초래될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 보낼 수 없습니다.

 

거부한 바로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은 열 가지 재앙 뿐 아니라 완악한 대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9:18, 새번역).

그러니까 스스로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긍휼히 여김을 받지만, 마음을 악하게 먹고 끝까지 미련스럽게 고집을 피우면 그 강퍅한 마음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신다는 겁니다.

레온 모리스의 해석이 참 좋습니다. “이 구절은 물론, 성경 어디를 살펴봐도 하나님이 스스로 강퍅하게 되지 않은 자들을 먼저 강퍅하게 하셨다고 나와 있는 곳은 하나도 없다.” 하여, 마음을 강퍅하게 한다는 말은, 하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더욱 꾸역꾸역 엇나가는 길을 걷는 이들의 영적 실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간곡한 설교는 도리어 듣는 청중의 마음을 더욱 완강하게 만듭니다.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하였어도 그들이 행치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말로 그들에게 응하게 하였느니라 하라” (11:8).

인간의 마음은 예레미야의 말처럼 어떤 만물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거짓되고 썩고 부패하였습니다.(17:9).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애타는 구애와 경고는 죄악된 본성과 성품을 충동하여 더욱 못된 짓을 일삼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인간은 청개구리처럼 반응합니다. 하지 말라는 짓은 더 열심히 잘도 합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바로에게, 그리고 예레미야를 통해서 유대에게 말씀하신 것은 재앙을 내리기 위한 명분 쌓기가 아니라 구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호의를 거절하고 스스로 무덤을 팠습니다. 유다에게도 그리스도의 호의가 없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많았습니다.

유상섭의 [설교를 돕는 분석 요한복음](규장)에 따르면, 요한복음에만도 제자 중 하나는 자신을 믿지 않으며 마귀라고 주의를 주셨고(6:64, 70~71), 유다가 돈을 착복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재정 유용을 그칠 것을 기대하고 기다리셨으며(12:6),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유다를 염두에 두고서 다 깨끗하지는 않다고 하셨습니다.(13:10~11).

또 세족 후에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 것이라고, 즉 배반할 것이라고 예고하셨고(13:18), 더 나아가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 것이라고 공개적이며 직접적인 경고를 계속하셨습니다.

 

마지막은 예수님이 빵 한 조각을 찍어서 유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부분은 논란이 많은 본문입니다. 그 때 주님은 유다에게 희한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13:27, 새번역). 언뜻 보기에, 유다복음의 주장처럼 예수님이 유다가 배신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으므로 그 일을 하라는 것, 그래서 유다의 배신은 예수의 요청이라는 유다복음의 논리가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육체라는 굴레를 벗어던져 구원을 이루게 해 달라는 예수의 요청이라는 것입니다.

 

허나 유다복음의 해석과 달리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의 진의는 유다의 결단을 촉구한 것입니다. 식사를 할 때에 음식을 한 조각 건네는 것은 우정의 표시입니다.(각주) 유다의 배신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선의와 호의를 베푸는 것은 유다의 심중에 품고 있는 음모를 중지할 것을 따뜻하게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끝내 예수와 그분의 우정 어린 호의를 거절했고, 이를 요한복음은 그 순간 사탄이 그의 마음에 들어갔다고 표현함으로써 유다의 결정이 무엇이었는지 보여 줍니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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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 사건에 대해서 가장 잘 쓰여진 책 중 한 권입니다. 김기현 목사님의 깊은 영성과 지식이 잘 녹아져 있는 대표 저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 딜레마

 

저자: 김기현 목사님

 

24~31page

 

 

 

가룟 유다는 누구인가?

 

 가룟 유다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먼저 그의 이름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과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다는 영예롭고 대중적인 이름이었습니다.

그 뜻은 찬양입니다. ( 29: 35). 칼 바르트에 의하면, 독일어로는 감사(thnks)라고 합니다. 히브리식 이름을 표기하면 Judah이고, 헬라식으로는 Judas입니다.

성서에서는 야곱의 넷째 아들에게서 유다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했습니다. 그 후 통일왕국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포로기 이후 귀환한 이들이 대개 유다 지파나 남왕국 출신이 많았기에, 유다는 자연스레 민족 공동체 전체를 일컫는 이름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성서에는 유다라는 이름이 많습니다.

신약 성서에만도 유다라는 이름이 여섯 번 등장합니다.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인 유다( 6:16, 1:13), 예수님의 형제이자 유다서의 저자인 유다( 13:55), 백성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킨 갈릴리 유다(5:37), 다메섹에서 눈을 보지 못하게 된 사울이 잠시 기거했던 집의 주인 유다( 9:11), 바사바라 하는 유다( 15:22), 그리고 가룟 유다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시리아로부터 잠시나마 조국을 독립시키고 마카비 왕조를 열었던 이의 이름도 유다였습니다.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e).

 

 

 

 

오늘날의 유대교(Judaism)라는 이름도 유다와 관련이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이들을 유대인이라 지칭한 이후로 유대인(Judean)은 그들의 공식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불행하게도 유다는 유대인의 전형으로 각인된 것입니다.

지금은 마치 유대인이 아닌 듯 여겨지는 또 한 사람의 유대인과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다가 유대인의 대표명사가 된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추론입니다. 다만, 그의 이름 때문인 듯 합니다. 둘의 이름과 발음이 너무 흡사합니다. 혼동하기가 쉽지요. 유다와 유대. 제 친구 김일승과 김일성처럼 말입니다.

 

두 번째로, 유다 이름 앞에 붙는 가룟은 논란이 참 많습니다.

가룟, 공동번역에서는 가리옷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권터 슈바르츠라는 학자에 의하면 아홉 가지 해석이 있다고 합니다. 이를 클라센은 네 가지로 분류했는데, 이 중에서 그런 대로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동네 이름입니다.

그의 고향이 아마 가룟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라는 이름은 가룟 지역 출신의 유다인 겁니다. 이 추론이 맞다면 가룟은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그리욧(15:25, Kerioth)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네게브 지역의 텔 퀴리옷(Tel Qirrioth)일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 유력한 해석은 그가 시카리(Sicari)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그가 시카리라고 명명한 열심당(Zealots)의 명단에 유다라는 이름이 많이 언급됩니다. 그의 책에는 유대(Jude)라는 사람이 19, 유다가 13명인데, 그들 대부분이 열심당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베드로가 아닌 시몬이 바로 이 열심당 일원입니다.( 6:15). 이들은 이교도인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참 왕인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원조는 마카비이고, 그들의 후손들은 마사다에서 로마와 저항하다 일천 여명이 자살하기도 했습니다.

 

만일 유다가 이 열심당원이라면, 그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처럼 이스라엘 나라의 구속, 곧 정치적 해방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로마의 식민지 시절인데다, 구약에서 예언한 바 다윗 왕조의 회복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종교적 열정이 결합된 것이 열심당이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가슴에 품은 젊은이라면 이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겠지요.

그래서 그 기대가 배반당하자 예수를 부인했다는 가설이 많은 이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 어디에도 그가 열심당과 연루되어 있다는 징후를 읽을 수 없는 마당에 그의 이름 하나만으로 그를 열심당원이라고 확언하기에는 증거가 미비하여서 여간 미심쩍은 것이 아닙니다.

 

오경준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성경에는 없다] (홍성사)에서, ‘이스카리옷시카리로 보기에는 원어적으로 어렵고, 시카리들은 광장에서 민족 반역자나 로마 군인들을 암살할 정도로 대담한 반면, 유다는 자살한 것이나 세리 마태를 제치고 돈을 관리하는 것으로 보아 성격이 소심하거나 꼼꼼하여 성격이나 기질상 사카리에 맞지 않을 것이라 언급합니다.

, 그가 제자단의 금고의 돈을 빼돌렸다는 요한의 기사를 토대로 보건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만큼 유다는 이상주의적이지 않고 도리어 현실주의자일 공산이 크다고 언급합니다.(각주)

 

성서에서 유다를 열심당원으로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에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하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그가 사카리인지를 확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가설로 새겨들을 필요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가 열심당이었다고 단정하고 그들이 추구했던 하나님 나라와 메시아 기대가 배신당하자 예수님을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성서의 기록에도 맞는 정확한 묘사는, 유다가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열두 사도. 요한복음을 제외한 세 복음서에는 열두 사도의 명단이 있습니다. ( 10:2~4 ; 3:16~19 ; 6:14~16). 유다에 관련된 특이 사항이 있다면, 각 명단에서 유다는 항상 맨 꼴지에 있다는 것, 그리고 유다는 예수를 판 자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다를 사도의 한 명으로 언급하면서도 그가 예수를 팔았다는 과거 전력을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그리고 또박또박 적어 둔 것이 참으로 희한해 보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도라는 말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으로 문자적으로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도가 되겠지만, 신약에서 사도라 불린 사람들은 열두 사도가 아닌 경우 직접적으로는 바울과 바나바( 14:14), 암시적으로는 주의 형제 야고보(1:9)였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특별한 소수의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의 관심은 유다를 사도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모든 신자를 일컫든 아니면 특별한 소수의 무리이든 이른바 누가 사도인가 하는 것보다는, 유다가 그 사도들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에 제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도를 뽑으셨다는 것 못지않게 특별히 유의해야 할 점은 12라는 숫자입니다. 12는 구약의 열두 지파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던 숫자는, 이제 교회가 영적 지위를 차지할 것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새 세상에서 인자가 자기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라온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19:28).

열두 사도는 새로운 하나님 백성 공동체인 교회로 하여금 구약의 이스라엘을 연속적인 측면에서 계승하게 할 뿐 아니라, 비연속적인 측면에서 진정으로 완성하도록 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 건설을 위해 사소들이 해야 할 일은 세 가지입니다.(3:14~15).

예수와 동행하는 것, 보냄을 받고 전도하는 것,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열두 명의 명단에 이름이 기재된 유다에게도 분명 이런 역할과 특권이 부여되었을 것입니다.

하여, 유다도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했을 겁니다. ( 10:8). 그리고 돌아와서 아마도 70명의 제자들처럼 기쁨과 놀라움에 겨워 말했을 것입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10:17).

그랬다면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10:18)라는 칭찬과 격려의 말씀도 들었을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신하고, 귀신마저도 항복할 만한 영적 권세를 지녔고, 실제로 그런 경험도 한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이런 유다의 배신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뭘까요? 이 사람 유다는 누구일까요? 열두 사도의 명부에 이름이 등재되어 있으면서도 예수를 판 자라는 불명예가 항상 따라다니는 이 사람, 유다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이 이방인 선교를 하는 것과 유대인이 구원받는 것의 상관 관계를 설명합니다.(9~11).

유다와 관련해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대목은 11장의 돌감람나무 이야기입니다.

원래 가지에 문제가 있어서 그 가지들을 꺾어 버리고 새로운 가지를 접붙였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가지인 우리 이방인에게 주는 교훈은, 원래 있던 가지고 아낌없이 잘라내신 분이 우리 또한 높은 마음을 품고 교만하면 그들과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우리 모습입니다.

열두 사도였던 그가 예수를 판 자가 되었습니다.

그토록 놀라운 특권과 능력의 소유자였던 유다가 배반자 유다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유다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유다와 베드로처럼 예수를 부인하고 배신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현재의 축복과 형통함에 우쭐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바로 서면 하나님의 너그러운 인자하심이,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습니다.

 

 

 

내가 율법의 삶을 사는지, 은혜의 삶을 사는지를 분별하는 좋은 잣대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 또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내가 한 것이 자꾸 생각나는지, 아니면 주님이 내게 해주신 것이 생각 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한 일이 생각나면 불평하게 되고, 주님이 하신 일이 생각나면 감사하게 됩니다.

과거의 영광스러운 성취와 지위가 영원불변할 것으로 착각하여 자긍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일수록 얼른 잊어버려야 유익합니다.

나 역시 유다처럼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할 수 있습니다. 오직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3:14, 공동번역)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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