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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정의의 문제.....고민이 많이 됩니다.. 영화 [밀양]도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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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저서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에서 "인간사의 영역에서 용서의 역할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나사렛 예수였다"고 밝혔다. 더 나아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예수가] 이것을 종교적 맥락에서 발견했고 종교적 언어로 표현했다는 사실은, 이것을 엄격한 세속적 의미로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용서는 "행동에서 생겨나는 불가피한 피해에 꼭 필요한 교정책"이다. 그것은 "비가역성(irreversibility), 즉 자신이 한 일을 무효로 만들 수 없는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이에 반해 예측 불능에 대한 교정책은 "약속을 하고 지키는 능력에 있다. [용서하고 약속하는] 두 능력은 서로 짝을 이룬다.

 

그중 하나인 용서는 과거의 행동을 원상태로 돌리는 역할을 한다. 과거의 '여러 죄'는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모든 새로운 세대 위에 매달려 있다.

 

다른 하나인 약속으로 자신을 붙들어 매는 일은 미래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불확실성의 바다에서 확실성의 섬들을 세우는 역할을 한다.

 

확실성의 섬 없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종류를 막론하고 그 어떤 영속성은 물론 연속성조차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가 인간사에서 용서의 역할을 발견한 사람이라는 아렌트의 말이 옳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의 '발견'에 대한 그의 설명은 그리 정확해 보이지 않는다. 예수가 인간사에서 용서의 역할을 발견한 사람이라는 아렌트의 주장에는 고대의 이교도 윤리저술가들이 용서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전제가 있다.

 

다음 장에서 나는 그의 주장을 옹호할 것이고 고대 이교도 저자들이 용서를 찬미하거나 촉구하지 않은 것이 그저 우발적 행위였는지 따져 볼 것이다. 그러나 아렌트의 주장은 히브리성서의 저자들도 이 문제에서 고대 이교의 윤리저술가들과 다르지 않았다고 전제하고 있다.

 

히브리성서 저자들은 엇나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죄인 용서에서 드러난다고 거듭 선언한다. 앞서 우리가 여러 장에 걸쳐 살펴본 것처럼, 현대 아가페주의자들은 이 선언에 근거해, 하나님의 용서가 하나님 사랑의 여러 발현 중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일반의 전형이자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의 본보기가 된다고 추론했다.

 

하지만 히브리성서 저자들이 인간의 용서를 말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내가 아는 한) 누군가에게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고 명하지도 않는다. 예수가 나타나 사람들이 서로를 용서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신 것은 정말 새로운 주장이었다. 누가는 예수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한다.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 주어라. 그가 네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서 '회개하오' 하면, 너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누가복음 17:3~4). 이 명령을 놓고 서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며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상상된다.

 

 

정말 일곱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 것일까? 마태의 기록을 보면, 거듭해서 잘못을 저질러도 회개하면 용서해 주라는 말씀의 진의를 확인하고자 베드로가 예수에게 이렇게 묻는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예수는 과장된 대답을 하신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마태복음 18:21~22).

 

그러고 나서 예수는 비유를 하나 들려주신다. 어떤 종이 엄청난 빚을 주인에게 탕감받았는데 자기가 남에게 빌려준 소액의 빚은 탕감해 주지 않았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주인은 종을 엄중한 벌로 다스렸다. 예수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비유의 요지를 설명하신다.

 

예수의 가르침과 실천이 용서의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새로운 사건이었다는 아렌트의 주장은 옳았다.

 

그러나 그의 생각처럼 "끈끈하게 맺어진 작은 제자 공동체에서의 여러 경험"에 힘입어 예수가 그런 "발견"을 하게 되셨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예수를 그런 "발견"으로 이끈 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서로에 대한 우리의 용서가 이어져 있다는 그분의 확신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아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듯 하나님도 우리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사랑과 정의]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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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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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안: 교회 전통을 제대로 보는 데는 시간 거리가 필요합니다. '시간 거리(Zeitabstand)' 는 철학자 가다머(Hans-Georg Gadamer)에 따르면 무엇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더 잘 알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예수의 가르침과 능력을 보고서는 어디서 왔는가 물음을 던졌지만 곧장 누구의 형제, 누구의 오빠가 아닌가 하면서 자기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가다머-

 

 

예수가 누군지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에야 사람들이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2000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예수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몸담은 현실, 교회 현실은 정말 상상력으로 거리 두기를 하지 않으면 제대로 보기 힘들 거예요. 상상력이 없는 사람은 비판적 관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지식인에게 소명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동시대와 시대적 거리 두기가 아닌가 해요. 그렇지 않고서는 볼 수 없어요.

동시대와의 거리 두기가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얘기해 보지요.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근대를 다시 보게 되었어요.

그 이전에는 극히 소수만이 근대의 문제를 깨달았어요.

데카르트나 칸트를 보면 근대를 형성한 사람이면서도 근대의 문제를 동시에 본 철학자들이 아닌가 해요.

독특한 경우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큰 철학자라고 할 수 있지요. 근대를 형성하면서 그 한계를 벗어날 다른 면을 드러내지요. 그렇게 본다는 것이 쉽지 않아요.

​양희송: 현실의 교회 구조에서 일차적으로 거리두기는 누구의 역할일까요?

강영안: 신학자들이지요. 목회자는 현장에 워낙 깊숙이 투입되었기 때문에 동시대와 거리 두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요. 떨어져 있으면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못하는 거지요. 목회자들의 마음을 다해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면 상상력의 눈이 열리고 현실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는 눈이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와 달리 신학자는 교회의 구체적 상황에서 한 걸음 물러선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신학자들이 전체를 더 잘 볼 수 있어요. 그러나 현실 교회에서 받는 이익에 너무 익숙해져 버리면 그런 눈을 잃어 버려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게 현실이 아닌가 해요.

양희송: 우리 현실에서 그 과제가 만족스럽게 수행되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원인이랄까, 그 이유를 지적할 수 있을까요?

강영안: 글쎄요, 그것이 뭘까요? 신학자의 경우에는 두 가지가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는 신학자들이 대부분 교단 신학자라는 점이에요. 교단의 목사를 양성하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쏟고 있고 그로 인해 금전적인 이득이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교회 정치로 부터 희생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한 발을 빼고 볼 여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요.

두 번째는 신학자라는 본질적인 위치와 관계가 있습니다.

 

칸트가 지적하는 점인데 신학자들은 철학자들, 인문학자들과 달리 한 '기관'에 관련된 사람들이거든요. 그 기관이 교회인데, 일반 교인들과 교인들을 가르치는 목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요.

 

칸트는 지적했지요. 대중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고 목회자들은 가능한 한 그런 이익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일하기에 자신들이 원하는 수단이나 충고를 신학자들에게 기대한다고 말이죠. 신학자들의 연구나 발언도 교회 현실이나 사회문화적 현실과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관조하고 발언하기 보다는,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죠. 이것이 칸트의 진단이에요.

양희송: 신학자들은 매우 불행한 위치에 놓여 있군요? (웃음)

강영안: 신학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칸트가 지적한 또 다른 두 직업, 의대 교수와 법대 교수도 동일한 범주에 들어갑니다. 의과 대학 교수들은 의사들을 양성하는데, 의사들은 환자들과 연관되어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법대 교수들은 변호사나 판사를 키워 내고, 변호사나 판사는 고객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한단 말이죠.

중세 대학의 세 중심 대학, 중심 학부(faculty)인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는 각각 영혼의 질병, 사회 질병, 신체적 질병, 이렇게 모두 질병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니 대중의 이익과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밖에 없어요.

칸트는 이제 그런 비판적 역할을 좁게는 철학자들이, 넓게는 인문학자들이 감당해야 한다고 봐요.

칸트가 말년에 저술한 <학부간의 논쟁> 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

 

 

양희송: 상당히 재미있는데요.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법학이나 의학은 여전히 전문가 집단으로서 사회의 공적 역할 수행자로 여겨지는데, 신학은 종교 분과 혹은 특정 종교의 성직자 양성기관으로 축소되면서 그만큼 공적 영역에서 사라지고 있잖아요.

강영안: 배제되었죠. 그건 계몽주의 문화의 소산이에요. 사실 계몽주의 이전까지만 해도, 아니, 계몽주의가 한참 유행할 때만 해도 유럽에서는 공적 역할을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했거든요.

 

​정치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높았고 먹혀 들어갔습니다.

​칸트가 활동한 18세기 말만 해도 프로이센 제국에서 경건주의파 출신 목사들의 목소리가 엄청 컸어요.

 

빌헬름 2세 치하에 종교 검열이 생기고 종교 문제에 심한 억압이 있었지요. 지금은 신학자나 목회자들의 역할이 공적 영역에서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나 언론인의 의견이 더 중요해졌지요. 영적 문제, 정신적인 문제는 대부분 심리적인 문제로 환원되고 정신의학자나 정신분석가, 심리상담가가 신학자나 목회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지요. 서양의 상황에서 보면 이런 것들은 기독교의 세속화가 초래한 현상입니다.

양희송: 공적 영역에서 사회적 비판과 방향 제시 기능을 하려면, 교단 신학자들이 공공의 영역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할까요, 아니면 주로 종교적 영역에 관심사를 국한시키고, 기독 철학자나 기독 인문학자들이 공적 영역에 기독교 담론을 제공하는 구조로 힘을 기울여야 할까요?

강영안: 둘 다 가능하리라고 생각해요.

 

현실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기독 인문학자들과 기독 사회과학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 좀 더 확대한다면 기독 학자들이 교회와 사회와 문화 전반에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기독교 전통과 세속 문화 전통을 모두 고려한 뒤 나오는 온당한 목소리여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신학교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연세대나 이화여대 같은 대학 신학부가 있거든요.

그 경우 왜 교회에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가? 이 경우에는 교회와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이 또 문제입니다.

교단 신학의 경우, 교회와 너무 밀착해서 동시대와 거리 두기가 불가능하고, 교단 신학과 관계없는 일반 대학의 신학자들의 경우, 교회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설득력을 발휘할 공통의 바탕(common basis)를 잃어버리지 않았나 해요.

​.........

동시대와 거리를 두려면 교회에 문제가 있더라도 교회에 몸을 담아야 해요.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이고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분명히 있으면서, 동시에 거리 두기를 해야 현실 교회를 제대로 볼 수 있고 말씀에 합당한 교회를 위해 몸부림 칠 수 있죠. 그렇지 않다면 빈들의 소리에 그치겠지요.

신학자나 기독 학자들은 삶의 전반적인 문제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고 믿어요.

 

삶 전반에 대한 신학적 검토나 철학적 논의를 시도한 예를 지난 세기에서 찾자면 두 전통이 있어요. 하나는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카이퍼 전통(Kyuper tradition)이에요. 아브라함 카이퍼와 네델란드 중심으로 한 이 전통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등 삶의 모든 분야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논했어요.

          -아브라함 카이퍼-

 

​카이퍼 이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를 중심으로 도이어베이르와 폴른호븐과 그 후예들이 이 작업을 했어요. 경제학 분야에서는 봅 하웃즈바르트, 기술 철학 분야에서는 반 리슨과 스후르만, 에술 분야에서는 한스 로크마크르 등을 들 수 있을 거예요.

다른 하나는 영국에서 등장한 '급진정통주의'(Radical Orthodoxy)를 들 수 있겠지요.

그레이엄 워드(Graham Ward)나 존 밀뱅크(John Milbank)등이 대표적인 학자입니다.

이들이 내건 기치는 주목할 만합니다.

카이퍼나 도이어베이르트 전통은 사실 철학을 중심으로 경제학, 미술, 기술철학 등 삶의 모든 문제를 기독교적으로 성찰하자는 것이고 신학이 토대가 아니에요.

오히려 철학이 토대에 있죠. 그런데 급진정통주의는 신학 자체가 모든 영역을 성찰해야 한다고 봐요. 그러니까 성경 연구나 기독교 전통 연구에 머물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영성 등 전통적으로 신학적 성찰에서 제외된 영역 전체를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이 점에서 카이퍼 저너통과 급진정통주의는  비슷한 데가 있어요.

...

- [묻고 답하다] 에서 -​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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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송: 서구적 개인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공동체 강조가 쉽게 정당화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적 근거도 쉽게 찾을 수 있고요. 그러나 그런 이야기에서 늘 간과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개체성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살아남아 있었다면, 서로 다른 것을 포용해 주는 태도인 '관용', 요즘 똘레랑스(Tolerance) 라고 부르는 그것이 교회의 주요한 특징으로 나타나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공동체 이야기를 하면 '다양성' 보다는 '동질성'만 잔뜩 강조하고, 포용력이나 인내심은 점점 잃어 가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강영안: 재미난 지적입니다. 그것은 공동체성의 변질이라고 봐야겠지요. 성숙한 개인성이 전제되어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이지, 그것이 없으면 그냥 집단이지요.

​동질성을 강조할수록 집단성이 강화됩니다. 타자성이, 심지어는 이질성이 어우러져서 색깔을 낼 때라야 진정한 공동체가 가능합니다.  (집단성(collectivity)는 공동체(community)와 다르다는 논의가 있었음)

기독교 신앙으로 제한해서 이야기하자면, 에베소서에서 강조하듯, 한 하나님,한 성령, 한 주님을 고백하면서도 색깔의 차이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관심이나 직업이나 처한 상황은, 죄가 아닌 한 '선의 씨앗(seed of goodness)'이 될 수 있고, 선을 확장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면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수용해야 진정한 의미에서 공동체입니다.

다른 색깔이나 다른 모양을 배제해 버리고 완전히 동질화한다면 그것은 폭력이지요. 사실 그런 의미의 공동체는 생명을 자라고 번성하게 하기보다는 질식시키고 죽인다고 봐요.

공동체의 강조는 살림의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죽임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없지 않겠어요?

​양희송: 1970년대 이후 한국 개신교가 급속하게 규모를 키우던 때의 전형적인 전도 방법이나 집회 방식은 한 가지 모델을 빈도를 늘리거나 강도를 높이면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영리> 같은 전도 책자로 단순하고 정형화된 내용을 복음의 핵심으로 전도해 왔고, 대형 집회나 부흥회 등은 주로 사람들을 압도하는 스케일로 개최하고 정서적 일체감이 강하게 고양되도록 했지요. 그런 것이 반복적으로 오랜 기간 축적되어 오늘날 복음주의 내 대중 정서의 밑바탕을 이룰 뿐 아니라, 공동체 내부를 규율하는 방식과 바깥을 대하는 태도에 뿌리 내린 것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이런 진단이 틀리지 않다면 어떻게 기독교 신앙 안에서 개체성을 중요한 특질로 재발견하고 그것을 고양시킬까 하는 질문이 아주 크게 다가옵니다.

강영안: 시간 순서로 보면 개체성 확립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그 개체는 개체로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해 가야 합니다.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개체를 성장시켜 주는 요소이기도 하구요. 이렇게 본다면 개체성 강조에만 머물 게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행동하고 사고하는 데까지 성장하도록 도와야죠.

​그런데 개체성도 여러 색깔, 여러 모양이 있고 여러 위치에 있을 수 있지요. 그런 것이 어우러져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텐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신앙고백이죠.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공산주의자에게 '공산주의 선언(Communist Manifesto)' 이 있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신경(Creed)' 즉 신앙고백이 있어요. 모든 기독교 전통을 하나로 묶어 주는 공동의 신앙 고백으로 '사도신경'(Apostles' Creed)' , 아타나시우스 신경(Athanasian Creed)',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Nicene-Constantinople Creed)' 이 있습니다.

 

 

다 같은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기독교에는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가톨릭도 있고, 그리스 정교회도 있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도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도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칼뱅을 따르는 개혁파(Reformed) 교회가 있고, 루터교, 침례교, 감리교, 오순절 교회도 있지요. 서로 다르지만 이 모든 교회를 하나로 묶는 공통의 요소는 신앙고백입니다.

신앙고백의 일치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서로 다르게 형성되고 성장했지만 하나의 교회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희송: 신앙고백의 중요성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더라는 것이 교회사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신앙고백은 같은 듯하나 구체적인 사안에서 입장이 달라지면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정치적 사안이나 문화적 취향에서 견해가 갈라지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를 믿는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로 비약하고 밥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서로 다른 예수를 믿는 것 아닌가?" 하고 반문하게 됩니다.

​강영안: 지역이나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전통이 형성된 것, 색깔이 다르거나,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거나, 오른쪽에 있거나, 왼쪽에 있거나 누구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가톨릭에 대해, 정교회에 대해 형제자매라 이야기해야 하지요. 그런데 현실을 돌아보면 우울한 일들을 많이 봅니다. 한 교회 안에서도 최근 몇 년 사이 여러 문제에 대해 입장의 양극화를 경험했잖아요.

이라크 파병을 할 것이냐, 노무현 정부를 어떻게 봐야 하느냐, 이명박 정부는 어떻게 봐야 할 거냐, 촛불 시위에 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 등, 아주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교회 안에서 심한 양극화를 보였습니다. 한 공동체라고 하면서 구체적 사안에서 의견 차이가 발생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통적으로는 교회에 의견 차이가 생기면 공의회(Council)를 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 등을 열어서 의견 차이를 조정하고 하나의 교회로 나아가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다릅니다. 사회적으로, 신앙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부딪힐 때 함께 심사숙고할 자리가 없습니다. 노회와 총회는 사실상 일반 성도와 무관한 회의가 되었거든요. 목사와 장로들 모임이고, 성도들이 관심 두고 묻는 물음은 안건으로 올라가지 않아요.

어떤 교회도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교회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숙고하고 결정하지 않아요.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큰 난관이나 결함이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생각해요.

 

 

내가 '공교회성'(Catholicity)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보는 까닭이지요. 공교회성은 내가 속한 지역교회뿐만 아니라 이 교회와 저 교회가 다 주 안에서 하나의 교회라는 거죠.

 

나는 장로교 고신교단에 속하는데, 장로교 통합, 장로교 합동 등 국내의 여러 장로교단 간에 공동의 문제를 놓고 숙고할 수 있는 채널이 없습니다.

 

연합체가 없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공교회성의 관점을 가지고 연합체들이 활동을 하는 건 아니에요. 한국처럼 복잡한 일이 자주 일어나는 나라에서 성도들이 어떤 입장을 취할지 방향 제시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공교회적인 의견을 모으고 행동을 유도하는 절차가 없기 때문에 이라크 파병이라든지 촛불 시위 등을 접하면서 교회 안에서 젊은이들과 기성세대의 견해 차이가 생각보다 훨씬 커지지 않았나 해요.

양희송: 공교회성과 관련해서 제가 흥미롭게 생각한 것이, 공교회성은 내부적으로는 전체 교회를 대표하는 체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로 집약되고, 대외적으로는 '공적 책임'(Public Responsibility)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로 귀결된다고 보는데, 교구체제(Parish system)을 '공간으로 분할하는 경우'와 '사람으로 분할하는 경우'에서 공적 책임을 이해하는 방식이 꽤 차이 나는 것 같습니다.

 

공간에 따라 교구를 분할하고, 구심력이 강한 감독제(Episcopal)를 택하는 가톨릭, 성공회, 감리교 등은 목회활동 외에 교구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목회적 관심 범위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에 반해 회중교회(Congregationalism) 전통인 침례교, 오순절 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가 가진 교회론은 '신자들의 공동체'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만을 목회의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이러다 보니 교단 난립 문제도 가세해서 한 건물에 교회가 서너 개 들어오는 경우도 생깁니다.

여기서는 어떤 그리스도인이 교회 바로 옆에 산다 해도 우리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아니면 목회 대상으로 삼으면 안되지요. 혹은 아무리 멀리 살아도 우리 교회에 출석하면 목회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회중교회적 전통에서는 '교회 안'과 '교회 바깥' 이라는 구분이 가톨릭과는 다른 의미에서 뿌리 깊게 존재합니다. 이들은 '교회 바깥'에 관심을 표명하는 방법은 언제나 '멤버십 확장', 즉 '선교' 아니면 '전도'로 정당화되어야 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그것이 '구제' 또는 '사회봉사'도 종종 '선교'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적 관심, 정치 참여 등을 놓고 이것이 '선교냐, 아니냐' 라는 논란이 나옵니다.

'공교회성의 회복'이 모든 교단이나 교회에서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강영​안: 기본적으로 개신교는 종교개혁 이후 무수한 분열을 통해, 엄밀한 의미의 공교회성을 상실했다고 봐야겠죠. 저는 여러 점에서 종교 개혁을 지지하고 그 전통 안에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열이 개신교의 최대 비극이라 생각해요. 그런데 한국 교회를 보세요. 각 교단 총회와 교단 연합기구인 한기총이나 NCC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기총이나 NCC에서 공교회성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해요.

칼뱅은 '보이는 교회' 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나눌 때 보편성을 갖는 교회는 비가시적 교회,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생각했거든요. 과거에서 미래에 걸쳐 있고, 전 세계에 확대되어 있는 모든 교회가 결국은 하나의 공교회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죠.

그런데 공교회성을 가톨릭에서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주교체제'로 의미를 부여하지만 사실 '공교회성'은 '우리가 한 분 주님을 모신다'는 것이 가장 기본입니다.

장로 교회든, 루터교회든, 순복음 교회든 '한 주님을 모시는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는 의식이 현재 한국 개신교회에 결여되어 있고 부족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묻고 답하다] 에서 -​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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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안: 목회자는 신학교에서 일상적 삶과 관련된 지식을 얻고, 그런 방식으로 성도들을 훈련시킬 수 있도록 훈련받아야 해요.

적어도 총론적인 훈련은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드리기가 민망하지만 제가 아는 한 이런 훈련을 하는 신학교가 한국에 한 군데도 없어요. 전통적인 신학 분류 방식에 따른 교육이 아직도 신학교 교육을 지배하고 있어요.

기독교 신앙이 세상의 사상과 문화, 과학과 예술, 정치, 경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폭넓게 읽고 생각하고 공부할 수 있는 신학교가 없습니다.

신학 교수조차도 이야기를 나눠 보면 기독교 세계관으로 통합적 사고를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신학 교수들은 전공을 벗어나 통합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면서 각 학문과 삶과 신앙을 연결시키는 사고를 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 아닌가 해요.

 

그렇기 때문에 신약을 가르쳐도, 구약을 가르쳐도, 교회사를 가르쳐도 단편적이고 일면적인 것만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교회사는 교리사 중심이거나 교회 사건사 중심에 그치거든요. 주로 교회 지도자 중심이고요. 그렇게 가르치니까 교회사에서 노동자의 역할이 뭐고, 의사의 역할이 뭐고, 간호사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런 직업이 언제 생겨났고, 왜 생겨났는지, 왜 화가들은 근대에 와서 일상적 삶의 세계를 그리게 되었는지 관심이 없지요. 왜 공회나, 교황이나, 사건이나, 지도자만 중심에 놓고 교회사를 가르쳐야 합니까?

사실 이 내용을 가지고 2007년 5월 <목회와 신학> 대담 때 풀러 신학교 총장인 리처드 마우(Richard Mouw)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평신도 사역을 위한 커리큘럼을 어떻게 운영하느냐 물었더니 풀러신학교에는 '평신도 사역 연구소' 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곳에서 연구한 것이 커리큘럼에 반영되는지도 물었어요. 실상 그렇지 않다고 하더군요.

전통적인 네 가지 분야, 즉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이 주류를 이룬다는 뜻이에요.

이런 분류는 현대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가 도입한 방식입니다.

겨우 200년의 역사를 가진 방식인데, 지금은 거기에 '기독교 윤리학', '기독교 상담학' 등을 좀 더 붙여서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이죠.

 

사실 이건 학문적인 분류방식이지,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 커리큘럼 분류로는 적당하지 않아요.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신학교는 대학에 있는 신학대학, 곧 Divinity School 또는 School of Theology 가 아니라, 그야말로 각 교파의 신학교 곧 세미나리(Seminary)인데, 단어 뜻을 보십시오. '세미나리'는 라틴어 세미나리움(Seminarium), 곧 '모판'에서 온 말이에요. 세멘(Semen)은 씨를 뜻하지요. 볍씨나 고추씨를 뿌려서 키워 내는 모판, 이것이 세미나리의 어원이에요.

신학교는 이렇게 보면 일종의 '양성소'예요.

목회자를 키워 내는 양성소. 그런데 이걸 '신학대학원'이라 부르니 무슨 대단한 학문을 하는 곳으로 착각하는 거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슐라이어마허 이후 근대 신학교육은 마치 학자를 키워 내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커리큘럼을 그렇게 짰지요. 신학 교육의 목적, 방법, 과정을 전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키만큼 성숙한 사람, 온전한 사람(엡4:13)으로 자라가고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섬기도록 훈련할 수 없습니다.

-[묻고 답하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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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안: 지금 말한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죠. 한기총이나 NCC가 한국 교회를 대변하는 기관으로 지목되고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은 1980년 이후 상황이지요. 교계연합기구의 등장 이전에는 각 교단이나, 대표적인 기독교 지도자가 그 역할을 상징적으로 했지요.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이나, 고신이나 합동 측에서도 그런 분들이 계셨지요. 그분들이 돌아가신 뒤에는 한기총이나 NCC가 마치 한국 교회를 대변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어요.

이같이 한국 교회를 대변하는 것은 그야말로 목사들의 모임이지요. 장로들도 별로 관여하지 않고 더욱이 일반 성도들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양희송: 그리고 가톨릭과 달리, 개신교 연합기구들은 그 구조상 아래로부터 위임의 절차가 일관되게 연결되지 못하고 중간 중간 연결고리가 다 끊어져 있기 때문에 상징적 수준을 넘어서는 실질적 대표성을 말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강영안: 가톨릭의 경우에는 위에서 위임을 하지요. 교황에서 추기경으로, 추기경에서 대주교로, 대주교에서 주교로, 주교에서 각 본당 신부로 내려옵니다. 일종의 위임이고 명령이며 권면 방식으로 내려옵니다.

 

그러나 사실 개신교는 그런 구조 자체도 없잖아요. 위아래 소통할 수 있는 통로 자체가 없으니, 정부에서도 편의상 한기총이나 NCC를 통로로 삼아 업무를 진행하는 것이 쉬웠지요.

목사들도 나름의 통로로 교단의 목소리를 내봐야 들리지 않으니까 연합의 이름으로 교회의 의견을 발표하고 정치적 입장을 취해 온 것이 사실이지요.

얼마 전에 방송국에서 기독교에 비판적인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어요. 한기총을 중심으로 거세게 항의했더니, 방송국에서 그 프로그램 마지막에 한기총 대표의 의견을 이야기하도록 했다고 해요. 그런데 나오지 않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의견을 들었어요. 전혀 설득력 없는 이야기였다지요.

그런 상황을 보면서 "목사님들이 다 선수가 됐구나" 라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목사님들이 모두 선수가 되어 공도 차고, 운동장을 누빈다는 말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적 목소리를 내는 주요 역할을 목사님들이 맡으려 해요.

마치 현장에서 뛰는 선수처럼, 대단한 착각입니다.

 

목사님들은 선수가 아니라 성도들을 키워 내고 양육하는 코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축구로 말하자면 벤치에 앉아서 코치 일을 보아야 해요. 선수로 뛰는 것은 성도들이에요. 경제나 정치나 문화 영역은 그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갖춘 성도들이 해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개혁주의 관점에서 목사들의 영역을 중심에 그렸죠.

그러니까 정치, 경제, 사회, 언론, 문화 영역 등 각 분야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 공동체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일이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 성도 그룹이 해당 분야에 의견을 내고, 필요할 경우 법 개정을 요구하거나 시민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목사들은 성도들을 선수로 키워서 전문 분야로 내보내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교회의 개념이 너무 넓기는 한데, 그때 교회는 목사만 말하는 건 아니거든요.

- [묻고 답하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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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 대전 동안,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은 사회나 정치적 문제를 다룰 때 교회가 택할 가장 훌륭한 전략으로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한 경험주의적 접근법을 추천했다.

                  -윌리엄 템플-


특히 그는 교회가 "어느 특정 정책"에 대해서도 거만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의 경험은 앞으로 나아갈 특정 방식을 취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정책은 언제나 정치와 경제 세계의 실제적인 인과관계에 대해 전문적 결정에 의해 좌우된다. 이 문제에 관해 그리스도인이 이기심의 유혹에 더 저항하지 않는 한, 그가 내린 판단의 신뢰도는 무신론자의 그것보다 나을 게 없다."


템플은 기독교의 원리나 진리 선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은 특정 상황을 경험하고 얻은 그 상황에 관한 지식은 공공 정책을 가장 잘 결정하는 데 긴요하다는 뜻이었다.


최근, 에버릿 쿠프는 사실은 제쳐 두고 결론부터 쏟아 내는 일이 1980년대 미국 공중위생국장으로 재직하던 기간 내내 자신을 괴롭혔다고 호소했다.


재직 초기에 쿠프는 임신 중절권을 반대한다는 확고한 개인적 견해를 밝혔다가 좌파에게 비판을 받았다.


이후에는 에이즈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인도적 처우를 주장했다가 우파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는 이에 대한 의견을 밝히면서 이 책이 말하는 끈질긴 우연성에 호소했다.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학문 탐구 정신의 결여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신학적 원리에 의지하면 사실은 그리 정확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진보주의자들이 무조건 반사적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무조건 반사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보수주의자들도 마찬가지임을 깨달았습니다."


-마크 놀 [그리스도와 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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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송: 제 고민과 제안을 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국 개신교를 바라보는 데 쓰여 온 '교계(church society)'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개신교인들의 생각을 그동안 소위 '교계 지도자(church leader)'들이 대변해 왔습니다.

 

특히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나 NCC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같은 교계연합기구가 그런 역할을 해왔지요.

 

 

 

 

그런데 이런 구조가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습니다.

사립학교법 개정 논란을 예로 들면, 과거에는 한기총이나 NCC 말을 듣고 '한국 개신교는 이런 입장이구나'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교계 대표가 한국 개신교를 대변하고, 또 대표할 수 있다고 보는 패러다임이었습니다.

이 논란 때 한기총과 NCC 둘 다 사학법에 반대 입장을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사운동 단체에서는 사학법 찬성 입장을 발표했거든요.

기독교사들은 당시 교계 정서에 역행하더라도 그 법이 사립학교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리고 성도들의 절대 다수는 학부모들인데, 이 층에서도 사학법 찬성 입장이 압도적으로 컸습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사학 운영자가 교계 지도자의 주축을 이루고 있고, 그들이 삭발식을 거행하는 등 강경한 반대 입장을 드러내면서 마치 한국 개신교 전체가 사학법 반대 입장인 것처럼 알려졌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목회자가 한국 교회를 과잉 대표하는 경우라고 봅니다.

그것은 목회자들 스스로 감당 못할 과도한 짐을 지는 불행한 일이고, 성도들은 자기들이 선택하지 않은 대표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여론 왜곡 현상을 겪는 악순환을 초래합니다.

저는 '교계' 패러다임에서 '기독교 사회(Christian society)' 패러다임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는 기독교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과 그룹의 한 부분이고, 이들은 목회 전문가로서 분명한 입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교육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면 교육 전문가, 사학 운영자, 교사 집단, 학부모 집단 등 한국 개신교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그룹 중에서 교육과 관련 있는 이들의 발언을 먼저 경청해야 한다고 봅니다.

앞서의 사학법 논란을 제대로 다루려면, 이런 여러 집단을 취재해서 그들이 같은 입장이라면 '한국 개신교는 이런 단일한 입장'이라고 보도할 수 있겠지만,만약 의견이 엇갈리면 '개신교 내에서도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고 알려야 옳습니다.

저는 목회자들이 전문적인 목회 영역을 넘어서, 자기가 대변할 수 없는 주제나, 위임받지 못한 의사에 대해 과잉 대표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교회를 목회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상정한다면 전혀 갈등이 없을 수 있어요. 그래서 앞서 말씀하신 개혁주의 전통이 '기독교 사회' 개념에 잘 부합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럴 경우 큰 원이 기독교 사회가 되는 셈인데, 그러면 그 핵심에는 무엇이 와야 하는지 궁금한 겁니다.

저는 그 핵심에 하나님 나라와 복음에 대한 헌신이 자리 잡아야 마땅하다고 보는데, 이 자리에 어떤 물리적 기관이 놓일 수 있는가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영역을 비워 놓는 것이, 그러니까 그 영역이란 하나의 기관으로 대변될 수 없다고 설정해 놓는 것이 개신교적 신앙고백에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묻고 답하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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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배신은 예정인가? 자유의지인가?

 

43page 부터 시작

 

 아무래도 유다의 배신이 던지는 골치 아픈 신학적 질문은 예정과 자유의지에 관한 것입니다.

문제 상황을 설정하기 위해 극단적인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인간의 자유가 배제된 채 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행동인가?” 아니면 반대로 유다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에 따른 것이지 하나님의 예정과는 무관한 것인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 주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고 둘 다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도 간단치 않습니다 .

 

만약에 전자라면, 유다에게는 도덕적 책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도덕의 전제는 자유입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없다면 그의 행동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A를 선택할 수도 있고, B를 원할 수도 있는데, A를 결정할 수 있어야 도덕이 성립됩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장발장과 같은 처지에 있다고 해서 빵을 훔치지 않으며, 신부의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새롭게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에서 정당방위를 제한적이나마 인정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는 극한적 궁지에 내몰린 경우, 예컨대 상대방이 살인의 의도로 신체적 위협을 가할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상대의 신체와 생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정당방위로 보고 무죄로 간주합니다.

만약에 유다의 행동이 자신의 자유의지 없이 필연적인 하나님의 예정을 수행한 것이라면, 그는 무죄가 될 것입니다.

 

 만약 후자라면, 유다에게 도덕적 책임을 부과할 수 있지만, 신앙에 치명적 과오가 발생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하여 바울은 벅찬 감동으로 외칩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 ( 11:36, 새번역). 아브라함 카이퍼의 명제처럼,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땅과 영역은 한 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정을 어떻게 이해하든 간에, 하나님이 창조 세계 전체를 포괄적으로 섭리하고 계신다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유다의 행동이 전적으로 그 자신에게만 있다면, 하나님은 구속사의 정점인 십자가 사건에서 그저 한 손님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신이 어느 신학적 캠프에 속해 있든지 간에, 예정과 자유의지 중 어느 한쪽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하면서도 자유의지를 버리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얼마간 약화되더라도 예정을 강조하는 것이지 자유의지 자체를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정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각시킨다고 해서 하나님의 예정을 전혀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결국 어느 쪽에 서느냐, 그리고 양자를 어떻게 조정할 것이냐가 관건이지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행동은 하나님의 예정이면서도 자유의지가 개입된 것으로 보아야겠지요. 

 

예정과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을 야기하는 성서의 본문은, 대표적으로 구약에서는 선악과와 출애굽기의 바로, 신약에서는 유다일 것입니다.

세 텍스트 중에서 이 주제에 관한 가장 풍부한 본문은 출애굽기의 바로입니다. 하여, 저는 바로의 행동에 대한 출애굽기의 서술을 중심으로 예정과 자유의지 혹은 필연과 자유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이를 유다의 경우에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유다에 관한 본문과도 조화와 일치가 있어야겠지요.

 

다만, 솔직히 먼저 밝혀 두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저는 그리스도인이자 목사라는 것입니다. 신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모두를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자유에 따른 책임을 강조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출애굽이나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뜻과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행동에 대한 최종적 책임은 유다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지 맹신이나 미신은 아닙니다. 유일무이한 창조주 신앙을 갖고 있는 이로서 하나님의 에정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또 도덕이란 인간의 자유에 기반을 둔 것이니 유다의 행동은 그 자신의 선택이므로 책임은 그 자신에게 있다고 보는 것은 신앙을 별개로 치더라도 합리적인 사유입니다.

 

다른 하나는, 저는 예정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예정론에 대해 공부할 겸해서 스프라울(Sproul) [알기 쉬운 예정론]을 사서 펼쳐보았습니다.

이것이 예정인지는 몰라도 예정을 정의한 대목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예정이란 우리의 최종 목적지, 즉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에 의해 천국이나 지옥이 결정된 사실을 의미한다.”(각주) 물론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모순되지 않는다”(각주) 고 밝히고 있지만, 저는 예정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을 흔쾌히 수용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실을 허용하시기로 결정하셨다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그것을 미리 정하신 것이다.” (각주). 그렇다면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것을 두고 누가 그 결정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요?

해서, 저는 C.S 루이스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저는 전적 타락의 교리를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볼 때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스스로 타락했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깨닫지 못할 것이고, 경험적으로 볼 때에도 인간의 본성에는 선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각주). (‘전적 타락에 대해 고민해 보기)

 

 

물론 스프라울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를 역설 혹은 신비로 설명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마치 모든 것을 결정하시는 것으로 그분의 주권과 예정을 결정론에 가깝게 해석하는 것은 못내 아쉽습니다.

 

그럼, 바로의 강퍅함에 대한 출애굽기로 들어가 보도록 하지요.

먼저 성서는 그의 마음이 강퍅하게 된 것의 주체가 하나님과 바로 모두라고 언급합니다.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였다” (7:13,22 ; 8:15 ; 9:35)는 표현과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 (9:12 ; 10:20,27)는 표현, 이렇게 두 가지 표현 양식이 공존합니다.

바로는 모세의 요구와 신하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제 스스로의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해서 노예로 붙잡아 둡니다.

하나님 역시 그런 바로의 행동을 예측하시고 모세에게 일러 주실 뿐 아니라 버젓이 예상하시면서도 연달아 재앙을 일으키십니다.

주체로서 하나님은 바로 자신의 고집을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각주)

 

 

 

하나님과 바로, 양자 모두가 바로의 강퍅한 마음에 주체라는 설명을 주목해야 합니다.(각주).

신과 인간이 동일하게 행동의 주체임을 출애굽기는 묘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를 모순 없이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는 어느 하나도 없앨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설명의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 좀더 성경적이고 합리적입니다.

 

저는 종종 이런 비유를 들곤 합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장미에는 인간의 자유라는 가시가 돋쳐 있고, 인간의 자유라는 장미에는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가시가 있다고요.

그래서 예정을 강조하다 보면 자유가 가시가 됩니다.

그렇다고 그 가시를 죽 밀어 버리면 아무런 위험도 없지만, 장미 본래의 아름다움은 많이 사라질 것입니다. 장미꽃을 사랑하는 자는 그 날선 가시마저도 장미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사랑의 한 요소로 감내해야 합니다.

그럴 때, 가까이서 보면 둘 사이의 갈등이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한데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운 것입니다.

 

바로의 완고한 마음의 책임은 궁극적으로는 그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의 마음이 강퍅해서 내 백성을 내보내라는 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집을 꺾지 않고 거절할 것이라고 야헤 하나님은 여섯 번이나 모세에게 주지시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만약’(if)이라는 단서를 단 가정법 형식으로 세 번이나 말씀하십니다.(8:2 ; 9:2 ; 10:4) “네가 만일 그들 보내기를 거절하고 억지로 잡아두면”(9:2) 번역본에 따라 4 23절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네 번이 됩니다.

 

 

이라는 조건문은 바로의 행동이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라 그가 마음먹기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다시 말해 바로의 거절은 미래의 가능성이지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굳이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경고를 할 필요가 없을 테고, 그런데도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찾아간다면 그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기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재앙을 현실화한 것은 바로 자신입니다. 바로가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낸다면 제국을 침몰시킨 그 엄청난 열 가지 재앙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행동에 따라 하나님의 대응 또한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명백히 거부하고 거역했습니다.

 

사실 바로의 선택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고 당연하기까지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남자만 60만명이었습니다.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하면 2백만에서 3백만에 육박할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이집트를 떠날 때 함께 따라나온 그 밖의 다른 민족들도 많았습니다.(12:38).

이는 고대 이집트 제국의 노동력의 절대 다수를 차지합니다. 이런 그들이 한꺼번에 모두 빠져 나간다면 제국의 운명은 불 보듯 뻔한 것입니다. 멸망입니다.

그러니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이집트를 떠나는 것은 절대 허용할 수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미국, 아니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꺼번에 한순간에 모두 떠난다면 그 후 초래될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 보낼 수 없습니다.

 

거부한 바로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은 열 가지 재앙 뿐 아니라 완악한 대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9:18, 새번역).

그러니까 스스로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긍휼히 여김을 받지만, 마음을 악하게 먹고 끝까지 미련스럽게 고집을 피우면 그 강퍅한 마음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신다는 겁니다.

레온 모리스의 해석이 참 좋습니다. “이 구절은 물론, 성경 어디를 살펴봐도 하나님이 스스로 강퍅하게 되지 않은 자들을 먼저 강퍅하게 하셨다고 나와 있는 곳은 하나도 없다.” 하여, 마음을 강퍅하게 한다는 말은, 하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더욱 꾸역꾸역 엇나가는 길을 걷는 이들의 영적 실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간곡한 설교는 도리어 듣는 청중의 마음을 더욱 완강하게 만듭니다.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하였어도 그들이 행치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말로 그들에게 응하게 하였느니라 하라” (11:8).

인간의 마음은 예레미야의 말처럼 어떤 만물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거짓되고 썩고 부패하였습니다.(17:9).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애타는 구애와 경고는 죄악된 본성과 성품을 충동하여 더욱 못된 짓을 일삼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인간은 청개구리처럼 반응합니다. 하지 말라는 짓은 더 열심히 잘도 합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바로에게, 그리고 예레미야를 통해서 유대에게 말씀하신 것은 재앙을 내리기 위한 명분 쌓기가 아니라 구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호의를 거절하고 스스로 무덤을 팠습니다. 유다에게도 그리스도의 호의가 없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많았습니다.

유상섭의 [설교를 돕는 분석 요한복음](규장)에 따르면, 요한복음에만도 제자 중 하나는 자신을 믿지 않으며 마귀라고 주의를 주셨고(6:64, 70~71), 유다가 돈을 착복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재정 유용을 그칠 것을 기대하고 기다리셨으며(12:6),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유다를 염두에 두고서 다 깨끗하지는 않다고 하셨습니다.(13:10~11).

또 세족 후에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 것이라고, 즉 배반할 것이라고 예고하셨고(13:18), 더 나아가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 것이라고 공개적이며 직접적인 경고를 계속하셨습니다.

 

마지막은 예수님이 빵 한 조각을 찍어서 유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부분은 논란이 많은 본문입니다. 그 때 주님은 유다에게 희한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13:27, 새번역). 언뜻 보기에, 유다복음의 주장처럼 예수님이 유다가 배신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으므로 그 일을 하라는 것, 그래서 유다의 배신은 예수의 요청이라는 유다복음의 논리가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육체라는 굴레를 벗어던져 구원을 이루게 해 달라는 예수의 요청이라는 것입니다.

 

허나 유다복음의 해석과 달리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의 진의는 유다의 결단을 촉구한 것입니다. 식사를 할 때에 음식을 한 조각 건네는 것은 우정의 표시입니다.(각주) 유다의 배신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선의와 호의를 베푸는 것은 유다의 심중에 품고 있는 음모를 중지할 것을 따뜻하게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끝내 예수와 그분의 우정 어린 호의를 거절했고, 이를 요한복음은 그 순간 사탄이 그의 마음에 들어갔다고 표현함으로써 유다의 결정이 무엇이었는지 보여 줍니다.

 

*모든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를 활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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