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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관점: 사회학적 설명

이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 리처드 니버(H. Richard Niebuhr)

그는 시대에 뒤떨어진 농촌문화의 산물로 근본주의를 규정했다.

근본주의란 미국사회가 남부 중심의 농촌사회에서 북부 중심의 산업사회로 존재론적 변환을 경험하고, 농업중심의 농촌문화에서 산업중심의 도시문화로 급격히 전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종의 근대화 부작용이라고 봄.


니버는 근본주의 출현이 "미국 농촌문화 대 도시문화의 충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고 지적하면서 "근대과학과 산업문명의 영향력을 가장 적게 받은 지역"에서 가장 맹위를 떨쳤다고 결론을 내렸다.

 

 


 

두번째 관점: 신학적 설명

이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 어네스트 샌딘(Ernest Sandeen)

샌딘은 근본주의의 기원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에 단호히 반대했다.

그의 관찰에 따르면 사회학적 해석과 달리 근본주의 논쟁은 농촌이 아닌, 도시에서 주로 발생했고, 단순한 문화적 충돌의 부산물이 아닌, 복잡한 신학적 논쟁과 탐구의 산물이었다.

그는 종래의 전통적 신학의 기반을 위협하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기 위해 출현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프린스턴 신학게 주목하면서, 근본주의 운동의 기원을 천년왕국론의 관점에서 추적했다.

즉, 그 주장의 핵심은 "근본주의는 최소한 천년왕국론 역사의 한 측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번째 관점: 문화적 설명

이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 조지 말스덴(George Marsden)

샌딘의 신학적 해석의 틀이 너무 협소하다고 비판하며, 근본주의의 탄생을 이해하기 위해 프린스턴 신학과 세대주의적 종말론 외에 이 보수적 기독교 운동이 탄생할 수 있게 했던 당시의 문화적, 종교적, 지적 상황들을 폭넓게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함.

그가 말한 바로는, 19세기 말 근본주의의 출현에는 샌딘이 언급한 종말론과 프린스턴 신학 외에 경건주의, 부흥운동, 성결운동, 그리고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중요한 문화적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네번째 관점: 복합적 설명

이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 조엘 카펜터(Joel A. Carpenter)

개별적 방법론에 근거한 획일적 해석에 반대해서, 종전의 연구 결과들을 모두 고려하며 근본주의를 보다 통전적으로 이해하려는 입장

그의 판단에 따르면 미국 근본주의의 기원과 정체는 단순한 근대화의 사회적 부작용이나, 천년 왕국론의 결과물, 혹은 19세기 말 미국의 문화적 현상만으로만 규정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난해하다.

따라서 근본주의의 다양한 측면들, 즉 "분파적, 분리주의적 충동, 자신의 회원들에게 각인시키는 '분리된 삶'의 이상, 천년왕국적 세계관, 효과적 기구를 조직하고 일반 대중들과 소통하는 재능,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책임과 문화적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열망" 모두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함

 

 


 

-배덕만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를 참고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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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빈치 코드에 숨은 거짓과 진실

 

저자: 리처드 어베니스(Richard Abanes)

 

23~24page [타로 카드의 기원에 대하여]

 

소설 [다빈치 코드] 에서는 타로 카드(Tarot cards)를 말하기를 이 비학(occult)의 카드는 교회가 금지한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안되었다.” 라고 한다.

(다빈치 코드 1 142page)

 

 

 

진실: 타로 카드는 원래 예언을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동양의 집시들이 타로 카드를 발명하여 1300년대 후반에 유럽에 전파했을 가능성이 있다.

타로의 기원이 유럽인들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슬람교도들이 1200년대 초부터 타로 카드놀이를 한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그 후 카드가 유럽으로 전파되어 집시들이 그것을 사용하고 대중화시켰다는 것이다. 1400년대 초 이탈리아에서 타로 카드의 기원을 찾으려는 학자들도 있다.

 

 

 

앞서 언급한 이론들은 타로에 대해 남아있는 단지 몇 가지 가설일 뿐이고 타로의 유래에 대한 뚜렷한 지식은 사라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타로 카드 한 벌이 1300년대 후반 유럽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전부이다. 위칸 도리엔 발리엔테는 타로 카드의 기원을 실제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했으며, 대부분의 연구자들도 금지된이데올로기의 전파를 위해 고안되었다는 주장을 부정할 것이다.

 

 

 

 

이교도의 탄압

 

26page

 

소설 [다빈치 코드]에 나오기를 기독교와 이교도간의 투쟁이 극심해지자 그로 인해 로마는 둘로 분열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콘스탄틴은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A.D. 325년에 기독교라는 하나의 종교로 로마를 통합시키기로 결정했다.” 라고 한다.

(다빈치 코드 1 355page)

 

 

 

진실: [다빈치 코드] 325년에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만들었다고 암시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콘스탄틴은 단순히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부여했을 뿐이다.(313, 밀라노 칙령). 데오도시우스 통치 기간(379~395) 381년에 이르러서야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었다.

 

325년 이전에 이교도와 기독교 간의 분쟁이 있었다는 것은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이교도와 기독교인들은 상호 공존하여 평화롭게 지내기도 했다. 로마 관료들을 포함한 몇몇 이교도들, 특히 데키우스(Decius : 249~251),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 384~305) 그리고 갈레리우스(Galerius : 305~311) 등이 통치했던 시기에는 기독교인들을 종교적인 박해로부터 보호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교도와 기독교 간의 충돌이 로마 제국의 주된 위협적 요소가 될 수는 없었다. 로마 제국은 여러 적국(고트족, 반달족, 훈족)에 의해 침략을 받았다. 더욱이, 로마의 성도덕과 개인윤리가 서서히 파괴되고 있었다. 로마 제국을 멸망하게 만든 다른 요인들은 외국 군대의 독립, 영토의 과도한 확장, 그리고 정치적 부패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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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에 대해 간단하면서도 꽤나 잘 summary 된 글이 있어서 여러분과 나눕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근본주의는 역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난폭한 논쟁주의와 영향력 있고 효과적으로 전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수용적 태도 사이에서 찢겨 있다.


흔히 그것은 타계적이고 사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강력한 애국주의와 국가의 도덕적-정치적 복지에 대한 관심을 보유하고 잇다.

근본주의는 개인적이지만 강력한 공동체들을 만들어 낸다.


근본주의는 어떤 의미에서는 반지성적이지만, 올바른 사고와 참된 교육을 강조한다.


근본주의는 주관(the subjective)에 대한 부흥사들의 호소를 강조하지만, 빈번히 인식론적 차원에서는 합리적이고 귀납적이다.


근본주의는 한 고대의 문헌에서 기원한 기독교이지만, 또한 기술문명의 시대에 형성된 기독교이다.


근본주의는 반 근대주의적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대단히 근대적이다.


아마도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근본주의가 명백하게 모순된 답을 너무 쉽게 제공하지만, 그것은 너무 복잡한 전통들이 혼합되어 있어서 근본주의 옹호자뿐만 아니라 반대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모호성과 역설로 가득 차 있다.


-George M. Marsden, Understanding Fundamentalism and Evangelicalism, 1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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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에 쓴 글이니 지금에 와서는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사유를 확장시키고, 새롭게 글을 써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일단 큰 골격은 유지해도 될 것 같아서 올려 봅니다.

 

 

 

크리스천에게.

 

크리스천! 안녕. 

 

중요한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아. 이런 관련 정보들을 잘 알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 여쭙고 씨름하면서 내가 서 있는 지점을 찾아 두는 건 인생을 살아가는데 유익한 측면이 많을 것 같아. 특히 넌 진리에 대한 열망과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에 대한 중요성에도 많이 노출되었었고, 그러한 호기심과 달란트를 또한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고민들은 지속적으로 해 보는 게 도움이 되리라 믿어. (너의가는 길을 숙고할 때도 언젠간 응용될 날이 오리라….)

 

일단 전제 자체는 인간이 불완전하고, 연약하며, 죄가 많아서 언제든지 오류나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이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하게 될 말들도 몇 년 후에는 분명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핵심은 변하지 않고 유지될 거야.)

 

두 번째로는 이와 같은 치열한 고민들은 답이 잘 나오지 않더라도 계속적으로 씨름해 나가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과정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기에….)

 

마지막으로는, 어떤 답을 내릴 때는확신하기 보다는, 좀 더신중한 편에 서는 게 좋을 것 같고, 서로 대립되는 주장들이 있을 때는 양쪽을 다 공부하고, 통합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앙의 본질은 인격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 이라고 정의할께. 또는 인격이신 하나님을 전 존재를 걸어 알아가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아.

 

이와 같은 Base를 깔아 두고, 고민을 좀 더 해야 할 것 같아.

 

한국 교회는 대체적으로 정통신학(칼빈주의)이 주류인 것 같고, 상당히 보수에 가까운 것 같아.

 

일반적으로는 장로교고신이 보수의 극단에 가깝게 분포하고 있을 것이고, 그 이외에도 합동,통합,기장 등다양한 분파가 있을 거구…(‘고신보다합동을 더욱 극단으로 두는 견해도 존재함)

 

한국에서 본격적인 신학을 체계화 시킨죽산 박형룡교수님은 미국에서 유학할 당시 웨스트민스터 신학 대학교에 있던메이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었어.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교 자체가 정통신학에 철저히 서 있는 학교였고, 그 이전에 세워진 프린스턴 신학 대학교가 기존의 정통신학을 버리고,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 들인 것에 대한 반발로 태동하게 되었어. 메이첸은 그 중에서도 가장 확고하게 정통신학을 지키고 싶어 했었지.

 

그러한 스승을 둔 박형룡 교수님의 가르침은 총신대학교 조직신학과에서 시작되었고, 그 분의 제자들이 한국 장로교 신학의 주축을 이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아.(‘정암 박윤선교수님 등 걸출한 분이 많으셨어)

 

 

 

미국에서는 장로교인의 숫자가 미미한 편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유독 장로교가 주류에 가까운 것 같아. 일단 대한 예수교 장로회와 한국 기독교 장로회가 분열할 때는 성서의고등비평을 수용하는 문제를 가지고 분열을 했었어. (이 부분은 이따가 자세히 언급해 볼께)

 

그 이외에도 일본 강점기 당시 신사 참배 문제를 놓고 고신이 분리 되어 나가고…..

 

WCC라는 세계 기독교 연합 활동이 있는데, 이 속에서는 모든 교파와 카톨릭까지 손을 잡는 분위기인데 이와 같은 타협을 거부하는 측을 합동이라 분류하고, WCC 참여에 찬성하는 쪽은 통합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

 

(카톨릭을 어느 정도 포용해야 하는 가의 문제는 또 하나의 거대한 쟁점이 되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생략할께. 좀 어려워서..)

 

일단 요약을 하자면, 한국에서는 장신대(통합)나 한신대(기장) 쪽은 정통신학(칼빈주의)에 국한되지 않고, 프린스턴 대학교 처럼신정통주의 신학에 상당히 열려 있는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아.

(장신대에 계시는 조직신학 교수님인김명용 교수님이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 전파에 열심이 있어 보이셔)

 

그 이외에 고신이나 합동 등은 여전히 칼빈주의 신학에 높은 우선순위를 주고 있구….

 

그렇다면신정통주의 신학정통신학을 구분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신정통주의 신학은 20세기에 활동했던칼 바르트라는 신학자의 견해를 많이 따라간다고 보면 될 것 같아.

(정통신학은 16세기 종교 개혁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던 존 칼빈(장 깔뱅)의 계보를 잇는다고 보면 됨. 개혁주의 신학은 대개정통신학과 동의어로 많이 사용되지만, 화란 계열<네델란드>아브라함 카이퍼등의 신학을 같이 융합시켜서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아. 하지만, 지금 현재 나의 신학적 견해로는개혁주의의 범위는칼빈정통신학이나, 화란 계열신학모두를 포괄하고도 더 큰 범주를 의미해야 한다고 생각해. , 칼 바르트의신 정통주의 신학까지도 포함하는 표현이 되어야 할 것 같아.) (이 견해는 나중에 수정될 수도 있음)

 

여기 까지 논의를 해 놓고, 내 신앙 이야기를 잠깐만 할께

 

 

일단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나서는 C.S 루이스와 프란시스 세퍼에 매료되어 그와 비슷한 색깔을 견지하려고 했었어.

 

C.S 루이스는 성공회 소속이라서 정통신학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지만, 내가 볼 때는성경에 계시된 기독교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보였어.

 

반면에 프란시스 쉐퍼는 극도의 보수주의는 아니였다지만, 여전히 칼빈주의 신학에 철저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어.

(20세기에 이 두 사람처럼 기독교를 변증하려고 애 쓴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에, 내겐 두 사람이 정의의 사도로 보였어. 지금도 존경하고, 좋아하고, 본받고 싶어 하는 분들이고)

 

그런데 프란시스 쉐퍼가 누누히 비판했던 게 바로칼 바르트였어. 내가 C.S 루이스와 프란시스 쉐퍼의 수 많은 번역서들을 읽고 나서 내렸던 잠정적 결론은, ‘칼 바르트는 기독교에 아주 위험한 짓을 범한 잘못된 신학자구나!! 였어.

 

또한 프란시스 쉐퍼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일명문화 선교라는 용어를 주창해 냈고, 그의 제자들인 오스 기니스나 낸시 피어시(‘완전한 진리의 저자)의 저서들을 읽어 보면, 기독교 세계관의 중심 주장을 들을 수 있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주류는 이러한 정통신학(또는 개혁주의)에 기반을 둔 칼빈주의 신학자, 목회자가 주축을 이루고 있어. (물론, 기독교 세계관 운동 그 자체에 반대를 하는 분들도 있을터.)

 

è  기독교 세계관 운동 그 자체를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면, 나는 칼빈주의적인특정 세계관 운동에 대한 반대는 충분히 수긍이 가고, 합리적인 것 같지만 이런 논의나 고민 그 자체가 의미가 없다라고 말해 버리는 건 좀 위험한 것 같아. 관계 중심적이고, 인격으로 세상 속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거라지만, 관계를 맺게 될존재들은 결국 세상(문화)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언어를 익히지 못하고,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한다는 건 자체적인 모순이 있어 보여.

è  (물론, 이런 모종의 movement 복음과 혼동하는 시류도 위험하긴 마찬가지 일꺼야. 가령, ‘창조과학같은 경우는 근본주의 계열의 문자 해석과 방법론을 가지고 만들어진 theory 중 하나인데, 마치 이 창조과학이 말하는 모든 내용을 부정하면 하나님을 부정하고, 구원을 잃어 버릴 것처럼 이야기 하는 분들은복음과 자신들의신념을 착각한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마크 놀이 쓴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이 이 관점에 힘을 실어 줄거야)

 

(일단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입장과 중요성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한다는 전제 하에서)

 

리처드 니버가 쓴 <기독교와 문화>를 읽어 보면, 크리스천이 문화(세상)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5가지로 분류를 해 둬.

 

그 중 개혁주의적인 세계관은 5번째에 해당되구

 

나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분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누리며 살아가던 중 큰 문제에 봉착했었는데, 그건 바로 기독교 세계관의 5번째 견해가 논리상으로는 가장 성경적이고, 그럴싸해 보이는데 늘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는 점이었어.

(이건 모 대학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치시는손화철 교수님’, ‘양희송 교수님도 공통적으로 하는 고백이었고, 다른 수 많은 교수님들도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었어.)

 

작은 예를 하나만 들자면, 군대에 들어가서 프란시스 쉐퍼에게 열심히 배운 데로, 모든 문화를 변혁시켜야 겠다고 각오를 했었어.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미술, 역사 등 등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적인 문화가 세워질 수 있다는승리주의적인 견해들’……

 

그러나……

 

현실은 암울하기 그지 없었어. 세상 속에 들어가서 내 믿음 하나 지켜 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고, 세상은 전혀 그리스도적인 문화에 관심이 없었어….(딱히 이게 바로그리스도적 문화! 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빈약했고, 그게 뭔지 알려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그 때 느꼈던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 아무 것도 내 힘으로 할 수 없고, 복음을 전하고자 열심히 공부했던 모든 것들이 Useless 하게 보였어. 깨질 것 같은 두통 속에서 신음하던 중, 오직 하나님만이 한 영혼을 바꾸실 수 있고, 내가 전해야 할 복음은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 사역’(고전2:2) 뿐임을 깨닫게 되면서 점차 인격이신 하나님을 알아가고, 경험하게 되었어.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쟈크엘룰과 같은 신학자들의 저서를 탐독하게 되었고 이 분이 서 있는 입장은 기독교 세계관의 4번째에 해당되었어. 이 지점에는 마틴 루터나 사도 바울도 서 있었는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는 다분히 역설적인 것이다!! 라는 관점이었어.

 

이 영역은 실제로 세상 속에서 살아 보니 공감이 되고 인정이 되는 부분이었어.

마치 우리의 삶은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아서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그 순간의무게 중심을 찾아 내서 굳건하게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또한 내가 어제 진리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적인 삶과 세상 속에서의 삶의 세밀한 균형점을 발견했다고 해서 안심하고 살 수 없으며, 한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새로운 무게 중심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내야 한다는 관점이었어. (변증법적 신학이라고도 불리는..)

 

정말 그러하더라구…..

 

 

 

분명 논리상으로는창조-타락-구속이 맞아 보였어. 창조된 모든 것이 선하지만, 그 모든 게 타락의 범위 안에 들어갔으며, 마지막 때에 온전하게 구속될 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문화가 사실 선한 건데,(ex) , 노래, , 연극, 영화, 정치, 경제 등 등) 지금 그와 같은 선하던 것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까 방향을 바로 잡아 주면 그본질’(구조)는 선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성화될 것이다라는 관점. (이게 정통신학이 견지하는 5번째 세계관)

 

è  이 관점의 맹점은 누가 기준점이 되어서 방향을 바꿔줄 것이며, 그 방향이라는 걸 어느 정도까지 바꿔 줘야 창조 본연의선함을 유지할 수 있냐는 것. 그리고 그 본질(구조) 자체가한 건 정말 아무 것도 없을까? 라는 질문을 남겼어.

è  그리고 최근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 한 명인 N. T. Wright(‘톰 라이트라고 불리는)는 이와 같은정통 신학창조-타락-구속이라는 그림 자체에 반대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어. ‘성경이라는 장대한이야기’(Narrative)를 이와 같이 단순한 구조로 환원시켜 버리는 건, ‘성경의 놀라운 권위를 훼손할 수 있다는 참신한 주장이야. , ‘창조-타락-구속도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중요한 흐름이긴 하지만, 성경은 그 이외에도 더욱 섬세한 역사적 맥락과 상징적 맥락들이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하고 있기에 보다 더 넓은 관점이 요구된다는 것이지.

 

그 이외에도 몇 가지 참신한 세계관 적 견해가 있지만

 

결국 이 4번과 5번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만 남게 되더라구….

(난 이 두 가지를 섞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내가 그토록 찬양하고 열광하던 프란시스 쉐퍼 등의 논리가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고, 그가 그토록 반대하던 칼 바르트의 주장도 들어보기 위해 김명용 교수님이 쓰신 <칼바르트의 신학> 을 읽게 되었어.

(또한 쉐퍼가 경계하던 실존주의에 대해 알기 위해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마틴부버, 사르트르 등의 글을 읽어보게 되었어. 그리고 학부 시절에 <실존치료>라는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쉐퍼의 주장이 상당히 허술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어...그 이후에 쉐퍼가 많은 사역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었어.)

 

è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지니는 위험성에는 철저히 동의를 하지만, ‘실존주의적인 사고그 자체는 비성경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깊이 있고, 진리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아 보였어. 이건 단지 지식적인 차원이나 논리적인 차원에서만 그러한 게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그와 같은 사고가 얼마나 귀하게 쓰이는 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영역이었어.

(간혹, ‘정통신학이 견지하는, 변증론에 익숙한 사람들이실존주의를 지독히 경계하는 발언들을 많이 해. <창조과학> 활동을 많이 하는 분들 중에도 마냥실존주의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만 말해 둘께)

 

칼 바르트가 제시하는 신학은 칼빈이 <기독교 강요> 등에서 주장했던 내용의 연장선 상에 있었어. , 칼빈에게 빚을 많이 지고 있어 보였어. 그래서신정통주의 신학이라고 불렸던 건 아닌지….. 칼빈의 교리가 워낙 체계적이고, 성경에 잘 기반하고 있어서 누구든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을래야 않을 수는 없었어. 하지만, 칼 바르트는 더 나아가서 칼빈의 교리 중 성경적이지 않아 보이는 영역들을 잘 수정하고, 발전시켰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

 

è  일단 칼 바르트는 구원 받을자와 버림 받을 자가 모두 예정되어 있다는 칼빈의이중 예정론등을 반대했었어.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버림 받을 자 예정이 상호 모순되기 때문이었지. (이외에도 몇 가지 중요한 주장들이 칼빈과 다른 의견을 보였는데, 칼 바르트의 의견이 와닿는 게 많더라구)

 

(오히려, 내가 서 있는 지점이 칼 바르트에 가까웠고, 내가 경험했던 하나님과의 이야기를 더욱 잘 서술해 주는 신학이라는 느낌을 받았어. 물론, 그의 이론에서 동의가 안 되는 몇 가지가 있긴 했어. 특히 teleological suspension of ethics 라는 개념은 난 아직은 와닿지 않더라구.. 하지만, 거의 모든 영역에서는 칼빈주의 신학의 맹점을 잘 수정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이 균형감 있게 강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그런데, 이 지점에서 고민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

 

사실 어떤 목사님들은 유독칼빈주의 신학에 서서 설교를 많이 하시는데, ‘계시의 정지라든지, ‘하나님과의 대화는 이 시대에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하는 경우도 있어.

(이 문제에 대해서는알리스터 맥그라스의 회신을 통해 입장을 밝힌 바 있었지)

 

그런데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칼빈주의 신학을 견지하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동의해야 한다는 Rule 이 있거든. 그 신앙고백 1장에서 말하고 있는게계시의 정지이고……..그런 목사님들은 그 틀에 충실했을 뿐……. (수 많은 분파로 나뉘어진장로교측에서 자신들의 연합을 추진할 때,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합의점이 바로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기도 해.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이신이승구 교수님의 글과 논문을 근거로 볼 때..)

 

하지만, 말이 거창하게 들려서 그렇지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은 내가 알고 있고, 경험한 바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 속에서 전부는 아니지만 필수적인 부분을 차지한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에 고민을 다시 해 보게 되었어. (무엇보다도 정통 신학이 그토록 강조하는성경’(Scriptura) 속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가능하다는 근거들이 무수히 적혀 있지)

 

다행인 것은 황영호 목사님이나 윤진규 목사님 김형겸 목사님은 이런 영역에서 상당히 열려 있기 때문에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가질 수 있었고, 옥스퍼드 대 신학교수로 재직 중인 알리스터 맥그라스에게 여쭤 봤을 때, (현존하는 최고의 복음주의 계열 신학자) 그는 감리교에서 가지고 있는 웨슬리안 사대행이라는 교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4가지를 이야기 하더라구

(그가 답해 준 관점이 내가 동의하고 있고, 내가 경험하고 있는 방법과 거의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나는 그 지점에 서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어.)

è  위에서도 언급한 N. T. WRIGHT(톰 라이트) 교수님은, 웨슬리안 사대행,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4가지 루트인성경’, ‘전통’, ‘이성’, ‘경험중에서 마지막 범주인경험의 범주를 비판하긴 해. (하지만, 이 영역은 가장 많은 위험성과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해도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해. 이론과 실재를 연결시킬 만한 더욱 매끄러운 Categorization(범주화)이 존재한다면 누군가 연구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우리가 정통신학의 틀 속에 갇히지 않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온전한 진리를 끊임 없이 찾아가지 않으면 어떤 목회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사유가 제한될 수 있음을 힘주어 강조하고 싶어.

 

일부 목사님이성령 체험등에 대한 극도의 경계를 보이시는 이유는 그 분들 스스로가 겪으셨던 아픈 기억들도 큰 이유가 될 것이고, 요즘신비주의 적인 성령 사역이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경계로서도 그러하셨던 것 같아.

 

(그와 같은신비주의 영성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아. 일단 요즘 성행하고 있는예언자 학교등을 수료하여, 자신들이 꾼 꿈이나,  예언에 엄청난 권위를 부여하는 일부 성도들은 부지불식간에 성경 읽기를 등한시 하고, 자신들이 느끼는 심상이나 이미지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경우도 많아….. 그런 입장에 확고히 서 있는 사람들과는 대화가 잘 이뤄지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입장은 이미하나님의 입장 equal하게 되어 버리기에……) <그들의 인식 속에서>

 

 

 

즉 스펙트럼을 그려 보면, 오른쪽 끝에는 완전한 계시의 정지와 이 시대에 더 이상 성경책 이외에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수 없다는 보수 측의 장로교나 근본주의자가 있다면 그 그래프의 왼쪽 끝에는 오순절, 순복음 계열의 성령파들이 있을 거야. 그들은, 성경이라는 명확한 기준점을 위험하게 넘어서는특이한 체험이나기사,이적을 무분별하게 강조하곤 할거야

 

우리는 중간 어디 쯤을 견지하고 있는 게 가장 좋을 것 같구. 그 스펙트럼은 온건 장로교나 감리교, 침례교 쪽에 가까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꼭 이렇게 분류시킬 수 있는 건 아니야. 소속은 한 쪽 극단이더라도, 그 사람이 살아내고 있는 신앙 생활은 진리에 가까울 가능성도 분명히 있어)

 

참고로 내가 책을 분별해서 읽을 때십자가 복음에 잘 서 있고, 말씀으로 단단하게 무장되어 있고 성령님의 역사도 제한하지 않고 민감하게 깨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책들은 대개침례교쪽에 많이 있더라구. (그렇다고 침례교로 옮기자는 말은 아니야…..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인간적인 신학의 틀에 메이지 않고, 오직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어.)

Ex) 헨리 블랙카비 목사님이 쓰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데이비드 플랫 <래디컬>, 여주봉 목사님 <십자가의 복음> , 손기철 장로님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 , 정원 목사님 <주님의 마음, 주님의 임재 속으로>,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의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등은, 신앙의 본질이 인격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음을 균형감 있게 잘 말해 주고 있어 보였어. (여기서 손기철 장로님 같은 분들은성령 사역’, ‘치유 집회도 많이 하시기 때문에 한국 정통 장로교에 계신 분들은 매우 경계하고 있어. 그들은, ‘계시의 정지라는 교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개인적 체험과 깨달음으로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는 일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당연히 경계할 수 밖에 없어. 그리고 정원 목사님의 다른 책들은 아직 추천을 잘 못하겠어. 약간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하지만 저 책은 상당히 좋아.)

 

 

 

그 이외에도 청교도 신앙을 견지하는 정통신학의 대변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 같은 경우는 성령님의 임재에도 상당히 깨어 계시기 때문에 상당히 좋아하는 분이고(물론 카톨릭을 이단시 여기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나 존 스토트 목사님이 힘쓰신에큐메니컬 운동에 함께 하지 않으려 한 점에서 기독교의분열을 조장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그 분 입장에서는 나름 옳다고 생각한 길을 지키려고 한 결정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실지 의문일 때가 많아.) 아까 언급한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신앙도 참고하기 참 좋은 것 같아. (그 이외에도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스펄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등의 삶을 들여다 봐도 성경과 성령의 조화가 잘 이뤄지고 있어)

(찰스 스펄전의 설교집은 정말 최고!!!!!!....이런 믿음의 조상이 있어서 너무 다행)

 

말하고 싶은 요지는, 성경에 계시된 구속사는 당연히 완성된 게 맞지만 그와는 별개로 하나님은 인격체이시고 지금도 말씀하실 수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점이 강조되는 게 더욱 성경적이라고 난 주장하고 싶어. (이런 고백은 이미 칼바르트의 신학 틀 속에 포함이 되어 버려…)

 

è  보수 장로교 어르신들은 이와 같은 고백을 허용해 버리면 성경의 권위가 훼손되고, 너도 나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여 각종 이단을 양산하고, 분별력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 해….. 이러한 경계도 매우 중요하고 맞는 말이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경 그 자체를 신으로 모시는 게 아니라, 성경이 계시하는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는 점이 강조되는 게 더욱 맞다고 생각해. (이 역시 칼 바르트 신학에 포함된 고백이더라구)

è  종교 개혁 당시에 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가 워낙 강조되다 보니, 사람들은 정말 성경만을 보려고 했었어. 그러다 보니, 안정성은 뛰어 나고 모가 난 행동을 하지는 않게 되었다는 큰 장점도 있었지만 동시에 성령님의 존재는 있으나마나 한 게 되 버리는 문제점이 생기더라구. (사실 그 분들 논리를 따라가면 기도를 할 필요도 없게 됨….. 기도는 철저히 관계성에 속해 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듣고 구하는 시간이며, 그 분을 만지는 시간인데 이와 같은 논리가 먹혀들 자리가 없더라고……….그냥 성경을 읽고 그 내용에 지식으로 동의해서 끄덕이면 그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여기시는 분도 많아……….만약 이 정의가하나님의 음성 듣기라면, 바리새인이 저주를 받을 이유는 단 하나도 없어야 할 텐데…. 라는 큰 의문을 남겨…)

 

특정 교단은 큰 문제다!!! 이런 말은 유익하지 않은 것 같아. 심지어 그 분들이 <계시의 정지>를 주창하며,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로막는다 해도 칼빈주의 신학이 지니고 있는 수 많은 강점들과 견고함 또한 높게 보고 있거든. (답이 잘 나오지 않아도 연합은 해 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칼빈이 주장한 핵심 5대 강령인 TULIP 이라는 교리가 있는데, 그 중 T에 해당하는 Total Deprivity(전적 타락) 같은 부분은, 감리교에서는 반대를 하지만 난 이 부분이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는데 굉장히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고 있어.

 

그 이외에도 I 에 해당하는 Irresistable Grace(저항할 수 없는 은혜), P에 해당하는 Perseverence of Saint(성도의 견인) 등의 교리도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를 향한 무한한 사랑이 잘 드러나 있는 성경적인 교리라고 믿고 있어. (결국 가장 근간이 되는 베이스는 나 역시 칼빈주의 신학에 가까워 보이긴 해)

 

그리고 최근에 어떤 목사님이 최근에 <마지막 신호> 라는 데이비드 차? 선교사님 책을 추천하셨는데(영풍 문고에 갔더니 신앙 서적 베스트 셀러에도 올라와 있더라걱정이 된다), 이 책이 말하는프리 메이슨’ , 666 배리칩에 대한 의견들은 정통신학에서도 경계를 하고 있고, 나도 정통신학자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어.(이와 같은 책을 추천하는 목사님들은 대개하나님의 음성 듣기’ , ‘성령의 기름 부으심등에 매우 익숙한 분이실 가능성이 커. 그래서 개방된 사고 속에서 누군가가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면 그들의 논리를 일단 따라가 보게 되고, 결국은 극단적인 예언자적 메시지나 문자적 해석도 충분히 거부감 없이 수용해 버리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내가 원하는 바는 성령님의 자유로운 임재하심을 제한하진 말되, 철저히 성경에 기반하여 민감하게 분별하며 하나님께 길을 구해야 하는 섬세한 지점을 찾아 나가는 거…)

(그런데, 데이비드 차 선교사님의 간증을 직접 듣고 나눠준 어떤 형의 말을 들어보면, 참 진실되고 가슴을 후벼파는 스토리들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어디까지 문을 열어 놔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만약 저와 같은 고백들이 허용되어 버리면 다른 이단들을이단이라 부를 만한 근거가 매우 빈약해 진다는 위험성이 커서……….일단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는 볼 수 있고, 참고 정도는 할 수 있으며, 개인적으로 마음에 담아둘 수는 있지만 이 메시지들을복음의 일부로 여기고 마냥 전하기가 위험해 보여)

è  김우현 감독 등처럼 존경하는 분들도 이와 비슷한 발언을 할 때가 많으시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긴 힘들 것 같아. 더욱 선명하게 비춰 주실 날이 있겠지……

 

마크 놀이 쓴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이나, 류대영 교수님이 쓰신 <미국 종교사> 등을 함께 읽어 보면, 19세기에 태동한 근본주의자(세대주의자)들의 독특한 요한 계시록 해석법 등을 알게 되고 그 연장선 상에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다양한 문자적 해석, 예언들의 문제점을 보게 되는 것 같아.

(일말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건 아니지만,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영상이나 블로그 카페에 있는 이런 류의 기사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게 더 맞는 것 같아……가령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음녀는 카톨릭의 마리아라든지, 적 그리스도는 유럽 어딘가에서 실제로 나타날 것이라든지…..윌리엄 왕자가 적그리스도라든가……이런 류의 말들은 One of the possibility 정도로는 받아 들일 수 있지만, ‘진리의 일부라고 보기에는 너무 무리수가 많아 보여………100번 양보해서 정말 그런 이상한 해석이 성취한다 해도 그걸 모른다 해서 우리가 버림 당할 이유도 없고……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붙드는 자는 구원을 받는 것이기에해석이 일관되게 하나로 모아지면 좀 더 진지하게 기도해 보겠는데, 워낙 의견들이 다르니………)

 

이런 면에서 정통신학의 역할도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

 

결론은치열하게 고민하며, 신앙의 본질을 살아내고 경험하며 알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

 

그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지점을 바르게 알고 움직일 줄 아는 자세….

 

그리고 우리가 특정 교회에 다니고 있다면 그 목사님의 철저한 신학에 많이 노출이 될 것인데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창조적으로 사고하는 마음도 계속 지니면서 열심히 존경해 드리고 좋은 것을 알아가되, 진리의 문제에서는 내적인 씨름을 그치지 않아주길 부탁하며…..(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이기에 늘 한 몸이라는 연대의식과 친밀한 중보는 잊지 않아야 함)

 

세상은 날로 혼탁해 지고, 영분별 하기가 정말 힘들어 지는 시대이기 때문에 섣불리 답을 내리기 보다는 더욱 경험하고, 알아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

 

 

 

 

[핵심 이야기]

 

1.     평신도지만, 우리의 첫째 사명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이웃에게 하나님 사랑을 전하는 것이므로 신학적 공부는 게을리 하지 말 것. 그래서, 장로교에서 중요시 여기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 등과 아울러, 감리교, 침례교, 오순절 등 포괄적인 공부를 해서 가장 성경적인 지점을 찾아 나갈 것.

2.     균형과 긴장을 철저하게 유지하기. 진리는 중간 어디쯤에 있다는 말이 있을 만큼, 이 시대 속에서 민감한 균형점을 찾아가는 건 중요할 것 같아. 가령,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다양한 성령 사역자들의 활동들을 보면 분명 그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고, 권장할 부분도 많지만 워낙 질병 치유나 눈에 보이는 기적에 집중하다 보니 예수님과 그 분의 인격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더라구…. 그런 류의 운동은 주의 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 같고, 또한 반대 극단에 있는 것처럼 율법에 너무 메여서 성경 속문자에 머물러,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만드는 모종의 교리적 틀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필요한 것 같아. 극단은 늘 위험하며, 양 극단이 과도하게 변질되었을 때 각종 이단이 양산되었음을 기억하며

3.     프란시스 쉐퍼와 C.S 루이스가 했던 역할들은 참으로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아. 지금에 와서는 쉐퍼의 핵심 주장들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긴 하지만, 그가 세상과 소통하려 했으며 기독교는 논증이나 토론을 할 수 없는 철저한 전제로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한 다른 보수주의 신학자들에 비하면 정말 많이 열려 있는 분이기 때문에 그의 사역은 높이 살만한 것 같아. 여전히 두 사람을 존경하고 있고, 알아가는 중.

è  세상과의 소통을 잃어 버리면, 기독교가 아무런 역할을 해낼 수 없다는 점을 잘 알려줘서 빚을 많이 진 분들.

4.     그리고 내가 칼빈이니, 칼 바르트니 어려운 신학자들 이름을 언급했지만 정말 중요한 건신학을 공부하고 나서 그 신학에 나를 끼워 맞추는 게 아니라, 내가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알아가고 그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살아 왔는데, 정신을 차리고 신학을 조금씩 공부해 보니 이미 내가 했던 경험들이 신학의 스펙트럼 속에 포함되어 있더라는 것….. 결국 역사 속에 하나님이 심어 두신 신학자들의 활동들을 벗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라는 점……(이런 측면에서 신학은 중요해 보여…)

5.     한국에서 칼 바르트를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매도하는 분들도 인터넷을 포함해서 꽤 있는 것 같던데, 정통 칼빈주의 신학의 틀에서 바라볼 때 자유주의라는 것 뿐이지, 실제로 독일에서 칼 바르트는 보수주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 같아. 이들이 구분되는 여러 가지 요인 중 가장 이슈가 되었던 건성경 무오설부분인데, 정통신학 측에서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으니 오류가 있으면 안 된다는 입장이고, 성경을 학문적으로 비평하고 분석하려 했던고등 비평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의 출현을 극도로 경계했어. 그들이 성경이라는 신령한 경전을 인본주의적으로 비평하는 건 있을 수 없다는 관점이었지. 여기서도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은데, 모든 성경은 결코 오류가 없다는 쪽은 요즘은 별로 힘을 얻지 못하고 있어. 왜냐하면, 고등비평에서 말을 굳이 안 해도 우리가 그냥 성경을 읽어도 분명오류가 있기에….. 그런데오류라는 말을 쓰면 사람들이 하도 오해를 많이 해서 그냥불일치’(discrepancy)가 있다고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즉 내용의 오류를 말하는 게 아니라, 4복음서 등에 흔히 등장하는 시간의 오류, 인물의 오류 등 단어에 오류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사람들은 이걸 인정하지 않더라구칼 바르트는 이런 영역에서 열려 있었어. , 인간의 불완전함을 통해 완전한 진리를 드러내시고자 했기에 단어나, 연대의 불일치가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라고 주장했던 게 칼 바르트였어. (지금에 와서 보면, 이 고백이 가장 맞아 보이는데 정통 신학 하시는 분들은 그걸 납득할 수 없나 봐, 왜냐하면 성경의 권위가 너무 훼손되어서 그런 허점이 있는 경전을 진리라고 주창하기가 힘들어 질까 봐 두려워 해. 계몽주의를 거쳐서 과학적이고 분석적 사고를 잘 하는 사람들의 비판에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이지..) 그래서 내 놓은 타협안은 성경의 사본들에는 이런 글자의 불일치가 많지만, 성경 원본에는 결코 그런 불일치가 있지 않았을 거라는 주장을 요즘 하고 있어. (그래도 꽤 깨어있는 장로교 신학자 분들이 지지하실 듯) -> 여기에도 맹점이 있다면, 모든 사본이 하나 같이 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고, 완벽히 일치하는 사본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 말은 원본 또한 그와 같이불일치를 내포한 채 기록되어져 있었기에 그걸 필사한 사본이 조금씩 틀린 게 아니냐고 해석하는 게 일단 논리적으로는 당연히 맞는 말인데, 이런 류의 비평을 결코 허용해선 안 된다고 그 분들은 말씀하고 있어.

 

참 중요한 이슈들이 많아. 나눌 말이 많지만 이 정도만 나눠 둘께.

늘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만지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길

그리고 그 하나님을 전하기 위한 최선의 지점을 찾기 위해 씨름하며 기도하길.

무엇보다도 우리는 함께연합해야 하기에, 바른 지점을 주장할 때도 늘분열을 조장하는 글과 말과 행동은 지양하자.

마지막으로 어떤 입장이 되었든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관점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면, 모든 논리는 뒤집힐 수 있다는 점. 분명히 피력해 두고, 글을 마칠께.

 

[성경 무오설]과 관련된 부분은, 따로 글을 올려 줄께!

 

-기존에 우리가 들어 왔던장로교적 틀을 약간 벗어난 관점을 전개하고 있지만, 찰스 스펄전, 조나단 에드워즈, 마틴 로이드 존스, 칼빈, 성 어거스틴 등이(최근에는존 파이퍼 목사님) 보여주는 탄탄한 신앙적 고백들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두 지점을 연결시킬 수 있느냐 하는 점에서는 좀 더 기도하며, 공부해야 할 것 같아. ‘칭의라는 이슈를 놓고 현대 신학자들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데, 이와 같은 부분들도 양 측의 의견이 모두 팽팽하기 때문에 답이 내려질지는 잘 모르겠음.(무엇보다도 가장 큰 target이 되었다는 점에서장로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고, 또한정통신학의 정통성 또한 일견 증명이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진리를 분별한다는 명목 하에, 너무 많은 정죄와 판단을 일삼진 않았는지…. 우리가 특정 교파의 흐름에 너무 익숙해 진 나머지 참과 거짓을 분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우선하는서로 사랑하라는 명제를 너무 단순히 여겼던 건 아닌지 반성해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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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나의 사귐]

 

 나는 어떤 길로 가야 해요?’ 라는 질문을 던질 때, 예수님은 잠잠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란다.’ … 나를 잡으렴…. 나를 만지렴…. 나를 보렴…..나를 받아 들여 주렴……네가 나와 같이 걸어가게 될 때, 네 마음 속의 수 많은 질문들은 사라질 거란다……..미래를 주도하고픈 너의 욕망은 사라지고, 모든 주도권을 내리게 되기에 참된 자유와 평강 속에서 삶을 꾸려 나가게 된단다. 무언가를 잘 보일 필요도 없고, 무거운 의무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되고, 그저나의 생명과 나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면 되는 거란다……….내가 곧 길 그 자체며, 내가 곧 생명 그 자체란다…….십자가를 붙들고, 나와 다시 관계를 맺자꾸나…….오직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만 난 너와 관계 맺을 수 있단다……. 가자꾸나함께….난 분명한 목적과 뜻과 의중을 지닌 인격체 하나님이란다. 내가 널 창조한 분명한 목적이 있고, 구체적인 계획도 있단다. 그러나내가 원했던 건 어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었으며, 지금 이순간너와 함께 사랑할 수 있고, 관계 맺을 수 있는 것을 열망했단다. 네가 나의 사랑을 경험하는 순간, 순간을 결코 포기하지 않게 될 것을 난 확신한단다. 넌 다른 것을 구하지 않게 되고,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내 소망이 주께 있나이다.’[시편39:7],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편27:4]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3:7~9]. 를 고백하게 될 거란다.

 

그저 기도할 뿐…..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계속 함께 할 것을 확신하며

 

샬롬!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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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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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년 전에 근본주의, 세대주의 관련하여 정리해 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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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세대주의가 양산해 낸 폐단]

요한 계시록과 다니엘서의 짐승’, ‘적 그리스도’, ‘666’, ‘음녀’, ‘동방’, ‘열 뿔등을 임의로 해석하며, 임박한 종말론을 주장하며, 이 세상을 하나님과 사탄의 두 대결구도로 보는 이원론적인 주장을 하기도 하며, 양태론과 기독론, 구원론에서 이단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P.S: 기독교는 하나님과 사탄의 힘을 동등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아무리 강력한 영적 존재라 해도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시대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서 사탄이 최후의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시대라고 보는 게 더 성경적입니다.)

(P.S2: 양태론을 주장하는 건 모든 세대주의자들이 그러는 건 아닙니다. 일부만 그러고 있습니다. 양태론은 정통 기독교가 주창하고 있는 삼위일체와 다른 개념입니다. 양태론이란 three person in one nature(한 본질을 지니신 세 분의 다른 존재)라는 삼위일체의 특성과는 달리 한 분 하나님만이 단일하게 계시고 때에 따라 다른 모습(양태), 즉 어쩔 때는 성령, 어쩔 때는 성자 예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다는 이론으로서 사벨리우스가 주창했습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님 이라는 구분이 사라지다 보니 삼위일체 하나님의 독특한 인격성은 사라지고, 신비주의적이고 막연한 신성만 남게 된다는 치명적 오류가 있어서 개신교 진영에서는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세대주의]

 

(1)19세기 말 플리머스 형제의 초기 지도자였던 존 넬슨 다비에 의해 주장된 일련의 신학적 사조입니다.

(2)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3)19세기에 미국 교회사, 정치사의 독특한 토양에서 생겨난 근본주의라는 노선의 일부라고 보면 됩니다. (근본주의 중에서 가장 지적인 형태로 나타났던 게 세대주의다. 그래서 세대주의자들이 복음주의 지성에 끼친 악 영향이 실로 대단했습니다.)

(4) 세대주의 중에서도 극단적인 세대주의는 굉장히 위험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대주의이다.> 라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5) 이러한 세대주의는 구원파 등의 한국 이단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들도 있습니다.

(아래 댓글로 구원파와 세대주의는 관련이 없다는 글을 올리신 분이 있으니 정확한 진위 여부를 확인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관련 단체와 세대주의가 전혀 상관이 없다면 기존에 알려져 있는 교리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반박 등을 댓글로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반적인 특징은

(1)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엄격한 구별

(ex) 그래서 마지막 때에는 이스라엘 12지파에서 12000명씩 회심하여 144000명을 이룰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을 읽어 보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렸으며[3:29], 그리스도인을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기록한 부분도 있는 걸로 볼 때, 이와 같은 이스라엘과 다른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구별 시키려는 시도는 성경적 근거를 확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2) 문자적인 해석

(ex) 세대주의자들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천년을 정확히 1000년으로 해석합니다.-> 요한 계시록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건 아주 위험합니다.)

(그러나 일관성이 없어서 ‘1은 또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천년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원칙과 기준이 딱히 없는 것이죠)

(3)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근원적 목적으로서 구원의 완성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에 더 주목하는 태도

 

좀 더 구체적인 특징

세대주의:

(1) 하나님이 인류와 맺으시는 관계를 몇 개의 예리하게 분리되는 시대로 나누어서 성서를 이해하는 태도.

(2) 성서가 아담으로부터 신약 성서의 마지막까지 또 성서에 예언된 종말의 세대까지, 이러한 시대들 혹은 세대들에 대한 분명한 신적 해석을 제공한다고 봅니다.

(3) 하나님이 역사를 초월적으로 다스리신다는 믿음을 옹호합니다.

(4)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성서관과 그에 따른 성서 해석(그러다 보니 성서 비평에 취약했음)

(5) 예언 해석에 초점을 맞추는 강경한 성서 문자주의

Ex) 그래서 그들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재림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일어나야 한다는 이중 재림을 주장합니다. 즉 대환난 이전에 예수님이 한 번 재림하시고, 그 이후에 천년왕국의 통치 이전에 다시 한번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것입니다. -> 이단적인 종말론을 태동시키는 촉진제로서 작용했고, 이와 같은 이중 재림은 성경적 근거도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6)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반박: [19:23~24]을 보면 천국하나님의 나라는 병행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두 용어는 서로 호환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대주의의 방법론: 성서적 진리(특히 세상의 종말에 대한 진리)를 입증해 내기 위해 성서 전체에서 뽑아낸 구절을 적절히 배열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문자주의를 수용합니다.

 

세대주의가 인기 있는 이유:

(1)성서의 예언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고 현재 상황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해석해 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예언이 나름 해석 되는 것 같으니까 신이 나는 것이죠)

(2)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인기 있었던 이유는 통제를 벗어난 세상 속에서 미래에 대한 전천년주의적 관점을 지니게 해 줌으로써 복된 소망과 더불어 왜 상황이 이렇게 나쁘게 흘러가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줬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몇 백년 전에 현재의 혼란을 예언했다는 것을 알고 묘한 위안을 얻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성경의 무오성이라는 중요 교리를 철저히 지켜 내려고 학문적인 노력도 나름 많이 했습니다. -> 정통 신학에서 유일하게 긍정하는 세대주의자들의 업적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긍정할 만한 요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악영향이 더 많았거든요.)

 

진보적인 세대주의자는 그나마 역사적 개신교와 비슷한 개념을 많이 취하려고 하지만, 일반적인 세대주의자들은 기성 교회의 쇠퇴나 배교, 그에 따른 문명의 타락,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지 않은 기존의 제도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할 필요성 등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이단들이 아주 좋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이론을 적극 수용해서, 기성 교회들을 싸잡아서 비난하는데 사용했죠)

 

 

 

근본주의(또는 세대주의)가 미친 영향들

 

(1)  반지성주의를 만연케 만들었습니다. 즉 임박한 재림과 예언의 은사를 강조하여 학문의 필요성을 경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지성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싸잡아서 종교주의자로 매도해 버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단에 빠지는 분들을 보면 가방끈이 좀 짧은 어머님들이나, 순진한 분들이 참 많아요. 배우지 못함에 대한 열등감 등을 교묘하게 비틀어서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립니다. 잔인하게도…)

(2)  성서 해석이 지나치게 단순하다 보니 성서 비평앞에 취약함을 보입니다.

(3)  성서 구절을 신적 진리라는 완성된 그림을 얻어내기 위해 골라서 끼워 맞추는 데만 필요한 퍼즐 조각처럼 취급해 버립니다.

(4)  극단적인 본질주의를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특정한 공식으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나 인간의 상태, 세상의 운명과 같은 모든 문제에 관한 성서적 진리의 본질을 포착해 낼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그에 따라 특정 시대에 가장 중요해 보였던 문제를 이해하고 정의하는 데 역사가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5)  이전 세대로부터 내려온 지혜를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교만에 가까운 자기 확신을 지녔습니다.

Ex) 루이스 스페리 체이퍼(Chafer)는 말했습니다. “신학계에서 정해 놓은 과정대로 연구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편견 없는 마음으로 신학을 연구하고 성서가 실제로 가르치는 바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반박-> 굉장히 객관적이고, 엄밀한 태도를 취한 듯 하지만 사실 자신이 생각한 바가 진리라고 독단적으로 주장하는 것과 다름 없다. 자신의 해석법에는 검증의 잣대를 대지 않겠다는 것이다.

 

è 이런 독단적인 태도의 맹점: 자신의 신학 사상을 포함한 모든 신학 사상이 교육이나 경험과 같은 개인적, 문화적 요소와 그 신학자가 속한 전통에 의해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다는 것을 간과한 태도입니다.(자체적인 논리적 오류를 지닌 주장입니다.)

 

(6)  대중에게 매우 퍼뜨리기 쉬운 극단적 형태의 초자연주의를 전하느라, 자연적 영역을 고려할 만한 시도가 없었고, 진리의 내용 자체가 상당히 영지주의적이게 되어버렸습니다. (, 자연, 세상 정치, 윤리, 인간 존재 등에 대해서는 성경적인 답안을 거의 내 놓지 못했습니다. 맨날 종말 이야기만 하고, 이상한 단어 해석에만 집착하느라 성경의 Quality 를 땅으로 떨어뜨려 버렸습니다.)

(7)  시대 자체를 들여다 보는 불편하고 중요한 작업은 하지 않고, ‘시대를 해석해 보려는 기이한 시도였습니다.  

(8)  세계적인 사건이 터질 때마다 성서를 복잡한 국제 윤리를 풀어 가는 지침으로 활용하기 보다는 수정구슬처럼 사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모호한 성경 예언의 세부사항에 대한 성취라고 자부하면서..)

 

[몇 가지 알아둘 내용들]

지난 10년간 일부 세대주의자들은 소위 전통적인 세대주의에서 극단적인 요소를 많이 제거하긴 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들이 세대주의의 주류는 아닙니다. 그러니, 그다지 받아들여 주기 어렵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성서를 방어할 때, 성서 원본의 무오성을 주장했습니다.(성서의 저자들이 인간임을 완전 망각하고 고려도 안 하고 있습니다. 성서 저자들의 삶의 경험과 문화적 배경 등에 대한 고려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실수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은 전혀 생각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근본주의(특히 세대주의) 비판하기

(1)  이 운동이 미국에서 각광 받는 동안 복음주의 공동체는 하나님 아래에서 자연 세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인간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왜 인간의 본성은 그런 모습인지, 문화의 축복과 위험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통찰을 거의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대한 이해력을 놓여주지 못함.)

 

근본주의자들의 공헌점: 그래도 무신론주의, 유물론주의 토양에서 초자연주의를 지켜냈습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성서에 정말 충실했다는 점은 칭찬할 만 합니다.

(그들이 끼친 악 영향을 생각하면, 이런 칭찬도 해 주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100번 양보해서 힘겹게 칭찬해 줄 순 있을 것 같습니다.)

 

결론

성서 예언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의 정서적이며 우주적인 차원을 계시하는 것이지 신자들에게 세상의 종말에 대한 완전하고 상세한 미리보기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은 역사적으로(문화적,인간적 요소 고려), 자연적으로(상징,상상력,서술 양식 고려), 그리스도 중심적으로(성서의 통일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에 있다는 관점) 해석해야 합니다.

(그냥 단어에서 단어로 jumping 해서 쉽게 쉽게 해석하려고 하다가는 세대주의자들의 말에 완전 매료될 수 있고, 신천지 같이 비유 풀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덥석 잡히는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는 기회로서 읽는 것이지 퍼즐을 풀듯이 예언을 찾아 가는 방식으로 읽는 게 아닙니다.

 

-마크 놀 교수님, 이인규 권사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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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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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자(세대주의자)들이 이야기 하는 프리메이슨] (수용해선 안 될 견해)

그들은 말하기를 프리메이슨은 성경에 나오는 사탄을 숭배하는 조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권력을 쥐고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집단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과거에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었지만, 지금은 로마 카톨릭이 프리메이슨 조직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고 이야기 합니다.

 

프리메이슨은 18세기 경에는 사탄을 숭배하는 조직이 아니었는데, 사탄을 숭배하던 일루미나티라는 비밀 조직과 엮이게 되면서 그 조직의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고 봅니다. 일루미나티는 로마 카톨릭에서 가장 무서운 집단으로 알려졌던 제수이트(예수회)의 회원이며, 유태인으로 잉골스타트의 교수이며 법학부장이었던 아담 바이스 하우프트가 고대의 비밀스러운 악마숭배와 바벨론과 이집트의 우상 숭배 등 다양한 사상을 하나로 결합시켜 1776 5 1일 경에 독일의 바이에른 지방에서 만든 비밀 조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이 아담 바이스 하우프트는 독일 근방에 자신들과 유사한 조직인 프리메이슨이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되어 순식간에 그 조직에 개입되어 프리메이슨 내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루미나티 속에 프리메이슨을 흡수시키기에 이릅니다.(무슨 근거로 이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루미나티는 영화 [천사와 악마]에서도 등장을 하죠.)

 

현재 프리메이슨들은 전 세계의 금융, 언론, 곡물, 석유(에너지), 경제, 종교, 문화, 연구기관, 대학교들, 다양한 국제 기구들, 교수들, 각국의 대통령들, 범죄 조직들, 로마 교황청, 공산당 등을 총망라한 조직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들의 목적은 유엔을 업그레이드시켜서 세계단일정부를 세워, 거기에서 선출된 적그리스도가 세상을 다스리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이쯤 되면, 한 편의 판타지 소설이 완성되기 시작합니다.)

프리메이슨 조직은 세부적으로 4백만 개 정도에 이를 것이며, 여기에 속한 회원들은 세계 최고의 엘리트들로 1천 만명 정도 된다고 봅니다. 이들이 세상의 모든 권력과 돈을 쥐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일은 모두 프리메이슨이 관여하고 있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가령 프랑스 혁명,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공산당, 석유파동, 다양한 범죄조직, 6.25, IMF, 우르과이 라운드, FTA, 다양한 지구촌의 전쟁은 모두 프리메이슨이 배후에 있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지구를 정복할 기세입니다.)

 

그리고 아직 공개되지 않은 그들의 무시무시한 음모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그들은 간곡하게 말합니다. 로마 교황청은 프리메이슨이 100% 장악하고 있꼬, 지구촌의 다양한 종교들의 약 70%를 프리메이슨이 장악하고 있으며, 기독교도 70%는 프리메이슨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제 2의 유엔이라고 불리는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모두 프리메이슨이 세운 것이며, 무지한 신학자와 목사들이 이 조직을 열심히 돕고 있는 상황이라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이렇게 해석을 해 내는 게 더 대단한 것 같습니다.)

 

[프리 메이슨에 대한 바른 이해]

18세기에 영국의 석공(메이슨)의 조합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후에 지식인과 중산층의 조직으로 발전하였고, 한 때에는 카톨릭의 박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카톨릭에 대항하는 비밀 결사단과 비슷한 성격을 지녔던 적도 있다고 합니다.

 

프리메이슨은 반드시 기독교의 모임이라고 볼 수 없지만 기독교인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건 맞는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카톨릭에서는 프리메이슨이 자신들을 음해한다고 비난하곤 하며, 개신교에서는 프리메이슨이 카톨릭과 연관된 비밀 조직이라고 말하며 그들을 비난합니다.

 

지금도 이러한 프리메이슨은 현존하고 있으며, 한 때는 사업적인 이유, 정치적인 로비로 도움을 받으려는 형태로 이 조직이 발전했던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중요한 사회 이슈나 정치 문제에 이 프리메이슨을 끼워 맞추는 어리석은 시도들을 근본주의자(세대주의자)들은 일삼곤 합니다.

 

물론 유럽과 미국의 대통령, 정치인 등이 프리메이슨의 회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근본주의자(세대주의자)들은 프리메이슨이라는 조직 자체를 왜곡된 눈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역대 대통령, 정치인, 유명 목사님 등이 모두 프리메이슨으로서 세계 정복을 꾀하고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논리적으로 당연한 결과이긴 합니다.

하지만 너무도 훌륭하게 사역하고 계시는 복음주의 목사님들을 죄다 프리메이슨이라고 부르며 사탄의 종으로 정죄하고 있는 근본주의자(세대주의자)들의 해석법은 옳지 않습니다.

 

프리메이슨에 대한 음모론이 각광을 받다 보니, 프리 메이슨이 그림자 정부이며,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비밀 결사대라고 주장하는 책들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지만 프리메이슨은 더 이상 비밀조직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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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 짐승의 표] -> 세대주의자들은 요즘 666베리칩’(생체 이식 칩)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4:9)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3:16~17)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 17:5)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못에 던지우고( 19:20)

 

근본주의자(세대주의자)들의 해석법을 잘 기억해 봅시다. 요한 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숫자 하나 하나에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 보니, 666에 대한 질문에 답을 내려야 겠다는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 가짐을 가지고 자신들이 처해 있는 사회 현상들을 찬찬히 둘러 봅니다. 뭔가 짐승의 표를 받는 느낌과 유사한 모종의 아이템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 보니, 마침 베리칩에 관한 기사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마음에 feel이 꽂힙니다. ‘바로 이거다. 이게 바로 666이라고 보면 되겠구나. 이게 모든 사람에게 이식되어서 이걸 이식 받지 못한 사람은 사회 속에서 불이익을 당하겠구나. 그러나 이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은 마지막 날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짐을 당하겠구나이 베리칩을 이식 받으면 우린 지옥에 떨어지는 거야….!!!!!’

 

 

반박: 근본주의자(세대주의자)들의 해석법이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자의적인지는, 666 해석 하나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근거를 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666의 의미에 대한 논의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는 666이 네로황제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곤 합니다.(알파벳에 숫자를 부여해서 네로 황제의 본명인 네론카이사르를 숫자로 표시해 보면 666이 나온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666을 일반 교회들, 또는 카톨릭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보너스로 144000명은 자신들 교회의 교인 숫자라고 주장하구요. 신천지가 이런 주장을 유독 좋아합니다.).

그리고 666을 불신자, 반기독교인 전체로 지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666이 컴퓨터 또는 바코드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리고 전자카드나 은행카드 등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666을 특정 개인으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김일성이나 히틀러라고 보기도 합니다. 또는 로마 교황이 666이라고 말하는 개신교 진영 사람들도 있고, 666을 마틴 루터라고 보는 카톨릭 진영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쯤 되면, 이와 같은 해석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컴퓨터가 666이다. 신용카드가 666이다라고 주장했던 분들도 컴퓨터 잘 사용하고 있고, 신용카드도 적극 활용하고 계시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반박1:

만약 컴퓨터의 바코드나 전자카드를 666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현재의 시대적 상황만을 계시록의 예언으로 보는 것이 되므로 요한 계시록의 건전한 해석법에 전혀 부합하지 않습니다.

 

반박2: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경에 나와 있는 기호, 표는 소유권을 의미한다고 보는 게 더 일관적인 해석입니다. 예로부터 노예나, , 그리고 가축들은 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대 히브리인들은 전쟁에서 잡은 노예와 일반인을 구별하기 위해 표시를 해 놨다고 합니다. 또 유대인들은 그 이마와 손에 기호나 표를 붙이고 다녔고(6:8), 짐승도 이를 모방하여 자신들만의 표를 받게 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성령님의 인치심을 주장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4:30)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1:13)

 

여기서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는다는 것은 실제로 몸에 도장을 찍는다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이러한 해석을 해 버린다면, 구원 받은 사람은 몸에 성령이라고 글자가 찍혀 있어야 한다는 엉뚱한 의미가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는다라는 것은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게 옳습니다.

이와 동일한 해석법을 적용해 본다면, ‘짐승의 표()를 받았다는 것은’, ‘사탄의 영, 미혹의 영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합니다. (성경에서 인침’(도장찍음)을 의미합니다.)

 

즉 성령의 소유가 되느냐, 사탄의 소유가 되느냐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 더욱 타당합니다. 요한 계시록을 읽을 때, 단어 하나 하나에 얽매이기 보다는 좀 더 큰 그림을 그리면서 독해하는 게 더욱 안전하고 정확할 것입니다.

 

반박3:

무엇보다도 오직 구원의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사탄의 백성인가 하는 문제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믿지 않고 있는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21세기에 등장한 베리칩이라는 생체 이식 칩을 이식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짐승(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며, 사탄을 숭배함으로써 사탄의 노예가 되며, 사탄의 소유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성령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께 인침을 받아 구원의 보증을 받게 됩니다. (1:13, 4:30)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이마나 손에 모종의 바코드가 찍혀 있다거나, 신용카드를 잘못 사용해서, 또는 요즘 유행하고 있는 베리칩(생체 이식 칩)을 몸 속에 넣었다고 해서 구원을 잃는다고 주장해 버린다면, 그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사역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이자, 유일무이한 진리에 완벽하게 반대되는 주장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런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표에 상관 없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구원을 위한 충분한 조건을 획득했습니다. 그게 바로 Good News(복음) 입니다.

 

우리는 베리칩이 아니라, 사탄의 미혹을 조심해야 합니다.

 

[추가지식] [베리칩은 무엇인가?]

애완동물과 비싼 가격의 가축에 삽입하는 작은 생체 칩입니다. 이걸 삽입하게 되면 그 대상의 이동경로를 알 수 있게 되고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이를 사람에 적용하기 위해 치매에 걸린 노인 분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그 분들은 한 번 집 밖으로 나가면 길을 잃어 버릴 수가 있기 때문이죠.

 

베리칩 사용 문제는 요한 계시록을 펼쳐서 종말론 적으로 해석할 때 언급될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와 같은 칩이 몸 속에 심겨질 때 초래될 수 있는 생리적, 물리적 안전성 여부, 개인의 사생활 보호 문제, 편리성 등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베리칩을 구원과 연결시키는 근본주의자(세대주의자)들의 대담함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문명의 利器(이기)는 우리의 삶에 편의를 가져다 주는 것들입니다. 컴퓨터나 카드, 바코드 등을 우리가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지요. 그런데 이와 같은 문화와 과학의 요소들을 철저히 신앙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단정지어 버리는 건, 재고할 필요가 없는 비논리적인 견해입니다.

 

 

-변종길 교수님, 이인규 권사님의 지식을 빌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

근본주의자(세대주의자)들의 요한 계시록 해석법을 수용하고 그들의 비논리적인 성경 풀이를 일상 생활에 적용하다 보면, 적 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인 인물이 말세에 반드시 나타나야 하며 그러려면 반드시 10개의 국가가 통합을 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연합’, ‘하나됨등의 이야기만 나오면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줄 압니다. 그래서 끌어 들이게 된 개념이 프리메이슨입니다. 음모론에서 잘 이용할 수 있고,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이면 가장 그럴싸한 비밀 결사대로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프리메이슨을 점찍어 두고, 유럽의 국가들이 통합되어야 하며, 당연히 적그리스도가 태동하려면 종교들도 하나로 통합되어 참 된 기독교를 박해해야 한다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음녀를 로마 카톨릭으로 해석하는 해석법 또한 적절히 활용해 주면, 그들은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내게 됩니다.

, ‘음녀인 카톨릭과 손을 잡는 종교가 나타난다면 그들은 서서히 종교의 통합을 세상 속에 전파하려 들것이고, 그러다 보면 서서히 국가들 간에도 하나됨을 보일 것이며 그렇게 세계의 질서가 새롭게 정돈되다 보면 적절한 시기에 유럽의 특정 국가에서 적 그리스도라 불릴 만한 수장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때즈음에는 프리메이슨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수백, 수천 만명의 엘리트들이 필요한 자본과 필요한 지식 등을 제공하며 전 지구를 휘어잡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결론: 처음에 잡고 있던 방법론 자체가 비논리적이고, 황당하기 때문에 결론 도출도 매우 자의적입니다. 일단 요한 계시록을 독특한 문자주의로 해석하고, 그 해석한 내용을 반드시 실제 역사나 실제 인물 실제 사건과 연결시키려고 하다 보니, 자신들의 해석법에 사회 현상을 끼워 맞추기에 급급합니다. (기준과 맥락은 여전히 무시됩니다.)

그래서, 카톨릭과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복음주의 계열 목사님들은 무조건 프리메이슨으로 찍어 놓고 봅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프리메이슨이라고 비판했던 것도 객관적인 근거가 있다기 보다는, 그가 연설문에서 조금은 타 종교에 대해서도 유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 그저 쉽게 판단 내린 것에 불과합니다.

 

 

[WCC에 대한 간략한 설명]

120개국의 349개 교단의 여러 교회들의 하나됨과 공통된 증언과 기독교적 봉사와 섬김을 위한 교회들의 교제를 지향하는 단체가 바로 세계 교회 협의회입니다.

다양한 교단들이 서로 분열하기 바쁘고, 서로를 비난하고 있기 보다는 그 속에서 일치점을 찾아 나가고 서로 화합해 나가는 데 힘을 쏟자는 나름 좋은 취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주의자(세대주의자)들은 하나됨이라는 말만 나오면 일단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WCC(세계 교회 협의회)에 소속된 교단이나 목사님 등을 싸잡아서 프리메이슨으로 매도합니다. 왜냐하면 이 단체는 교회의 연합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에 대해서도 상당히 수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보니 역시 근본주의자(세대주의자)들의 눈에 거슬렸던 것입니다.

 

일단 근본주의자들이 정통 신학(존 칼빈이 주창한 장로교를 태동시킨 개혁주의적 신학)을 지지한다는 점은 알아두셔야 합니다. 칼빈의 신학은 상당히 탄탄하고, 한국 개신교에서는 상당히 주류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WCC 는 칼빈보다는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의 관점을 좀 더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칼 바르트의 신학은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분류됩니다.(칼 바르트의 해석은 좀 더 열려 있는 느낌이 강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배울 점이 많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기장’, ‘통합측에서는 이 칼 바르트의 신학에 상당히 열려 있지만 고신’, ‘합동등에서는 여전히 경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물론 성급하게 일반화시키는 건 위험합니다.) 이 부분은 설명할 말이 너무 많아서 생략하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칼빈주의 신학만 진리라고 고집하는 건 매우 위험한 발언이라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의 신학은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대학교 등에서는 이미 주류에 속해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 대학교는 아직도 칼빈주의노선이 강하지만 말입니다. 두 신학자 모두 세계적인 영향력을 미쳤고 각기 성경 해석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근본주의자(세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고수하던 칼빈주의 신학+자의적인 성경 해석법을 접목시켜서 이 그물망에 모든 교회와 사회 현상 목사님들을 걸러 내 봅니다. 그래서 걸려 들면 그 때부터 그들은 프리메이슨이 되고, 신세계질서를 주도하는 사탄의 자식으로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배타적이고, 앞 뒤 꽉꽉 막힌 주장들은 건전하게 진리를 수호하려 했던 수 많은 정통 신학자들<칼빈주의자>에게 오히려 악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이들이 양산해 낸 이상한 주장들과 그 틀 속에서 세상을 정죄하는 모습 속에서 기독교에 실망한 비기독교인이 범 지구적으로 굉장히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와 같이 실컷 정죄하고 나서 자신들은 진리를 수호했다고 기뻐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곤 했을 것입니다.)

 

P.S: 카톨릭을 어느 정도 수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중요한 이슈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 논의는 만만치 않은 어려움들을 수반합니다.

(일단 칼빈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정통신학을 지지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카톨릭을 인정하지 않는 추세입니다. 그 중에서도 극 보수에 가깝고, 사실 같은 스펙트럼에 두기 머쓱해질 만큼 이상한 주장을 많이 하고 있는 근본주의자(세대주의자)들은 카톨릭 이야기만 나오면 요한 계시록을 펼쳐 들고 짐승’, ‘음녀라고 외치기도 합니다. 카톨릭에 상당히 위험한 교리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소 근본주의자(세대주의자)들 처럼 무례한 입장을 취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승구 교수님, 이인규 권사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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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년 전에 이인규 권사님 책과 마틴 로이드 존스 책 뒤적거리면서 정리했던 글입니다.

더욱 나은 해석 접근법이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일단, 요한 계시록을 해석하는 방법은 총 5가지가 있습니다.

1.    과거적 해석법

2.    역사적 해석법

3.    온건 미래적 해석법

4.    극단적 미래적 해석법

5.    영적 해석법

 

이 부분은 한국 이단대책 위원회 이인규 권사님의 지식을 빌렸습니다. 간략하게만 언급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분류법을 같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교리적으로 안전함을 고수하는 목사님이시기 때문에 이 분의 의견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더 나은 해석법을 추천해 주시고자 한다면 언제든 알려 주세요)

 

1.    과거적 해석법

이 해석법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요한 계시록 본문이 AD 1세기 경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역사적인 내용을 기록한 것이라고 봅니다. 또는 AD 70(예루살렘 멸망 전) 근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즉 이미 지나간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EX) 요한 계시록 2~3장의 우상숭배는 로마황제를 숭배하라는 사건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요한 계시록 4~11장은 교회와 유대교 사이의 투쟁을 가르킨다고 해석합니다.

요한 계시록 13~19장은 주로 네로 황제 혹은 도미티안 황제 치하에서 일어났던 일을 가르킨다고 해석합니다.

바벨론, 짐승 : 로마제국으로 보곤 합니다.

 

이 해석법의 치명적 문제점: 요한 계시록이 지닌 예언적인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해석법입니다. 미래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국의 도래 등과 관련된 종말적 요소가 결여되어 있으므로 이 해석법은 문제가 많습니다.

 

2.    역사적 해석법

  이 해석법은 플로리스의 요아킴(Joachim)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요한 계시록은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대부터 요아킴이 생존하던 시대가지 서구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시간표적인 기록이라고 합니다.

특징: 이 해석법을 취하는 사람들은 적 그리스도, 바벨론은 로마제국, 교황과 동일시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음녀는 카톨릭의 마리아로 해석한다고 합니다.

(맥락도 없고, 기준도 없고, 근거도 없는 해석법입니다. 하지만 카톨릭을 말세 시대의 핵심 악마 세력으로 규정하는 해석법은 요즘 들어 매우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문제점: 요한 계시록에는 상징적인 해석을 해야 하는 부분이 많은데, 모든 걸 역사적 맥락에서 서술하려고 하다 보니 억지 주장이 많이 개입되어 있고, 논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허술한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요한 계시록을 역사 속의 시간표에 따라 순서대로 나열하면서 해석하려고 했던 시도들은 예로부터 수십 차례 있어 왔지만, 제대로 인정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그저 또 하나의 이단으로 전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3.    온건 미래적 해석법

요한 계시록 1장과 2~3장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내용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후한 종말의 시기와 관련이 있다는 견해입니다.

극단적 미래적 해석법과의 차이점은

1)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선 교회의 휴거를 반대합니다.

2) 요한 계시록 4장 이하를 유대인들에게만 국한 시키는 것을 반대합니다. 즉 이스라엘과 전체 교회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대주의자들의 특징이 이스라엘과 전체 그리스도인을 구별시킨 다는 것이었습니다. 인터콥도 BTJ 운동을 하기 때문에 이런 경향을 잘 드러냅니다.)

3) 요한 계시록 2~3장의 일곱 교회들이 교회사 전체를 가르키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4.    극단적 미래적 해석법

 

신약에 정면 위배되는 해석을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각종 이단 종파들이 좋아하는 견해입니다. 이 속에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의 입장이 녹아져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요한 계시록 13, 17장의 짐승은 역사의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라고 단언합니다.

 

온건 미래적 해석법과 극단적 미래적 해석법의 문제점: 다양한 천년 왕국론을 양산해 냄. 그리고 재림에 대한 통일된 견해가 없습니다. 상당히 세분화 되어 버리는 것이죠. 즉 이들은 장차 도래할 세상의 이야기를 요한 계시록과 연결시키려고 하다 보니, ‘천년 왕국을 실제로 도래할 왕국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 전천년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무천년설’, ‘후천년설이라는 다양한 견해를 양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뭐가 진짜인지 구분 자체가 모호합니다.)

(현재 한국의 장로교는 무천년론에 가깝고, 감리교는 후천년론에 가까운 편입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견해는 죽산 박형룡 교수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역사적 전천년설을 지지했었습니다.) -> 이 부분이 궁금하신 분은 말씀해 주시면 추가로 글을 남기겠습니다.

 

5.    영적 해석법

성경의 난해한 구절에 대해서는 거의 전부를 상징적이며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이들의 해석법에 따르면 요한 계시록은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사를 통해 전해져 온 선과 악의 투쟁에 관한 진리를 찾는 본문입니다.

 

문제점: 이러한 영적 해석법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666이나 144000명과 같은 숫자들이나 짐승과 같은 단어에 대해 임의적이고 주관적인 비유를 가능케 만들어서 각종 이단들을 양산해 냈습니다. (‘신천지등이 대표적이겠네요)

그리고 분명한 역사적 해석을 적용해야 하는 부분에서도 비유와 상징의 의미를 부여하려다 보니, 역시 균형감각을 잃은 해석법이 됩니다.

 

Swete 라는 신학자가 한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나는 전체로서 어떤 학파를 일방적으로 따르지 않고 모든 해석체계들과 접촉점을 갖도록 할 것이다. 나는 과거파에게서 당시 상황의 역사를 배우며미래파에게서는 장차 올 시대의 성취를 배우고이상주의에서는 기독교의 철학을 배우며역사파에서는 사건의 진행들이 어떠한 원리에서 적용되었는가 하는 예증을 배울 것이다.”

 

결론점: 요한 계시록의 해석법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가 있으나, 어느 한쪽 방법만을 수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즉 요한 계시록의 완전한 해석은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죄성과 불완전성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 우리는 온전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인격이신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사랑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숫자 하나, 단어 하나를 모른다 하여 구원을 못 받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겸손히 그 분이 비춰주실 때를 기다리며, 우리는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해석법을 견지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요한 계시록 해석 방법

 

요한계시록의 3가지 해석법

 

1. 과거주의적 견해 – 요한계시록 내용이 이미 3세기경에 모두 현실화 되었다

2. 미래주의적 견해 – 요한계시록 내용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미래의 일이다

3. 역사주의적 견해 – 과거나 미래에 국한되지 않고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대한 예언

 

역사주의적 견해를 좀 더 깊이 들여다 보기

1. 교회 역사적 견해: 요한계시록은 교회 역사의 주요 단계들에 대한 개략 혹은 개관이다

2. 연속적 역사적 견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환상들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면서 교회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견해

3. 영적 역사주의적 견해: 요한계시록은 초림과 재림 사이에 교회의 삶과 역사를 지배하는 원리들에 대한 설명이지 현실의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예언이 아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연속적 역사적 견해영적 역사주의적 견해가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받아 들여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연속적 역사적 견해는 옳지 않다고 반박하십니다.)

 

연속적 역사적 견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환상들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면서 교회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견해

 1) 6장 – 6개 인을 뗌, 8 - 7번째 인 뗌, 8~11장 – 7 나팔, 16장 – 7 대접

이 내용들이 교회에 순서대로 일어날 일이라고 봄. 따라서 실제 나라들과 역사적 사건들과 일대일로 매치된다고 봄. (ex. 9장이 무슬림 왕조가 교회를 침공한 사건)

 

2) 문제점

) 12장은 미래가 아닌 성육신 사건을 묘사하는 것이다.(벌써 맹점이 드러남)

) 마지막장(22)에 요한계시록을 인봉하지 말라는 명령이 나옴 “또 내게 말하된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22:10)

) 다니엘서와 비교 –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이라” ( 12:4) - 이 예언은 거의 5세기가 지난 후 일어남

) 500여년 후에 일어날 일들에 봉함을 명령하셨는데 요한계시록이 쓰여진지 거의 2천여년이 지난 지금 시각으로 보면 인봉하지 말라는 요한계시록의 명령을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하기엔 문제가 있습니다. 즉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시점과 그 이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즉시 적용될 내용들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입니다.

 

 

 영적 역사주의적 견해 (목사님이 지지하시는 견해)

1) 요한계시록이 어떤 상세한 연속적 역사적 과정을 가르치기 위한 책이 아니라는 견해입니다.

2) 요한 계시록은 초림과 재림 사이에 교회의 삶과 역사를 지배하는 원리들에 대한 설명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3)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을 포함한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록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4)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응시키는 것은 이 책의 영적 특성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봅니다.(수 많은 이단들과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이런 대응을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특징

 

1. 요한 계시록은 교회를 향해 기록되었습니다 ( 1:11)

교회를 돕고, 위로하고, 자극하고, 세우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2. 도덕적 권면이 있습니다 (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듣는 자”만이 아니라 또한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3. 요한 계시록은 계시의 책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특정한 일에 대한 통찰과 이해를 갖게 해 줍니다.

 

4. 요한 계시록은 상징과 표징을 사용하여 진리를 드러냅니다.

1) 시각적 상징 – 촛대, , 나팔, 대접, 짐승

2) 상징적 숫자 – 일곱 (54차례: 일곱 머리, 일곱 눈,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삼 년 반, 마흔두 달, 일백사십 사, ,

3) 요한 계시록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 13:18 666)-> 세대 주의자들은 글자 그대로의 해석을 고집해서 문제를 많이 일으킵니다.

 

4) 요한 계시록은 기계적이고 문자적인 정확성이 아니라 상징적 방법을 사용해 원리와 진리를 전달해 줍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상징이나 숫자를 기계적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이유

) 7: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중에서 인 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 마지막 심판이 임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의 머리에 인이 쳐지고 하나님의 백성은 안전하게 지켜질 것인데 결국 이스라엘 사람만 144,000명 구원 받는 것인가?

(‘세대주의자들의 해석 등에 의거하면, 144000명은 이스라엘의 12지파에서 각각 12000명씩 선발된다고 보므로, 그들의 해석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올바른 해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 따라서 4절에 나오는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로 보는 게 타당합니다. 그것이 144,000명의 유대인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늘에서 영화롭게 된 모든 영혼에 대한 묘사라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요한 계시록 7 4절에 나오는 144,000명의 이스라엘 12지파만 성령의 인침을 받는다는 내용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버리면 바로 5절 뒤에 나오는 전세계 모든 민족이 하나님 앞에 선다는 내용과 조화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배격할 수 있습니다.)

 

5. 요한계시록은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에게 교훈을 주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1) 요한 계시록은 흥밋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2) 요한 계시록은 호기심과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관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6.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1) 그들을 위로하고, 2) 위안하고, 3) 교훈을 주고, 4) 권면하고, 5) 지지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7. 요한 계시록을 읽을 대는 사려깊은 상징성이 녹아져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 이 책을 읽으면서 불건전하고 병적인 호기심을 갖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2) 현재 실존하고 있는 인물들과 사건들에 더 큰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3) 하나님이 온 세대를 지나 종말에 이르기까지 주님과 그 교회에 대해 가지고 계신 위대한 목적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개요

 

1. 1~3: 교회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 ( 1:20)

일곱 교회 이야기 – 1)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모든 교회 상태에 대한 묘사, 2) 오늘날 어떤 모임이든 그 안에는 일곱 교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존재

 

2. 4~7: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이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

4장 – 하늘에서의 위대한 장면

5장 – 하늘이나 땅에 능히 책의 인을 뗄 만큼 위대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à 주님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다. 주님만이 인을 뗄 수 있다.

6장 – 역사의 종말과 최후 심판

7장 – 구속 받은 자들의 놀라운 모습

 

3. 8~11: 주님 교회, 교회에 일어날 일들, 최후의 심판, 구속 받은 자와 멸망한 자들 (8장 전반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간구와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놀라운 장면이 묘사됨)

 

4. 12~14: “아들”이라고 표현된 우리 주님의 탄생에 대한 묘사, 마귀, 마귀가 권세를 준 짐승, 바벨론 같이 교회에 대적하는 원수들이 등장한다. 즉시 최후의 심판. 구속 받은 자들에 대한 놀라운 묘사

주의사항 – 더 깊은 차원의 투쟁, 즉 마귀와의 투쟁이 나오기 시작함

 

5. 15~16: 최후의 심판, 구속받은 자들과 최종적으로 멸망한 자들 사이의 구분

 

6. 17~19: 주님의 대적자들과 그의 구속된 백성에 대한 이야기

17, 18장 – 바벨론, 두 짐승과 추종자의 최종 멸망에 대한 기사

19장 – 백마를 타고 입에서는 검이 나오는 모습의 주님이 영광 중에 나타나심

 

7. 20~22: 마귀의 심판과 파멸, 이에 대비되는 교회의 최종적 승리, 영원한 영광의 도래,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성

2, 3, 4, 5, 6부에 반복적으로 최후의 심판과 구원받은 자들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나옴

 

이렇게 요한계시록을 7개의 섹션으로 분류한 뒤에 이중에서 2부부터 6부까지 반복해서 나오는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고난과 환란중에서 신앙의 순결을 잃지 않은 이에게 어떤 영광의 순간이 도래하는지와 반대로 사탄에게는 심판과 멸망이 오리라는 도식이 5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옴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설명해 주십니다.

 

결론

1.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와 마귀 및 그 권세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을 말해 주는 책입니다.

2. 목적 –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의 확실하고도 확정된 최후 승리의 이야기

3.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실제적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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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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