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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부탁해] 에서 발췌

 

-국정원의 댓글 조작 사건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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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늦은 오후 서울 명동에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다. 거리 양편의 노점들은 하나둘 불을 밝히고 하루를 시작한다. 성당 들머리엔 '명동성당 종합계획 1단계 신축공사' 표지판이 붙어 있다.

귀에 익은 노랫가락이 어디선가 들려온다. <잘할걸>. 버스커 버스커다.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찾아오면은 난 다시 그대 생각에..."

성당으로 향하는 철제 계단을 따라 성당의 연대기가 공사 가림막에 펼쳐져 있다. 1984 요한 바오르 2세 방문. 1987 인권,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 글귀 밑 미사 사진 속에 청년 박종철의 영정이 있다. 그렇다. 87년 6월이 있었다. 함성과 구호와 최루탄의 시간. 지금 우리는 그해 6월이 놓은 길 위에 서 있다.

 

 

"그때는 우리가 완벽했을지라도 지금은 닿을 수 없어..."

며칠 전 여론조사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2012년 하반기, 정말 이상했어. 야권 후보들을 비난하는 트윗들이 주말에 사라졌다가 월요일부터 급증하곤 했거든. 트위터 순위 사이트를 봐도.... 국정원 수사를 보니 왜 그랬는지 알겠더군.

컴퓨터 앞에 종일 앉아 있다 퇴근하는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들도 보통 샐러리맨들처럼 '불금'(불타는 금요일)과 주말이 기다려졌을 것이다. 그들은 댓글 올리고 리트윗(재전송)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문제는 그렇게 '평범한' 일상에 있었다.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도대체 우리가 왜 이렇게..."

1987년 6월 한국 사회는 대통령 직선제만 하면 민주주의가 이뤄질 거라 믿었다. 일상까지 민주주이 원칙에 따라 재편되지 않는 한 민주 정치는 요원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정보기관 직원, 군 사이버사령부 요원의 업무 내용이 상식적이지 않다면 정상적인 사회라 부를 수 없다는 사실도 예감하지 못했다.

그 책임이 정치인들에게만 있을까. 준비된 대통령은 준비된 시민이 있을 때만 유효하다. 안타깝게도 우린 준비되지 않았고 깨어 있지 않았다. 우리가 깨어 있었다면 우리의 친척이나 대학 동창인 그들이 선거 개입으로 의심받을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이었다면 과연 거부할 수 있었을까. 고통스럽지만 인정해야 하는 사실도 있다.

"조금만 더 잘할걸, 조금만 더 참을걸..."

그 해 6월 우린 서둘러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자기 자리로의 복귀를 조금 미루고 한국 사회, 한국 정치의 미래를 놓고 토론을 벌였어야 했다. 민주주의를 어떻게 발전시킬지 묻고 답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상식과 일상을 만들어가야 했다.

권력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 어떤 이유로도 국가기관이 시민들의 여론에 검은 손을 뻗으려 해선 안 된다는 것을 서로의 가슴에 새겨 넣어야 했다.

 

입으론 노동자, 농민을 말하면서도 다들 자기 앞의 생에 초조해 했다. 구호 소리만 높았을 뿐 생각을 나누지 않았다. 어쩌면 그 철저하지 못함에 보복당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상처가 덧나고 고름이 터진 뒤에야 '철저 수사'를 다짐하는 총리 담화문에서, 국정원 방어에 급급한 여당 의원들의 모습에서, '구국의 결단'과 '아버지 대통령 각하'를 거론하는 발언록에서 상식의 퇴행을 확인하고 있다.

"조금만 더 잘할걸, 조금만 더..."

현실은 홍상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통속적이고 비루하다. 그래도 개선하려는 의지까지 접지는 말아야 한다. 젊은 공무원들이 허접한 글들을 리트윗하면서 안보 업무라고 믿는 현실만큼 소름 끼치는 일은 없다.

이제 의식의 일대 변화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때 대학생이었던 40대, 넥타이 부대였던 50대, 60대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매번 비슷한 곳을 맴도는 회로에서 벗어날 순 없는 걸까. 착잡한 마음으로 외국인 관광객들이 점령한 거리로 들어갔다. 세상은 상점과 노점의 불들로 환했지만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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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2013년 9월 서울고법이 전 국정원 차장과 심리전단장에 대한 재정신청을 받아들였다. 이어 검찰 수사에서 국정원 댓글과 관련된 트위터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의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국정원 직원들이 댓글 활동을 공무원의 정상적 업무로 여기는 현실이라니.... 착잡함을 달래려고 명동성당 언덕에 올랐다가 87년 6월을 기억해냈다. 성당 앞 빌딩 숲 위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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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경향신문 기자 -> 2007년 중앙일보 입사 논설위원 -> 현재 JTBC 로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듯 합니다~

 

[정의를 부탁해]의 저자 '권석천'의 여정이다.

 

그의 짤막하지만, 굵직한 사설들을 읽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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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열린책들)는 194X년 알제리 도시 오랑에서 벌어지는 전염병과의 전쟁을 그리고 있다.

 

4월 16일 죽은 쥐들이 쏟아져 나오고 불안감이 엄습하지만 시 당국은 '죽은 쥐 수거'만 지시한다. 방역소가 나서야 한다는 의사 리유의 요청에 방역소장은 이렇게 답한다.

 

 

"명령이 있어야 그렇게 하지." 메르시에가 말했다. .... 시 당국은 자진해서 무엇을 해볼 생각도 전혀 없었고 아무런 대책도 없었지만 논의를 위해 일단 회의부터 소집하기로 했다." (26쪽)

2015년 6월 대한민국, 메르스에 대한 저우의 초기 대응이 실패한 데 대해 세계보건기구(WHO) 합동평가단은 "투명한 정보 공개가 늦었기 때문" 이라고 지적한다. '카톡'소리를 타고 병원 명단과 메르스 확산 지도가 전파되는 상황에서 정부는 왜 의미 없는 비공개 원칙에 집착한 것인가. 명령이 없었기 때문인가.

"조치들은 허술했고 여론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욕심에 상당 부분 포기한 것 같았다.... 실제로 우려할 만큼 충분히 규명되지는 않았으며, 따라서 시민들이 냉정을 잃지 않으리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71쪽)

 ​'익히지 않은 낙타고기를 먹지 말라.' 예방수칙은 극소수 미식가를 위한 것이었다.

​병원, 시민들과 정보를 공유하며 체계적인 방역 매뉴얼로 불안을 불식시켜야 할 골든타임에 정부는 괴담 대응 매뉴얼을 펴들었다.

 

관료들은 감염 확률이나 치사율 같은 통계수치들을 나열하며 '합리적 태도를 잃지 말라'고 훈계했다.

"이렇다 할 신념도 없이 공부 집행하듯 했었지요. 그들(관리들)에겐 상상력이 부족합니다. 재앙에 맞설 수준들이 아닙니다. 짜낸 해결책은 고작 코감기 수준에 불과해요." (161쪽)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박근혜 정부의 대책엔 '서민의 삶'이 빠져 있었다.

 

 

 

세종시와 충북 오송에서 일하는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 실무자들은 대도시 시민들의 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고위관료들과 정치인들은 승용차 뒷자석 시트에 기대 정부 청사와 국회, 고급 식당 사이를 오갔다. 병원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어쩔 수 없이 밀접 접촉하며 들숨 하나, 날숨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시민의 불안이나 분노 따위는 그들의 안중에 없었을 것이다.

 

고령, 중증 질환이 아니면 괜찮다는 투의 발표는 또 무엇인가. 고령자와 중증 질환자는 어찌돼도 할 수 없다는 뜻인가.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병균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머지 것들, 예를 들어 건강함, 성실함, 순수함 등은 이를테면 의지, 그러니까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의지의 산물이죠." (324쪽)

그렇다. 병균과 부패, 관료주의가 자연스러운 것이다. 경각심과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금세 그런 것들에 잠식되고 만다. 관료들이 위만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대통령은 세월호 사건, 정윤회 문건, 성완종 리스트를 거치며 스스로를 여론에서 '자가 격리'시켜 왔다.

 

그 결과 메르스는 궁궐 밖 먼 곳에서 풍문으로 떠돌았다. 권력 내부의 폐쇄주의가 사태를 더 곪아터지게 했다는 혐의를 벗기 힘든 상황이다.

 

"나는 성인들보다는 패배자들에게 더 많은 연대의식을 느낍니다. 나는 영우주의라든가 성스러움 따위에는 취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327쪽)

메르스가 폭로한 건 공감이 빠진 채 공회전하는 권력의 누아르다. 권력 운용 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위험은 확대 재생산된다. 페스트가 변두리에서 시작됐듯 돈 없는 자, 힘없는 자들부터 희생될 것이다.

메르스는 대통령과 정부를 향한 경고다. [페스트]의 마지막은 암울한 묵시록에 가깝다.

"페스트균은 결코 죽지도 않고 사라져 버리지도 않으며... 인간들에게 불행도 주고 교훈도 주려고 저 쥐들을 잠에서 깨워 어느 행복한 도시 안에다 내몰고 죽게 하는 날이 언젠가 다시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96쪽)

-[정의를 부탁해]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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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이승만,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 정권을 옹호했던 역사가 잘 기록되어 있다. 기만과 권모술수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노련함이 잘 들어 있는 사설들이 많다. 또한 [조선일보]가 왜 '노무현'을 그토록 싫어했는지도 잘 알 수 있는 유시민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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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민주화 운동가를 싫어한다.-

[조선일보]는 노무현을 싫어한다. 미워한다. 혐오한다. 사설과 기사를 보면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수없이 많은 이유가 있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노무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민주화운동 전력을 가진 사람을 싫어한다.

 

[조선일보]는 박정희를 민족의 지도자로 숭배하며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필요악이 아닌 역사의 필연으로 규정한다.​ 전두환의 쿠데타와 양민학살까지도 대놓고 지지했다. [조선일보]의 시각으로 보면 노무현은 '입으로 민주화를 떠드는 시끄럽고 무책임한 선동가'에 속한다.

아무 근거없이 [조선일보]를 험담하는 게 아니다. 지난날의 [조선일보]가 한 독재 찬양 행적을 보면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럼 먼저 지난날 행적부터 잠깐 보자.

 

사례가 하도 많아서 대표적인 것만 본다. 더 많은 사례를 확인하고 싶은 분들은 강준만이 쓴 [권력변환-한국언론 117년사]를 보시기 바란다.

[조선일보]는 5.16 쿠데타와 유신독재를 지지했으며 아직도 박정희를 민족의 영도자라고 찬양한다.

 

박정희와 방일영이 술동무라 그랬을 수도 있고, 서로 생각이 같기 때문에 술동무가 되었을 수도 있다. 다음은 박정희 쿠데타 사흘 뒤인 1961년 5월 19일 [조선일보] 사설이다.

<혁명의 공약과 국내외의 기대>

군사혁명은 이런 불행한 여건 하에서 보다 나은 입장을 마련하기 위하여 감행된 것으로서 이것이 거군적인 단결과 함께 국내외적인 찬사와 지지를 받게 된 소이가 실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5.16 쿠데타에 이어 1969년 3선개헌을 지지했던 [조선일보]가 1972년 10월 17일의 유신 쿠데타를 지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민주적 기본질서를 완벽하게 파괴하고 종신집권 체제를 구축한 뒤 새로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에게 [조선일보]는 연일 화려한 꽃다발을 바쳤다. 다음은 1972년 12월 28일 [새 역사의 전개 - 제 8대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을 경하한다]는 제목의 사설이다. 1934년 일본 왕의 생일 축하 사설 [봉축천장절]을 떠오르게 하는 명문장이다.

지난 4반세기에 걸쳐 지속되어온 냉전 속에서의 동족상잔과 남북 결원의 민족사에 10.17 구국의 영단으로 종지부를 찍고 평화통일의 새 역사를 위하여 정초한 박정희 대통령을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 취임토록 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미덥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무엇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5,6,7, 대나 대통령을 역임한 그를 또다시 환영하는 것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그의 영도력 때문이다. 그의 높은 사명감과 뛰어난 능력과 역사의식의 정당성 때문이다. 더욱 전망적인 민족통일의 사명감과 구구중흥의 신념에 불타는 영도자를 가졌다.

 

중앙정보부가 종종 비판적 언론인들을 지하 취조실에 끌어다 매운맛을 보이는 한편, 기자들의 검열거부운동과 권력비판을 봉쇄하기 위해 광고주를 협박해서 광고를 싣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동아일보]의 숨통을 조였던 시대에 [조선일보]는 번영의 토대를 구축했다.

 

조선일보사는 1969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최초로 일본 이토추 상사의 민간차관 400만 달러를 연리 6%에 들여와 코리아나 호텔을 지었다. 은행금리도 연 25% 를 넘던 그 시절로서는 엄청난 특혜였다.

[조선일보]는 훗날 군사반란과 내란행위로 처벌받은 전두환 일파의 1979년 12.12 쿠데타를 지지했고, 군부의 언론자유 탄압을 옹호했으며, 1980년 광주학살을 왜곡 보도해 역사의 진실을 감추었다.

1979년 12월 20일 사설에서 "군의 이러한 입장과 결의가 새삼 천명되었다는 것은 전국민의 공감과 지지를 받아 마땅"하다고 군사 반란을 예찬했다.

[조선일보]는 또한 신군부의 언론통제와 여론조작을 노골적으로 옹호했다.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인 협력이었다.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선우휘는 1980년 1월 30일 일본 [산케이신문]과 회견했다. [산케이신문]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앞장선 극우파 신문으로 유명하다. 이 회견에서 선우휘는 당당하게 말했다.

언론규제는 없는 것이 낫다. 하지만 한국에서 언론의 제약이 가해져도 하는 수 없는 상황이 있다. 4.19에서 5.16까지의 1년은 어떠했는가. 언론의 자유와 책임이 전혀 양립되어 있지를 않았다. 하룻밤 새 모든 신문이 정부에 대해 비판적으로 나서게 되고 1년 내내 연일 조석간을 통틀어 정부를 두들겨팼다. (....) 그 사태를 한국의 언론이 심각하게 반성하지 않고 5.16에 의해 언론규제를 받게 되자 이번에는 언론의 자유를 붙잡고 '슬픈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너무도 감상적인 처사이다.

​[조선일보]는 광주민주화 운동을 '폭도'들의 '난동'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신군부가 광주를 피바다로 만든 직후인 1980년 5월 28일 사설에 다음과 같은 거짓말을 늘어 놓았다.

지금 오직 명백한 것은 광주 시민 여러분은 이제 아무런 위협도, 공포도 불안도 느끼지 않아도 될, 여러분의 생명과 재산을 포함한 모든 안전이 확고하게 보장되는 조건과 환경의 보호를 받게 됐꼬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 비상계엄군으로서의 군이 자제에 자제를 거듭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광주항쟁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은 군부의 힘을 바탕으로 정치 권력을 찬탈하려 했다. 1980년 8월 21일 전군지휘관회의가 충성서약을 하고 전두환이 최규하를 축출하고 유신헌법에 따라 선거인단을 집합시켜 권좌에 오르자 [조선일보]는 즉각 '영웅 만들기'에 나섰다. 8월 23일과 28일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은 사설을 내보냈다.

국민 일반은 크게 안도와 고무를 간직했을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 (...) '8.21 군 결의'는 이러한 국민의 기대와 신뢰를 한층 더 공고히 뒷받침하고 보장하는, 일찍이 없었던 국가 간성들의 담보의 표징이다. 건국 이래 모든 군이 한 지도자를 전군적 총의로 일사분란하게 지지하고 추대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그러한 점에서 '8.21군 결의'는 또한 역사적으로 깊은 함축을 간직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우선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을 온 국민과 더불어 축하하며 그 전도에 영광이 있기를 희원해 마지 않는다.

(...) 전 대통령의 취임으로 바야흐로 새시대 새역사는 개막되고 있으며 국민들은 전 대통령 정부에 새로운 소망과 기대를 걸고 (...)

 

전두환이 1987년 4월 13일 이른바 '호헌선언'을 통해 5공헌법에 따라 대통령 자리를 노태우​에게 물려주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을 때도, [조선일보]는 "현행 헌법에 따른 당초의 단임 공약조차 제대로 이행할 수 없는 시간적, 상황적 위기에 봉착할 우려가 짙게 깔려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며 맞장구를 쳤다.

[조선일보]는 '1등신문'이 아니었다. 1980년도 이 신문의 매출액은 161억 원이었다. [동아일보](265억원), [한국일보](217억원)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이 끝난 1988년에는 [조선일보]가 매출액 914억 원으로 [동아일보](885억원), [한국일보](713억원)을 앞질렀다.

 

조선일보사가 받은 특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월간조선]이다. 전두환은 언론통폐합 조처를 통해 제 마음대로 매체를 없애고 만들었다. 예컨대 1980년 [월간중앙]이 폐간된 시점에서 조선일보사는 [월간조선]을 창간했다.

이런 [조선일보]가 1981년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운동에 뛰어들었고 1987년 6월을 아스팔트 위에서 보낸 노무현을 반길 리 없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영도자로 찬양한 [조선일보]가 보기에 노무현은 '역사적 정통성'이 없는 인물이다.

-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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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밤의 대통령' 방일영

 

그런데 방일영이 '밤의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은 건 사실이다. 앞서 인용했던 한홍구의 글에 그 사연이 나와 있다.

 

그런 칭호를 내린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절대권력자 박정희였다. '밤의 대통령'이 의미하는 바도 전혀 다르다.

방일영은 박정희의 가까운 술동무였다. 군사반란으로 갑자기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요정에 가보면 방일영은 화술로나 주량으로나 늘 좌중을 휘어잡았다. 박정희가 보기에 자기에 대한 마담이나 기생들의 대접은 깍듯하기는 해도 거리감이 있었지만 방일영에 대해서는 대접이 극진하면서도 정감이 넘쳐났다.

 

                        -젊은 시절 방일영 -

 

긴 방일영은 술이 거나해지면 동석자들의 지갑까지 털어 기생들에게 듬뿍 돈을 쥐어주었다니 누군들 마다했을까? 나이는 박정희가 다섯 살 위였지만 술집 출입의 경력으로 보나 여자들 다루는 솜씨로 보나 방일영은 '촌놈' 박정희보다 한참 위였다. 박정희는 자신을 '대통령 형님'이라 부르는 방일영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팔자가 좋은 사람'이라며 부러워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낮에는 내가 대통령이지만 밤에는 임자가 대통령이구먼" 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좋게 이야기하면 당대의 풍류객이라는 것이고, 좀 진하게 이야기하면 최고의 '오입대장'이라는 것이다.

 

조선일보사가 펴낸 방일영의 전기에 "권번 출신 기생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사람이 바로 방일영"이란 이야기까지 버젓이 나오는 것을 보면 박정희가 방일영을 그렇게 부른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후 1987년 6월항쟁까지 40여 년 동안 우리 언론은 권력의 혹심한 탄압을 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광신적 반공주의와 군대의 폭력을 무기 삼아 언론자유를 목졸랐고, 전두환 정권은 날마다 보도지침을 내려보내 신문과 방송 편집자를 무위도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입을 가젓스나 생벙어리 행세를 하여야 하엿스며 할 말은 만헛스나 호소할 곳이 업섯"고 "죽으라면 말업시 죽는 시늉을 하지 안흐면 안 될 환경에 노혀 잇섯"던 시대라고 말하지 않는다.

[디지틀조선일보]에 올라와 있는 회사 소개를 보라.

 

1960년 이후는 [조선일보]의 본격적인 발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명 칼럼니스트들이 [조선일보]를 무대로 활약을 했으며, 이를 통해 [조선일보]는 오늘날의 명성에 토대를 쌓았습니다. 이후 사회의 문제점을 정확히 전달하고 비판하는 기사, 그리고 세계와 국내의 동향을 정확하게 파악한 각종 기획사업 및 행사로 성가를 높였습니다.

방응모가 [조선일보] 복간사에서 내비친 변명, 그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없는 이 회사 소개는 [조선일보]의 정치적, 사상적 정체성을 증명한다. 여기에는 1960년대 이후 [조선일보]는 탄압을 받은 흔적이 없다. "군사독재 정권에 결탁해서 알랑거리고, 특혜 받아 가지고 뒷돈 챙겨서 부자가 되었다"면, 민주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당연히 사죄를 해야 한다. 궁색한 변명이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모든 것을 당당하게 했고, 그래서 지금도 너무나 당당하다.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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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노무현 대통령이 2001년 6월 7일자 [미디어 오늘] 이영태 기자와 나눈 인터뷰에서 그의 '언론관', '조선일보관'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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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는 좋은 언론과 나쁜 언론이 있다.

정당을 나눌 때 보수와 진보로 구별한다.

그러나 이를 나누기 전에 정당은 정통성 합리성 신뢰성을 갖춰야 하며 이는 언론도 마찬가지다.​

언론이 기본적으로 합리적이고 정당한 방법으로 보도하는가,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가, 사실의 취사선택에 있어 합리적 균형을 유지하는가, 일관된 관점을 견지하는가 등이 중요하며 이 원칙을 지키면 좋은 언론, 합리적 언론이라 할 수 있다.

언론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고 공론화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형성하는 만큼 정확한 사실과 가치 있는 보도를 해야 한다.

정치인을 비판하기에 앞서 스스로 과거를 고백하고 사죄해 겸손하고 품위 있는 언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언론이 달라지면 정치도 달라지고 국민도 달라진다.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이론이 공론화 과정을 거쳐 사회적 통념이 됐을 때 법과 제도를 바꿀 수 있는데 공론화와 통념에 기여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며 언론을 통해 변화의 계기가 마련된다.

​도대체 언론이 비판하는 실업자 문제, 탈북자인권, 의약분업 등에 대한 대안이 뭐냐고 묻고 싶다.

언론개혁은 사주의 소유지분 제한, 편집권과 인사권 독립이 우선이며 언론간의 경쟁은 보도의 품질로 이뤄져야 한다.

언론사가 배송 시스템의 기득권이나 우위를 갖고 경쟁하는 것은 문제이며 공동배송제 등이 필요하다.

앞으로는 광고주로부터의 독립도 큰 문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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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월 유신 ~ 6월 항쟁 : 직접적 언론통제와 종속적 유착관계

 

독재권력이 국민의 주권을 박탈한 시대였기 때문에 언론이 사회적 권력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정치권력은 언론시장 신규 진입을 봉쇄하고 취재와 보도의 자유를 제한했으며, 언론인에 대한 협박과 테러를 자행하고 보도와 편집에 직접 개입했다.

협조적인 언론사에 대해서는 이윤 추구의 기회를 열어주되 권력의 나팔수가 되기를 거부하는 언론사에 대해서는 경제적 기반을 공격했다.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폐합, 보도지침은 이 시기의 권언관계를 증언하는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종속적 유착관계는 전두환 정권의 몰락이 분명하게 예고되었던 6월 항쟁 전야에 가서야 비로소 동요의 조짐을 보였다.

 

 

2) 6월 항쟁~2001년 1월:선택적 상리공생과 제한적 대립

6월항쟁의 승리와 더불어 선거를 통하지 않고는 정권을 창출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

독재시대의 종속적 권언유착은 종말을 고했다. 권언관계는 대등한 상리공생으로 발전한다. 양측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만큼 정치권력은 유력 언론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했다.

김영삼 정부가 언론사 세무조사를 유야무야 처리한 것은, 정치권력이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독자적인 사회적 권력으로 언론이 성장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언론사는 자기의 입맛에 맞는 정치권력이 탄생하도록 적극적으로 국민의 의사 형성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적 상리공생은 안정성이 약하다.

다수 국민의 여론이 정치권력에 비판적일 경우 언론은 이윤과 사회적 권력의 확대를 위해 정치권력과 제한적 대립각을 연출한다.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양김 혐오증 유발(87년)과 노골적인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92년)를 했던 유력 언론사들이 이들의 집권 후반기에 가한 대정부 공격은 대등한 상리공생이 얼마나 불안정한가를 보여준다.

김대중 정부가 2000년도에 정기 세무조사를 하지 않는 등 집권 초기 3년 동안 지난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했던 유력 언론사와의 대립을 회피한 것은 소수파 정권이라는 약점과 경제난 등 불리한 환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권세력으로서 선택적 상리 공생의 수혜자가 되려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3) 2001년 1월~현재: 선택적 상리공생의 일시적 붕괴

2001년 1월 김대중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 이후 상황은 1987년 이후 약 15년간 계속되어온 권력과 언론의 선택적 상리공생과 제한적 대립관계가 일시적으로 무너진 과도기다.

김대중 정부는 유력 신문사와의 상리공생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고, 합법적 수단인 세무조사를 통해 언론사의 물질적 토대와 사주들의 특권을 공격하고 신문고시를 부활시켜 신문시장의 불공정 경쟁행위를 규제하고 나섰다. 그러나 구속된 유력 신문사 사주들은 보석으로 풀려났다.

 

부활한 신문고시는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언론개혁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동력과 국민의 지지를 상실했다.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의 선택적 상리공생이 어떤 식으로 되살아날지 알 수 없다.​

 

-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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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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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10월 유신 이후 민주화운동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일으켜 민중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의 민주화운동은 1987 6월 민주항쟁의 승리와 더불어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은 다수의 국민이 원하면 평화적, 합법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 우리의 민주주의는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 하지만 아직 성숙하지는 않았다.

 

민주적 제도가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에 맞는 생각을 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성숙한 민주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민주주의는 제도와 행태, 의식의 복합물이다.

물론 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1987년 가을 여야 정당들이 합의하고 국민이 승인한 제도의 틀 안에서 작동해왔다.

그 제도의 틀을 ‘1987년 체제라고 하자. 1987년 체제는 민주화 이전부터 존재했던 낡은 의식과 문화와 결합해 우리 민주주의의 성숙을 더디게 했다.

 

1987년 체제는 특정한 제도와 의식과 행태의 결합이다. 여기서 제도의 핵심은 대통령중심제와 5년 단임 규정, 결선투표가 없는 선거법,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다. 이 제도는 지역주의라는 낡은 의식, 동원정치라는 후진적 문화와 결합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한국적 특성을 만들어냈다.

 

 

 

-1 3김의 시대, 대통령 5년 단임규정, 국회의원 소선거구제-

 

1987년 체제는 현행 헌법과 선거제도를 만든 정치 지도자 ‘13의 동상이몽과 이해타산이 만든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 5년만 하고 나가는 데 합의했다. 대통령 단임 규정은 25년의 군사독재로 말미암은 정치적 인사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들은 그 취지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헌법 제 128 2항에 임기를 늘리거나 중임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을 할 경우 개정 조항은 현직 대통령에게 적용하지 않는다는 안전장치까지 넣어두었다.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모두 결선투표제는 도입하지 않고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채택한 것은 ‘13의 기득권을 지키고 정치적 사행심을 충족시키는 방안이었다.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하면 전국 평균 득표율이 높은 정당보다 특정 지역에서 몰표를 받는 정당이 유리하다. ‘13은 각자 대구, 경북, 부산, 경남, 호남, 충청지역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결선투표를 배제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면 1차 투표 순위가 어떻게 되든 양김 가운데 한 사람과 노태우 후보의 맞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노태우는 그것이 두려웠다. 김종필은 결선투표까지 갈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야권 단일 후보 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으며 표가 잘 나뉘기만 하면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6월 민주항쟁도 4.19 혁명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권력주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재야와 학생운동 세력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을 이루기 위해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조직하는 데는 유능했지만 그 승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 능력은 없었다.

거리시위에 참여해 민주주의 정치 혁명의 본대를 형성했던 시민들은 ‘13이 합의한 1987년 체제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알지 못했다. 결국 6월 민주항쟁의 후위였던 야당의 두 지도자가 사실상 모든 것을 결정할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1987년에 개정한 현행 헌법에 큰 문제가 있는 아니다.

권력구조 관련 조항을 제외하고 보면, 현행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분명하게 보장한 민주적 헌법이다.

 

 

 

-새로 개정된 헌법에 투영된 6월 민주항쟁의 성과-

 

우리 헌법은 국민의 저항권을 인정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명시했다. 10조부터 37조까지 신체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노동3권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비롯한 시민의 기본권을 명확하게 보장했다.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국회와 사법부의 권한을 대폭 확대해 권력의 분산과 상호견제를 강화했다.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부활시키고 법관의 독립성을 높였으며 헌법재판소를 설치했다.

 

최저임금제를 명시하고 성장, 안정, 적정한 소득분배, 독과점 폐해방지, 경제민주화를 위해 국가가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었다. 시각에 따라 비판할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헌법은 민주주의 선진국의 헌법에 견주어 크게 손색이 없는 훌륭한 헌법이 되었다. 나는 이것이 바로 헌법에 투영된 6월 민주항쟁의 성과라고 본다 .

 

 

 

-‘양김 분열, 노태우 당선-

 

1987 10 27일의 헌법 개정 국민투표에 78%의 유권자가 투표했고 93%가 찬성했다. 12 16, 1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무려 17년 만에 대통령을 자기 손으로 뽑게 된 국민들은 기쁨에 들떴다. 하지만 내게 이 선거는 끔찍한 악몽이었다.

나는 양김이 후보 단일화를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후보 선출방식을 둘러싼 줄다리기 끝에 김대중 씨가 추종자들을 통일민주당에서 탈당시켜 평화민주당을 창당했지만 어떻게든 대선에는 한 사람만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대중 총재가 좀 더 훌륭한 사람인 만큼 최악의 경우에는 그가 양보를 할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다. 후보 단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야인사와 대학생들이 양당 당사를 점거해 농성을 하면서까지 단일화를 요구했지만 양김은 끝내 거부했다. 평민당에서는 이른바 ‘4자 필승론을 퍼뜨렸다. 객관적으로 보면 로또 당첨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두 지도자는 각자 출마해 끝까지 선거를 치렀다. 야당이 분열되었고 재야가 분열되었으며 국민도 결국 분열되었다.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유효표의 36.6%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는 28%,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27.1%를 획득했다.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의 득표율은 8.1% 였다. 유신체제와 제5공화국을 같은 세력의 정권으로 보면, 55.1%의 유권자가 정권교체를 지지했는데도 전두환 정권이 연장된 것이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민주화를 이루어놓고서는 결국 12.12 군사반란과 광주학살, 5공화국 강권통치와 권력형 부정부패의 제 2인자를 대통령으로 뽑았으니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김대중의 후회, 이인제의 의도치 않은 선한 역할-

 

김대중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때 후보 단일화를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김영삼은 노태우, 김종필과 손잡고 민주자유당을 만들어 보수정권의 대통령이 되었다.

김대중은 4수 끝에 겨우 대통령이 되었고 유신본당김종필과 권력을 분점한 탓에 소신대로 국정을 운영하지 못했다. 후보 경선에서 패배하고서도 독자 출마를 해서 무려 500만 표를 분산시켜준 이인제 후보가 아니었다면 김대중 후보는 이회창 후보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인제 씨는 선한 의도가 있어야만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삶의 역설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경선탈락-탈당-신당창당-독자출마로 이어진 그의 반칙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것 덕분에 진보정권 10년을 경험할 수 있었기에 나는 텔레비전에서 그를 볼 때마다 감사의 마음을 되새기곤 한다.

 

 

 

 

1987년 대통령 선거는 결코 공정하고 깨끗한 선거가 아니었다. 선거를 약 보름 앞두고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이 터졌다. 정부는 범인 김현희를 선거일 직전에 김포공항으로 데리고 들어와 모든 신문과 방송의 뉴스를 도배함으로써 거센 북풍을 일으켰다. 정부여당은 공무원과 통반장을 동원해 유권자에게 돈을 뿌렸다. 공무원들이 시청, 군청 지하 강당에서 밤새 현금을 봉투에 담는 작업을 했다. 노태우 후보의 여의도 유세 때 마포대교는 인파로 가득 찼다.

차량 통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포대교를 도보로 건너 여의도에 가서 조직책에게 돈 봉투를 받은 다음 다시 걸어서 마포로 나왔다. 전두환 대통령이 재벌에게 천문학적 규모의 정치자금을 걷어 노태우 후보를 지원했다. 야당 후보들도 각자 구할 수 있는 만큼 돈을 구해서 썼다.

그러나 어쨌든 노태우 정부는 국민의 선택으로 수립되었다. 노 태우 대통령은 양김의 분열이, 그리고 북풍에 휘둘리고 부패선거를 용인한 우리 국민들의 의식과 행태가 만든 대통령이었다.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1988 4 26일 제 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집권당인 민정당은 125석을 얻었다. 그러나 광주, 전남,전북은 단 한 석도 없었다. 평민당은 70석을 얻어 제 1야당이 되었지만 수도권과 광주, 전남, 전북에서만 당선자를 냈다. 통일민주당은 주로 수도권과 부산, 경남에서 59석을 얻었다. 공화당은 35석을 얻었는데 대부분 충청지역 의석이었고, 영남,호남에서는 한 석도 없었다. 여야 4당 득표 기반은 1987 12월 대통령 선거 때와 거의 비슷하게 나타났다. 1980년대 내내 민주 대 독재로 양분되어 있던 민심이 대구, 경북, 부산, 경남, 광주, 전남, 전북, 대전, 충남, 충북 등의 지역으로 갈라진 것이다.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 : 민주자유당(이후 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의 등장-

 

그런데 1990년 초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 여당을 만들었다. 그러자 지역구도는 호남 대 비호남으로 단순화되었으며 25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민주자유당을 신한국당으로 바꾸었다. 이회창 총재가 신한국당을 한나라당으로 바꾸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을 새누리당으로 바꾸었다. 김종필 총재는 김영삼 대통령과 헤어져 자민련을 만들었으며 잠시 동안 김대중 대통령과 손잡고 국민의 정부 권력을 공유했다. 새누리당은 1987년 이후 한국 정치를 이끌어 온 보수정당을 모두 통합한 정당이다.

 

 

 

 

 

-진보 당의 변천사-

 

평민당은 재야세력을 흡수하고 3당 합당을 거부한 통일민주당 잔류세력과 통합하면서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었다. 열린 우리당이 창당된 2004년 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했다가 총선에서 참패를 당했다. 하지만 결국 열린우리당과 다시 합쳤고, 2014년에는 안철수 박사의 조직과 통합해 새정치 민주연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정당은 박정희 시대 신민당의 전통을 물려받은 진보적 자유주의 정당이다.

 

 

 

-재야 인사들의 국회 입성-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민주화운동의 전위였던 재야와 학생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농민운동, 각계각층 지식인운동에 변화를 요구했다. 그들은 정치, 민중운동, 시민운동으로 갈라져 점차 1987년 체제에 통합되었다. 정치 진입의 주요 통로는 김대중당이었다.

김대중 후보가 3위로 낙선해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던 1987 12, 100여 명의 재야인사들이 평민당에 입당해 다음 해 총선에서 대거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김대중 총재는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까지 여러 차례 이런 방식으로 재야 인사와 학생운동 출신 신인을 영입했다.

이해찬, 임채정, 한명숙, 장영달, 박영숙, 심재권, 우원식, 김민석, 신계륜, 임종석, 송영길, 우상호, 이인영, 호인회 등이 모두 이런 경로로 정치에 진입했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김영삼당도 그런 역할을 했다.

노무현, 김광일 등이 1998년 통일민주당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정치군인 집단인 하나회를 숙청하고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도입해 인기가 치솟았던 1994년에 민자당을 신한국당으로 개편하면서 민중당 출신 이재오, 김문수와 학생운동 출신 심재철, 손학규 등을 영입했다.

1997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는 김대중 총재의 정계복귀에 반발해 야권통합추진위원회에서 갈라져 나온 이부영, 김부겸, 제정구 등을 받아들였다. 2000년 제 16대 총선 때는 김영춘, 원희룡, 고진화 등 소위 386 세대 학생운동 리더 일부가 이회창 총재의 한나라당에 들어갔다.

 

 

 

- 3당의 등장-

 

노동자, 농민을 기반으로 한 진보정당은 아직도 현실정치에 안착하지 못했으며 다른 제3당 실험도 성공하지 못했다.

1988년 한겨레 민주당, 1992년 정주영 회장이 만든 국민당과 이기택 씨의 꼬마민주당’, 2008년 등장했던 문국현 대표의 창조한국당, 2010년 지방선거에 나선 국민참여당 등 새누리당과 민주당 양당체제를 균열시키려 한 모든 시도는 다 실패로 끝났다. 결선투표 없는 국회의원 소선거구제와 지역구도라는 진입장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안철수 의원의 제3당 시도 역시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막을 내렸다. 결국 우리 정치는 여전히 1987년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014 6.4 지방선거를 보수-자유주의 양당체제의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었다.

 

…………………..

 

또 한 갈래는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도시빈민운동 등 소위 기층운동또는 민중운동에 투신했다. 그들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여러 대기업 노동조합과 금속노조를 비롯한 산별연맹, 전교조와 언론노조 등의 공공부문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그 토대 위에서 민주노총을 세웠으며 전국 농민회총연합 탄생을 도왔다. 전국 각지의 다양한 빈민운동단체와 영세상인단체가 탄생하는 과정에도 기여했다. 그들은 각계각층의 대중이 생활에서 느끼는 요구를 기반으로 스스로를 조직하고 정치적으로 각성해야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것을 토대로 진보정당을 만들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민중후보 백기완선거운동을 시작으로 정치적 결집을 시도한 그들은 민중당 실험을 거쳐 민주노총과 전농을 조직적 기반으로 한 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

 

민주노동당은 2004 17대 총선에서 열 명의 당선자와 13%의 정당득표율을 기록해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내부의 노선투쟁과 조직운영의 비민주성 문제로 분열과 이합집산을 거듭한 끝에 정의당, 통합진보당, 노동당 등 여러 군소정당으로 갈라져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시민운동의 발전-

 

세 번째 갈래는 시민운동이었다. 첨여연대,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소비자 생활협동조합,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예술인총연합, 인도주의실천의사회, 건강실천약사회, 참교육학부모회, 인권운동사랑방, 정신대문제협의회, 여성민우회, 민주언론시민연합, 어린이보육공동체, 빈곤층자활운동단체, 마을공부방 등 민주화 이후 그 종류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자생적 시민운동단체가 탄생했다.

1988년 시민들이 주주가 되어 [한겨레] 신문을 창간한 것도 일종의 시민운동이었다. 시민운동의 첫 세대 주역들은 거의 대부분 민주화운동의 용광로에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이 흐름을 체현한 대표적 인물로는 박원순 서울시장과 환경운동연합 최열 의장을 거명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시대의 민주화 운동-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시대의 민주화운동은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저항운동에서 헌법정신을 실현하는 시민참여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시민참여운동은 종종 격렬한 반정부투쟁을 동반했다. 민주주의 제도는 다시 세웠지만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짓밟는 국가권력의 공안통치 행태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1989 3문익환 목사의 북한 방문이었다. 그는 통일논의의 물꼬를 트기 위해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평양에 가서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북한의 수뇌부 인사들을 만났다. 노태우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 공안통치로 기울기 시작했다.

 

 

 

-임수경의 북한 방문 사건, 전대협->한총련-

 

4.19 혁명 직후 대학생들이 남북학생회담을 추진했던 것처럼, 6월 민주항쟁 이후 대학생들도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NL 계열이 주도권을 쥔 학생운동은 반미자주화투쟁의 일환으로 통일운동을 폈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외국어대학교 학생 임수경의 북한 방문사건이었다.

그는 일본과 서베를린, 동베를린을 거쳐 1989 6 30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한국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임수경을 평양 시민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살벌한 공안정국이 조성되었다. 전대협은 1993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으로 재편되었고 정부는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노태우 정권의 탄압과 유서대필사건-

 

1990 1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전격적인 3당 합당으로 국회는 개헌의석을 확보한 민자당의 독무대로 변했다. 정부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는데 이것은 반정부세력에 대한 정치적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국회를 완전히 장악한 노태우 정부는 힘으로 대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을 제압하려 했다. 그런 상황에서 1991 4월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시위 도중 경찰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가는 시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두 달 동안 전국에서 2,361회나 반정부집회가 열렸고 열세 건의 분신과 의문사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안기부와 검찰이 분신한 청년활동가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해 주고 자살을 교사했다는 혐의를 조작해 아무 죄도 없는 강기훈 씨를 구속한 유서대필사건을 만들어 냈다.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죽음의 굿판을 거두라면서 재야와 학생운동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해 파문을 일으킨 것도 이때였다.

 

 

 

-민통련->전민련->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6월 민주항쟁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중심으로 결속해 있던 재야 진보세력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공동대표 이부영, 이창복)을 거쳐 1991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으로 확대 재편되었다. 노동자, 농민, 대학생 등 각계각층의 운동단체 14개와 13개 지역운동단체가 결합한 전국연합은 1997년에 사실상 해소되었다.

 

 

 

2008년의 공식 해산 이후에는 한국진보연대로 전환되었다. 경기동부, 울산, 인천 등 NL 계열 지역운동단체들은 전국연합이 사실상 해소된 1997년 이후 조직적으로 민주노동당에 결합해 당권을 장악했다. 경기동부연합과 울산연합은 현재 통합진보당으로 결속해 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정권-

 

누가 하는 어떤 것이든, 민주주의와 관련한 헌법의 규정을 실현하려는 활동은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대통령에 대해서든, 정치에 대해서든, 통일문제에 대해서든, 혁명에 대해서든, 그 무엇에 대해서든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헌법이 우리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정부가, 또는 압도적 다수의 국민이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위한 것이 아니다. 대다수 국민이 터무니없다고 판단하는 견해까지도 제한 없이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

비록 진리가 아닌 견해라 할지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그것을 제약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헌법의 정신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다. 노태우 정부는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에 대한 대학생과 시민들의 의사표현을 탄압했다.

 

 

 

-김영삼 정부와 민주화 운동-

 

김영삼 정부는 노동법을 날치기했다. 1996 12 26일 새벽, 신한국당 소속 의원 154명이 야당에 회의 개최 사실도 통보하지 않은 채 버스를 대절해 국회 본회의장에 몰래 들어가 파견근무제, 정리해고제, 파트타임근로제와 변형시간근로제 등 노동자의 지위에 엄청난 악영향을 주는 조항이 담긴 노동관계법을 의결했다.

민주노총이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를 요구하는 총파업을 시작했다. 공안당국이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체포조를 투입하는 등 초강경 대응에 나섰지만 하루 최대 35만 명 넘게 참여하는 등 파업은 더욱 확산되었다. 천주교 사제들의 시국미사를 시작으로 대학교수와 지식인, 각계각층 단체의 노동법 재개정 요구 서명발표가 줄을 이었다.

농민들은 쌀과 음식을 싣고 와 농성 노동자를 격려했으며 대학생과 시민들의 격려 방문과 파업을 지지하는 신문광고가 줄을 이었다. 해외교민들도 정부를 규탄하고 파업을 지지하는 집회를 벌였다. 내가 있던 독일 마인츠대학교 한국 유학생들도 돈을 모아 [한겨레]에 총파업 지지 생활광고를 냈다.

 

 

 

-노동운동의 중요성과 김영삼의 사과-

 

한 달 가까이 이어진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 투쟁 분위기는 마치 6월 민주항쟁 전야 같았다. 개정 노동법의 내용도 문제가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정부가 국회법의 의결 절차를 지키지 않았고 헌법이 보장한 노동 3권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임금과 근로조건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는 법률 개정을 막기 위해 노동자들은 파업을 할 권리가 있다.

파업을 하면 생산이 중단되고 기업이 타격을 받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업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지 않도록 성의를 다해 교섭해야 한다. 만약 국민경제에 악영향을 주고 기업 경영에 손실을 입힌다는 것을 이유로 파업행위를 처벌한다면 노동조합 그 자체가 의미가 없으며 노동3권을 보장한 헌법 조항은 효력을 잃게 된다.

노동자가 아닌 종교인, 지식인, 농민, 대학생, 시민들이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를 요구하는 총파업을 지지하고 연대한 것은 헌법정신과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이 날치기 행위에 대해 사과했고 국회는 임시국회를 열어 노동법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김대중 정권과 민주화 운동-

 

1997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룸으로써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성숙해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공안통치를 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야당과 언론의 입을 막거나 시민들의 기본권 행사를 제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정부와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부당하게 억압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견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김대중 대통령이 정리해고제를 도입하는 등 노동법을 개정함으로써 노동자의 지위를 현저히 약화시켰다. 1996년 정부여당이 날치기 처리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내용이었다. 정부는 정리해고제 반대 파업을 경찰력으로 해산하고 주동자를 구속했지만 대규모 파업이나 시민사회의 연대투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구제금융을 제공한 IMF 가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리해고제 도입을 강요했다. 둘째, 김대중 대통령은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노동계와 합의하려고 노력했으며 고용을 유지하는 기업을 지원하는 등 정리해고의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국민들이 벼랑 끝에 몰려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심정에 공감하면서도 정부를 심하게 비난하지는 않은 것이다.

 

 

 

-노무현 정권과 민주화 운동-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권력의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평검사들과 치열한 공개토론을 함으로써 대통령이 검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 국정원장의 독대보고를 받지 않았다.

자신의 대선자금 가운데 일부가 불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국민에게 사과했다. 한국-칠레 자유무역협정(FTA) 폐기를 주장하며 서울 도심에서 시위를 하던 농민이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사고가 났을 때도 공개적으로 사죄하고 경찰청장을 경질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손잡고 대통령 탄핵을 추진했을 때 열린우리당 의원들에게 육탄으로 저지하지 말라고 권했다. 국회에 탄핵권이 있고, 탄핵을 의결해도 헌법재판소 결정이 남아 있는 만큼 헌법 절차에 따라 다투는 것이 옳다고 했다. 이라크 파병 등 중요한 문제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통령과 다른 견해를 밝혀도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도 민주주의 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3년에 일어난 부안사태였다. 산업자원부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사용 후 핵연료가 포함된 저장 시설인지 아니면 중저준위 방사선폐기물만 저장하는 시설인지 정보를 정확하게 제공하지 않았다.

게다가 부안 군수는 부안 군민과 인접 시, 군 주민들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고 유치 신청을 했다.

대통령은 그런 사실을 제대로 보고받지 못한 채 정책 결정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정부가 국민을 속이고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환경운동단체가 중심이 된 부안 핵폐기물 저장시설 반대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졌고 시위대와 경찰의 심각한 충돌을 야기했다.

 

결국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재공모 절차를 거쳐 주민투표 찬성률이 가장 높았던 경주시에 방폐장을 설치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칠례 FTA 와 한- FTA 체결, 이라크 파병, 용산 미군기지 평택 이전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사태가 일어났다. 그러나 정부는 정부대로 절차를 지키려고 노력했고 범국본은 범국본대로 헌법상의 기본권을 충분히 행사하면서 의사표시를 했다. 민주주의 국가 어디에서나 흔히 일어나는 정상적인 과정이었던 것이다.

 

2004년 봄의 탄핵규탄 촛불집회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시민들이 현직 대통령의 편이 되어 자발적으로 전국적, 동시다발적, 연속적 집회시위를 벌인 적은 그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탄핵규탄 촛불집회의 투쟁대상은 야당이었다.

임기가 넉 달 밖에 남지 않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뽑은 임기 5년 대통령의 직무를 겨우 1년 만에 정지시킨 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분개했다.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얻고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를 기각함으로써 대통령 탄핵은 야당이 국회의 헌법적 권한을 오남용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 촛불시위는 국회가 국민의 주권을 부당하게 침해한 데 대한 항의였으므로 헌법을 지키는 민주화운동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과 민주화 운동-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 미국산 쇠고기로 인한 광우병 발병 확률은 매우 낮았다. 문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을 완화하는 결정을 내린 과정이었다. 아무 예고도 하지 않고 최소한의 공론화 과정도 없이, 국민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대통령과 정부가 그런 결정을 한 것이다.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가 다른 일도 모두 그런 식으로 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여중생들이 광화문 인근에서 작은 촛불집회를 시작했을 때 그것이 국민운동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촛불집회는 재야, 학생운동, 시민단체, 야당 등 전통적인 민주화운동 세력과 전혀 상관없이 젊은 어머니들과 직장인들에게 번져나가 거대한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집회시위로 확산되었다.

물대포와 최루액을 동원한 경찰의 진압과 명박산성이라고 불린 경찰차벽에도 굴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거짓 사과 말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지만, 촛불집회는 자발적으로 행동하면서 수평적으로 연대할 줄 아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예고했다.

 

 

 

-박근혜 정권과 민주화 운동-

 

2013년 시민들은 다시 촛불을 들었다. 이번에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 국정원과 기무사,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이 불법 개입한 것을 규탄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국미사를 열었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가기관을 정치적으로 사유화해서 같은 당의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국민을 상대로 온라인 심리전을 벌인 조직범죄였다.

지금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민참여의 시대다. 2008년 이후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지만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런대로 작동하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가 헌법을 무시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행태를 보이지만 권력의 제한과 분산, 상호견제를 통해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 역시

국가운영의 많은 분야에서 민주화의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정책과 행태를 보이는데, 그 기반은 불합리

한 제도나 경찰과 군대의 폭력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거대 보수언론

재벌, 공안세력이 반복 주입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시민들의 의식이 그 기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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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에서 6월 민주항쟁까지]

 

-전두환 시대의 민주주의 투쟁-

 

1979 10 27일 새벽이었다. 서클 공부방으로 쓰던 봉천동 꼭대기 달동네 자취방에서 대통령 유고계엄령 선포를 알리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박정희가 죽었다!!! 우리는 기쁨에 넘쳐 서로를 얼싸안았다.

처마 밑에 조기를 달던 집주인 아주머니가 싱글벙글하는 우리를 나무라셨다. “학생들 너무 좋아하진 마. 그래도 사람이 죽은 거잖아.” 그렇지 않아도 찜찜하던 참이었다. 독재자도 사람이 아닌가. 사람이 죽었다는 데 기뻐하는 것은 왠지 인간적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일그러진 시대였고 내 마음도 그렇게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11월 하순 휴교령이 풀린 후 학생회 부활을 준비하는 과대표 회의에 갔다. 3학년 대표가 궐석이어서 2학년 대표였던 내가 경제학과 대표로 간 것이다. 학교에 상주하던 경찰 병력이 보이지 않았다. 회의를 한 강의실에 학생처 직원도 사복형사도 나타나지 않았다.

늦은 밤 회의를 마치고 비탈길을 내려오면서 크게 소리 질렀다. “자유다! 만세!” 곧 좋은 세상이 올 것 같았다. 하지만 섣부른 기대였다. 어느 날 자취방에 모여 공부를 하기로 했던 서클 친구들이 자정이 다 되어서야 나타났다. 한강대교가 봉쇄되어 버스기사가 양화대교 쪽으로 돌았는데, 거기도 막혀 있어서 걸어왔다는 것이다.

 

 

 

-전두환의 12.12 쿠데타-

 

쿠데타가 난 거야! 그렇지 않으면 한강 다리가 막힐 리 없지!” 1979 12 12일 밤이었다.

며칠 후 우리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희도, 장세동 등 소위 신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고 군권을 장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1980 5 15일 오후, 나는 서울역 광장에 있었다. 몇만 명인지 모를 대학생들이 대오를 맞추고 앉아 있었다. 광장 가장자리와 인근 고가도로는 구경하는 시민들로 빼곡했다. 그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그저 구경만 했다.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경찰은 남대문 근처 도로를 차단했다.

 해가 기울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광장에서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대한민국을 상상했다. 마음이 아찔하게 설레었지만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이 혼돈에서 도대체 무엇이 나올까?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주검이 산더미를 이루는 끔찍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서웠다. 그 시각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때는 휴대전화도 카톡도 트위터도 없었다. 남대문 근처에서 누군가 버스를 몰아 경찰대오를 덮쳤다는 소식이 들렸다. 용산 효창운 동장과 강남 잠실운동장 인근에 중화기와 장갑차로 무장한 대규모 군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총학생회장들이 어디선가 대책회의를 한다고 했다. 마이크로버스 위에 서서 집회를 이끄는 학생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변변한 방송시설도 없었고 거리 시위의 목적을 알리는 유인물도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가 지닌 것은 전두환은 물러가라’, ‘계엄령을 해제하라따위의 구호를 손으로 휘갈겨 쓴 피켓과 플래카드, 맨주먹과 조그만 휴대용 확성기 뿐이었다.

 

이 광장에 무장한 군인들이 들어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난 아마 죽을거야. 스물한 번째 생일이 두 달 남았는데, 벌써 죽어야 하나? 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시위를 주동했으니 억울할 거야 없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하지 않는가. 그 피가 내 피일 수도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가 나와 같은 건 아니었다. 대학에 들어온 지 석 달이 채 되지 않은 저 신입생들은 어찌될까? 자신과 세상의 관계에 대해, 권력과 역사에 대해,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한 적 없이 선배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와 착한 아이처럼 줄지어 앉은 저 청년들의 죽음을 누가 책임져야 하나? 책임을 질 수나 있는 것일까?

이 광장이 시산혈해가 되면 민주주의 정치혁명이 이루어질까? 그렇게 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을 살리려면 일단 집회를 끝내고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비참한 패배를 당할 것 같았다.

 

그 때 지하 지도부선배들이 그 자리에서 철야농성을 하자는 연설을 하라고 했다. 1980년 말 이른바 무림사건으로 일망타진당한 서울대 학생운동 비밀조직의 지도선인 77학번 형들이었다. 학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공부모임의 가장 활동적인 인물들을 연결한 이 조직은 총학생회 부활을 준비했고 학생회칙을 만들었으며 주요 직책 후보를 내정했고 실제로 당선시켰다.

여러 학생조직 가운데 서울대 총학생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조직이었다. 심재철도 나도, 그 조직의 결정에 따라 총학생회장과 대의원회 의장이 되었다. 그들이 그 혼돈 속에서 어떻게 나를 찾아 냈는지 신기했다.

 

마이크로버스 지붕에 올라가 소형 확성기로 연설을 했다. 우리의 형이요 오빠이며 국민의 아들인 국인들은 우리에게 총을 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오며 박수로 반겨주면서 충심으로 호소합시다.

우리는 오늘 밤 이곳을 지켜야 합니다. 이 집회를 해산하면 신군부의 역습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학우 여러분, 역사의 대의와 나라의 미래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대충 그렇게 말했다. 이 연설 때문에 나는 강력한 투쟁을 주장한 매파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정직한 연설이 아니었다. 나는 두려움과 번민을 감추고 조직의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다.

 

 

 

-서울역 회군 사건-

 

(심상정의 등장)

 

그런데 장소를 옮겨가며 회의를 하던 총학생회장들이 집단해산과 대학별 교내농성을 결정했다. 더 준비하고 더 많은 시민들의 이해와 지지를 구함으로써 더 크고 성공적인 투쟁을 전개하자는 취지였다. 정부가 휴교령을 내리면 전국의 모든 대학생이 일제히 가두투쟁에 나서자는 결의를 덧붙였다. 곳곳에서 항의와 욕설이 터져 나왔지만 학생들은 대오를 지어 각자의 학교로 걸어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1980 5 15일의 서울역 회군이었다.

 

나는 어떻게 되든 이 싸움이 패배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역 광장을 지켜도 질 것이요, 학교로 돌아가도 질 것이다. 시민들이 저렇게 구경만 하고 있는데 무슨 수로 신군부의 폭력을 이길 것인가.

그러던 차에 철수 결정이 나오자 가슴 밑바닥에서 안도감이 차올랐다. 내일모레 죽는 한이 있어도 일단 오늘 죽는 것은 면했다. 저 신입생들이 죽지 않아도 된다. 걸어서 한강대교를 건너는데 대오 한가운데서 누군가 십 원짜리’, ‘백 원짤욕을 섞어가며 학생회 지도부를 성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녀는 단정해 보이는 여학생이었다. 이름을 물어보았다. 심상정. , 저 친구가 여러 학회의 여학생들을 모아 별도의 서클을 만든 다음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부에 들어가겠다고 해서 무림의 남자들을 열받게 만들었던 바로 그 심상정이구나.

 

예쁜 입술에서도 험한 소리가 나오네요!” 그렇게 웃으며 한마디를 건넸다. 그 뒤 6년 동안 그녀를 보지 못했다.

 

인류 역사는 숱한 반란, 봉기, 내전, 혁명,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사태의 원인과 계기, 전개과정과 결과는 저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같은 게 있었다.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을 덮친 것이 혼돈이었다는 사실이다.

무리를 지어 폭력으로 부딪치는 격동의 순간에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동기와 지향에 따라 제각기 활동한다. 모두에게 익숙한 일상의 소통방식이 무너진 상황에서는 냉철한 논리와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충동이 행동을 지배한다.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누구도 전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끝나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역사가들이 사태의 전모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해석한다.

그때에야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 대한민국현대사도 예외가 아니다. 제주 4.3 사건, 6.25 전쟁. 4.19 혁명, 5.16 쿠데타, 5.18 광주민중항쟁, 6.10 민주항쟁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이 본 것은 혼돈이었다.

 

…..

 

 

 

-대학교 학생들의 투쟁: 서울의 봄-

 

5.13 밤 연세대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생들이 각자 학교 근처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누가 어떤 의도로 그랬는지 나는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당시 대학가에는 유신체제를 연장하려 하던 신군부와 어떻게 투쟁해야 할 지를 두고 생각을 달리하는 두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1] 신군부와의 전면적 정치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 다양한 자생적 학생조직이었다. 다른 하나는[2] 정치정세와 국민여론, ‘3이 이끈 여당 정당들의 움직임과 보조를 맞추어 가면서 점진적으로 투쟁수준을 높여나가려 한 주류 학생운동조직이었다. 5 13일 밤 가두시위를 벌인 것은 아마도 전면투쟁론을 주장한 급진적 학생조직이었을 것이다.

 

 

 

그날 자정이 다 된 시간에 고려대학교 학생회관에 모인 서울의 총학생회 대 표들이 대규모 거리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군대를 갔다 온 복학생이었던 고려대 신계륜 총학생회장이 모임을 이끌었다. 나는 심재철 총학생회장을 대신해 이 회의에 갔다. 학생대표들은 정부가 휴교령을 내릴 명분을 얻었다고 판단했다. 학생들 사이에 전면 투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급격하게 세를 불리는 형국이라 거리시위를 더는 막을 수 없다고 보았다.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앉아서 선제공격을 당할 수는 없었다. 전국의 대학 총학생회에 결정사항을 알려주었다. 5 14일 아침 대학생들은 교문의 경찰 봉쇄망을 무너뜨린 후 걸어서 도심으로 진출했다. 혼돈은 그때 시작되었다. 서울의 경우 어느 대학 총학생회도 가두시위를 이끌지 못했다. 방송시설도 없었고 전투조직도 갖추지 못했다.

학과별 배오는 모두 흐트러졌다. 학생들은 사방에서 광화문을 향해 걸어갔지만 세종로 사거리와 남대문 일대에 구축한 경찰의 강력한 방어망을 뚫지 못했다. 휴교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신군부는 전국적 학생시위를 단숨에 제압하기 위해 군 병력을 이동 배치하는 중이었다.

 

5 17일 오후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이화여대 교정에 모여 향후 투쟁방침을 논의했다. 대규모 경찰병력이 회의장을 급습했다. 총학생회장 심재철의 체포 여부는 알 수 없었다.

학생처장 이수성 교수가 총학생회장실로 전화를 해서 오늘 밤은 편한 곳에서 자라고 했다. 계엄군이 들어오니까 도망치라는 뜻이었다. 그는 그 전화를 한 죄로 계엄사 합수부에 끌려가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

 

학생들이 고립된 캠퍼스에서 계엄군에게 짓밟히도록 둘 수는 없었다. 전국의 여러 대학 학생회에서 전화가 왔다. 상황을 설명한 다음 휴교령이 내리면 학교 근처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한 계획을 상기시켰다.

10시 반경 비상계엄을 제주도까지 확대한다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건장한 남자들이 쇠사슬로 묶어둔 학생회관 4층 복도 현관문을 뜯어내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공주사대 총학생회에서 온 전화였다. “여기도 계엄군이 진입했으니 빨리 피하세요!”

그렇게 외치고 돌아서는데 이단옆차기가 날아왔다. 허벅지를 밟혔다. 이마에 닿는 권총 총구가 서늘했다. 나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편입되어 있던 경찰청 특수수사대로 끌려갔다. 계엄군은 교정과 기숙사에 남아 있던 모든 사람을 소총과 몽둥이, 군홧발로 짓밟았다. 모든 대학 교정에서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고 서울의 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우리 국민은 아직 민주주의를 누리는 데 필요한 용기와 의지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유신독재를 끝내지 않았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죽였을 뿐이었다. 10.26에서 5.18까지, 그 다섯 달은 안개 속이었다. 짙은 안개 너머에 있는 것이 유신의 연장일지 새로운 민주주의일지 알 수 없었다. 권력의 심장을 잃어버린 집권 공화당은 영원한 2인자김종필을 새 총재로 선출했다. 그는 신민당 김영삼 총재를 만나 시국 수습책을 논의했다. 유신시대에는 재야인사로 일컬어졌떤 정치인 김대중 씨도 오랜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정치가 다시 살아날 징후를 보였다.

 

 

 

-최규하 대통령 선출-

 

정부는 1979 12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소집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던 최규하 국무총리를 제 10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죽었지만 유신체제는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최규하 대통령의 임무는 유신체제의 안락사일 것이라고 우리는 기대했다.

그가 헌법 개정과 선거 관리를 제대로 해서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면 유신체제는 조용히 무너질 것이라 믿었다. 최규하 정부는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고 양심수들을 일부 석방했다. 그런데 전두환과 노태우, 정호용 등 육사 11기 정치군인들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유신체제를 수호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12 12일 밤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수경사, 특전사, 보병 9사단 등 휘하 병력을 동원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등 온건파 국군 지휘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국민들은 계엄사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그 내막을 알 수 없었으며 전두환이 정권을 잡을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사북 사태-

 

봄이 와서 언 땅이 녹으면 모든 풀과 나무가 한꺼번에 움튼다. 유신체제라는 겨울공화국이 물러날 기미를 보이자 그 동안 억눌려 있었던 모든 욕망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1980년 신학기가 되자 전국의 대학생들이 학생회 부활을 준비했다. 대학은 계엄령 해제 요구, 병영 집체훈련 거부, 어용교수 퇴진, 재단 비리 척결 투쟁에 나섰다. 교수들은 교수협의회를 만들 준비를 갖추어 나갔으며 언론인들도 검열의 폐지와 언론자유를 요구하는 모임을 잇달아 결성했다 

노동조합 설립 붐이 일었고 곳곳에서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이 일어났다. 물질적 풍요, 자유, 인간적 존엄성을 향한 열망이 강력하게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사태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4 21사북사태가 터졌다. 강원도 정선군의 동원탄좌 광부들이 어용노조 지부장 사퇴와 임금인상을 요구하면서 시작한 파업이 회사 측과 경찰의 강경대응 때문에 폭동으로 비화한 것이다.

광부들이 사북읍 일대를 점거한 이 사건은 사흘 만에 노사합의로 막을 내렸지만, 언론은 공포의 탄광촌’, ‘무법천지 사북’, ‘곡괭이 도끼 무장 파괴 방화등 끔찍한 제목을 달아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국민의 불안심리를 자극했다. 구로공단과 울산, 부산, 인천 등 대규모 사업장이 밀집한 곳에서 잇달아 파업과 노사충돌이 빚어졌다.

 

 

 

정치 상황은 불길한 흐름을 보였다. 개헌안 공청회를 하는 등 국회가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신현확 국무총리는 정부가 주도해서 개헌을 하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직선제가 아닌 내각제 또는 이원집정부제 개헌론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4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전두환 보안 사령관 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이 중앙정보부장까지 겸직한 것을 대학생들은 정치군인들의 정권장악 의사표시로 간주했다.

대학가에서 전면투쟁론이 고개를 들었다. 5월 초부터 전국 주요대학 학생회는 신입생들의 병영집체훈련 거부투쟁을 접고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정치투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5 14일과 15일 전국에서 동시다발적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것은 사실상 대학생들만의 투쟁이었다.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 본대 없이 선봉대 혼자 싸운 것이다.

결국 5 17일 밤 신군부가 전국 주요 대학에 계엄군을 투입함으로써 학생시위는 막을 내렸다. 휴교령이 내릴 경우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시위를 벌이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약속을 지킨 곳이 광주였다. 그곳에서만 시민이 참여하는 도시봉기가 일어났다.

 

 

 

-광주 5.18 민중 항쟁-

 

광주민중항쟁의 시작은 1979 10월의 부마항쟁과 비슷했다. 김영삼 총재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부마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처럼 신군부가 김대중 씨를 체포한 것이 광주 시민의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5 18일 오전부터 전남대 앞에서 학생과 계엄군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계엄군이 학교 밖으로 나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것을 본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하면서 도시 전체가 궐기했다. 여기까지는 부마항쟁과 같았다. 그런데 광주 시민들은 부산, 마산 시민들보다 더 절박했고 더 용감했다. 공수부대는 시내 곳곳에서 대검을 장착한 소총과 충정봉이라는 박달나무 몽둥이로 마구잡이 폭력을 휘둘렀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자 시위는 더 확산되었다.

계엄사는 더 많은 특전사 병력을 광주로 보냈다.

 

비무장 시위가 무장투쟁으로 번진 것은 계엄군이 발포를 했기 때문이다. 5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정문 앞에 진 치고 있던 제 11공수여단 병력이 갑자기 흘러나온 애국가 연주에 맞추어 일제히 M16 소총과 M60 기관총을 공중으로 발포했다. 그래도 시위대가 흩어지지 않자 곧바로 사람을 향해 총을 쏘았.

전일빌딩, 상무관, 수협 전남지부 건물 옥상에서는 저격수들이 조준사격을 가했다. 그것은 명령에 따른 조직적, 계획적 발포였다. 5 19일과 20일에도 제 11공수여단과 제 3공수여단 병력이 권총과 M16 을 발포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그것은 산발적, 돌발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도청 앞 발포는 달랐다. 거리는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했다.

 

분개한 시민들은 광주 시내뿐만 아니라 나주, 화순, 장성, 영광, 담양 등 인근지역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카빈소총과 M1 소총을 확보했고 화순탄광의 다이너마이트를 반입했다. 시민들이 먼저 총을 쏘았기 때문에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다는 신군부의 주장은 거짓이었다.

군의 모든 기록 갸ㅏ운데 최초로 등장하는 무기탈취 사례는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상황일지]에 기록된 5 21일 오후 1 35분 전남화순파출소 무기 피탈사건이었다. 특전사가 전남도청 앞에서 발포를 할 때에는 시민들에게 총이 없었다. 시민들이 무장항쟁을 시작하자 경찰관들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광주를 빠져나갔고 특전사 병력은 외곽으로 이동해 광주의 교통과 통신을 차단했다.

그들은 인근 도시로 가는 국도에서 광주를 빠져나가는 민간차량을 저격하고 주둔지 인근의 민가에 총을 쏘았다.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해 많은 시민이 죽었다. 다른 도시에서는 대중투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군부는 모든 화력을 광주에 집중했다. 특전사 3개 여단 3500, 보병 20사단 5000,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소속 병력 1 2000명 등 무려 2만이 넘는 병력을 광주시 일원에 투입한 것이다.

 

도청을 점령한 시민군은 부대를 편성하고 치안질서를 유지했으며 시민들은 그들에게 음식과 물을 제공했다. 시민자치에 들어간 광주 시내는 평온했으며 범죄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병원에는 헌혈 신청자들이 줄을 섰고 도청 공무원들이 다시 출근했다. 지역사회 원로들이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광주 상무대에 있던 전남북 계엄분소를 방문했다. 그러나 계엄사는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광주항쟁에 대한 소식은 닷새째인 5 22일에 가서야 석간 [동아일보]가 처음으로 보도했다. 그 닷새 동안 광주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으며 국민들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신군부는 광주 시민을 폭도로 규정했고 계엄군은 광주시를 포위했다. 5 27일 새벽 계엄사는 6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해 광주를 탈환하는 상무충정작전을 전개했다. 도청을 중심으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한 시민군은 카빈총과 M1 소총을 든 157명 뿐이었다.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윤상원 씨를 비롯한 열세 명을 사살하고 100여 명을 체포했다.

 또 다른 거점이었던 광주공원과 전일빌딩도 손쉽게 점령했다. 그들은 도청 앞 상무관에 있던 광주 희생자들의 시신 129구를 덤프트럭에 싣고 가서 망월동 산비탈에 묻었다. 5.18 유족회의 집계에 따르면 항쟁 당시 사망자는 166, 행방불명 65명이었다. 부상 후 사망자는 400명이 넘는다.

군경 사망자는 27명이었는데 군인들끼리 벌인 오인전투 사망자가 많았다. 계엄사는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무려 2500명이 넘는 시민과 대학생을 체포해 600명 이상을 검찰에 송치했다. 정동년, 배용주, 박남서는 군법회의와 대법원 최종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홍남순, 정상용, 허규정, 윤석루 등 일곱 명은 무기징역, 김상윤, 김성용, 명노근, 전옥주, 윤강옥 등 열한 명은 징역 20년에서 10, 152명은 징역 10년에서 5년의 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모두 풀려났다.

 

광주민중항쟁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가능성과 당시 민주화운동의 현주소를 명료하게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전제정치를 타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라는 것, 그리고 아직 대한민국 국민은 그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참혹한 패배로 막을 내린 광주민중항쟁은 많은 국민의 가슴에 깊은 죄책감을 남겼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 시민들이 계엄군의 폭력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1987 6월 민주항쟁의 서막 그리고 전두환의 집권-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87 6,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어느 지역도 고립되지 않는 전국적 도시봉기를 정밀하게 기획하고 준비했다. 광주 시민들만 홀로 고립의 아픔을 겪게 만든 1980 5월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6월 민주항쟁은 사실상 광주민중항쟁의 전국적 확대판이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유신쿠데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저질렀던 독재를 능가하는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이해동, 조성우, 이신범, 이해찬, 설훈 등 재야와 학생운동 핵심 인사들에게 내란음모 혐의를 씌워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김대중 씨에게는 사형, 다른 사람들에게는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했다. 김영삼 씨를 비롯한 야당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했고 김종필, 이후락, 김진만 등 유신정권의 실세들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공직에서 몰아냈다.

정부 공무원과 공공기관 임직원 9000여 명을 숙청했다.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만들어 위원장이 되었다. 기자들을 대거 구속하고 해고했으며 신문, 방송을 통폐합하고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뿌리깊은 나무], [기자협회보] 등 정기간행물 172종을 폐간시켰다.

문화공보부가 보도지침이라는 것을 매일 내려보내 방송과 신문의 내용뿐만 아니라 편집까지 일일이 통제했다. 1986년에 가서야 김주언, 김태홍 등 용감한 기자들이 보도지침의 실상을 폭로했다.

 

신군부는 대학생과 교수들을 대량 제적, 해직했고 노동조합을 해산했으며 원풍모방, 반도상사, 콘트롤데이타, 청계피복 노동조합 간부들을 해고했다. 불량배 소탕이라는 명목으로 무려 4만여 명의 시민들을 불법 연행해 삼청교육대에 집어넣었다. 무자비한 고문, 학대로 300명 넘게 사망했고 3000명 가까운 사람이 영구장애를 입었다.

 

 

 

신군부가 한 조처 가운데 그나마 대중의 호감을 산 것은 과외 금지와 대입 본고사 폐지, 졸업정원제를 명분으로 한 대학 입학정원 대폭 확대, 야간 통금 해제 정도가 고작이었다.  

 

[몇 안 되는 전두환의 업적]

 

 

 

신군부는 1980 8월 최규하 대통령을 내쫓았다. 그는 유신헌법에 따라 합법적으로대통령이 되었지만 퇴진 요구를 받자 군소리 없이 물러났다. 전두환은 곧바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소집해 100% 찬성으로 제 11대 대통령이 되었다. 모든 신분, 방송이 그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특집보도와 특집기사를 내보냈다.

정부는 지체 없이 헌법개정안을 만들었다. 1980 9 29일 공고한 5공화국헌법안은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제로 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이름을 대통령 선거인단으로 바꾸었다.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하는 제도를 없애는 대신 비례대표를 의원 정수의 3분의 1로 하고 제1당에 비례의석 3분의 2를 배분하는 괴상한 제도를 도입했다. 10 22일 실시한 국민투표에 95.5%의 유권자가 투표했고 91.6% 가 찬성했다. 유신헌법 국민투표 때와 비슷한 결과였다. 국민들이 다시 한번 폭력의 공포에 굴복한 것이다.

 

…..

 

전두환 대통령은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것을 만들어 총선 때까지 국회 기능을 대신하게 했다. 국가보위입법회의는 156일 동안 존재하면서 215건의 안건을 가결했다.

 

야당 정치인 835명을 정치활동 금지 대상자로 정한 특별조치법, 집회와 시위를 사실상 금지한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이름을 국가 안전기획부로 바꾼 중앙정보부법, 반공법을 흡수 통합한 국가보안법 등을 모두 여기에서 만들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1 1월 하순 김대중 씨의 형량을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하고 계엄령을 해제했다. 미국 행정부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한 사대주의적 유화책이었다.

갓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은 워싱턴에 간 전두환 대통령을 극진히 환대했다.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을 바꾼 중앙정보부는 충성을 서약한 사람들을 모아 민주정의당(민정당)이라는 집권당을 창당했고, 민주주의를 한다는 시늉을 하기 위해 야당 민주한국당(민한당, 총재 유치송)과 한국국민당(국민당, 총재 김종철)도 만들었다. 이런 속사정을 아는 시민들은 민정당을 전두환 1중대, 관제야당인 민한당과 국민당을 2중대, 3중대라고 불렀다.

 2 25일 대통령 선거인단을 체육관에 불러 모은 전두환은 2중대, 3중대의 유치송과 김종철을 출마시켜 모양새를 갖추고 90% 라는 상대적으로 소박한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제 12대 대통령이 되었다. 한달 후 실시한 제 11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민정당은 득표율 36% 로 비례의석 61석을 포함해 전체 의석의 54.7% 151석을 차지했다. 당시 나는 강원도 화천 전방부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투표용지는 없고 선거공보만 든 봉투를 받았다. 투표용지는 대대본부 서무병이 모두 1번을 찍어 발송했다. 당시 군 부재자투표는 그런 식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민중항쟁의 전국적 확산을 두려워했다. 부마항쟁도 광주항쟁도 모두 학생운동이 뇌관이었다. 5공화국이라는 이름을 붙인 새로운 유신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학생운동을 뿌리 뽑고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을 고립시켜야 했다. 그런데 1980년 하반기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대학생들은 산발적 저항을 계속했다. 하반기에만 경희대, 연세대, 성균관대를 비롯한 전국 20여 개 대학에서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살포하거나 교내시위를 벌이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정부는 학생운동의 뿌리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무림사건->학림사건->부림사건-

 

안기부와 보안사, 경찰과 검찰은 1980 12월 남명수 등 서울대 학생들이 교내시위를 하면서 뿌린 [반파쇼학우투쟁선언] 을 추적하는 합동수사를 편 끝에 유신시대와 1980년 봄 서울대 학생운동을 주도한 주요 서클 활동가 조직을 일망타진했다. 다수의 졸업생을 포함해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를 범죄조직으로 만들려고 하니 안개처럼 모호한 점이 많아 무림사건이라는 낭만적 명칭을 부여했다. 정부는 김명인, 한홍구 등 수십 명의 학생들을 구속하거나 강제로 징집했다.

 

대학생과 노동자들을 전국적으로 결합해 강력한 반정부투쟁을 전개하려 한 조직도 적발했다.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을 만든 이태복과 흥사단아카데미를 기반으로 전국민주학생연맹을 결성한 이선근이 그 주역이었다. 그들은 여러 지역에 조직을 만들어 1981년 대학가 반정부 교내시위를 일으켰다.

공안당국은 1981 6월 두 사람과 관련자들을 체포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감금했다. 무시무시한 고문을 가한 끝에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한 반국가단체를 결성한 혐의를 만들어 무기징역형을 선고했다. 그들은 대학생이 중심이었던 이 사건에 학림사건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1979 10월 부마항쟁의 뇌관을 찾아 제거할 목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부산에서도 학생운동 활동가와 양서협동조합 회원들을 두달 넘게 불법 구금하고 고문해 반국가단체 사건을 만들었으며 부산의 무림사건이라고 해서 부림사건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1981년 한해 동안 전국 각지의 대학생들이 40회나 교내시위를 했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학생운동의 이념과 운동방식은 급진적 변화를 겪었다. 군복무를 하고 있던 나를 면회하러 온 친구들이 처음 듣는 행진곡풍의 운동가요를 불렀다.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일보전진 이보후퇴], 마오쩌둥의 [모순론], [실천론] 같은 논문을 읽는 게 기본이라고 했다.

 

…………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청년지식인들이 단순한 민주화가 아니라 사회혁명을 목표로 삼는 급진적 대중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반미주의와 사회주의가 빠르게 확산되어가던 1982 3,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이 터졌다. 문부식, 김은숙, 이미옥 등이 문화원에 불을 질렀고 유승렬과 박원식 등이 인근 건물에서 미제국주의 반대살인마 전두환 타도를 주장하는 유인물을 뿌렸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곳에서 공부하는 학생 한 사람이 죽었고 부상자가 여럿 생겼다. 배후 조종자로 지목된 김현장과 문부식은 사형, 김은숙과 이미옥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

 

-진보의 두 가지 노선 : 민중민주주의(PD) 노선, 민족해방(NL) 노선-

 

1980년대 혁명운동가들에게 전두환 대통령은 절대악의 화신이었다. 광주의 대학살과 난폭한 인권탄압을 겪은 만큼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전두환 정권은 청년지식인들의 영혼을 흔들어 놓았으며 그들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이념을 찾아 나섰다.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민중민주주의(PD) 노선을 받아들였다.

모델은 러시아 혁명이었다. 그들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믿으면서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러시아 혁명사, 레닌의 전략, 전술을 연구했다. 노동자계급을 조직하고 정치적으로 지도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규정했다. 그들은 민족주의를 낡은 부르주아 사상으로 북한을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전체주의 독재국가로 간주했다. 이런 성향을 가진 세력은 민주화 이후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진보정파가 되었다.

 

광주 학살의 배후에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점을 중시한 청년지식인들은 민족해방(NL) 노선으로 결집했다. 모든 사회악의 근원은 미제국주의다. 분단도 독재도 자본주의적 악덕도 모두 미제국주의 때문에 생긴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지배와 간섭을 중단시키지 않으면 민주화도 사회정의도 통일도 이룰 수 없다. 러시아 방식의 혁명은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다.

노동자 계급을 조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중산층과 소자산계급을 포함해 각계각층 모든 민중을 반미의 기치 아래 결속함으로써만 혁명을 이룰 수 있다. 그들은 그렇게 판단했다. 북한은 민족자주를 최고의 가치로 표방하고 있는 만큼 북한 정권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믿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단파 라디오로 북한 대남선전조직인 한국민족민주전선(민민전)이 송출한 구국의 소리방송을 녹취해 학습자료로 삼았다. 한국은 반식민지’, ‘반봉건사회라고 규정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혁명이 민족해방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사회 내부에서 생겨난 자생적 사회주의 혁명운동과 민족해방 혁명운동은 전두환 정권의 학살과 독재가 만들어낸 이념적 열병이었다. 적지 않은 국민들이 청년들의 반정부투쟁과 반미투쟁을 심정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주장이 다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독재정권과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경제적 풍요와 아울러 자유, 인권, 인간적 존엄을 원했다. 전두환 정권이 그런 욕망의 표현을 폭력으로 억눌렀기 때문에 반정부 투쟁을 지지한 것이다. 6월 민주항쟁 때 대중이 선택한 구호는 독재타도 민주쟁취’ , ‘호헌철폐 직선개헌이었다. 그 때 거리시위에서 청년들은 헌법제정민중회의미군철수 양키고홈을 외칠 수 없었다. 시민들이 호응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대놓고 면박을 주었기 때문이다. 독재정권이 대중의 욕망을 거스를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의 혁명전사들도 대중의 욕망을 무시하지 못했다.

 

 

 

-민주화 운동에 발동이 걸리기 시작-

 

1982년과 1983년 전국 대학에서 각각 60회가 넘는 교내시위와 작은 규모의 거리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기 정부를 상대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대학생 뿐이었다. 그러나 유신체제 때와 마찬가지로 시위 주동자는 교내에 상주하고 있던 사복형사와 경찰에게 5분을 버티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오래 버티기 위해 건물 옥상에 밧줄을 매고 공중에 매달린 상태로 선언문을 읽는가 하면 식칼이나 횃불로 무장을 하는 등 기묘한 버티기 전술을 선보였다.

그런 가운데 시간이 흐르면서 재야와 야당 인사들도 공포감을 떨치고 서서히 기지개를 켰다. 1983 5월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자택에 연금되어 지내던 김영삼 씨가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무려 23일에 걸친 단식투쟁을 했다. 정부의 보도지침 때문에 겨우 숨만 쉬면서 연명하던 신문사의 기자들이 검열을 피하기 위해 재야인사의 식사 문제라는 희한한 말을 만들어냈다. 1982 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미국으로 망명한 김대중 씨가 연대투쟁을 시작했다. 두 사람이 손을 잡자 재야와 야당 인사들도 기력을 회복했다.

 

1983 9월에는 학생운동 출신 청년들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 김근태)을 결성했다. 5.18 이후 처음으로 독재정권과 싸우는 단체를 공개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12월 말 갑자기 유화책을 발표했다. 조금 인심을 써도 권력 유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때문이었는지, 정부는 제적 대학생 1400여 명의 복학을 허용하고 청년학생을 포함한 정치범 172명을 석방했다. 해가 바뀌자 대학 교장에 상주했던 경찰 병력을 철수시켰고 야당 정치인들의 정치활동 규제를 일부 완화했다. 그런데 이 유화 조치는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기는커녕 반독재투쟁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철권통치가 느슨해지자 눌려 있던 대중의 욕망이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던 것이다.

 

대학가는 곧바로 학도호국단 철폐와 학생회 부활을 추진하는 투쟁에 들어갔다. 1984년에는 학원자율화와 사회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교내집회와 시위가 집계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다. 3년간 계속된 혹독한 공안통치 아래서 강력한 비밀조직을 구축한 학생운동의 이념적 성향이 그대로 표출되었다.

처음에는 PD 계열이 분위기를 이끌었다. 문용식, 안병룡, 윤성주 등 청년 활동가들이 [깃발]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고 여러 대학에 민주화추진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든 다음 그것을 모아 민주화투쟁학생연합을 결성했다. 그들은 9월 청계피복노동조합 합법성 쟁취대회에 결합해 동대문 일대에서 격렬한 거리시위를 벌였. 구로공단과 부평역 등 공단이 밀집한 지역에서 노동악법 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 11월에는 민정당 중앙당사를 점거했다가 264명이 체포되었다.

 

1985년에는 노동자들을 의식화하고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해 주민등록증을 위조하거나 경력을 속이고 공장에 취업했던 청년 활동가들이 처음으로 그 존재를 드러냈다.

수가 얼마였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적게 보는 사람은 5000, 많게 보는 사람은 2만 명이 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정부가 1970년대의 대표적인 노동조합들을 강제 해산시킨 억압적 상황에서도 1984년 한 해 동안 130개가 넘는 노동조합이 새로 조직된 것은 이들의 활동과 관계가 있었다.

1985 4월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노동자들이 어용노조와 회사 측에 맞서 열흘간 파업투쟁을 벌였다. 홍영표, 송경평 등 학생운동 출신 운동가들이 그 주역이었다. 김우중 회장은 직접 농성 노동자 대표와 협상해 문제를 해결했으며 그들이 징역을 살고 나오자 대우자동차 판매법인으로 복직시켜 유럽 각국으로 내보냈다. 재벌 총수들 중에 이렇게 한 사람은 김우중 회장 밖에 없었다.

 

6월에는 경찰이 성공적으로 파업투쟁을 한 구로공단 대우어패럴 노동조합의 김준용 위원장 등 간부들을 연행해간 데 항의하면서 인근 여러 회사 노동조합들이 연대파업을 한 구로동맹파업이 벌어졌다.

노동조합의 연대의식을 표출한 보기 드문 사건이었다. 공안당국은 심상정을 이 연대파업의 주모자로 지목했다. 대학생들이 노학연대의 깃발을 들고 대거 뛰어들었고, 민청련을 비롯한 민주인권단체들이 가세했다. 가리봉오거리 등 구로공단 일대에서 대규모 거리시위가 벌어졌다.

구로동맹파업을 일으킨 노동운동가들이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결성해 [노동자신문]을 발간했다. 재야세력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의장 문익환)으로 결집했다. 전두환 정권의 유화 조치가 열어준 정치적 공간을 야당과 재야,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세력이 신속하게 점령하면서 역량을 확대하고 조직을 구축한 것이다 .

 

 

 

1985년 전두환 정권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다. 2 12일에 치른 제1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국민들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거부 의사를 명확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1984 5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만들어 야당 부활 작업을 시작한 양김은 투표일을 겨우 25일 앞둔 시점에서 이민우 씨를 총재로 세워 신한민주당을 창당했.

 

…..

 

신한민주당은 득표율 29%를 얻어 35% 를 받은 민정당을 턱밑까지 추격했다. 민청학련 사건 때 전국에 수배전단이 붙었던 돌아온 사형수 이철이 서울 성북구에서 당선되었다. 신한민주당은 관제야당 민한당과 국민당을 밀어내고 단숨에 제1야당이 되었다. 서울에서는 42.7%를 얻어 27%를 얻은 민정당을 압도했다. 당선자들이 대거 신한민주당으로 이적하자 전두환의 제 2중대 민한당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다.

 

 

 

-전국총학생총연합(전학련)와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 투쟁위원(삼민투) 의 등장-

 

민정당이 2.12 총선에서 사실상 패배하면서 전두환 정권은 정국 주도권을 상실했다. 신민당과 재야, 학생운동 세력은 더욱 거세게 정부를 공격했다. 학생운동의 주도권은 PD 계열에서 NL 계열로 넘어갔다. 학생운동은 학습 서클과 비밀결사 수준을 넘어섰고 자치조직인 총학생회 그 자체가 거리시위를 수행하는 전투조직으로 변화해 전국적 연대를 형성했다.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의장 김민석)이 탄생한 것이다. 전학련은 산하에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 투쟁위원회’(삼민투, 위원장 허인회)라는 전투조직을 설치했다. 광주민중항쟁 5주년을 맞아 전학련은 광주항쟁 진상규명과 학살원흉을 처단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전국적인 시위를 벌였다. 전국 80개 대학 5만 여명의 대학생이 시위에 참가했다.

 

5 23일 서울 5개 대학 ‘5월 투쟁특위소속 대학생 73명이 서울 미국문화원을 점거했다. 그들은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보유한 미국이 공수특전단과 보병 20사단의 광주 투입에 대해 사과하고 독재정권 지원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나흘간 미국문화원을 점거했던 대학생들은 내외신 기자회견을 한 다음 전원 연행되었다. 삼민투를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로 규정한 정부는 현장을 지휘했던 함운경, 고진화 등을 구속하고 전학련 의장 김민석, 삼민투 위원장 허인회를 수배했다. 그리고 [깃발]을 발간했던 민추위를 고리로 삼아 민청련을 학생운동의 배후로 몰았다. 이 사건으로 민청련 김근태 의장은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 등에게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남영동 1985>는 바로 그 사건을 재현한 것이다. 김근태 의장은 그 와중에도 고문한 사람의 얼굴과 이름, 방법, 시간을 상세하게 기억해두었다가 변호인과 가족에게 알렸다.

 

대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을 견디다 못한 정부는 학원안정법을 제정하려고 했다. 대학에 선도교육위원회를 만들고 학생운동 관련 학생단체를 대학당국이 해산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이었다.

장세동 안기부장과 허문도 허문도 청와대 정무수석이 주동자였다. 야당, 재야, 대학생 단체가 공동투쟁위원회를 만들어 강력하게 대응하자 정부는 결국 법 제정 작업을 중단했다. 1985 11월 재야 세력이 마지막 무기를 빼들었다. 재야 민주화운동의 본부 역할을 하던 민통련이 민주헌법쟁취 위원회를 구성한 것이다. 여기에 호응해 전학련 산하 군부독재타도 및 파쇼헌법철폐투쟁위원회’(위원장 김의겸) 소속 서울 14개 대학 학생 191명이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을 기습 점거했다.

 

 

 

-민주개헌 천만인 서명운동-

 

1986 2월부터 양김의 연대기구인 민주화추진협의회가 민주개헌 천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정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신민당사를 봉쇄했다. 전학련이 범국민개헌서명운동본부를 띄웠고 김수환 추기경,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성공회 정의실천사제단, 조계종 승려 152, 여성계 인사, 대학교수들의 개헌 요구 성명과 공동선언이 줄을 이었다. 마치 봇물이 터진 것 같은 형세였다.

 

그런데 시민들의 민주화투쟁에 대한 호응이 점차 높아가던 이 시기에 학생운동은 이념적인 면에서 정상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서울대 학생운동가 김영환이 쓴 [강철서신] 시리즈가 지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와 같은 자극적 제목을 단 팸플릿에서, 그는 김일성의 관점으로 박헌영을 비판하면서 주체사사으이 수령관품성론을 전파했다. 학생운동의 대세를 장악한 NL 계열의 조직에는 구국학생연맹, 애국학생회, 구국학생동맹과 같은 민족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 붙었다.

공개조직은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처럼 반미와 민주화를 결합한 이름을 짓는 게 유행이었다. 구국은 일제강점기 민족해방투쟁을 하던 사람들이 쓰던 말이지만 대한민국을 미제 식민지라고 보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매력이 있는 단어였다.

 

강철이라는 필명을 널리 떨쳤던 김영환은 반제청년동맹이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활동했다. 남파간첩과 접촉한 그는 1991년 강화도 해안에서 반잠수정을 타고 평양에 가서 김일성 주석을 만났으며 1992년 하영옥 등과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결성하고 지역조직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접촉했다.

 

그렇지만 실제로 본 북한의 실상이 생각했던 것과 달라 번민하다가 1997년 초 민혁당을 스스로 해산했다. 1998년 말 거제도 남쪽 해상에서 해군의 함포를 맞아 침몰한 북한 반잠수정에서 관련 단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민혁당은 그저 몇몇 청년지식인들이 벌인 이념의 소꿉놀이로 끝났을 것이다.

공안당국은 민혁당 조직원들을 구속하고 사건을 발표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반제민족혁명운동가김영환은 북한해방운동가로 전향했다. 그가 강철서신으로 운동권의 스타가 되었을 때, 학생운동 선배들은 그 유행에 휩쓸린 후배들을 간곡하게 말렸다. 북한이 무늬만 사회주의 국가일 뿐 실제로는 개인숭배와 독재가 일상화 된 전체주의 왕조국가라는 것은 굳이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주체사상을 전파하는 일에 몰두했던 사람들이 북한인권운동가로 전향해 그 때 북한과 어울리지 말라고 말렸던 사람들은 종북세력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인간의 부박함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준 것이다.

 

1986 3월부터 신민당이 개헌추진위원회 지방지부 결성대회와 현판식을 열었고 학생과 재야는 이 행사를 활용해 선전전을 펴고 거리시위를 벌였다.

 

…………..

 

그들은 제각기 다른 구호를 외치면서 경찰과 충돌했다. 시위대는 5만명이 넘었다. 정오부터 밤늦은 시각까지 인천 시내는 최루탄과 돌, 각목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전쟁터로 변했고 인천 민정당사가 불탔다. 정부는 5.3 인천 사태를 폭력봉기로 규정하고 민통련 문익환 의장과 장기표 정책실장을 포함한 간부 전원을 구속했다.

 

……..

 

정부는 5.3 사태와 관련해 모두 129명을 구속하고 60여 명을 수배했다. 함께 활동했던 시인 박노해는 백태웅 등과 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했다.

 

1986 10 24일 안기부는 마르크스레닌주의당 결성기도사건관련자 100여 명을 체포해 열세 명을 기소했다. 하지만 1986년 하반기에 학생운동을 지배한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니라 주체사상과 민족해방혁명론이었다. ….NL 계열은 자신들의 노선을 관철하기 위한 독자적 전국조직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을 결성했다. 경찰이 결성식 장소였던 건국대를 포위하고 최루탄을 쏘면서 진입하자 학생들은 건물 안으로 피신해 사흘을 버텼다. 경찰은 무장헬기와 소이탄, 취루액을 동원해 건물에 진입하여 무려 1525명을 체포하고 1288명을 구속함으로써 단일 사건 최다 구속 신기록을 세웠다. ‘건대사태로 알려진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과 학생운동이 7년 내내 벌였던 기나긴 싸움의 절정이었다.

 

 

 

-6월 민주 항쟁의 서막-

 

1987년이 되자 국민의 정치적 관심은 헌법 개정 여부에 집중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임기가 1년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헌법을 바꾸지 않으면 또 5000명의 선거인단이 차기 대통령을 뽑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정권교체도 민주화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민주화세력은 민주화를 위한 최소 요구이자 절대적 조건인 대통령직선제 회복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1 14, 어찌 보면 필연적이고 달리보면 우발적인 사건이 터졌고 이 운명적인 사건이 대한민국의 진로를 바꾸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씨가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 것이다. [중앙일보]가 대학생 사망 사실을 최초 보도했고 [동아일보]가 더 많은 사실을 취재해 더 크게 보도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수사관이 범죄사실을 추궁하면서 주먹으로 책상을 치자 박종철 군이 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 초기 [동아일보] 기자들의 활약은 역사적으로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 [동아일보]는 시신에 피 멍자국이 있었다는 부검 관련 소식에 이어 쇼크로 인한 심장마비가 아니라 물고문으로 인한 사망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의사의 검안소견서를 보도했다. 그때의 [동아일보]는 오늘의 [동아일보]와 전혀 다른 신문이었다. 비난여론이 끓어오르자 검찰이 경찰관 두 사람을 구속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유감을 표명하고 치안본부장과 내무부장관을 경질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 파문이 가라앉을 사건이 아니었다. 구속자 가족모임인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민가협)의 어머니들이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 드러누었다. 민정당이 국정조사권 발동을 거부하자 신민당 국회의원들도 농성을 시작했다. 김근태 민청련 의장 고문사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재야, 종교계, 여성계, 시민단체가 구성했던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가 활동을 본격화했다. 이것이 나중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로 발전해 6월 민주항쟁의 지도부가 되었다. 전국의 대학에서 고문살인 규탄집회가 열렸다. 2 7일 서울 명동성당을 비롯해 전국에서 열린 추도대회가 거리시위로 번졌을 때 5.18 이후 처음으로 일반 시민들이 반정부 시위에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종교단체 추도행사가 열린 3 3일에는 전국 46개 대학에서 집회가 열렸다.

 

 

 

-전두환의 4.13 호헌선언-

 

야당은 전투모드에 들어갔다. 신한민주당 이민우 총재는 바지사장이었고 김영삼, 김대중 양김이 당의 대주주였다. 그런데 고용사장이 대주주의 뜻과 달리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정부와 타협하려고 하자 법적으로 대항할 수단이 없는 대주주들이 투자금을 회수해 버렸다. 신민당 소속 의원 대부분이 전격 탈당해서 통일민주당을 창당한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신당의 창당발기인 대회가 열린 4 13일에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한 그는 개헌을 하지 않을 것이며 계속 개헌을 주장하면서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을 엄단하겠다고 말했다. 이른 바 ‘4.13 호헌선언이다. 뉴스를 보면서 우리는 휘파람을 불었다. “넌 이제 죽었어!”

 

호헌선언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뿌린 행위였다. 7년을 체육관 대통령의 독재 아래 산다는 것을 끔찍한 일로 여기는 국민이 많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날부터 국민적인 호헌철폐투쟁이 불붙었다. 야당과 대학생, 종교인, 대학교수 등 기존의 세력 범위를 넘어 여성단체, 화가, 문인, 연극인, 법조인, 의사, 교사, 약사, 한의사, 간호사, 영화인, 연예인들의 호헌반대성명 발표가 줄을 이었다. 마치 들불과 같았다.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한국경영자총협회, 이북5도 민중앙연합회, 실향민호국운동중앙협의회, 한국반공연맹, 대한노인회, 한국노총 등 소수의 단체들만이 호헌지지 성명을 냈다. 대부분의 신문이 호헌선언을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으로 지지했지만 국민여론은 그와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다시 5월이 오자 전국 62개 대학에서 광주항쟁 추모집회가 열렸고 명동성당에서는 광주민중항쟁 제7주기 미사가 열렸다. 그런데 이곳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핵폭탄 급 진실을 폭로했다. 이미 구속된 경찰관 두 사람 이외에도 박종철 씨를 죽인 범인이 더 있다는 것이었다. 김승훈 신부는 고문살인범 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사, 이정오 경장이 현직에 그대로 근무하고 있고 치안본부의 전석린 경무관과 유정방 경정이 사건을 조작했으며 강민창 치안 본부장이 사건은폐와 범인조작에 개입했다고 폭로했다.

사흘이 지난 후 검찰은 고문경관이 셋 더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동아일보]는 김성기 법무부장관과 서동권 검찰총장이 범인 축소, 은폐 사실을 석달 동안이나 알면서 감추었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임시국무회의를 열어 내각 총사퇴를 결정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대규모 개각을 단행했다. 검찰은 공안수사의 대부로 통하던 치안본부의 박처원 치안감을 구속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6월 민주항쟁 후에 구속되었다.

 

그러나 분노의 불길은 잦아들지 않았다. 마침내 정당, 재야, 학생, 각계각층의 단체 대표들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했다. 2,191명의 발기인은 지역대표 352, 종교계 683, 정치인 213, 각계각층 대표 943명이었다. 고문은 함석헌, 홍남순, 강석주, 문익환, 윤공희, 김지길, 김대중, 김영삼이었다. 상임공동대표 11명은 박형규, 김승훈, 지선, 계훈제, 이우정, 송건호, 박용길, 고은, 양순직, 김명윤, 한승헌이었다. 감옥에 있던 김근태 민청련 의장은 비상임 공동대표를 맡았다. 오충일 목사가 위원장을 맡은 상임집행위원회에는 이해찬, 임채정, 장영달, 이미경, 김부겸, 이재오, 박계동, 이규택 등 젊은 활동가들이 포진했다.

 대변인은 인명진 목사, 인권위원장은 이상수 변호사였다. 노무현 변호사는 부산 국본의 상임집행위원장이었다. 국본의 주요 인사들 가운데 세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 국무총리, 장관, 국회의원이 된 사람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김영삼, 이재오, 박계동, 안명진 등 후일 보수진영으로 간 사람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국가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본 집행부의 면면을 보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6월 민주항쟁의 결실임이 분명하다.

 

 

 

-연세대 이한열 씨 사건-

 

1987 6 10일 오전 민정당은 전당대회를 열어 노태우 씨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고 전두환 대통령은 그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국본은 그 행사를 겨냥해 같은 날 오후 6시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국민대회를 열었다. 그날 국민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연세대 학생 이한열 씨의 생사문제였다.

 

6 9일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6.10 국민대회 참가 결의대회를 마치고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중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 씨가 총류탄(SY-44)에 뒷머리를 직격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신문들은 이한열 씨가 뒷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다른 학생의 품에 안겨 있는 사진을 크게 보도했다.

 

 

 

6 10일 오후 여섯 시, 나는 유인물 몇백 장을 품에 감추고 서울 시청 광장에 서 있었다. 국본 지도부 인사들이 대회 개막을 선포하기로 한 성공회 본부를 경찰이 미리 봉쇄했지만, 미사에 참여할 피아노 반주자 등으로 위장해 성공회 교회에 잠입하는 데 성공한 몇몇 인사들이 여섯 시에 종탑으로 올라갔다. 종소리와 동시에 유인물 뭉치가 날아올랐고 구호가 터져 나왔다. 서울시청 일대 거리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시위대로 뒤덮였다. 최루탄이 터졌고 버스와 택시, 승용차들이 경적을 울렸다. 남산 아래 힐튼호텔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 축하연을 하던 민정당 국회의원들이 최루탄 가스에 쫓겨 흩어졌다. 거리 시위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전국 22개 도시에서 50만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고 4000여 명이 연행되었다. 서울에서는 경찰이 시위대에 밀려 청와대와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부근 전략거점으로 후퇴했다. 시위대 일부가 명동성당에 들어가 닷새 동안 농성하면서 투쟁 분위기를 이어갔다. 명동 일대는 아무나 와서 대자보를 붙이고 연설을 해도 되는 해방구로 변했다.

 

나는 노동자와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 청년지식인들이 뒤섞인 자생적 비밀결사에 속해 있었다. 한 시간 간격으로 세 곳의 중간 집결지를 정하고 나갔다. 모든 것이 오판이었다. 유인물은 금방 동났고, 조직원들은 모두 흩어져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큰 시위가 벌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1980 5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1987 6 10일 서울 도심에서 내가 본 것도 혼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다. 넥타이를 맨 젊은 직장인들과 더 나이 든 시민들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본이라는 지도부가 있었고 양김이 이끄는 야당도 있었다.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 봉기-

 

6 18최루탄 추방 국민대회에서 더 큰 민심의 파도가 밀어 닥쳤다.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참여한 이날 시위의 하이라이트는 서울이 아니라 30만 명이 시위를 벌인 부산이었다. 부산 시민들은 거리에서 교대로 잠을 자면서 밤샘시위를 벌였다.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경찰은 전국에서 1500여 명을 연행했지만 시위를 통제할 능력을 잃었다.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고 주한미군방송(AFKN)이 미군과 군속, 가족들의 외출자제령을 보도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긴급친서를 보냈고 국무부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가 서울에 왔다. 6 24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가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만나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회담을 마치고 나온 김영삼 총재는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선언했다. 그가 투박한 부산 사투리로 햅상은 갤랠되었다라고 선언하는 장면이 내가 본 정치인 김영삼의 모든 모습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국민평화대행진-

 

세 번째 파도는 6 26국민평화대행진이었다.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80만 명이 거리시위에 나왔다. 맨손으로 시위를 한 6.10 대회와 달리 시민들은 도처에서 투석전을 벌였으며 대학생들이 던지는 화염병에도 큰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사태 추이를 지켜보던 광주 시민들이 마침내 궐기했다. 그들은 이번만큼은 결코 고립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광주에서만 2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목포, 순천, 여수, 광양 등 전남 전역의 도시에서도 수 만명이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전국에서 3500여 명을 연행했지만 점점 수세에 몰렸다. 30개가 넘는 경찰서와 파출소가 화염병에 맞아 불이 났다. 민정당 지구당사와 공공기관 건물 여러 곳에 화염병이 날아들었다. 경찰차량 20여 대가 불타고 전복되었다. 전국 거의 모든 도시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를 10만여 명의 경찰력으로 진압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아무도 정부와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다음 국민대회에서 얼마나 더 큰 시위가 벌어질지 가늠할 수 없었다.

 

 

 

-6.29 선언-

 

6 29일 민정당 노태우대통령 후보가 8개 항으로 이루어진 시국수습 특별선언을 전격발표했다. 소위 ‘6.29 선언이다. 대통령직 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과 정치범 석방, 국민 기본권과 언론자유 보장, 지방자치제 실시와 교육자율화, 자유로운 정당활동 보장 등을 담은 이 선언으로 전국적 도시봉기는 막을 내렸다. 전두환 정권은 야권의 분열을 일으키면 선거를 통해서도 재집권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6.29 선언을 했으며 이 희망은 결국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12.12 군사 반란과 광주학살, 그리고 천문학적 부정부패를 저지른 죄를 완전히 면책 받은 것은 아니었다.

 

 

 

7 5일 이한열 씨가 끝내 숨을 거두었다. 7 9일 서울역 광장에서 100만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영결식이 열렸다. 이 행사는 6월 민주항쟁의 에필로그였다. 영결식이 끝나고 경찰이 해산을 종용하면서 페퍼포그와 최루탄을 쏘자 100만 시민은 조용히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헌법을 고치고 선거를 하면 정권을 바꾸고 민주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그들의 희망은 다섯 달 뒤에 물거품이 되었다.

 

 

 

-노동자들의 투쟁-

 

하지만 6월 민주항쟁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시민들의 정치투쟁이 소멸된 공간은 노동자들이 채웠다. 독재정권의 정치적 억압이 약화되자 곧바로 전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과 파업, 거리시위가 폭발했다.

노동자들은 재벌그룹 대공장에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7 5일 현대엔진을 시작으로 현대미포조선 등 대규모 사업장에서 노조설립 신고가 줄을 이었다. 마산, 창원, 울산 등 영남지역 중화학공업 대공장을 휩쓴 노동조합 결성과 임금, 근로조건 개선투쟁은 중장비를 동원한 거리시위로 이어졌다. 8 22일 거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씨가 거리시위 도중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검찰은 노동자들을 지원한 노무현 변호사와 이상수 변호사를 장례방해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투쟁은 수도권 중소기업으로 확산되었으며 1987년에만 1500개에 육박하는 노동조합이 새로 결성되었고 조합원 수는 23만 명이 늘었으며 7월에서 9월까지 3300건이 넘는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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